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Oskar Ryszard Lange오스카르 리샤르트 랑게폴란드어는 폴란드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 가격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방안을 주창하고, 시장 사회주의의 초기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제기한 경제 계산 논쟁에 맞서 중앙 계획 경제의 효율성을 옹호하였다. 랑게는 중앙 계획 당국이 상품 재고의 증감 추이를 통해 수요와 공급을 파악하고 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사회적 복지와 경제 효율성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수리경제학 분야의 학자이자 연구자였으며, 이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랑게는 1904년 7월 27일 토마슈프마조비에츠키에서 개신교도 제조업자인 아르투르 율리우스 랑게와 그의 아내 조피 알베르틴 로스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19세기 초 독일에 폴란드로 이주해 왔다. 그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28년 아담 크시자노프스키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 논문을 방어했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바르샤바의 노동부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1927년부터 1931년까지 크라쿠프 대학교의 연구 조교로 일했다.


3. 미국에서의 경력
1932년 이레네 오더펠트와 결혼했다. 1934년 록펠러 재단의 펠로우십으로 영국을 거쳐 1937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8년 시카고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는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수리경제학 분야에서 학술적인 연구와 교육 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3.1.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교 및 정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랑게는 런던에 기반을 둔 폴란드 망명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 루블린 위원회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랑게를 좌익적이고 친소련적인 인물로 보았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랑게가 소련을 공식적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여권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여 개인적으로 그와 대화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또한 랑게에게 미래 폴란드 내각의 직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 국무부는 랑게의 정치적 견해가 폴란드계 미국인이나 미국 여론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그가 특사로 여행하는 것에 반대했다. 1944년 랑게의 소련 방문은 새로 설립된 폴란드계 미국인 회의가 그를 비난하고 런던 망명 정부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랑게는 5월 말 미국으로 돌아와 루스벨트의 요청으로 워싱턴 D.C.를 방문 중이던 망명 정부의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 총리를 만났다. 랑게는 스탈린이 독립적인 폴란드를 연립 정부 하에 유지하려는 소련의 염원을 밝히며 얼마나 합리적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강조했고, 국무부에 망명 폴란드 지도부가 소련 지도자와 이해에 도달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얄타 회담에서 전후 폴란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4. 전후 활동 및 외교 경력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랑게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폴란드로 돌아갔다. 같은 해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초대 주미 대사로 활동했다. 1946년에는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폴란드 대표단으로도 활동했다. 1947년부터 그는 폴란드에 거주하며 바르샤바 대학교와 중앙 계획 통계 학교에서 학술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폴란드 정부를 위해 일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폴란드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 기간 동안 1964년 8월 7일부터 5일간 국가원수 대행을 겸임하기도 했다.

5. 경제 이론 및 기여
랑게는 시장 사회주의 모델을 제시하고 사회주의 경제 계산 논쟁에 참여했으며, 복지 경제학과 일반 균형 이론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5.1. 시장 사회주의와 랑게 모델
랑게의 경제학에 대한 주요 기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그의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경제학의 노동 가치설을 비판하고 신고전파 경제학의 가격 이론을 신봉했다. 그는 1936년에 출판된 저서 『사회주의의 경제 이론에 관하여』에서 마르크스 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랑게는 이 책에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 계획에 시장 도구, 특히 신고전파 가격 이론의 활용을 옹호했다. 그는 중앙 계획 위원회가 "시행착오"를 통해 가격을 설정하고, 부족이나 잉여가 발생함에 따라 조정을 가함으로써 자유로운 가격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대신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시스템 하에서 중앙 계획자들은 국영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해 임의로 가격을 책정하고, 부족이나 잉여가 발생하는지에 따라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실험이 몇 차례 반복된 후에는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경제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부족이 발생하면 가격을 올리고, 잉여가 발생하면 가격을 내리는 식이다.
가격 인상은 기업들이 이윤 증대 욕구에 따라 생산을 늘리도록 장려하여 부족을 해소하고, 가격 인하는 기업들이 손실을 막기 위해 생산을 줄이도록 장려하여 잉여를 해소할 것이라고 랑게는 설명했다. 랑게의 견해로는 이러한 시장 메커니즘의 시뮬레이션이 수요와 공급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정부 계획자들이 시장 경제에서처럼 가격 시스템을 사용하고, 국영 산업 관리자들에게 국가가 결정한 가격에 대해 매개변수적으로 반응하도록 지시한다면(예: 비용 최소화) 계획 경제가 자본주의 또는 사적 시장 경제만큼 효율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아이디어의 지지자들은 이것이 시장 경제의 장점과 사회주의 경제의 장점을 결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랑게 모델은 가격 결정에 "시행착오"를 사용하는 기술적 관점에서 아바 러너의 기여로 '랑게-러너 모델'로도 알려져 있으며, 프레드 M. 테일러의 기여로 '랑게-테일러 모델' 또는 '랑게-러너-테일러 모델'로도 불린다. 반면, 가격 결정에 "연립 방정식"을 사용하는 수학적·계획적 관점에서는 디킨슨의 전개로 '랑게-디킨슨 모델'로 알려져 있다.
5.2. 사회주의 경제 계산 논쟁
랑게의 주장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과의 사회주의 경제 계산 논쟁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중앙 당국(정부)이 일반 균형 조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장 원리를 확대해야만 이상적인 자원 배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소위 "시장 근본주의"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랑게는 중앙 계획 경제의 관리자들이 상품 재고의 증감 추이를 통해 수요와 공급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 경제의 효율성을 옹호했다. 그는 가격 결정에 시장 원리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일반 균형 조건을 달성할 수 없으며, 중앙 당국의 정책을 통해서만 일반 균형 조건에 근접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정부와 가격 결정 시장 원리 간의 상호 보완성을 강조했다. 당시 페이비언 협회의 영국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랑게가 이 논쟁에서 승리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랑게의 저작들은 시장 사회주의의 가장 초기 모델을 제공했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에세이 『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은 랑게의 작업에 대한 반박이며, 경제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3. 복지 경제학과 일반 균형 이론에 대한 기여
랑게는 다양한 다른 분야에서도 기여했다. 그는 1930년대 일반 균형 이론에서 "파레토적 부흥"의 선도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42년에는 제1 및 제2 후생 정리의 최초 증명 중 하나를 제시했다. 그는 일반 균형의 안정성 분석(1942, 1944)을 시작했다. 그의 화폐수량설 비판(1942)은 그의 제자 돈 파틴킨이 화폐를 일반 균형 이론에 "통합"하는 주목할 만한 연구를 개발하도록 이끌었다. 랑게는 신고전파 종합의 발전에 여러 중요한 기여를 했다(1938, 1943, 1944). 그는 고전 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을 단일 이론 구조로 통합하는 작업도 수행했다(예: 1959). 말년에 랑게는 사이버네틱스와 경제 계획을 위한 컴퓨터 사용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케네스 애로와 제라르 드브뢰에 의해 일반 균형의 존재가 수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의 이론 자체가 완벽한 "최종 이론"임이 입증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일반 균형 조건이 실제 경제의 다양한 단위 실물 요소를 정량적으로 관측·계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원 배분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기술적/정치적 측면)의 두 가지 실용적인 문제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사이버네틱스와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 의해 랑게 모델의 실용적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6. 정치 및 이념적 입장
랑게는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인물로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스탈린주의적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집권당인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 입당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때로는 스탈린을 "경제 이론가"로 옹호하는 논문(예: 1953년)을 작성하여 동료 경제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랑게는 자신을 사회주의 활동가로 자임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에 기반을 둔 랑게의 모델(소위 시장 사회주의)은 그의 전체 이념적 범주 내에서 계획 경제의 고도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계산 도구였다. 전후 폴란드에서는 신고전파 가격 이론을 소련식 경제 계획 실천에 통합하고,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학을 하나의 이론 체계로 통합하는 데 힘썼다(예: 1959년).
7. 개인사
랑게는 1932년 이레네 오더펠트와 결혼했다.
8. 사망
오스카르 랑게는 1965년 10월 2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9. 유산 및 평가
랑게의 경제 사상은 후대 경제학자들과 경제 시스템 설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론은 긍정적 및 비판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평가된다.
9.1. 경제 사상에 미친 영향
랑게는 시장 사회주의의 가장 초기 모델을 제시했으며, 그의 이론은 케네스 애로와 제라르 드브뢰에 의해 일반 균형의 존재가 수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 이론적 완결성이 입증되었다. 그의 작업은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시장 메커니즘을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 통합하는 방안에 대한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1962년 국제사회연구소는 오스카르 랑게에게 명예 펠로우십을 수여했다.
9.2. 비판적 관점
랑게의 경제 모델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일반 균형 조건이 실제 경제에서 다양한 단위의 실물 요소를 정량적으로 관측·계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원 배분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실물적 기술적 측면 또는 정치적 측면)에 대한 실용적인 문제에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그가 말년에 사이버네틱스와 컴퓨터 기술을 통해 모델의 실용적 문제를 개선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랑게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스탈린주의적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을 "경제 이론가"로 정당화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동료 경제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그의 경제 이론의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은 랑게의 시장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중요한 반박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