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이타 고이치(種田 孝一오이타 고이치일본어, 1914년 4월 9일 ~ 1996년 9월 11일)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자 저명한 실업가이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출전하여, 당시 강력한 상대였던 스웨덴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승리, 이른바 "베를린의 기적"에 기여한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선수 경력 후에는 스미토모 금속공업 축구팀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이후에는 스미토모 금속공업, 스미킨 물산, 다이킨 공업 등 일본의 주요 기업에서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 회장 등 고위 임원을 두루 거치며 일본 경제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다재다능한 삶은 축구 선수로서의 업적과 함께 일본 사회의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2. 생애
오이타 고이치는 축구 선수로서의 빛나는 순간과 함께 일본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실업가로서 복합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출생부터 학창 시절의 축구 활동, 그리고 전후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일본 근대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2.1. 출생과 초기 생활
오이타 고이치는 1914년 4월 9일 일본 제국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은 종전호로 알려져 있다. 오이타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2.2. 학력
오이타 고이치는 도쿄부립 제5중학교(현 도쿄도립 고이시카와 중등교육학교)를 졸업하고, 구제 미토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현 도쿄대학)에 입학했다. 도쿄 제국대학 재학 중에는 아식스 축구부에 소속되어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1938년 4월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3. 초기 축구 경력
오이타 고이치는 도쿄 제국대학 축구팀에서 중요한 선수로 활동했으며, 대학 재학 중이던 1936년에는 이미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았다. 특히, 1938년 4월 7일 잉글랜드의 이즐링턴 코린시언스와의 경기에서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출전한 것이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였다.
3. 국가대표 경력
오이타 고이치의 국가대표 경력은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으로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일본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936년, 당시 도쿄 제국대학 학생이었던 오이타 고이치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193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종목에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8월 4일 스웨덴을 상대로 첫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일본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일본은 스웨덴에게 역전승을 거두며 올림픽 축구 첫 승을 달성했고, 이는 일본에서 "베를린의 기적"(ベルリンの奇跡베루린노 키세키일본어)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이 경기에 이어 8월 7일 이탈리아를 상대로도 출전했다. 1936년 일본 올림픽 대표팀은 2016년 일본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2. 포지션 변화 및 경기 스타일
오이타 고이치는 원래 미드필더 중에서도 수비형 미드필더에 해당하는 하프백 포지션에서 주로 플레이했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독일 현지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은 일본 대표팀은 기존의 2-3-5 시스템에서 3-2-5 시스템으로 전술을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장신이며 수비적인 성향을 가진 오이타는 3백의 중앙 수비수인 풀백 또는 스위퍼로 전환되었다. 그는 호리에 다다오(오른쪽 풀백)와 다케우치 데이조(왼쪽 풀백)와 함께 백 라인을 구축하며 팀의 수비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키는 175 cm, 몸무게는 67 kg으로 알려져 있다.
3.3. 국가대표팀 통계
오이타 고이치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총 2경기에 출전했으며 득점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국가대표 출전은 1936년에 이루어졌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
연도 | 출전 | 득점 |
1936 | 2 | 0 |
합계 | 2 | 0 |
4.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오이타 고이치는 축구 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1947년 그는 새로 창단된 스미토모 금속공업 축구단(현 가시마 앤틀러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56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5. 사업가 경력
오이타 고이치는 축구 선수 및 지도자 경력 외에 일본의 주요 기업에서 고위 임원으로 활약하며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사업가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일본 경제의 변화와 성장을 반영한다.
5.1. 전시 및 전후 기업 활동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오이타 고이치는 1938년 4월 만주 스미토모 금속공업 주식회사에 입사하며 사업가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10월에는 일본 본토의 스미토모 금속공업(현 일본제철)에 합류했다. 이 시기 그의 기업 활동은 일본의 전후 재건 및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과정의 일부였다.
5.2. 주요 기업 임원 활동
스미토모 금속공업에 합류한 오이타 고이치는 빠르게 승진하며 주요 임원직을 역임했다.
- 1966년 5월: 스미토모 금속공업 이사
- 1968년 11월: 스미토모 금속공업 상무이사
- 1972년 11월: 스미토모 금속공업 전무이사
- 1976년 6월: 스미토모 금속공업 대표이사 부사장
스미토모 금속공업에서 퇴임한 후에도 그의 사업가 경력은 이어졌다.
- 1978년 6월: 스미킨 물산(현 닛테츠 물산) 이사회 회장
- 1982년 2월: 다이킨 공업 이사회 회장 (1989년 3월까지 재직)
오이타 고이치는 이처럼 여러 대기업의 고위 임원으로서 일본 경제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6. 사망
오이타 고이치는 1996년 9월 11일 도쿄도 분쿄구에서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7. 유산 및 평가
오이타 고이치는 일본 축구의 역사와 일본 산업계 모두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7.1. 업적 및 인정
선수로서 오이타 고이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는 스웨덴전 승리에 기여하며 일본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다. 그의 활약은 일본 축구의 초창기 발전에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이 공로로 1936년 올림픽 대표팀은 2016년 일본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그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선수 은퇴 후에는 스미토모 금속공업 축구단의 감독으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과 팀 창단 초기 기틀 마련에 기여했다. 축구계를 넘어 실업가로서 스미토모 금속공업, 스미킨 물산, 다이킨 공업 등 유수의 기업에서 고위 임원직을 역임하며 일본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다방면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