1. 생애 및 교육
오카쿠라 덴신은 어린 시절부터 서양 학문과 전통 동양 학문을 동시에 습득하며 성장했으며, 이는 그의 독특한 사상과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1.1. 출생 및 성장 배경
오카쿠라 덴신은 1863년 2월 14일(분큐 2년 음력 12월 26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혼마치 5초메(현재 요코하마 개항 기념 회관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쿠이번 출신의 하급 번사였던 아버지 오카쿠라 간에몬(岡倉勘右衛門, 1820~1896)의 둘째 아들이자, 간에몬의 두 번째 부인 고노(この, 1834~1870)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번의 명령으로 무사 신분을 버리고 요코하마에 개설된 후쿠이번의 무역 상점 '이시카와야'의 무역상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인 가쿠조(覚三)는 그가 태어난 상점의 모퉁이 창고(角蔵)에서 유래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깨달은 아이'라는 의미의 다른 한자인 覚三로 변경했다.
1870년, 그의 어머니 고노는 여동생 데후를 출산한 후 산욕열로 사망했다. 이듬해인 1871년 폐번치현으로 이시카와야가 폐업하자, 아버지가 도쿄 니혼바시 가키가라초에 료칸 '오카쿠라 료칸'을 열면서 가족은 도쿄로 이주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는 어머니의 장례가 치러진 조엔지(長延寺)에 맡겨져 한학을 배웠다.
1.2. 학업 및 스승
오카쿠라 덴신은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선교사 제임스 커티스 헵번이 운영하는 요시사부로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이를 통해 외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모국어인 한자를 읽지 못했는데, 이에 아버지는 그가 요시사부로에서 서양 문화를, 불교 사찰에서 전통 일본 문화를 동시에 배우도록 했다. 조엔지에 맡겨진 동안에는 다카시마 가에몬이 설립한 서양 학교 '다카시마 학교'에도 입학했다.
1873년에는 관립 도쿄 외국어 학교에 입학했으며, 1875년에는 도쿄 개성 학교(이후 도쿄 대학으로 개편)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재정학을 공부했다.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미술사가 어니스트 페노로사의 조수가 되어 페노로사의 미술품 수집을 도왔다. 1880년 7월 도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11월부터 문부성 음악조사원으로 근무했다. 1882년에는 센슈 대학의 전신인 센슈 학교의 교관이 되어 학교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 경력 및 활동
오카쿠라 덴신은 일본 미술 교육의 현대화와 전통 미술의 보존에 힘썼으며,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동양 문화의 가치를 서구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1. 미술 교육 및 기관 설립
1886년 오카쿠라는 문부대신 비서관이 되어 음악 업무를 담당했다. 같은 해 그는 제국 미술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서양 미술을 연구하기 위해 해외로 파견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돌아온 후, 1887년에는 도쿄 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도쿄 비주쓰 갓코일본어) 설립에 기여했으며, 이듬해인 1888년에는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도쿄 미술학교는 전통주의자들의 "생명 없는 보수주의"와 초기 메이지 시대 서양 미술 모방에 대한 "첫 번째 진지한 반작용"을 대표했다. 오카쿠라는 서양 미술의 공감할 수 있는 측면에만 집중하며, 학교와 새로운 정기 간행물인 『국화』를 통해 고대 및 토착 예술을 복원하고 그 이상을 존중하며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1890년 10월 7일, 오카쿠라 덴신은 도쿄 미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으며, 당시 27세였다. 그는 후쿠다 비센, 요코야마 다이칸, 시모무라 칸잔, 히시다 슌소, 사이고 고게쓰 등 많은 젊은 화가들을 양성했다. 1897년, 학교 교육과정에서 유럽 방식의 비중이 점차 커지자 그는 교장직을 사임했다. 6개월 후, 그는 하시모토 가호와 요코야마 다이칸을 비롯한 37명의 선도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일본 미술원(日本美術院니혼 비주쓰인일본어)을 창설하여, 국가적 영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서양 미술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재개했다.
2.2. 일본 미술의 보존 및 진흥
오카쿠라 덴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신토주의적 폐불훼석 운동으로 인해 일본에서 불교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했다. 그는 어니스트 페노로사와 함께 훼손된 불교 사찰, 불상, 경전 등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전통적인 일본 기법으로 그려진 회화인 니혼가(日本画니혼가일본어)를 서양화 양식인 요가가 대체하려는 위협으로부터 "구했다"고 평가받는다. 비록 현대 미술 학자들은 이러한 "구원"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오카쿠라가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존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본 미학을 현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시기에 주요 개혁가 중 한 명이었다.
2.3. 국제 활동 및 교류
오카쿠라는 자신의 주요 저작들을 모두 영어로 집필한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의 전통 예술을 연구하고 유럽, 미국, 중국을 여행했으며, 인도에서 2년간 거주하면서 스와미 비베카난다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동양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시 서양 문화가 지배적이던 예술과 문학 분야에 동양의 영향을 가져오려 노력했다. 1902년에는 일본을 방문한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와 교류했다.
2.4. 보스턴 미술관 활동
1906년, 오카쿠라는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의 초청을 받아 보스턴 미술관에 합류했으며, 1910년에는 보스턴 미술관의 중국 및 일본 미술부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미술관 소장품 수집을 위해 일본과 보스턴을 자주 왕래했으며, 이 기간 동안 그의 대외 활동은 줄어들었다. 보스턴 미술관 이사장 에드워드 잭슨 홈즈의 지원을 받아 미술관에 동양부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를 위해 유럽의 미술관 동양부를 시찰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제자 중 한 명으로는 랭던 워너가 있다.
3. 사상 및 저술
오카쿠라 덴신의 저작들은 그의 철학과 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동양 문화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주요 저서
오카쿠라 덴신은 주로 영어로 저술 활동을 했으며, 그의 대표작들은 동양의 미학과 철학을 서구에 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1.1. 《동양의 이상》
『동양의 이상』(The Ideals of the East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Art of Japan영어)은 1903년 러일 전쟁 직전에 출판된 아시아 예술 및 문화사에 관한 그의 저서이다. 이 책은 아시아 전체에 걸친 정신적 통일성을 강조하며 서양과 구별 짓는 서문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시아는 하나이다. 히말라야 산맥은 공자의 공산주의를 가진 중국 문명과 베다의 개인주의를 가진 인도 문명이라는 두 거대한 문명을 강조하기 위해 나눌 뿐이다. 그러나 눈 덮인 장벽조차도 모든 아시아 민족의 공통된 사상 유산인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광대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방해할 수 없으며, 이는 그들이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를 생산할 수 있게 하고, 특정한 것에 머무르며 삶의 수단을 찾고 끝을 찾지 않는 지중해와 발트해의 해양 민족들과 구별된다"고 서술했다. 이 책은 1922년 일본 미술원에서 처음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3.1.2. 《일본의 각성》
『일본의 각성』(The Awakening of Japan영어)은 1904년에 출판된 저서로, 그는 이 책에서 "서양의 영광은 아시아의 굴욕"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초기 범아시아주의의 표현으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 오카쿠라는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가 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환영받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우리는 아시아 문명 대신 유럽 문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너무 열중하여, 대륙의 이웃들은 우리를 배신자로, 심지어는 백인 재앙 그 자체의 구현으로 간주한다"고 언급했다.
3.1.3. 《차의 책》
『차의 책』(The Book of Tea영어)은 1906년에 집필 및 출판되었으며, "선불교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가장 초기적이고 명료한 영어 설명"으로 평가받는다. 오카쿠라는 "차는 음료 형태의 이상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삶의 예술에 대한 종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차 문화가 "순수와 조화, 상호 자선의 신비, 사회 질서의 낭만주의를 품고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에 대한 숭배이며, 우리가 삶이라고 아는 이 불가능한 것 속에서 가능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부드러운 시도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서양인들이 차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서양인들은 차 의식을 "그들에게 동양의 기이함과 유치함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상한 점들 중 하나"로 여긴다고 비판했다. 그는 러일 전쟁 이후에 저술하면서, 서양인들이 일본이 "평화로운 예술에 몰두할 때는 야만적"이라고 여겼고, "만주 전장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문명화되었다고 불렀다고 언급하며 서구의 이중적인 시각을 비판했다.
3.1.4. 《백여우》
오카쿠라의 마지막 작품인 『백여우』(The White Fox영어)는 1912년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후원으로 집필된 보스턴 오페라 하우스를 위한 영어 대본이었다. 이 대본은 가부키 연극과 리하르트 바그너의 서사 오페라 『탄호이저』의 요소를 통합하고 있으며, 은유적으로 동서양의 화해를 바라는 오카쿠라의 염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찰스 마틴 뢰플러가 가드너의 요청에 따라 이 시극에 곡을 붙이기로 동의했으나, 작곡이 지연되어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3.2. 철학 및 사상
오카쿠라 덴신은 아시아 문화의 독자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그는 『동양의 이상』에서 "아시아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며 아시아의 정신적 통일성을 역설했고, 『일본의 각성』에서는 "서양의 영광은 아시아의 굴욕"이라고 주장하며 범아시아주의적 경향을 표명했다. 그는 일본의 급속한 서구화가 아시아 이웃들에게 배신으로 비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서구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비되는 동양의 정신적,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조선은 원래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을 펼친 정한론의 주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의 범아시아주의적 사상이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은 그의 사상이 지닌 복합성과 논쟁의 여지를 보여준다.
4. 개인사
오카쿠라 덴신은 복잡한 가족 관계와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가졌다.
4.1. 가족 관계
오카쿠라 덴신의 아버지 오카쿠라 간에몬은 에치젠국 후쿠이번의 하급 무사였으나 상업적 재능이 뛰어나 요코하마 상점 '이시카와야'의 책임자가 되었고, 이후 도쿄에서 료칸 '오카쿠라 료칸'을 운영했다. 어머니 고노는 165NaN 경 cm의 장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간에몬의 첫 부인이 4명의 딸을 남기고 사망한 후 29세에 재혼했다. 고노는 장남 고이치로(1861~1875), 차남 가쿠조(덴신), 삼남 겐조(요절), 사남 오카쿠라 요시사부로(1868~1936), 오녀 조코(1870~1943)를 낳았으나, 37세에 산욕열로 사망했다. 장남 고이치로가 척추 카리에스로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기 때문에, 가쿠조는 하시모토 사나이의 먼 친척인 유모의 손에 자랐다. 동생 요시사부로는 영어학자가 되었고, 여동생 조코는 조각가 야마다 기사이(山田鬼斎, 1864~1901)와 결혼했다. 고노가 사망한 후, 간에몬은 세 번째 부인 오노 시즈를 맞이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오카쿠라 덴신은 16세 때 오오카 다다스케의 후손인 13세의 기코(基子, 1865~1922)와 결혼했다. 기코는 아카사카의 찻집에서 덴신을 만나 오카쿠라 료칸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879년 결혼했다. 덴신과 구키 하쓰코의 연애 기간 동안 기코는 별거하기도 했다. 기코는 다카하시 겐조의 아내를 선두로 하여 일본식 부덕을 배우는 부인 단체 '세이유카이'를 조직하기도 했다.
기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오카쿠라 가즈오(1881~1943)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오카쿠라 가쿠조의 전기를 집필했다. 장녀 고마코(1883~1955)는 불영화고등여학교(현 시라유리 학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철도성에 근무하는 요네야마 다쓰오와 결혼했다.
오카쿠라 덴신은 구키 하쓰코의 이복 언니인 요시노 고(よしの子)와의 사이에서 서자 와다 사부로(和田三郎, 1895~1937)를 두었다. 사부로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집에 맡겨졌다가 5세에 와다 마사야스의 양자가 되었고, 와다가 사망하자 어머니에게 인계되었다. 이후 중학교 진학부터는 겐모치 주시로에게 맡겨졌다. 사부로는 나고야시의 제8고등학교 (구제)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했으며, 졸업 후 도립 마쓰자와 병원에 근무하다가 구마모토 의과대학 조교수를 거쳐 정신병신경과 히로시마현립 대용양신관병원장이 되었다.
손자로는 오카쿠라 고시로가 있으며, 그는 비동맹 운동에도 관여한 국제정치학자이다. 증손자로는 중동 연구자인 오카쿠라 데쓰시와 서양사학자(아프리카사)인 오카쿠라 도시가 있다. 고손자로는 사진작가 오카쿠라 요시와 인재 개발 컨설턴트 오카쿠라 히로시가 있다.
5. 사망
오카쿠라 덴신은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1913년 6월 친구에게 "의사들은 내 병이 20세기의 흔한 질병인 브라이트병이라고 한다"며,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어 내 위와 신장의 유전적 개념에는 너무 다양했다. 하지만 다시 좋아지고 있으며 9월에 중국에 갈 생각이다"라고 편지를 썼다.
1913년 8월, 오카쿠라는 니가타현 묘코코겐시의 아카쿠라에 있는 자신의 산장으로 가기를 고집했고, 결국 그의 아내와 딸, 여동생이 그를 기차로 그곳으로 데려갔다. 일주일 정도 그는 조금 나아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었으나, 8월 25일 심장마비를 겪고 며칠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가족과 친척,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1913년 9월 2일 50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사인은 만성 신염에 요독증이 병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그에게 종사위와 훈오등 쌍광욱일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법명은 석천심이며, 묘소는 도쿄도 도시마구 고마고메의 소메이 묘지에 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분골되어 이바라키현 이즈라에도 묘가 있다.
6. 평가 및 영향
오카쿠라 덴신은 일본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국제적으로도 동양 문화의 가치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활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존재한다.
6.1. 일본 미술계에서의 역할
일본 내에서 오카쿠라는 페노로사와 함께 전통 일본 기법으로 그려진 회화인 니혼가를 서양화 양식인 요가(Yōga)의 위협으로부터 "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현대 미술 학자들은 유화가 전통 일본 회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는 주장이나 그의 "구원"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오카쿠라가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존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본 미학을 현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시기에 주요 개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890년부터 3년간 도쿄 미술학교에서 진행한 강의 "일본 미술사"를 통해 일본인의 관점에서 일본 미술을 서술한 최초의 통사적 미술사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6.2. 국제적 영향
일본 외적으로 오카쿠라는 스와미 비베카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시인 에즈라 파운드, 그리고 특히 그의 친한 친구였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미술 후원자이자 수집가, 박물관 설립자인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를 포함한 여러 중요한 인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현대 인도 수채화의 아버지인 아바닌드라나트 타고르에게 워시(wash) 기법을 소개한 세 명의 일본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6.3. 비판 및 논란
오카쿠라 덴신은 그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조선은 원래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을 펼친 정한론의 주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범아시아주의적 사상이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해석을 낳았다.
또한 그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1888년에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문부 관료 구키 류이치 남작의 부인 구키 하쓰코(철학자 구키 슈조의 어머니)와 연애 관계에 빠졌다. 하쓰코는 류이치와 별거 후 이혼했으며, 이혼 후 구키 슈조를 낳았는데, 슈조는 어린 시절 오카쿠라 덴신을 아버지로 생각한 적도 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스캔들은 당시 '미술학교 소동'으로 불리며 일부에서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7. 기념 사업
오카쿠라 덴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1942년 이바라키현 기타이바라키시의 이즈라 해안에 있는 고우라에 그가 만년을 보냈던 곳에 '덴신옹 초상비'(아시아는 하나다 비석)가 건립되었다. 같은 해 11월 8일에는 요코야마 다이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1967년에는 도쿄도 다이토구에 오카쿠라 덴신 기념 공원(옛 저택 및 일본 미술원 터)이 개원했다. 1997년에는 기타이바라키시 고우라에 오카쿠라 덴신 등의 업적을 기념하여 이바라키현 덴신 기념 고우라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그가 설계하고 1905년에 지어진 육각형 목조 산장인 롯카쿠도는 이바라키 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국가 기념물로 등록되어 있다.
뉴욕에서 그의 영어 저서 『차의 책』이 출판된 지 100주년이 되는 2006년 10월 9일, 오카쿠라가 마음의 고향으로 사랑했던 후쿠이현의 에이헤이지에서 '오카쿠라 덴신 『차의 책』 출판 100주년 기념 좌담회'가 열렸다. 또한 오카쿠라의 탄생 150주년,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3년 11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후쿠이현립 미술관에서 '전무후무한 오카쿠라 덴신전'이 개최되었다.
1931년 12월 6일, 도쿄 미술학교 (현 도쿄 예술대학 미술학부) 앞마당에서 히라쿠시 덴추가 제작한 '오카쿠라 덴신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8. 관련 항목
- 차의 책
- 니혼가
- 도쿄 미술학교
- 일본 미술원
- 어니스트 페노로사
- 요코야마 다이칸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스와미 비베카난다
-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 보스턴 미술관
- 롯카쿠도 (기타이바라키시)
- 이바라키현 덴신 기념 고우라 미술관
- 정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