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병감(伍秉鑑우빙젠중국어, 1769년 ~ 1843년 9월 4일)은 중국 청나라 시대의 저명한 상인이다. 서양에서는 그의 상업명인 '호관'(浩官하오관중국어)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 오국영(伍國瑩)으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그는 광동십삼행의 핵심 상인이자 이화행(怡和行)의 수장, 그리고 광동 공행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오병감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19세기 중반 영국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차, 비단, 도자기 등 주요 무역 품목을 다루며 중국과 서양 간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아편 무역에도 관여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편 전쟁 이후 남경조약에 따른 배상금 중 상당 부분을 기여하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생애
오병감은 청나라 시기 광동 지역에서 활동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으로, 그의 생애는 청나라 말기 격동하는 중국 무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오병감은 1769년에 태어났다. 그의 조적(祖籍)은 푸젠성 취안저우시 진강현 안해이지만, 실제 출생지는 광동성 광주부 남해현 황포(오늘날 광둥성 광저우시 황푸구)이다. 오씨 가문은 강희제 초기 천주(泉州)에서 광주(廣州)로 이주했으며, 푸젠성과 광동성 사이를 오가며 차 무역에 종사했다. 오병감의 아버지 오국영은 광동13행의 상인 중 한 명인 반진승(潘振承)의 회계원이었다. 오국영은 1783년 원순행(元順行)의 경영에 참여했으며, 1792년에는 아들인 오병감의 형 오병균(伍秉鈞)에게 업무를 물려주었다.
2.2. 초기 경력 개발
오병감의 형 오병균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화행(怡和行)을 창립했다. 그러나 오병균이 3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면서, 이화행은 그의 동생인 오병감에게 계승되었다. 오병감은 1801년부터 이화행의 경영을 맡아 본격적으로 상업 활동을 시작했다. 서양에서는 오병감을 '호관(Howqua)'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오국영이 1대 호관이었고, 오병감은 2대 호관으로 불리며 가문의 상업적 명성을 이어받았다. '호관'은 그의 상업명인 '호관'(浩官하오관중국어)의 푸젠성 방언인 민남어 발음에서 유래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오병감은 청나라 시기 중국과 서양 간의 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이화행(Ewo hong) 경영
오병감은 광동십삼행의 주요 상인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이화행의 수장으로서 광동 공행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화행은 광동 지역에서 외국 상인들과의 무역을 독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허가된 상행 중 하나였다. 그는 주로 비단과 도자기를 포함한 중국의 주요 수출품을 서양에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1801년부터 이화행은 아편 밀수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3.2. 중국-서양 무역에서의 역할
오병감은 영국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아편 전쟁 이전까지 청나라는 오직 광동의 무역 전담 길드인 광동십삼행을 통해서만 서양과 무역을 허용했다. 이 독점적인 무역 체제 덕분에 오병감은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서양에 판매하며 막대한 은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는 제임스 매시슨, 윌리엄 자딘, 새뮤얼 러셀, 에이비얼 애벗 로 등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양 상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도움에 감사했던 미국 상인들이 살렘 (매사추세츠주)과 뉴포트 (로드아일랜드주)의 저택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을 정도였다. 1822년 광동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많은 공행 건물이 불탔을 때, 녹아내린 은화가 약 3219 m (2 mile) 길이의 작은 강을 이루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3.3. 재정적 위상 및 부
오병감은 19세기 청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으며, 한때 세계 최고 부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의 자산은 최대 2천 6백만 은원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상인들은 그를 "재정 관리에 뛰어나고, 남들보다 비범하게 총명하다"고 칭찬했다. 그는 영국과의 아편 밀무역을 통해서도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3.4. 아편 무역 및 전쟁 관련 활동
오병감은 이화행을 통해 아편 밀수 활동에 참여하며 큰 재산을 모았다. 임칙서가 아편 단속에 나섰을 때 오병감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아편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상당한 재산을 청나라 조정에 헌납하고 방위대를 조직하는 등 국가 방위에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남경조약 체결 후 청나라에 부과된 배상금 2천 1백만 은원 중 광동십삼행이 부담해야 했던 3백만 은원 가운데, 오병감 혼자서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1백만 은원을 부담할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4. 개인 생활
오병감의 개인 생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그의 아들인 오숭요(伍崇曜)가 『월아당총서』(粤雅堂叢書)를 편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5. 사망
오병감은 1843년 9월 4일 광저우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남경조약이 체결된 해와 같은 해에 일어났다.
6. 평가 및 유산
오병감은 청나라 말기 중국의 대외 무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6.1. 긍정적 평가
오병감이 공행의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광동십삼행과 공행은 크게 번성하여 청나라의 무역 이익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광저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다. 그는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과 비범한 지성으로 서양 상인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6.2. 비판 및 논란
오병감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아편 밀수라는 비윤리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편 무역은 중국 사회에 심각한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으며, 그의 아편 단속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는 이러한 비판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의 부의 상당 부분이 아편 무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그의 업적을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6.3. 후대 영향
아편 전쟁 이후 오병감 가문의 사업과 명성은 빠르게 쇠퇴했다. 그의 국제 투자를 관리하던 미국 무역 회사인 러셀 & 컴퍼니(Russell & Company)는 1891년에 파산했다. 현재 그의 후손들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한때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오병감 가문의 저택은 광저우의 후난섬(Honam Island) 빈민가에 흔적만 남아 있다.
한편, 남경조약으로 광동십삼행이 해체된 이후에도 자딘 매시슨 & 컴퍼니는 그들의 중국어 상업명으로 '이화(Ewo)'를 계속 사용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맨스필드에서 23 km 떨어진 아일던 호수 동쪽 기슭에 있는 한 정착촌은 빅토리아 골드러시 시기에 이 지역을 지나던 중국인 광부들에 의해 오병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 오숭요는 『월아당총서』를 편찬하여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7. 관련 항목
- 광동십삼행
- 공행
- 이화행
- 아편 전쟁
- 남경조약
- 임칙서
- 클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