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마르 엔리케 비스켈 곤살레스 (Omar Enrique Vizquel González오마르 비스켈스페인어, 1967년 4월 24일 ~ )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은퇴한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로, "리틀 오"(Little 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24년간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경력 동안 시애틀 매리너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텍사스 레인저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유격수로 활약했다. 비스켈은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비형 유격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으며, 11개의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이 중 9개는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연속으로 수상했다. 유격수로서 그의 통산 수비율은 역대 최고인 .9847이며, 유격수로서 가장 많은 경기 출장과 가장 많은 병살을 기록했다.
은퇴 당시 비스켈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포지션 플레이어였으며, 1980년대에 선수 생활을 시작한 유일한 현역 선수였다. 그는 야구 역사상 40년 동안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한 31명의 선수 중 한 명이자, 유일하게 유격수로 활약한 선수이다. 2012년 5월 7일, 비스켈은 1918년 44세의 나이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2경기를 뛴 바비 월러스를 넘어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유격수 출장 선수가 되었다. 2020년부터 그에게 제기된 가정 폭력 및 성희롱 혐의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및 교육
오마르 비스켈은 1967년 4월 24일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4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비스켈은 베네수엘라 윈터 리그의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에서 빌 플러머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스위치 히터가 되는 법을 배웠다.
2.2. 초기 경력
비스켈은 1989년 4월 3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했다. 그는 9번 타자로 출전하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5개의 어시스트와 1개의 병살을 성공시켰다. 3일 후인 4월 6일, 그는 스톰 데이비스를 상대로 3회에 첫 안타를 기록했으며, 이후 다넬 콜스의 2루타로 득점했다.
3. 선수 경력
오마르 비스켈은 메이저리그에서 24시즌 동안 여러 팀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수비력과 꾸준한 타격 능력을 선보였다.
3.1. 시애틀 매리너스
비스켈은 1989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후, 1993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매리너스에서 뛰었다. 그는 1993년에 첫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자신의 수비 재능을 입증했다.
3.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3년 시즌 종료 후, 비스켈은 펠릭스 페르민, 레지 제퍼슨, 그리고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인디언스 소속으로 비스켈은 1995년과 1997년에 월드 시리즈에 두 번 진출했으나, 각각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플로리다 말린스에게 패배했다. 그는 57번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통산 타율 .250을 기록했다.
인디언스에서 뛰는 동안 비스켈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9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뛰어난 수비력을 이어갔다. 이 기록은 2002년 알렉스 로드리게스에 의해 깨졌다.
1999년, 비스켈은 타율 .333과 112득점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처음으로 3할 타율과 100득점을 달성했다. 당시 인디언스는 리그 최다인 1,009득점을 기록한 강력한 타선을 자랑했으며, 비스켈은 케니 로프턴과 로베르토 알로마 사이의 2번 타자로 활약했다. 이 타선에는 짐 토미와 매니 라미레스와 같은 강타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2001년 8월 5일, 비스켈은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9회에 3점 3루타를 쳐 14대14 동점을 만들며 14대2로 뒤지던 경기를 뒤집는 데 기여했다. 인디언스는 결국 11이닝 접전 끝에 15대14로 승리하며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 역전승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2002년에는 14개의 홈런과 72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으나, 오른쪽 무릎 수술로 인해 활약이 중단되었다. 그는 2002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 8회에 타점 3루타를 쳐 7대7 동점을 만들었다. 2002년 무릎 부상과 후속 수술로 인해 2003년에는 64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3년 5월 27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는 투수 스티브 에이버리의 허를 찌르는 홈 스틸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비스켈은 2004년 148경기에서 타율 .291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시즌 종료 후, 비스켈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자유 계약을 맺었다.
3.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7년 6월 23일, 히스패닉 야구 유산 박물관 명예의 전당은 경기 전 시상식에서 비스켈과 전 자이언츠 외야수 매티 알루를 헌액했다. 비스켈은 14개의 희생 번트를 기록하며 후안 피에르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 통산 1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희생 번트 부문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2008년 2월 27일, 비스켈은 무릎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그는 2008년 시즌을 부상자 명단에서 시작했으며, 5월 10일에 첫 경기를 치렀다. 6월 13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투수 그렉 스미스를 상대로 개인 통산 두 번째 홈 스틸을 성공시켰다.
비스켈은 허치 상과 윌리 맥 상을 수상했으며, 하트 & 허슬 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데이브 드라베키와 크레이그 비지오 단 두 명의 선수만이 이 상들 중 두 개 이상을 수상했으며, 윌리 맥 상의 이름이 된 윌리 맥코비는 이 상이 제정되기 전에 허치 상을 수상했다.
2005년 7월 26일, 비스켈은 그렉 매덕스의 통산 3,000번째 탈삼진 희생자가 되었다.
3.4. 텍사스 레인저스

2009년 1월 21일, 비스켈은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합류했다. 그는 주로 백업 내야수로 활약했다. 레인저스에서 62경기에 출전하여 47안타, 17득점, 14타점, 타율 .266, OPS .660을 기록했으며, 27삼진과 13볼넷을 얻었다. 그가 뛴 세 포지션(유격수, 3루수, 2루수) 모두에서 실책을 기록하지 않았다. 유격수로 27경기 196.2이닝을 소화하며 32개의 풋아웃과 76개의 어시스트, 22개의 병살을 기록했고, 3루수로 20경기 101이닝을 소화하며 5개의 풋아웃과 2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루수로는 23개의 풋아웃과 49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5.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9년 11월 23일, 비스켈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1년 140.00 만 USD 계약에 합의했다. 계약이 확정되자, 전 유격수이자 화이트삭스 레전드인 루이스 아파리시오는 2010년 시즌 동안 비스켈을 위해 자신의 등번호 11번을 일시적으로 "은퇴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화이트삭스 감독 오지 기옌이 비스켈과 아파리시오와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 출신 유격수였으며, 비스켈이 평생 착용해온 등번호 13번을 자신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 5월 25일, 비스켈은 데릭 지터와 호너스 와그너에 이어 역대 유격수 최다 안타 3위에 올랐다. 6월 25일에는 2010년 시즌 첫 홈런을 기록하며, 테드 윌리엄스, 윌리 맥코비, 리키 헨더슨과 함께 4개 다른 10년 동안 홈런을 친 몇 안 되는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10년 11월 2일, 비스켈은 시카고에 남기 위해 1년 계약을 다시 맺었다. 2011년 4월 3일, 비스켈은 싱글 안타를 쳐 통산 2,800번째 안타를 달성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스켈은 여전히 리그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전 화이트삭스 팀 동료들 사이에서는 가장 신체적으로 건강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3.6. 토론토 블루제이스

비스켈은 2012년 시즌을 위해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1년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을 통해 팀에 합류했으며, 개막전에서 전 소속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첫 경기를 치렀다. 그의 첫 선발 출장은 4월 22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서였다. 비스켈은 5월 1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벤치에서 주심과 언쟁을 벌이다 퇴장당했다. 그는 퇴장하면서 주심을 조롱하듯 춤을 추는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비스켈은 2012년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시사했다. 당시 45세였고 블루제이스에서 5경기밖에 출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장에 오는 것이 설렌다. 매일은 아니겠지만, 몸이 아픈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에 있고 싶고 경쟁하고 싶다"고 말했다.
7월 27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비스켈은 시즌 첫 2개의 장타인 2루타와 3루타를 기록했다. 비스켈은 훌리오 프랑코와 닉 알트록에 이어 3루타를 친 역대 세 번째 최고령 선수가 되었으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경기에서 2루타와 3루타를 동시에 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9월 19일 뉴욕 양키스와의 주야간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비스켈은 통산 2,874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베이브 루스를 넘어 역대 41위에 올랐다.
2012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브렛 로리는 평소 등번호 13번 대신 17번 유니폼을 입었다. 이는 비스켈이 2012년 10월 3일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 자신의 평생 등번호인 13번을 입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스켈은 3타수 1안타를 기록했으며,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를 쳐 통산 2,877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멜 오트를 넘어 역대 안타 순위 40위에 올랐다. 비스켈은 시즌 후 은퇴했으며, 1960년대에 태어난 마지막 포지션 선수이자 1980년대에 활약한 마지막 은퇴 선수가 되었다.
4. 코치 경력
오마르 비스켈은 선수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남아 여러 팀에서 코치 및 감독으로 활동했다.
4.1.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2013년 1월 30일, 비스켈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 바비 눕과 함께 공동 내야수 코치로 고용되었다. 이는 2013년 계약이 갱신되지 않은 딕 스코필드의 후임이었다.
4.2.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2013년 11월 18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비스켈을 새로운 1루 코치로 임명하며 라파엘 벨리아드의 후임으로 삼았다. 브래드 오스머스 감독 아래에서 비스켈은 타이거스의 내야 및 주루 인스트럭터 역할도 수행했다. 2017년 시즌 후 오스머스 감독이 해고된 후, 비스켈은 공석이 된 감독직에 면접을 보았으나 론 가든하이어에게 밀려 감독직을 맡지 못했다.
4.3. 시카고 화이트삭스
2017년 11월, 비스켈은 시카고 화이트삭스 구단으로 돌아와 윈스턴-살렘 대시라는 클래스 A 어드밴스드 팀의 감독을 맡았다. 2018년 12월, 비스켈은 화이트삭스의 클래스 AA 팀인 버밍햄 배런스의 감독으로 승진했다. 2019년, 비스켈은 한 남성 직원과의 사건으로 인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배런스에서 해고되었다.
4.4. 티후아나 토로스
2019년 12월 2일, 비스켈은 멕시칸 리그의 티후아나 토로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021년 7월, 비스켈은 팀을 떠났다.
5. 개인 생활 및 사회 활동
비스켈은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클리블랜드의 예술 교육 단체인 "영 오디언스"와 엔터테인먼트 책자 판매를 통해 기금을 모으는 "스쿨스 나우"의 명예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9년 그의 고향 베네수엘라에서 25,000명의 사망자를 낸 바르가스 진흙 사태 재난 이후, 비스켈은 구호 활동에 자원하여 50.00 만 USD 이상을 모금하는 데 기여했다. 비스켈은 클리블랜드 시내에서 "트라이브 잼"과 같은 다양한 자선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 행사에서 그와 일부 팀 동료들은 은퇴한 가수들과 함께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2002년, 그가 밥 다이어와 공동 집필한 자서전 오마르!: 필드 안팎에서의 나의 삶 (Omar!: My Life on and Off the Field)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4주 동안 올랐다. 이 책은 2003년에 페이퍼백으로도 출간되었다.
비스켈은 1992년 시애틀 출신인 니콜 톤킨과 결혼했으나, 이후 이혼했다. 그는 2014년 7월 블랑카 가르시아와 재혼했다.
6. 기록 및 수상
오마르 비스켈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비형 유격수 중 한 명으로, 수많은 기록과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6.1. 수비 기록
- 유격수로서 역대 최다 병살 기록
- 11회 골드 글러브 수상
-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최고령 유격수 (2005년 38세, 2006년 39세)
- 1,000경기 이상 출전한 유격수 중 역대 최고 통산 수비율 (.9847)
- 유격수 시즌 최소 실책 기록 (2000년 3개, 타이 기록)
- 역대 어시스트 6위, 유격수 어시스트 역대 3위
6.2. 타격 기록
- 은퇴 당시 베네수엘라 출신 선수 중 역대 최다 안타 기록 (이후 미겔 카브레라에 의해 경신)
- 통산 2,800안타를 달성한 47번째 메이저리그 선수 (2011년 4월 3일)
- 은퇴 당시 현역 선수 중 데릭 지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안타 기록 (역대 47위)
- 은퇴 당시 현역 선수 중 가장 많은 단타 기록 (역대 20위)
- 은퇴 당시 현역 선수 중 가장 많은 타석 기록 (역대 19위)
- 에디 콜린스, 제이크 도버트, 스터피 맥기니스, 윌리 킬러에 이어 희생 번트와 희생 플라이 합계 역대 5위
- 라이브볼 시대 역대 최다 희생 번트 기록 보유자이자 4회 리그 선두 (1997, 1999, 2004, 2005년)
- 은퇴 당시 현역 선수 중 알렉스 로드리게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 플라이 기록 (역대 50위, 타이)
- 은퇴 당시 현역 선수 중 후안 피에르와 칼 크로포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도루 기록 (역대 68위)
- 9이닝 경기 최다 안타 아메리칸 리그 기록 (2004년 8월 31일 6안타, 타이 기록)
- 유격수로서 두 번째로 많은 안타 기록 (데릭 지터에 이어)
- 유격수로서 네 번째로 많은 득점 기록 (허먼 롱, 데릭 지터, 빌 달렌에 이어)
- 유격수로서 일곱 번째로 많은 도루 기록 (버트 캄파네리스, 오지 스미스, 허먼 롱, 루이스 아파리시오, 호너스 와그너, 빌 달렌에 이어)
- 은퇴 당시 아이솔레이티드 파워 (타석당 장타율) .100 미만을 기록한 시즌이 12회로 현역 선수 중 가장 많음
- 통산 2,877안타로 역대 44위
6.3. 전반적인 업적
- 유격수로서 역대 최다 경기 출장
- 은퇴 당시 현역 선수 중 가장 많은 경기 출장 (역대 14위)
- 3회 올스타 선정 (1998, 1999, 2002년)
- 2회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우승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 1995, 1997년)
- 6회 아메리칸 리그 중부 지구 우승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 1995-99, 2001년)
- 허치 상 수상 (1996년, 비미국인 선수 최초)
- 윌리 맥 상 수상 (2006년, 정신력과 리더십 인정)
- 하트 & 허슬 상 최종 후보 (2007년, "경기의 가치, 정신, 전통을 구현한 선수"에게 수여)
- 베네수엘라 야구 국가대표팀 주장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히스패닉 야구 유산 박물관 명예의 전당 헌액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 헌액 (2014년)
- 2015년 올스타전 "프랜차이즈 4"에서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디언스 선수 4인 중 한 명으로 선정
7. 논란 및 비판
비스켈은 선수 및 코치 경력 외에 개인적인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7.1. 가정 폭력 혐의
2020년 12월 16일, 디 애슬레틱은 비스켈의 아내 블랑카(당시 이혼 소송 중)가 그가 2011년(결혼 전)과 2016년에 자신을 신체적으로 학대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블랑카는 2020년 10월 7일 인스타그램 라이브 영상에서 이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2016년 비스켈은 워싱턴주 새마미시의 자택에서 발생한 사건 이후 4급 가정 폭력 혐의로 기소되었다. 블랑카는 경찰에게 남편이 언쟁 중 자신을 밀어 넘어뜨려 정강이 부상과 여러 개의 손톱이 부러지는 상해를 입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블랑카의 요청으로 혐의는 나중에 취하되었다. 그녀는 기사에서 비스켈이 자신에게 편지 서명을 강요하고 재정적 보복으로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디 애슬레틱은 또한 2011년 12월에 발생한 사건도 언급했는데, 당시 비스켈은 앨라배마에 있는 아내의 언니 집에서 언쟁 중 아내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비스켈은 이 주장을 부인하며 블랑카가 자신을 할퀴었다고 주장했고, 블랑카는 이를 부인했다. 부부는 결국 공동으로 혐의 기각 신청을 성공시켰다.
비스켈은 성명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주장을 강력히 부인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이 상황에 대해 조사했다.
7.2. 성희롱 소송
2021년 8월 7일, 디 애슬레틱은 비스켈과 화이트삭스가 앨라배마 북부 지방법원에서 버밍햄 배런스의 전 배트보이에게 성희롱 혐의로 고소당했다고 보도했다. 이 배트보이는 비스켈이 자신의 자폐증 때문에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성희롱을 했다고 주장했다. 비스켈과 원고는 2022년 6월에 비밀리에 합의에 도달했다.
7.3. 호세 메사와의 불화
비스켈과 전 팀 동료이자 친구였던 호세 메사 사이에 오랫동안 공개적인 불화가 있었다. 2002년, 비스켈은 자신의 자서전 오마르!: 필드 안팎에서의 나의 삶 출간 후 1997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메사의 투구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다. 비스켈은 "전 세계의 시선이 우리의 모든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호세의 눈은 공허했다.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마치 그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공허한 눈을 본 직후, 그는 세이브를 날렸고 말린스가 동점을 만들었다"고 썼다.
메사는 이에 격분하며 이후 비스켈을 만날 때마다 공을 맞히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내 어린 아들도 그를 맞히라고 했다. 10번 더 상대하면 10번 다 맞힐 것이다. 그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2002년 6월 12일, 메사는 9회에 비스켈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메사는 퇴장당하지 않고 경기를 마쳤다. 그들은 2006년까지 다시 맞붙지 않았다. 당시 비스켈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이었고 메사는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뛰고 있었다. 4월 22일 덴버에서 비스켈이 메사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메사는 다시 비스켈에게 공을 맞혔다. 그러나 2006년 세 번 더 맞붙었을 때, 비스켈은 전 팀 동료에게 공을 맞지 않고 두 번의 땅볼 아웃과 한 번의 타점 단타를 기록했다. 메사가 2007년 은퇴하기 전까지 비스켈은 메사를 상대로 타율 .333 (21타수 7안타)을 기록했다.
8. 평가 및 영향
오마르 비스켈은 뛰어난 수비력과 긴 선수 경력을 통해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8.1.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
비스켈은 2018년부터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투표에 이름을 올렸다. 2018년에는 37.0%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선에 필요한 75%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후보 자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5%는 훨씬 넘는 수치였다. 그의 지지율은 2020년에 52.6%로 증가했으나, 2021년 투표에서는 49.1%로 하락했고, 2022년 투표에서는 23.9%로 급락했다. 2023년에는 19.5%로 6년 차에 접어들었으며, 2024년 7년 차에는 17.7%로 전년 대비 1.8% 감소했다. 선수는 미국야구기자협회 회원들의 정기 투표에 최대 10번까지 이름을 올릴 수 있지만, 이전에 간과된 선수를 선출할 수 있는 전직 선수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기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