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앤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오라녜 공비로서 네덜란드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녀는 또한 섭정으로서 네덜란드의 정치적 안정과 중앙 집권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앤은 1709년 11월 2일(구력 10월 22일) 하노버의 헤렌하우젠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게오르크 루트비히 선제후가 조지 1세로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위를 계승하기 5년 전이었다. 그녀는 태어난 직후 헤렌하우젠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할아버지의 사촌인 앤 여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앤은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배웠으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에게 노래, 하프시코드, 작곡 등 음악을 배웠다. 헨델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앤에게는 "공주들의 꽃인 앤에게만은 유일한 예외를 두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앤은 평생 헨델의 후원자로 남았으며, 그의 오페라를 관람하고 음악을 구독했다.

1720년에 앤은 천연두에 걸렸으나 살아남았다. 이로 인해 그녀의 얼굴에는 흉터가 남았고, 두 명의 여동생만큼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2년 후, 그녀의 어머니 카롤리네 왕비는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와 찰스 매틀랜드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목격했던 종두법 (천연두에 대한 초기 면역 방식)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카롤리네의 지시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 6명에게 사형 대신 종두법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고, 그들 모두 살아남았다. 추가 시험으로 같은 치료를 받은 고아 6명도 살아남았다. 의학적 가치를 확신한 왕비는 두 명의 어린 딸인 아멜리아와 캐롤라인에게 성공적으로 접종을 시켰다.
1727년 8월 30일, 조지 2세는 그의 장녀인 앤에게 프린세스 로열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는 찰스 1세가 1642년에 그의 딸 메리, 오라녜 공비를 위해 제정된 이후 사용되지 않던 것이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앤은 어린 시절부터 언어와 음악에 대한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 특히 헨델에게 사사하며 음악적 재능을 꽃피웠고, 이는 그녀의 평생에 걸친 예술 후원 활동으로 이어졌다.
1725년, 앤과 루이 15세 간의 잠재적인 결혼 계약이 논의되었다. 프랑스의 관점에서 이러한 결혼은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으로부터 프랑스에 귀중한 중립을 제공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 문제가 발생했다. 앤이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시되었지만, 교황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특히 루이 15세와 스페인 공주 간의 파기된 약혼과, 앤이 미성년 섭정 시기에 프랑스의 섭정이 될 경우 프랑스 내 위그노에 대한 그녀의 종교적 성향이 우려되었다. 결국 프랑스 측이 앤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3. 결혼 및 자녀
1734년 3월 25일(구력 3월 14일), 앤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오라녜 공 빌럼 4세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결혼으로 얻은 새로운 칭호를 선호하여 영국 칭호 사용을 중단했다. 그녀의 결혼식에서 연주된 음악인 This is the day는 헨델이 시편 45편과 118편을 바탕으로 앤이 직접 쓴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헨델은 또한 그녀의 결혼을 기념하여 오페라 파르나소 인 페스타를 작곡했으며, 이 작품은 1734년 3월 13일 런던의 국왕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런던 소호의 나소 스트리트(1910년 제라드 플레이스로 개명)는 이 결혼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빌럼은 척추 기형을 앓아 외모에 영향을 미쳤지만, 앤은 그가 "원숭이라 할지라도"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 결혼을 그토록 고집한 이유는 단순히 결혼하여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오빠의 궁정에서 독신으로 사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녀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상대는 군주 또는 왕위 계승자였으므로, 빌럼은 사실상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개신교 선택지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질문에 빌럼과 결혼할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결혼을 할지 말지의 문제라고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두고 오빠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 다투기도 했다.
빌럼과 앤은 큐에서 신혼여행을 보낸 후 네덜란드로 항해했다. 네덜란드에서 그들은 레이우아르던에 거주했다. 빌럼이 라인란트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앤은 곧 향수병을 느꼈고, 자신이 임신했다고 믿어 아이가 영국 왕위 계승에 포함될 수 있도록 고국에서 출산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남편과 아버지 모두에게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짧은 체류 후 그녀에게 네덜란드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1735년 4월이 되어서야 앤이 임신하지 않았음이 분명해졌다. 1736년에는 임신했으나, 아이(딸)는 사산되었다. 1739년에도 딸을 낳았으나 같은 해에 요절했다.

앤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어머니인 헤센카셀의 마리 루이제와도 잘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앤은 위엄 있는 본질을 지녔지만 네덜란드인보다 영국인이 우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음악과 문학에 대한 관심에만 몰두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시녀들에게 피로를 무시하고 몇 시간 동안 자신을 위해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등 궁정인들에게 거의 배려를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빌럼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거리가 있었으나, 결국 서신에서 드러나듯이 조화롭고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1747년, 빌럼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모든 7개 주 총독이 되었고, 이는 그의 새로운 광범위한 권한을 세습으로 만드는 헌법 개혁으로 이어졌다. 빌럼과 앤은 헤이그로 이주했으며, 앤은 1750년에 헨델을 네덜란드에 초청하여 헤이그에서 음악 활동을 하도록 했다. 작곡가 요시나 판 아르선은 그녀의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앤과 빌럼 4세 사이에는 총 5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이 중 2명만이 성년까지 생존했다.
- 딸 (1736년 사산)
- 딸 (1739년 출생, 같은 해 사망)
- 카롤리나 공주 (1743년 2월 28일 ~ 1787년 5월 6일)
- 안나 마리아 공주 (1746년 11월 15일 ~ 1746년 12월 29일)
- 오라녜 공 빌럼 5세 (1748년 3월 8일 ~ 1806년 4월 9일)
2. 주요 활동 및 업적
앤은 오라녜 공비로서 네덜란드 사회에 문화적으로 기여했으며, 남편 사후에는 섭정으로서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2.1. 오라녜 공비로서의 역할
네덜란드에서의 생활 동안 앤은 문화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특히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스승이었던 헨델을 네덜란드에 초청하여 그의 음악을 네덜란드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녀는 네덜란드 국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시어머니인 헤센카셀의 마리 루이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 빌럼 4세와는 점차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으며, 그들의 서신은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1747년, 빌럼 4세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의 모든 주에 걸친 총독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 총독직은 공식적으로 세습으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앤은 네덜란드의 최고 지도자의 배우자로서 더욱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2.2. 섭정 시기

1751년 10월 22일, 빌럼 4세가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앤은 세 살 된 아들 빌럼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네덜란드 세습 총독이 일반적으로 행사하는 모든 특권을 얻었으나, 군사적 의무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 루이 에른스트에게 위임되었다.
앤은 근면했지만,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인기가 없었다. 1750년대는 네덜란드와 영국 간의 긴장과 상업적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였고, 이는 그녀를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했다.
앤의 국내 정책은 네덜란드 주들의 전통적인 권리에 대항하여 중앙 세습 총독 정부의 권위를 옹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세습 총독직 개혁은 남편의 통치 기간에 도입되었으며, 이는 새롭고 논란이 많았고 그의 사망 후에도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앤은 중앙집권적 정부를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예를 들어, 하를럼 시와의 갈등에서 그녀는 후보자 명단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시가 선거를 개최하는 것을 막았다. 그녀의 가혹한 통치는 반발을 샀지만, 그녀의 통합 정책은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세습 총독 통치를 효과적으로 확립했다.
외교 정책에서 앤은 프랑스보다는 황제와의 영국 동맹을 선호했는데, 이는 네덜란드에서는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또한 프랑스령 네덜란드에 대항하여 남부 주들의 요새화를 추진한 것은 큰 반대에 부딪혔다.
앤은 1759년 헤이그에서 수종으로 사망할 때까지 섭정 역할을 계속했다. 그녀의 사망 후에는 시어머니인 헤센카셀의 마리 루이제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 루이 에른스트의 도움을 받아 섭정직을 계승했다. 마리 루이제가 1765년에 사망하자, 앤의 딸인 카롤리나가 1766년 빌럼 5세가 18세가 될 때까지 섭정으로 활동했다.
3. 예술 및 문화 활동
앤은 미술과 음악 모두에 깊은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헤르만 판 데르 마인에게 드로잉과 회화 수업을 받았으며, 1740년에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현재 오라녜나사우 왕실 역사 컬렉션 신탁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그녀는 판 데르 마인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그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음악 방면에서는 헨델의 제자로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평생 헨델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녀는 헨델의 오페라를 꾸준히 관람하고 그의 음악을 구독했으며, 1750년에는 헨델을 헤이그로 초청하여 네덜란드에서의 음악 활동을 지원했다. 작곡가 요시나 판 아르선은 그녀의 시녀 중 한 명이었다.
4. 사상 및 정치적 성향
앤의 정치적 신념과 통치 철학은 주로 중앙 집권적 통치와 영국과의 동맹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4.1. 정치적 성향
앤은 영국에서 성장하고 가족 관계를 통해 영국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졌던 친영파였다. 그러나 그녀는 7년 전쟁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이 영국 편에 참전하도록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녀의 국내 정책은 네덜란드 주들의 전통적인 권리에 대항하여 중앙 세습 총독 정부의 권위를 옹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녀는 남편 사후 세습 총독직의 새로운 권한이 논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집권적 정부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새로운 세습 총독 통치를 네덜란드에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외교 정책에서는 프랑스보다는 황제와의 영국 동맹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정책은 네덜란드에서는 인기가 없었으며, 프랑스령 네덜란드에 대항하여 남부 주들의 요새화를 추진한 것은 큰 반대에 부딪혔다.
5. 개인 생활
앤은 가족 관계와 대중적 인식에서 여러 복합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가 결혼을 서두른 주요 동기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남편 빌럼 4세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거리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화롭고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앤은 네덜란드 국민들과 시어머니인 헤센카셀의 마리 루이제와는 잘 지내지 못했다. 그녀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네덜란드인보다 영국인이 우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음악과 문학에 대한 관심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녀는 시녀들에게 피로를 무시하고 몇 시간 동안 자신을 위해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등 궁정인들에게 거의 배려를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도 있었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은 후 그녀의 얼굴에는 흉터가 남았고, 이로 인해 두 명의 여동생만큼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일부 초상화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훗날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와 상당히 닮았다는 평가도 있다.
6. 사망
앤은 1759년 1월 12일 헤이그에서 수종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 후, 시어머니인 헤센카셀의 마리 루이제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 루이 에른스트의 도움을 받아 아들 빌럼 5세의 섭정직을 계승했다. 마리 루이제가 1765년에 사망하자, 앤의 딸인 카롤리나가 1766년 빌럼 5세가 18세가 될 때까지 섭정으로 활동했다.
7. 평가 및 유산
앤은 네덜란드 총독 정부의 권위를 확립하고 예술을 후원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녀의 통치 방식과 외교 정책은 많은 비판과 논란을 낳았다.
7.1. 긍정적 평가
앤은 남편 사후 불안정했던 세습 총독직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중앙집권적 정부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강력한 통치와 정책 통합은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세습 총독 통치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녀는 평생 헨델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헨델을 네덜란드에 초청하여 네덜란드 문화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7.2. 비판 및 논란
앤은 섭정으로서 근면했지만,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녀의 가혹한 통치 방식은 많은 반발을 샀으며, 네덜란드인보다 영국인이 우월하다는 그녀의 믿음은 네덜란드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음악과 문학 같은 개인적인 관심사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시녀들에게 피로를 무시하고 몇 시간 동안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등 궁정인들에게 배려심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외교 정책에서는 영국과의 동맹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남부 주 요새화 정책을 추진하여 네덜란드 내에서 큰 반대에 부딪혔다.
7.3. 후대에 미친 영향
앤의 통치 기간 동안 확립된 세습 총독 통치 체제는 이후 네덜란드의 정치적 안정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메릴랜드주의 프린세스 앤이라는 도시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8. 기타
8.1. 문장
1719년 1월 31일, 군주의 손녀로서 앤에게는 왕실 문장이 부여되었는데, 이는 붉은색 십자가가 각각 그려진 다섯 개의 은색 라벨로 구별되었다. 1727년 8월 30일, 군주의 딸로서 앤의 문장 표식은 붉은색 십자가가 각각 그려진 세 개의 은색 라벨로 변경되었다.
8.2. 가계 및 조상
8.2.1. 자녀 목록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딸 | 1736년 | 1736년 | 사산 |
딸 | 1739년 | 1739년 | 요절 |
카롤리나 공주 | 1743년 2월 28일 | 1787년 5월 6일 | 1760년 3월 5일 나사우바일부르크 공 카를 크리스티안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안나 공주 | 1746년 11월 15일 | 1746년 12월 29일 | 요절 |
오라녜 공 빌럼 5세 | 1748년 3월 8일 | 1806년 4월 9일 | 1767년 10월 4일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공주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8.2.2. 조상
- 1. 프린세스 로열 앤
- 2. 영국 국왕 조지 2세
- 3.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주
- 4. 영국 국왕 조지 1세
- 5. 브라운슈바이크첼레 공작부인 조피 도로테아
- 6.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
- 7. 작센아이제나흐의 엘레오노레 에르트무테 공주
- 8.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 9. 팔츠의 조피 공주
- 10.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 게오르크 빌헬름
- 11. 엘레오노르 데미에르 돌브뢰즈
- 12.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알브레히트 2세
- 13. 외팅겐외팅겐의 조피 마르가레테 백작부인
- 14. 작센아이제나흐 공 요한 게오르크 1세
- 15. 자인알텐키르헨의 요한네타 백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