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엔리코 데 니콜라(Enrico De Nicola엔리코 데 니콜라이탈리아어, 1877년 11월 9일 ~ 1959년 10월 1일)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변호사, 언론인, 정치가이자 국가원수이다. 그는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형사 변호사로서 명성을 쌓았다. 1909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하원 의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초기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파시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상원의원직 제안까지 거부하며 은둔 생활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파시즘이 붕괴된 후, 그는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의 정치적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46년 제헌의회에 의해 임시 국가원수로 선출되었고, 1948년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 발효와 함께 이탈리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상의 이유와 겸손한 성품으로 인해 짧은 재임 후 재선에 출마하지 않고 사임하여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대통령 퇴임 후에도 종신 상원의원, 상원 의장, 헌법재판소장 등 주요 공직을 역임하며 공화국 초기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발전과 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보여준 고결함, 겸손함, 그리고 청렴한 리더십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엔리코 데 니콜라는 1877년 11월 9일 이탈리아 왕국 캄파니아주 나폴리에서 변호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896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형사 변호사로서 경력을 시작했고, 이탈리아에서 매우 유명하고 존경받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3. 초기 정치 경력
데 니콜라는 자유당 소속으로 1909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13년부터 1921년까지 그는 여러 소규모 정부 직책을 수행했다. 구체적으로는 조반니 졸리티 정부(1913년 11월 ~ 1914년 3월)에서 식민지 차관을 지냈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내각(1919년 1월 ~ 6월)에서는 재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1920년 6월 26일에는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1924년 1월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4. 파시즘 시기 활동
파시즘의 도래와 함께 엔리코 데 니콜라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1929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의회에 출석하거나 의정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시기 그는 주로 변호사 업무에 전념하며 반쯤 은둔 상태로 지냈다.
5. 공화국 수립 과정에서의 역할

파시즘 정권이 1943년에 붕괴된 후, 데 니콜라는 다시 정치에 복귀했다.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이후 왕정이 파시스트 정권과의 협력 관계에서 벗어나려 했던 전환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국왕의 아들인 움베르토 왕자가 "왕국 부총독"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고 군주의 대부분의 기능을 인계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퇴위했고, 움베르토 2세가 국왕이 되었다. 1946년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공화주의자들이 승리했다. 새로운 제헌의회가 선출되었고, 움베르토 2세가 망명하여 이탈리아를 떠난 후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가 몇 주 동안 임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제헌의회는 1946년 6월 28일, 1차 투표에서 80%의 득표율로 데 니콜라를 임시 국가원수로 선출했다. 훗날 총리가 되는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데 니콜라가 - 엄청난 겸손함을 지닌 인물로서 - 지명을 수락할지 확신하지 못했으며, 모든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주 마음을 바꾸었다고 회고했다. 안드레오티는 당시 언론인 만리오 루피나치(Manlio Lupinacci)가 일 조르날레 디탈리아(Il Giornale d'Italia) 지면을 통해 데 니콜라에게 "각하, 부디 수락하시는 것을 수락하시기로 결정해 주십시오..."라는 호소를 보냈다고 언급했다.
1947년 6월 25일, 데 니콜라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직책에서 사임했으나, 제헌의회는 그의 행동에서 고결함과 겸손함을 인정하여 다음 날 즉시 그를 재선출했다.
6. 초대 이탈리아 대통령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이 발효된 후, 그는 1948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5월에 열릴 첫 헌법적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루이지 에이나우디가 선출되어 퀴리날레 (이탈리아 대통령의 공식 관저)에 입성했다.
7. 후기 공직 및 활동
1948년, 데 니콜라는 전직 국가원수로서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1951년 4월 28일부터 1952년 7월 24일까지 상원 의장을 역임했다. 또한 1956년 1월 23일부터 1957년 3월 26일까지 헌법재판소장으로 선출되었다.
8. 개인 생활
엔리코 데 니콜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녀도 없었다. 그는 피자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화덕 근처 테이블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9. 영예 및 수상
엔리코 데 니콜라는 재임 기간 중 또는 사후에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 이탈리아 연대 훈장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1956년 수여)

10. 평가 및 유산
엔리코 데 니콜라는 그의 겸손함, 고결함, 그리고 청렴한 인격으로 널리 존경받았다. 그는 파시즘 붕괴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군주제에서 공화제로의 전환을 중재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의 초석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국가원수이자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임시 국가원수직을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으나 제헌의회가 그의 고결함과 겸손함을 인정하여 즉시 재선출한 일화는 그의 높은 도덕성을 잘 보여준다. 초대 대통령직을 맡은 후에도 건강을 이유로 재선에 나서지 않고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겨준 그의 태도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활동은 이탈리아의 민주주의 발전과 공화국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에도 모범적인 공직자의 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11. 사망
엔리코 데 니콜라는 1959년 10월 1일, 나폴리 주 토레 델 그레코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