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는 1930년 12월 9일 과테말라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8년에 군사 학교에 입학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군 경력
메히아 빅토레스는 1953년 군사 학교를 졸업한 후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꾸준히 승진을 거듭하여 1980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군 내부에서 군 감찰관, 국방부 차관 등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호세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대통령 재임 시기에는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3. 권력 장악
1983년 8월 8일, 국방부 장관이던 메히아 빅토레스 준장은 육군 참모총장인 헥토르 마리오 로페스 푸엔테스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호세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대통령을 축출했다. 그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종교적 광신자들이 정부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남용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쿠데타의 동기는 복합적이었지만,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하급 장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고위 장교들의 반발이었다. 쿠데타 직후 메히아 빅토레스는 군사 평의회(후안타)의 수장이 되었으며, 쿠데타 20일 만에 대통령에 취임하고 국무 회의를 해산했다. 이로써 그는 사실상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4. 메히아 빅토레스 정권 (1983-1986)
메히아 빅토레스는 국제 사회 및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압력에 직면하여 과테말라의 민주주의 복귀를 추진하는 동시에, 반군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과 통제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군사화를 심화시켰다.
4.1. 민주주의로의 이행
국제 사회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압력에 따라 메히아 빅토레스는 과테말라의 점진적인 민주주의 복귀를 허용했다. 1984년 7월 1일, 민주적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제헌 의회 대표 선거가 실시되었다. 1985년 5월 30일, 제헌 의회는 새로운 헌법 작성을 완료했으며, 이 헌법은 즉시 발효되었다. 이 헌법은 현재 과테말라의 현행 헌법이다. 이후 1985년 11월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민간인 후보인 비니시오 세레소가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세레소는 1986년 1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과테말라의 16년간 이어진 군사 정권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민주 정부의 부활에도 불구하고, "실종"과 죽음의 부대 살해는 끝나지 않았으며, 초법적 국가 폭력은 이미 정치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있었다. 군부는 비록 직접적인 통치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다. 과테말라 내전의 종결에는 그로부터 10년이 더 소요되었다.
4.2. 지속된 인권 침해와 국가 폭력
메히아 빅토레스가 권력을 장악할 무렵, 루카스 가르시아와 리오스 몬트 정권 하의 대게릴라전은 이미 반군을 민간인 지원 기반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또한, 과테말라 군사 정보국(G-2)은 대부분의 정치 기관에 침투하여 테러와 선별적 암살을 통해 정부 내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 대게릴라 프로그램은 과테말라 사회를 군사화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대부분의 대중적 시위와 반란을 억압했다. 군부는 사회 거의 모든 부문에서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83년 12월 2일, 메히아 빅토레스 정권은 반군에게 사면을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1983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성직자인 아우구스토 라미레스 모나스테리오가 납치되어 폭행당한 뒤 사망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
1983년 8월 쿠데타 이후, 미국 정보 공동체와 인권 감시 단체는 과테말라 농촌 지역의 인권 유린 사례가 줄어들고 있었으나, 과테말라시티에서는 죽음의 부대 활동이 증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대규모 초법적 살해와 학살 비율은 감소했지만, 납치와 강제 실종 비율은 증가했다. 과테말라시티의 상황은 루카스 가르시아 통치 시기와 유사하게 변했다. 메히아 빅토레스가 집권한 첫 달(1983년 9월)에는 월별 기록된 납치 건수가 8월의 12건에서 56건으로 급증했다. 피해자 중에는 여러 미국 국제 개발처 직원, 온건 및 좌파 정당 관계자, 그리고 가톨릭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제 연합에 제출된 과테말라 인권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84년 1월부터 9월까지 713건의 초법적 살해와 506건의 과테말라 국민 실종이 보고되었다. 1986년 3월의 비밀 미국 국방부 보고서는 1983년 8월 8일부터 1985년 12월 31일까지 총 2,883건의 납치(하루 평균 3.29건)가 기록되었으며, 1984년 한 해 동안 월평균 137건의 납치(총 약 1,644건)가 발생했음을 언급했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위반 행위가 메히아 빅토레스 하의 보안군과 준군사 조직에 의한 조직적인 납치 및 살해 프로그램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범죄 활동이 소수의 사례를 차지하고 가끔 개인이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납치는 보안군과 준군사 단체의 책임이다. 반군 단체는 현재 납치를 정치적 전술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메히아 빅토레스 정권 하에서 정부 탄압의 운영 방식 중 하나는 군 기지, 경찰서 또는 정부의 안전 가옥에서 피해자를 심문하는 것이었다. 반군과의 연루 혐의에 대한 정보는 "고문을 통해 추출"되었다. 보안군은 이 정보를 사용하여 과테말라시티 전역의 의심되는 게릴라 은신처에 대해 합동 군사/경찰 급습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수백 명의 개인을 비밀리에 체포했으며, 이들은 다시는 볼 수 없거나 나중에 고문과 훼손의 흔적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국가 경찰의 특수 부대에 의해 수행되었다. 1984년과 1986년 사이에 비밀 경찰(G-2)은 과테말라 남서부 레탈룰레우의 남부 공군 기지에서 대게릴라 프로그램 작전 센터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G-2는 의심되는 반군과 협력자들을 위한 비밀 심문 센터를 운영했다. 수감자들은 기지 주변의 물이 찬 구덩이에 감금되어 있었고, 이 구덩이는 우리로 덮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수감자들은 구덩이 위의 우리를 잡고 있어야 했다. 고문으로 사망한 수감자들의 시신과 실종 대상으로 지정된 살아있는 수감자들은 과테말라 공군 소속 IAI-201 아라바 항공기에서 태평양 상공으로 던져졌다. 이는 일명 "죽음의 비행"이라고 불렸다.
4.3. 사회 및 정치 통제
메히아 빅토레스 정권은 반군 진압 작전을 통해 반군의 민간인 지원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대체로 성공했다. 군 정보기관인 G-2는 과테말라의 대부분 정치 기관에 깊숙이 침투하여 테러와 선별적 암살을 통해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했다. 이 시기 과테말라 사회는 극도로 군사화되었으며, 군부가 조성한 공포 분위기는 대부분의 대중 시위와 반란을 억압했다. 군부는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그 권력을 공고히 했다.
한편, 원주민 활동가인 리곱레타 멘추는 이 시기 자신의 삶을 담은 회고록 나, 리곱레타 멘추를 펴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1980년 1월 31일 스페인 대사관 학살에서 사망한 농민 지도자 중 한 명의 딸이다. 멘추는 더 넓은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으로 19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회고록은 과테말라와 그 제도적 테러리즘의 본질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5. 권력 이양과 사법적 책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메히아 빅토레스는 1982년 3월 23일 리오스 몬트의 쿠데타부터 1986년 1월 14일까지의 모든 군인 및 게릴라의 범죄 행위에 대해 사면을 부여하는 법령(Decreto 8-86)을 발포했다. 그러나 이 법령은 과테말라 내전이 종결된 지 10년 후인 1996년에 폐기되었다.
1999년, 리곱레타 멘추 등 박해 피해자들은 스페인 법원에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호세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그리고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 등 전직 대통령 3명을 포함한 8명의 전직 정부 관료를 고소했다. 메히아 빅토레스는 살인, 납치,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1년, 인권 단체들은 메히아 정권이 과테말라 내전에서 가장 가혹한 시기였으며, 그의 통치 하에 수천 명의 마야인 원주민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고발했다. 그러나 그는 치매를 앓고 발작 증세가 있어 재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를 면했다.
6. 개인사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의 결혼이나 가족 관계 등 대중에게 알려진 개인적인 삶의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제한적이다.
7. 사망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는 오랜 기간 병을 앓다가 2016년 2월 1일 과테말라시티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8. 평가 및 유산
메히아 빅토레스의 통치는 과테말라 역사에서 군사 정권의 마지막 단계이자 민주주의로의 전환기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심각한 인권 침해가 지속된 시기로 평가된다.
8.1. 긍정적 평가
메히아 빅토레스는 군사 통치를 종식하고 민간 정부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정권은 제헌 의회 소집, 새로운 헌법 제정, 그리고 총선거 실시를 통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16년간 이어진 과테말라의 군사 통치를 끝내고 과테말라 내전 종식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8.2. 비판 및 논란
메히아 빅토레스는 정치적 탄압과 죽음의 부대 활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국가원수였다는 점에서 강력한 비판과 논란에 직면해 있다. 민주적 절차를 복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강제 실종, 고문, 살해 등 국가 폭력은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심화되었다. 특히 납치와 실종 사건의 급증은 그의 정권 하에서 보안군과 준군사 조직에 의한 조직적인 인권 침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물이 찬 구덩이에 수감자들을 가두거나 '죽음의 비행'을 통해 태평양에 시신을 유기한 잔혹한 고문 및 살해 방식은 그의 정권이 저지른 극심한 폭력성을 대변한다.
리곱레타 멘추의 회고록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과테말라의 제도적 테러리즘과 함께, 수천 명의 마야인 원주민이 학살당한 제노사이드 혐의는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다. 살인, 납치, 제노사이드 혐의로 스페인 법원에 기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회피하며 책임에서 벗어난 점은 과테말라의 인권 및 사법 정의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민간 정부로의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가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메히아 빅토레스 정권의 군사화 정책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9. 영향
메히아 빅토레스의 정치적 행보는 과테말라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국가 폭력은 과테말라의 정치 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군부는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는 민간 정부로의 권력 이양 이후에도 군부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배경이 되었다. 메히아 빅토레스가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과테말라 내전은 10년 더 지속되었으며, 이는 그의 정권이 국가 폭력의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의 통치는 과테말라의 민주주의 정착 과정에서 인권과 사회 정의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