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엘진 베일러는 1934년 9월 16일 워싱턴 D.C.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우지엘(루이스) 베일러와 존 웨슬리 베일러였다.
1.1. 어린 시절 및 고등학교
베일러는 14세에 농구를 시작했다. 그가 자란 워싱턴 D.C.의 시립 레크리에이션 센터 근처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시설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농구 코트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에게는 농구를 하는 두 명의 형제, 살과 커밋이 있었다. 그는 사우스웨스트 보이즈 클럽과 브라운 주니어 하이스쿨을 거쳐 고등학교에서 세 차례 올-시티 선수로 선정되었다.
베일러는 1951년과 1952년 시즌 동안 펠프스 건축, 건설 및 공학 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농구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워싱턴 D.C.의 공립학교는 인종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흑인 고등학교 팀과만 경기를 치렀다. 그곳에서 베일러는 카도조 고등학교를 상대로 44점을 기록하며 첫 지역 득점 기록을 세웠다. 펠프스 고등학교에서 두 번의 올-시티 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그는 시즌당 평균 18.5점과 27.6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 1952-53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구점에서 일하며 지역 레크리에이션 리그에서 농구를 했다.
베일러는 1954년 시즌에 새로 개교한 전원 흑인 학교인 스핀가른 고등학교의 4학년으로 다시 등장했다. 키 0.2 m (6 in)에 102 kg (225 lb)의 이 선수는 워싱턴 올-메트로폴리탄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으며, 이 팀에 선정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였다. 베일러는 또한 1954년 지역 최고의 농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SSA 리빙스톤 트로피를 수상했다. 그는 인터하이 디비전 II 리그 8경기에서 평균 36.1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1954년 2월 3일, 그의 옛 학교인 펠프스 팀과의 경기에서 베일러는 전반에만 31점을 득점했다. 후반 내내 4개의 파울을 안고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일러는 32점을 더 추가하여 총 63점을 기록하며 워싱턴 D.C. 지역의 새로운 득점 기록을 세웠다. 이는 전년도 웨스턴 고등학교의 짐 웩슬러가 세운 52점 기록을 깬 것이었다. 그러나 웩슬러가 백인이었고 베일러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베일러의 기록은 워싱턴 포스트를 포함한 언론으로부터 웩슬러의 기록만큼의 보도를 받지 못했다.
2. 대학 경력
베일러는 고등학교 농구 선수로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학 스카우트들이 흑인 고등학교에서 선수를 모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주요 대학도 그를 스카우트하지 않았다. 일부 대학은 베일러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지만, 그는 학업적으로 자격이 미달이었다.
2.1. 아이다호 칼리지
베일러의 친구가 다니던 아이다호 칼리지는 1954-55학년도에 베일러를 위한 미식축구 장학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베일러는 그 학교에서 미식축구를 한 적이 없었고, 대신 농구 팀에 테스트 없이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즌에 팀의 다른 선수들을 능가하며 경기당 평균 31점 이상과 2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후, 아이다호 칼리지는 농구 감독을 해고하고 장학금을 제한했다. 시애틀의 한 자동차 딜러가 베일러를 시애틀 대학교에 관심을 갖게 했고, 베일러는 시애틀에서 자격을 얻는 동안 1년 동안 시애틀의 아마추어 운동 연맹 팀인 웨스트사이드 포드에서 뛰었다.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는 그를 1956년 NBA 드래프트 14라운드에서 지명했지만, 베일러는 대신 학교에 남기로 결정했다.
2.2. 시애틀 대학교

1956-57 NCAA 남자 농구 시즌 동안 베일러는 시애틀 대학교에서 경기당 평균 29.7점과 20.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다음 시즌, 베일러는 경기당 평균 32.5점을 기록하며 시애틀 대학교 치프턴스(현재는 레드혹스)를 NCAA 챔피언십 경기로 이끌었다. 이는 시애틀 대학교의 유일한 파이널 포 진출이었으며, 결승에서 켄터키 와일드캐츠에게 패했다. 주니어 시즌을 마친 후, 베일러는 1958년 NBA 드래프트에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에 의해 전체 1순위로 다시 지명되었고, 이번에는 학교를 떠나 1958-59 NBA 시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다호 칼리지에서 한 시즌, 시애틀 대학교에서 두 시즌을 포함한 세 시즌 동안, 베일러는 경기당 평균 31.3점과 19.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1956-57 시즌 동안 NCAA에서 리바운드 부문 1위를 차지했다.
3. 프로 선수 경력
베일러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에 입단한 이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14시즌 동안 활약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3.1. 신인 시즌과 팀의 구원자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는 1958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사용하여 베일러를 선택했고, 그를 설득하여 시애틀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건너뛰고 프로에 합류하게 했다. 팀은 1954년 스타 센터 조지 마이칸의 은퇴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베일러가 오기 전 해, 팀은 19승 53패로 리그 최악의 기록을 세웠으며, 느리고 덩치 크고 노쇠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정된 홈 경기장도 없었고, 인기가 떨어지며 재정난에 시달렸다. 구단주 밥 쇼트는 팀을 팔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베일러의 스타다운 운동 능력과 올라운드 플레이가 프랜차이즈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쇼트는 1971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그때 나를 거절했다면, 나는 사업을 접었을 것이다. 구단은 파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일러는 당시 NBA에서 큰 금액이었던 연간 2.00 만 USD에 레이커스와 계약했다. 농구 역사가 제임스 피셔에 따르면, 베일러는 그의 뛰어난 기술과 팀의 사업 계획에서 차지하는 핵심적인 역할 덕분에 NBA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
베일러는 즉시 기대를 뛰어넘었고 궁극적으로 레이커스 프랜차이즈를 구원했다. 1958-59 신인 시즌에 베일러는 리그 득점 4위(경기당 24.9점), 리바운드 3위(경기당 15.0리바운드), 어시스트 8위(경기당 4.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는 한 경기에서 55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조 풀크스의 63점과 마이칸의 61점에 이어 리그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1959년 1월 16일, 베일러는 웨스트버지니아주 찰스턴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 출전을 거부했다. 팀이 예약한 호텔이 팀의 흑인 선수 세 명의 숙박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한 팀 동료가 베일러에게 경기에 출전하도록 설득하려 하자, 베일러는 "나는 인간이다. 나는 구경거리로 우리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동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 차별에 대한 그의 단호한 저항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베일러는 NBA 신인왕을 수상했고 레이커스를 NBA 파이널로 이끌었지만, 파이널 역사상 첫 4경기 스윕으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하며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관계의 시작을 알렸다.
3.2. 전성기와 기록 경신

1960년, 레이커스는 미네소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겼고, 제리 웨스트를 포인트 가드로 지명했으며, 웨스트의 대학 시절 코치였던 프레드 샤우스를 고용했다. 베일러와 웨스트 듀오는 1968년 윌트 체임벌린이 합류하면서 1960년대 내내 서부 디비전에서 레이커스의 성공을 이끌었다.
1960-61 NBA 시즌부터 1962-63 NBA 시즌까지, 베일러는 각각 경기당 평균 34.8점, 38.3점, 34.0점을 기록했다. 1960-61 시즌 11월 15일, 베일러는 뉴욕 닉스를 상대로 71점을 득점하며 NBA 득점 기록을 세웠고, 25리바운드도 함께 기록했다. 이로써 베일러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한 경기에서 70점 이상을 득점한 선수가 되었으며, 그가 전년도 11월에 세웠던 64점의 NBA 기록을 깼다. 베일러는 이 기록을 1962년 체임벌린이 100점을 득점하기 전까지 보유했다. 당시 닉스 소속이었던 리치 게린은 훗날 "단연 엘진의 퍼포먼스가 훨씬 훌륭했다"며, "윌트의 경기에서는 팀 동료들이 윌트를 위해 기록을 만들려 했지만, 엘진의 71점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스럽게 득점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3.3. 군 복무와 부상으로 인한 영향
미국 육군 예비군 소속이었던 베일러는 1961-62 시즌 동안 현역 복무에 소집되었고,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 주둔하면서 주말 휴가 때만 레이커스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는 시즌 전이나 시즌 중 팀과 훈련할 수 없었고, 주말마다 전국을 가로질러 코치 비행기를 타고 팀이 있는 경기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 시즌에 단 48경기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1,800점 이상을 득점하며 경기당 평균 38.3점(체임벌린을 제외한 모든 선수 중 NBA 역사상 가장 높은 평균), 18.6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 시즌 후반, 보스턴 셀틱스와의 NBA 파이널 5차전 승리에서 베일러는 NBA 파이널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인 61점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농구 역사가 제임스 피셔는 그 시즌 베일러의 활약을 "파트타임 직업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 베일러는 훗날 그 시즌을 "어느 정도 즐겼다"고 말했다.
베일러는 1965년 NBA 플레이오프 서부 디비전 플레이오프 개막전에서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어 수술을 받았고, 나머지 플레이오프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음 네 시즌 동안 매 시즌 24점 이상을 득점했지만, 당시 무릎 수술의 한계와 의미 있는 재활 부족으로 인해 그는 계속해서 무릎 문제를 겪었고, 결국 양쪽 무릎 수술을 받게 되어 남은 선수 생활 동안 그의 경기 능력에 지장을 주었다.
베일러는 1970-71 NBA 시즌에 단 두 경기만 뛰고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입었고, 결국 다음 1971-72 NBA 시즌의 9경기 만에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은퇴했다. 베일러는 언론에 더 이상 최고 수준의 경기를 할 수 없으며, 레이커스 로스터에 다른 선수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3.4. 은퇴와 챔피언십의 아이러니
레이커스 포워드로서 14시즌 동안, 베일러는 팀을 NBA 파이널에 8번 진출시켰지만, 매번 패배했다. 시즌 초 은퇴한 결과로, 베일러는 두 가지 역사적인 업적을 놓쳤다. 그의 은퇴 직후 레이커스의 다음 경기는 NBA 기록인 33연승을 시작했고, 이후 그들은 1972년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그가 은퇴한 직후 팀이 염원하던 우승을 달성한 것은 베일러 본인에게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되었다.
3.5. 선수로서의 특징 및 플레이 스타일
베일러는 수비, 공격, 리바운드, 패스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알려져 있었다. 0.2 m (6 in), 102 kg (225 lb)의 체격으로 당시에도 포워드치고는 작은 편이었지만, 수비수들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힘과 그들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섬세함과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놓친 슛을 리바운드하여 세컨드 찬스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베일러는 수비수들보다 더 오래 공중에 머무르며 득점할 수 있게 해주는 뛰어난 점프 능력으로 유명했다. 빌 러셀은 그를 "행 타임의 대부"라고 불렀다. 그는 공중에서 손을 바꾸거나 방향을 바꾸는 등 수비수들을 속이는 "움직임"을 고안했다.
베일러의 공격 레퍼토리에는 러닝 뱅크 슛과 왼손 훅 슛이 포함되었는데, 그는 오른손잡이였다. 그는 코트 위에서 머리 페이크로 사용하는 얼굴 틱을 가지고 있었다. 베일러는 자신의 성공을 점프에 대한 재능과 수비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창의성 덕분이라고 말했다.
4. 지도자 경력
1974년, 베일러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보조 코치로 고용되었고, 이후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86승 135패의 부진한 기록을 남겼고, 1978-79 NBA 시즌이 끝난 후 팀이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전하기 직전에 해고되었다.
5. 행정가 경력
1986년, 베일러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 팀의 농구 운영 부사장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2006년에 NBA 올해의 임원상을 수상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클리퍼스는 단 두 시즌만 승리 시즌을 기록했고, 607승 1153패의 승패 기록을 쌓았다. 그들은 플레이오프에 단 네 번 진출했으며, 단 한 번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승리했다. 그는 2008년 10월까지 22년 동안 그 직책을 유지했다.
2009년 베일러는 클리퍼스, 팀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 팀 사장 앤디 로저, 그리고 NBA를 상대로 고용 차별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팀 재직 기간 동안 저임금을 받았고, 나이와 인종 때문에 해고되었다고 주장했다. 베일러는 나중에 소송에서 인종 차별 주장을 철회했다. 2011년, 배심원단은 클리퍼스의 손을 들어주며 베일러의 해고가 팀의 저조한 성과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베일러는 2014년 스털링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녹음이 언론에 공개된 후 NBA에서 영구 제명되었을 때 자신이 옳았다고 느꼈다.
6. 말년 및 사망
베일러는 2021년 3월 22일 86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자연사했다. 그는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할리우드 힐스)에 안장되었다. 그는 아내 일레인과 딸 크리스틀, 전 결혼에서 얻은 두 자녀 앨런과 앨리슨, 그리고 여동생 글래디스와 함께 있었다.
7. 유산 및 영향력
NBA 경력 초기부터 베일러는 세계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라는 그의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7.1. 농구 경기 방식의 혁신
베일러가 1958년 NBA에 합류하기 전, 리그의 경기는 체계적이었지만 기계적이었고, 주로 세트 점프 슛과 러닝 훅 슛이 지배적이었다. 베일러는 이후 줄리어스 어빙과 마이클 조던과 같은 다른 NBA 슈퍼스타들이 모방할 창의적이고 아크로바틱한 플레이 스타일을 도입했다. 빌 시몬스는 "러셀과 함께, 엘진은 수평적인 경기를 수직적인 경기로 바꾸었다"고 썼다. 베일러의 기술은 동시대 선수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오스카 로버트슨은 베일러를 "최초이자 원조 하이 플라이어"라고 썼고, 빌 샤먼은 베일러가 "프로 농구를 했던 코너맨 중 가장 위대했다"고 말했다. 톰 하인슨은 "포워드로서 베일러는 래리 버드, 줄리어스 어빙, 그리고 다른 모든 선수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베일러는 현재 많은 가드들이 그의 키와 비슷하거나 더 큰 리그에서 마지막으로 위대한 언더사이즈 포워드였다. 그는 846경기에서 23,149점, 3,650어시스트, 11,46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가 키 큰 선수들 위로 빠르고 효과적으로 슛을 던질 수 있게 해준 그의 상징적인 러닝 뱅크 슛은 그에게 수많은 NBA 득점 기록을 안겨주었고, 그 중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다.
1960년 11월 15일 베일러가 기록한 71점은 당시 기록이었으며, 2006년 1월 코비 브라이언트가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81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1962년 NBA 파이널 5차전에서 그가 기록한 61점은 여전히 NBA 파이널 기록이다. 그의 경력 동안, 그는 경기당 평균 27.4점과 4.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저평가된 리바운더였던 베일러는 경력 동안 경기당 평균 13.5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특히 1960-61 시즌에는 경기당 19.8리바운드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NBA 역사상 단 다섯 명의 다른 선수들만이 이보다 높은 시즌 평균을 기록했으며, 이들 모두는 0.2 m (6 in) 이상이었다.
7.2. 주요 수상 및 영예
10차례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고 11차례 NBA 올스타에 선정된 베일러는 1977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1980년 NBA 35주년 올-타임 팀, 1996년 NBA 50주년 올-타임 팀, 2021년 NBA 75주년 기념 팀에 선정되었다. 2009년, 슬램 매거진은 그를 역대 NBA 선수 톱 50 중 11위로 선정했다. 2022년, NBA 75주년을 기념하여 디 애슬레틱은 역대 톱 75 선수를 선정하며 베일러를 NBA 역사상 23번째로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다. 그는 종종 챔피언십을 우승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NBA 선수로 언급되지만, 레이커스는 1971-72 시즌 초반 그의 공헌에 대해 베일러에게 챔피언십 반지를 수여했다.
베일러가 시애틀 대학교를 떠난 지 51년 후인 2009년 11월 19일, 시애틀 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농구 코트를 명명했다. 레드혹스는 이제 시애틀의 키아레나에 있는 엘진 베일러 코트에서 경기를 한다. 레드혹스는 또한 매년 엘진 베일러 클래식을 개최한다. 2017년 6월, 아이다호 칼리지는 베일러를 학교 명예의 전당에 첫 번째 헌액자 중 한 명으로 포함시켰다.
베일러의 첫 번째 전기는 2015년 슬램 온라인 기고가 비잔 C. 베인이 썼으며, 로우먼 앤 리틀필드에서 출판되었다.
2018년 4월 6일, 게리 틸러리와 옴리 암라니가 디자인한 베일러의 동상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의 레이커스 경기 전에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공개되었다.
7.3. 비판 및 논란
베일러는 선수 또는 행정가로서 비판이나 논란을 겪기도 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단장 재직 시절, 그는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을 상대로 고용 차별 소송을 제기하며 그의 해고가 인종 및 연령 차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법정에서는 클리퍼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훗날 스털링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공개되어 NBA에서 영구 제명되면서 베일러의 주장은 간접적으로나마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베일러가 NCAA 토너먼트 결승과 NBA 파이널에서 총 9번이나 우승에 실패하고, 클리퍼스 단장으로서도 팀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했던 점을 들어 "엘진 베일러의 저주"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8. 통계
연도 | 팀 | GP | MPG | FG% | FT% | RPG | APG | PPG |
---|---|---|---|---|---|---|---|---|
1958-59 | 미니애폴리스 | 70 | 40.8 | .408 | .777 | 15.0 | 4.1 | 24.9 |
1959-60 | 미니애폴리스 | 70 | 41.0 | .424 | .732 | 16.4 | 3.5 | 29.6 |
1960-61 | L.A. 레이커스 | 73 | 42.9 | .430 | .783 | 19.8 | 5.1 | 34.8 |
1961-62 | L.A. 레이커스 | 48 | 44.4 | .428 | .754 | 18.6 | 4.6 | 38.3 |
1962-63 | L.A. 레이커스 | 80 | 42.1 | .453 | .837 | 14.3 | 4.8 | 34.0 |
1963-64 | L.A. 레이커스 | 78 | 40.6 | .425 | .804 | 12.0 | 4.4 | 25.4 |
1964-65 | L.A. 레이커스 | 74 | 41.3 | .401 | .792 | 12.8 | 3.8 | 27.1 |
1965-66 | L.A. 레이커스 | 65 | 30.4 | .401 | .739 | 9.6 | 3.4 | 16.6 |
1966-67 | L.A. 레이커스 | 70 | 38.7 | .429 | .813 | 12.8 | 3.1 | 26.6 |
1967-68 | L.A. 레이커스 | 77 | 39.3 | .443 | .786 | 12.2 | 4.6 | 26.0 |
1968-69 | L.A. 레이커스 | 76 | 40.3 | .447 | .743 | 10.6 | 5.4 | 24.8 |
1969-70 | L.A. 레이커스 | 54 | 41.0 | .486 | .773 | 10.4 | 5.4 | 24.0 |
1970-71 | L.A. 레이커스 | 2 | 28.5 | .421 | .667 | 5.5 | 1.0 | 10.0 |
1971-72 | L.A. 레이커스 | 9 | 26.6 | .433 | .815 | 6.3 | 2.0 | 11.8 |
경력 | 846 | 40.0 | .431 | .780 | 13.5 | 4.3 | 27.4 | |
올스타 | 11 | 29.2 | .427 | .796 | 9.0 | 3.5 | 19.8 |
연도 | 팀 | GP | MPG | FG% | FT% | RPG | APG | PPG |
---|---|---|---|---|---|---|---|---|
1959 | 미니애폴리스 | 13 | 42.8 | .403 | .770 | 12.0 | 3.3 | 25.5 |
1960 | 미니애폴리스 | 9 | 45.3 | .474 | .840 | 14.1 | 3.4 | 33.4 |
1961 | L.A. 레이커스 | 12 | 45.0 | .470 | .824 | 15.3 | 4.6 | 38.1 |
1962 | L.A. 레이커스 | 13 | 43.9 | .438 | .774 | 17.7 | 3.6 | 38.6 |
1963 | L.A. 레이커스 | 13 | 43.2 | .442 | .825 | 13.6 | 4.5 | 32.6 |
1964 | L.A. 레이커스 | 5 | 44.2 | .378 | .775 | 11.6 | 5.6 | 24.2 |
1965 | L.A. 레이커스 | 1 | 5.0 | .000 | ||||
0.0 | 1.0 | 0.0 | ||||||
1966 | L.A. 레이커스 | 14 | 41.9 | .442 | .810 | 14.1 | 3.7 | 26.8 |
1967 | L.A. 레이커스 | 3 | 40.3 | .368 | .750 | 13.0 | 3.0 | 23.7 |
1968 | L.A. 레이커스 | 15 | 42.2 | .468 | .679 | 14.5 | 4.0 | 28.5 |
1969 | L.A. 레이커스 | 18 | 35.6 | .385 | .630 | 9.2 | 4.1 | 15.4 |
1970 | L.A. 레이커스 | 18 | 37.1 | .466 | .741 | 9.6 | 4.6 | 18.7 |
경력 | 134 | 41.1 | .439 | .769 | 12.9 | 4.0 | 2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