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어거스터스 케펠은 유년 시절부터 해군에 입대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해군 경력을 시작했다.
1.1. 출생과 가족
어거스터스 케펠은 1725년 4월 25일에 태어났다. 그는 제2대 알베마를 백작 빌럼 판 케펠과 앤 판 케펠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앤 판 케펠은 제1대 리치먼드 공작 찰스 레녹스의 딸이었는데, 찰스 레녹스는 찰스 2세 국왕의 사생아였다. 케펠 가문은 1688년 오라녜 공 빌럼 3세와 함께 잉글랜드로 건너온 유서 깊은 휘그당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1.2. 교육 및 해군 입대
케펠은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잠시 교육을 받은 후, 10세의 나이에 바다로 나섰다. 1740년 조지 앤슨 경과 함께 HMS 센추리온에 승선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섰을 때 이미 5년의 군 복무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항해 중 1741년 11월 13일 파이타 점령 작전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1742년 3월에는 소위 대리로 진급했다. 이 항해에서 그는 괴혈병으로 인해 많은 치아를 잃었지만, 존 캠벨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세계 일주 항해를 마치고 1744년 11월에 귀국한 후, 그는 14문 슬루프함 HMS 울프의 소령 겸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1744년 12월에는 6등급함 HMS 그레이하운드, 1745년 2월에는 5등급함 HMS 사파이어, 1745년 11월에는 4등급함 HMS 메이드스톤으로 전속되었다. 1747년 6월, 그는 프랑스 함선을 추격하던 중 벨릴 근처에서 자신의 함선 메이드스톤을 좌초시키는 사고를 겪었으나, 군법회의에서 명예롭게 무죄 판결을 받고 4등급함 HMS 앤슨의 지휘관으로 재임명되었다. 그는 1748년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


1749년 초, 케펠은 조지 에지컴 경에 의해 조슈아 레이놀즈 경에게 소개되었다. 1749년 5월 11일, 케펠이 지중해 함대의 준장으로서 플리머스를 떠나 지중해로 항해할 때(그의 옛 함선 HMS 센추리온에 깃발을 달고 알제의 데이에게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을 억제하도록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레이놀즈는 그와 함께 메노르카까지 동행하여 케펠의 첫 번째 초상화를 포함해 6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케펠은 알제의 데이와 영국 상업을 보호하는 협정을 체결했으며, 트리폴리와 튀니스에서 조약을 협상한 후 1751년 7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알제에 도착했을 때, 데이는 케펠이 너무 어리다며 "영국 국왕이 턱수염도 나지 않은 소년을 보냈다"고 불평했다. 이에 케펠은 "턱수염이 나야 한다면 숫염소를 데려오면 된다"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2. 해군 경력
어거스터스 케펠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부터 미국 독립 전쟁에 이르기까지 주요 해상 분쟁에 참여하며 다양한 지휘 경험을 쌓았다.
2.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케펠은 1748년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749년에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서 알제, 트리폴리, 튀니스와 성공적으로 협정을 체결하여 영국 상업의 안전을 확보했다.
2.2. 칠년 전쟁
케펠은 칠년 전쟁 기간 내내 끊임없이 복무했다.
2.2.1. 북미 및 서인도 함대 사령관
1751년부터 1755년까지 4등급함 HMS 노리치에 그의 넓은 깃발을 달고 북미 기지의 준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1751년부터 1755년까지 북미 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2.2.2. 고레 섬 원정 및 키브롱 만 해전
1756년에는 프랑스 해안에 주둔했으며, 1758년에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위치한 프랑스령 고레 섬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대에 파견되었다. 1759년 11월 키브롱 만 해전에서 그의 함선인 74문함 HMS 토베이가 가장 먼저 전투에 돌입했다.
1757년에는 존 빙 제독을 유죄로 선고한 군법회의의 일원이었지만, 그를 사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활동했던 누구도 판결이 집행되지 않아야 할 심각한 이유를 제시할 수 없었다. 1761년 3월, 케펠은 3등급함 HMS 밸리언트로 전속되었고, 벨릴을 함락시키기 위한 전대를 지휘하여 1761년 6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2.2.3. 아바나 원정
1762년 스페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전하자, 케펠은 조지 포콕 경의 부사령관으로 쿠바에 대한 영국 원정에 파견되어 아바나를 점령했다. 그는 수많은 병사와 선원들을 쓰러뜨린 열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2.50 만 GBP의 포획 상금은 "아버지의 낭비로 파산한 가문의 어린 아들"이라는 불쾌한 위치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2.3. 제독 승진 및 주요 지휘
1762년 10월 21일 소장으로 진급한 케펠은 그해 말 자메이카 기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765년 7월부터 제1대 로킹엄 내각의 해군 본부 이사였으며, 1766년 9월부터 채텀 내각에서 해군 원로로 재직하다가 1766년 12월 해군 본부 이사회에서 물러났다. 1768년에는 서퍽주의 엘브든 홀을 매입했다. 그는 1770년 10월 24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770년 포클랜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는 스페인에 맞서 파견될 함대를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합의가 이루어져 깃발을 게양할 기회는 없었다.

2.4. 미국 독립 전쟁 및 우샨트 해전
케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미국 독립 전쟁 초기였다. 케펠은 로킹엄 후작과 리치먼드 공작이 이끄는 휘그당과의 유대를 강력히 지지했다. 당시 휘그당은 조지 3세에 의해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1755년부터 1761년까지 치체스터 선거구, 1761년부터 1780년까지 윈저 선거구, 그리고 1780년부터 1782년까지 서리 선거구의 하원 의원으로서 휘그당의 당파적인 입장을 취하며 국왕의 측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휘그당은 국왕의 대신들, 특히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샌드위치 경이 어떤 악행도 저지를 수 있다고 믿었다. 1778년 1월 29일 케펠이 대장으로 진급하여 프랑스에 맞서 준비된 주력 함대인 서부 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해군 장관이 자신의 패배를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778년 이전, 케펠은 샌드위치에게 기술적인 어려움을 무시하고 "몇 척의 함선에만 구리 피복을 입힐 것"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나중에 이 문제를 런던 매거진 1781년 3월호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구리 피복이 "해군에 추가적인 강도를 부여한다"고 언급하며, 샌드위치 경이 자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몇 척의 함선에만 구리 피복을 입히는 것을 거부했다"고 비난했는데, 이후 샌드위치 경은 해군 전체에 구리 피복을 명령했다. 해군에 구리 피복이 부족했던 것은 영국이 13개 식민지를 잃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케펠의 부하 제독 중 한 명은 휴 팰리서 경이었다. 그는 해군 본부 이사회의 일원이자 국회의원이었으며, 케펠의 의견으로는 동료들과 함께 왕립 해군의 좋지 않은 상태에 책임이 있었다. 1778년 7월 27일 케펠이 프랑스군과 싸운 제1차 우샨트 해전은 좋지 않게 끝났다. 그 원인에는 케펠 자신의 지휘 문제도 있었지만, 팰리서가 명령에 불복종한 것도 포함되었다. (나중에 팰리서의 기함 포미더블이 항해 불능 상태였음이 인정되었다.) 케펠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배신당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2.5. 케펠-팰리서 사건 및 군법회의
케펠은 공식 보고서에서는 팰리서를 칭찬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를 비난했다. 케펠의 친구들과 함께 휘그당 언론은 비방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부 측 언론도 같은 방식으로 반격했고, 양측은 서로를 고의적인 반역죄로 비난했다. 그 결과는 의회와 군법회의에서 일련의 추문으로 이어졌다. 케펠은 먼저 재판을 받았고, 1779년 2월 1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779년 3월에 자신의 직책을 사임했다. 팰리서 역시 재판을 받았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우샨트 해전과 그 이후의 추문은 영국 해군의 몰락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8세기 후반, 케펠의 무죄 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로킹엄 후작의 의뢰로 존 카가 설계한 케펠스 컬럼이 건설되었다.
3. 정치 경력
어거스터스 케펠은 해군 경력 외에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주요 정치적 직책을 수행했다.
3.1. 의회 의원 활동
프레더릭 노스 내각이 몰락할 때까지 케펠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755년부터 1761년까지 치체스터 선거구, 1761년부터 1780년까지 윈저 선거구, 그리고 1780년부터 1782년까지 서리 선거구에서 선출되었다.
3.2. 해군 본부 및 해군 장관
1782년 노스 내각이 무너지자, 그는 해군 장관이 되었고, 서퍽주 엘브든의 케펠 자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또한 추밀원에 임명되었다. 해군 장관으로서 그의 경력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으며, 1783년 파리 평화 조약에 항의하여 사임함으로써 그의 옛 정치 동지들과 결별했다. 그는 폭스-노스 연립 내각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신뢰를 잃었고, 1783년 12월 연립 내각의 몰락과 함께 공직에서 물러났다.

4. 사상 및 이념
케펠은 휘그당의 핵심 인물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으며 국왕의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의 가문은 1688년 오라녜 공 빌럼 3세와 함께 잉글랜드로 건너온 유서 깊은 휘그당 귀족 가문으로, 이는 그의 정치적 성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로킹엄 후작과 리치먼드 공작이 이끄는 휘그당과의 연대를 강력히 지지했다. 케펠은 국왕의 대신들, 특히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샌드위치 경이 어떤 악행도 저지를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국왕의 측근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5. 개인 생활
케펠의 사적인 삶은 비교적 알려진 바가 적으며, 결혼하지 않고 자녀 없이 생을 마감했다.
5.1. 결혼 및 사망
케펠은 1786년 10월 2일 미혼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작 작위는 그와 함께 소멸되었다. 그를 매우 아끼던 에드먼드 버크는 그에 대해 "그는 본성적으로 고귀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거친 자존심의 바탕 위에 가장 부드러운 미덕이 접목된 것이었다"고 감상적으로 평가했다.
6. 평가 및 유산
어거스터스 케펠은 군법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의 경력과 행동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다.
6.1. 긍정적 평가 및 무죄 판결
케펠은 1779년 2월 11일 군법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의 무죄 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케펠스 컬럼이 건설되기도 했다.
6.2. 비판 및 논란
1778년 우샨트 해전은 케펠 자신의 지휘 문제와 부사령관 팰리서의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났다. 케펠은 팰리서를 사적으로 비난했고, 이는 대중적인 스캔들과 군법회의로 이어졌다. 해군 장관으로서 그의 경력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폭스-노스 연립 내각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신뢰를 잃었다. 우샨트 해전과 그 이후의 추문은 영국 해군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6.3. 영향 및 기념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이트 케펠 섬과 케펠 만, 그리고 포클랜드 제도의 케펠 섬은 어거스터스 케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로더럼에 있는 케펠스 컬럼은 그의 무죄 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로킹엄 후작의 의뢰로 건설되었다.
7. 대중 문화
케펠은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1956년 소설 황금의 바다에 HMS 센추리온의 사관생도로 등장한다. 그는 종종 코믹한 역할로 나오며, 항해 중 겪는 여러 고난으로 인해 대머리가 되고 이빨이 빠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