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신 및 학력
오치아이 에이지는 1969년 7월 25일 도치기현 시모쓰가군 이시바시정(현 시모쓰케시)에서 태어났다.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1986년 가을 도치기현 대회 준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사노 니혼 대학 고등학교에 패배했다. 이듬해 1987년 봄 도치기현 대회 준결승에서는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의 이시이 다쿠로와 맞붙어 완봉승을 거두었으며, 결승에서는 전년도 제58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 준우승팀인 도치기현립 우쓰노미야 미나미 고등학교에 패했지만 간토 대회 출전권을 획득했다. 이 결승전에서는 다카무라 히로시가 등판하지 않았다. 간토 대회에서는 2회전(첫 경기)에서 조소 가쿠인 고등학교의 에이스 시마다 나오야에게 막혀 완봉패를 당했다. 같은 해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도치기 대회 준결승에서는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의 이시이와 다시 맞붙었으나, 연장 10회 말 끝내기 패배를 당하며 베스트 4에 머물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니혼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여 니혼 대학 경식 야구부에 입단했다. 당시 니혼 대학은 도토 대학 야구 연맹 2부에 속해 있었으나, 1989년 가을 리그에서 6승을 거두며 2부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승격전에서 고쿠가쿠인 대학을 2연투 승리로 꺾고 1부 리그로 복귀했다. 이후에도 우승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투수진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1990년 제31회 IBAF 월드컵 일본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이 해 가을에도 승격전에서 완봉, 완투를 포함한 3연투로 1부 리그 잔류에 기여했다. 1부 리그 통산 27경기 등판, 8승 13패, 평균자책점 2.12, 148탈삼진을 기록했으며, 2부 리그에서는 12승 2패를 기록했다. 최고 150 km/h의 직구를 주무기로 삼아 같은 리그의 와카타베 겐이치(고마자와 대학)와 함께 드래프트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대학교 4학년 때 투구 도중 오른쪽 팔꿈치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한때 선수 생명이 위험하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회복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주니치 드래건스가 1991년 1991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도호쿠 복지대학의 에이스 사이토 다카시의 낙첨 1순위로 지명하여 입단했다. 니혼 대학 1년 후배로는 몬나 데쓰히로, 프로에서도 동료가 된 와타나베 히로유키, 그리고 고향 친구인 마나카 미쓰루가 있었다.
2. 선수 경력
오치아이 에이지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프로 입단 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핵심 투수로 활약했다.
2.1. 아마추어 시절
고교 시절에는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도치기현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7년 봄 대회에서는 준결승에서 이시이 다쿠로가 속한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를 완봉승으로 꺾었으나, 결승에서 다카무라 히로시가 속한 우쓰노미야 미나미 고등학교에 패했다. 여름 대회 준결승에서는 다시 이시이 다쿠로와 맞붙었으나 연장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니혼 대학 진학 후에는 2부 리그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90년에는 IBAF 월드컵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어 국제 무대 경험을 쌓았다. 대학 4학년 때 팔꿈치 부상을 당했지만, 주니치 드래건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2.2. 프로 경력
프로 데뷔 후 오치아이 에이지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다양한 보직을 소화하며 팀에 기여했다.
2.2.1.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프로 1년 차인 1992년에는 팔꿈치에 사파이어를 이식하는 대수술을 받고 재활에 매진했다. 2년 차인 1993년에 1군에 처음 등판했으며, 그 후 몇 년간은 팔꿈치 상태를 고려하여 주로 짧은 구원 등판을 맡았다. 1995년부터는 팀 사정상 주로 선발 투수로 기회를 얻었으나, 기복이 심해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현역 선수로 주니치에 재적했던 시기에는 스코어보드 표기에서 오치아이 에이지는 '오치아이 에이'(落合英일본어),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단순히 '오치아이'(落合일본어)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한때 도쿄 돔에서는 히로미쓰가 '오치아이 히로'(落合博일본어)로 표기된 적도 있으며, 요미우리 신문 등 일부 활자 매체에서는 히로미쓰에게 '오치아이 히로'를 사용하기도 했다.
1998년 대학 시절 선배였던 미야타 유키노리 투수 코치가 부임하면서, 마무리 투수 선동열에게 연결하는 중간 계투로 고정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유미나가 노부히로에 이어 리그 2위인 55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2.82, 4승 5패 5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듬해 1999년에는 프로 8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선출되었다. 이 해에는 이상훈과 이와세 히토키 등과 함께 강력한 중간 계투진을 형성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199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3경기에 등판했으며, 2차전에서는 9회부터 가와카미 겐신을 구원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오프 시즌인 12월 24일에는 2900.00 만 JPY 인상된 8600.00 만 JPY에 계약을 갱신했다.
2000년에는 스프링 캠프 도중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3월 18일 시점에서는 5월에 1군 승격을 목표로 조율 중이라고 보도되었으나, 4월 중순과 5월 중순에 통증이 재발하여 조율이 늦어졌다. 전반기에는 7월 19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 한 번 등판했을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21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2.75를 기록했다.
2001년 5월 10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나고야 돔)에서 2년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5경기 연속 실점한 적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45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1.73을 기록했다.
2002년 3월 30일 개막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나고야 돔)에 등판했을 때 왼쪽 옆구리 통증을 느껴 다음 날 등록이 말소되었다. 이 해에는 37경기에 등판하여 1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62를 기록했다. 오프 시즌인 12월 16일에는 300.00 만 JPY 삭감된 8500.00 만 JPY에 계약을 갱신했다.
2003년 시즌 중인 8월 3일에 FA 권리를 취득했다. 이 해에는 개인 최다인 61경기에 등판하여 7승 0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1.77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3년 4.00 억 JPY에 잔류 계약을 맺었다.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4년에는 3월에 오른쪽 어깨에 위화감을 느껴 2군에서 개막을 맞이했다. 4월 21일 출전 선수로 등록되었고, 다음 날 한신 타이거스전(나고야 돔)에서 시즌 첫 등판을 했다. 이 해에도 중간 계투진의 주축으로 활약했으며, 부진했던 이와세 히토키를 대신하여 마무리 투수를 맡았던 시기도 있었다. 9월 26일에는 7년 만에 선발 등판하여 5이닝 무실점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같은 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2004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3경기에 중간 계투로 등판했다.
2005년에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코치진으로부터 선발 전환을 지시받아 선발 투수로 전향했다. 8년 만에 개막 로테이션에 진입했으며, 5월 5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나고야 돔)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주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전(세이부 돔)에서는 4이닝 4실점으로 부진하여 다시 중간 계투로 재전향했다.
2006년에는 프로 야구 투구 폼 규칙 개정으로 이단 모션 투구 폼을 사용하던 오치아이도 투구 폼 개조를 강요받는 등의 문제로 2군에서 시즌을 맞이했으며, 1군에 올라와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1군에 없었지만, 오치아이를 오랫동안 지지해 온 나가타 트레이너가 감독의 헹가래 순간에 오치아이 에이지의 등번호 '26'이 새겨진 플레이트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나가타 트레이너 외에도 오치아이를 따르던 아라키 마사히로와 아사쿠라 겐타도 모자 뒤에 '26'을 쓰고 경기에 출전했다고 한다. 같은 해 6월 26일에 1군에 승격했으나, 최종적으로 5경기 등판에 그쳤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구단은 2군 투수 코치를 제안했으나, 본인은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거절했다.
2.2.2. 기록 및 수상
오치아이 에이지는 현역 시절 독특한 기록과 주요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투구 스타일**: 최고 150 km/h의 직구를 주무기로 삼았다.
- 주요 수상 경력**:
-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 1회 (1998년)
- 독특한 기록**:
- 1구 승리 투수: 1999년 7월 1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5차전(나고야 돔), 9회 초 1사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이마오카 마코토를 병살타로 처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9번째 기록이다.
- 1구 패전 투수: 1995년 4월 27일, 대 한신 타이거스 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10회 말 구원 등판하여 글렌 데이비스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12번째(13번째 사례) 기록이다.
- 1구 승리 및 1구 패전을 모두 기록: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1구 승리 투수와 1구 패전 투수를 모두 기록한 선수이다.
- 0구 등판: 교체를 통보받고 마운드에 올라왔으나 우천 중단 후 강판된 기록이다. (투구 연습 중 오른쪽 옆구리에 위화감을 느껴 강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본인이 CBC 라디오의 '드래건스 월드'에서 이를 부정했다.)
-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2회 (1999년, 2003년)
- 첫 기록**:
- 첫 등판: 1993년 7월 28일, 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19차전(나고야 구장), 9회 초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1993년 8월 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3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 말 에토 아키라로부터
- 첫 승리: 1993년 9월 2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1차전(나고야 구장), 7회 초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세이브: 1994년 7월 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5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 말 1사 상황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과 2/3이닝 무실점
- 첫 선발 등판 및 첫 선발 승리: 1995년 5월 2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6이닝 1실점
- 첫 완투 승리 및 첫 완봉 승리: 1996년 4월 2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5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 첫 홀드: 2005년 7월 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 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등번호**:
- 19 (1992년 ~ 1993년)
- 71 (1994년) - 이 해 입단한 디온 제임스가 등번호 19번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다만 1994년 스프링 캠프 첫날 사진 촬영 시에는 '12'번을, 캠프 중에는 '70'번을 달고 있었다. '12'번에서 '70'번으로의 변경은 다카하시 미치타케 코치(현역 시절 '12'번을 달고 있을 때 후반부에 혈행 장애로 고생했기 때문에 불길하다고 생각), '70'번에서 '71'번으로의 변경은 다카기 모리미치 감독('70'번은 투수 번호가 아니라는 인식)의 의향이었다고 한다.
- 25 (1995년)
- 26 (1996년 ~ 2006년)
- 88 (2010년 ~ 2012년, 2015년 ~ 2021년, 2025년 ~ )
- 77 (2022년 ~ 2024년)
- 등록명**:
- 오치아이 에이지(落合 英二오치아이 에이지일본어, 1992년 ~ 2006년, 2010년 ~ 2012년, 2015년 ~ 2016년, 2018년 ~ )
- 에이지(英二에이지일본어, 2017년)
- 통산 성적**:
연도 소속 등판 선발 완투 완봉 무4구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고의 4구 몸맞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평균자책 WHIP 1993 주니치 10 0 0 0 0 1 1 0 -- .500 36 9.1 5 1 5 3 0 7 1 0 2 2 1.93 1.07 1994 27 0 0 0 0 2 1 1 -- .667 146 34.0 35 2 14 1 1 23 0 0 13 12 3.18 1.44 1995 30 14 0 0 0 3 9 2 -- .250 404 96.1 119 11 16 4 3 47 0 0 54 51 4.76 1.40 1996 24 14 3 2 1 4 6 1 -- .400 411 96.1 98 6 29 6 2 61 1 0 49 40 3.74 1.32 1997 19 9 2 0 1 4 7 0 -- .364 271 66.1 66 3 7 1 2 52 0 0 33 27 3.66 1.10 1998 55 0 0 0 0 4 6 5 -- .400 308 73.1 81 3 12 2 0 36 0 0 29 23 2.82 1.27 1999 56 0 0 0 0 5 4 2 -- .556 207 51.2 43 8 9 2 2 27 0 0 17 16 2.79 1.01 2000 21 0 0 0 0 0 2 0 -- .000 83 19.2 20 0 6 4 1 18 2 0 7 6 2.75 1.32 2001 45 0 0 0 0 0 3 2 -- .000 177 41.2 41 1 11 3 1 19 0 0 14 8 1.73 1.25 2002 37 0 0 0 0 1 2 0 -- .333 138 34.1 27 1 7 4 3 21 0 0 12 10 2.62 0.99 2003 61 0 0 0 0 7 0 1 -- 1.000 215 56.0 53 4 5 2 0 35 0 0 11 11 1.77 1.04 2004 42 1 0 0 0 4 3 10 -- .571 186 44.0 46 3 10 2 2 17 0 0 12 12 2.45 1.27 2005 31 6 0 0 0 2 1 0 8 .667 210 47.2 64 6 10 0 1 27 0 0 26 25 4.72 1.55 2006 5 0 0 0 0 0 0 0 0 ---- 20 4.1 6 1 1 0 1 3 0 0 4 4 8.31 1.62 통산 : 14년 463 44 5 2 2 37 45 24 8 .451 2812 675.0 704 50 142 34 19 393 4 0 283 247 3.29 1.25
3. 코치 경력
오치아이 에이지는 현역 은퇴 후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한국과 일본에서 투수 코치 및 감독으로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3.1. 지도자 경력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간 주부닛폰 방송(中部日本放送주부닛폰 방송일본어, CBC)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이 방송국에서는 도카이 지방 지역 스포츠 정보 프로그램 '선데이 드래건스'(サンデードラゴンズ선데이 드래건스일본어)에서 '오치아이 에이지 부루부루의 와'(落合英二ブルブルの輪오치아이 에이지 부루부루노 와일본어)라는 코너도 담당했다. 해설 첫 해에는 '넷 뒤 해설'(ネット裏解説넷 우라 카이세쓰일본어)이라는 형태로 해설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른 방송국에서도 그라운드에 가까운 위치에 해설자를 두는 경우가 있지만, 오치아이는 백넷 뒤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후에는 일반적인 중계석에서 해설을 진행했으나, 전국 방송의 경우에는 2년차 이후에도 '넷 뒤 해설'로 출연하는 경우가 있었다. '넷 뒤 해설'을 할 때는 관객들이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드래건스 선수들은 "에이지 씨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이 이상한 느낌"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동료였던 선동열이 감독을 맡고 있던 인연으로, 한국의 삼성 라이온즈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010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코치로 정식 부임했다. 오치아이 코치 부임 후 삼성 라이온즈의 팀 평균자책점은 크게 개선되었고, 2011년부터는 투수 기용의 전권을 맡아 그 수완이 높이 평가되었다. 2012년 시즌 삼성은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같은 해 2012년 아시아 시리즈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를 떠났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선수 중에는 후에 한신 타이거스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게 되는 오승환이 있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2년간 야구 해설가로 복귀하여 CBC 라디오, 도카이 라디오 방송, TV 아이치에 출연했다. 또한 주니치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도 겸했다. 2014년 10월 16일 지바 롯데 마린스의 1군 투수 코치로 취임한다고 발표되었으며, 등번호는 88번이었다. 2017년부터 등록명을 '에이지''로 변경했다. 2017년 당시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 등록명으로 사용하는 코치는 주니치 시절 팀 동료였던 에이치 외야 수비 주루 코치에 이어 두 번째였다. 같은 해 10월 11일 다음 시즌 코치 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2017년 11월 가을 캠프부터 합류하여 2018년부터 한국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코치로 재취임했다. 2019년 가을부터는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22년부터 주니치 드래건스의 1군 헤드 코치 겸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이때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 다쓰나미 가즈요시가 뉴스 프로그램 '뉴스 원'(ニュースOne뉴스 원일본어)에 출연했을 때, 다쓰나미가 "77번은 오치아이 에이지에게 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하며, 과거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77번을 달게 되었다.
2024년 10월 6일 같은 해를 끝으로 퇴단하는 것이 한때 발표되었으나, 직후 취임한 이노우에 가즈키 감독으로부터 잔류 요청을 받아 같은 해 10월 28일 2군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등번호는 다시 88번으로 변경되었다.
3.2. 해설 및 평론 활동
오치아이 에이지는 현역 은퇴 후 주부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 위원과 주니치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야구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견해를 제시했다. 특히 CBC 라디오에서는 '넷 뒤 해설'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 방송 출연
- 사무라이 프로 야구 (CBC TV)
- 선데이 드래건스 (CBC TV)
- 모에요 드래건스 (CBC 프로 야구 중계)
4. 개인사
오치아이 에이지는 야구계에서 '영감'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 일화들을 남겼다.
4.1. 인물 및 인간 관계
오치아이 에이지는 '영감'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 경기 중 당시 팀 동료였던 오토요 야스아키에게 자신의 배트를 건네며 "이 배트를 쓰면 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오토요가 홈런을 쳤다.
- 1996년 야마자키 다케시에게도 배트를 건네자, 그 해 야마자키는 홈런왕이 되었다.
- 1999년에는 정보 프로그램 '줌인!! 아사!'(ズームイン!!朝!줌인!! 아사!일본어)에서 어느 구장에서 우승을 결정할 것인지 질문받자, "불펜이 밖에 있는 구장에서 호시노 감독이 헹가래를 받는 것이 보인다"고 예언했다. 실제로 불펜이 밖에 있는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우승을 결정했다.
- 2009년 6월 30일 대 한신 타이거스전 6회 말, 1사 만루 상황에서 후지이 아쓰시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홈런 타자가 아니었고 시즌 전까지 만루 상황 타율이 7타석 1안타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이가 시원하게 베이스를 도는 모습이 보인다"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 타석에서 후지이는 역전 만루 홈런이자 프로 첫 만루 홈런을 터뜨렸다.
- 주니치에서 팀 동료였던 가와카미 겐신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오치아이와의 영감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현역 시절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에게 투구 등으로 지적받을 때 맞은 적도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나는 기혼자는 때리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오치아이뿐만 아니라 호시노는 미혼 선수에게는 손을 대기도 했지만, 기혼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손을 대지 않았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이적해 온 다니시게 모토노부는 오치아이보다 한 살 어리지만, 왠지 "에이짱"이라고 불리며 반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선데이 드래건스'에서 오치아이는 "나이 차이는 실적으로 가산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2007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한 도노우에 나오미치와는 그의 아버지 도노우에 데루가 구단 기숙사 사장이었기 때문에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다. 2006년 팬 감사 데이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오치아이는 "이루지 못했던 일본 제일의 꿈을 여기에 있는 선수, 코치, 그리고 이 나고야 돔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도노우에 나오미치 군에게 맡기겠습니다"라고 인사하여 장내를 술렁이게 했다. (은퇴식 당시 도노우에는 드래프트에서 주니치가 이미 교섭권을 획득하고 가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당시 도노우에는 아이치 공업 대학 메이덴 중학교·고등학교 야구부 동료들과 함께 변장하고 행사장에 왔었다. 또한 2007년 오키나와 캠프 휴일에 도노우에가 취재진의 사진 촬영에 응했을 때, 오치아이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 'EIJI 26'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후 도노우에 나오미치가 입단한 2007년에 주니치 드래건스는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4.2. 가족
오치아이 에이지의 배우자는 피겨스케이팅 전 선수로, 어린 시절의 안도 미키와 아사다 마오를 지도한 경험이 있다.
5. 출연 및 기타 경력
오치아이 에이지는 야구 선수 및 지도자 경력 외에도 다양한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 방송 출연
- 사무라이 프로 야구 (CBC TV)
- 선데이 드래건스 (CBC TV)
- 모에요 드래건스 (CBC 프로 야구 중계)
6. 함께 보기
- 도치기현 출신 인물 목록
- 니혼 대학 출신 인물 목록
- 주니치 드래건스 선수 목록
7. 외부 링크
- [https://www.baseball-reference.com/register/player.fcgi?id=ochiai001eij Eiji Ochiai - Baseball-Reference (Minors)]
- [https://npb.jp/bis/players/71373885.html Eiji Ochiai - NPB.jp]
- [https://www.baseball-reference.com/bpbl/player.cgi?id=ochiai001eij Eiji Ochiai - Japanese Baseball Reference]
- [http://www.the-baseball.com/players/detail/53571 Eiji Ochiai - The Baseball Cube]
- [https://sp.baseball.findfriends.jp/player/19690025/ Eiji Ochiai - Weekly Baseball Online]
- [https://www.instagram.com/eiji.88.ochiai/ Eiji Ochiai - Instagram]
- [https://www.koreabaseball.com/player/foreignPlayerDetail.do?playerId=79339 Eiji Ochiai - KBO Lea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