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에블리야 첼레비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오스만 제국 궁정과의 깊은 연줄 속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교육과 초기 활동은 후에 광범위한 여행의 기반이 되었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에블리야 첼레비는 1611년 이스탄불에서 퀴타히아 출신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오스만 궁정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아버지 데르비시 메흐메트 질리(Dervish Mehmed Zillî)는 보석 세공사였고, 어머니는 메흐메트 4세의 대재상 멜레크 아흐메트 파샤의 압하스인 친척이었다. 에블리야 첼레비는 자신의 부계 혈통이 초기 수피즘 신비주의자이자 가장 오래된 튀르크 시인으로 알려진 아흐마드 야사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기록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그는 울라마 학자들로부터 궁정 교육을 받았다. 에블리야 첼레비는 저명한 할와티(Khalwati) 데르비시인 우마르 굴샤니(Umar Gulshani)의 제자로 성악과 기악을 공부했으며, 그의 음악적 재능은 궁정에서 큰 총애를 얻어 심지어 수석 음악가 아미르 구나(Amir Guna)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또한 علم الموسيقى일름 알-무시키튀르크어 (오스만)라고 불리는 음악 이론을 훈련받았다. 그의 일기 쓰기는 1640년 이스탄불에서 건물, 시장, 풍습, 문화에 대한 기록을 시작으로, 도시 밖으로의 여행 기록으로 확장되었다. 이 여행 기록들은 총 10권으로 구성된 『세야하트나메』(Seyahâtname)를 이루게 되었다.
1.3. 종교적 성향 및 궁정 생활
에블리야 첼레비는 광신주의를 반대하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꾸란을 암기하여 낭송할 수 있었으며, 이슬람에 대해 자유롭게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무라트 4세 술탄의 궁정에서 성직자이자 연예인으로 고용되었지만, 여행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고용도 거부했다. 그는 카이로에 있는 굴샤니(Gulshani) 수피 교단의 칸카(khanqah)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으며, 자신을 '굴샤니의 에블리야'(Evliya-yı Gülşenî)라고 칭한 낙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굴샤니 수피 교단에 가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1.4. 사망
에블리야 첼레비는 1682년에서 1684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사망할 당시 이스탄불에 있었는지 카이로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2. 여행 및 《세야하트나메》
에블리야 첼레비는 40여 년간 오스만 제국 전역과 인접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그 결과물인 『세야하트나메』는 17세기 오스만 사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2.1. 《세야하트나메》 소개
『세야하트나메』는 역사상 가장 길고 야심 찬 여행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문화와 생활 양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지침서로 남아 있다. 당시 오스만 문학의 관습에서 벗어나 구어체와 고급 터키어를 혼합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중적이고 접근하기 쉬운 참고 자료가 되었다. 『세야하트나메』에 담긴 많은 묘사는 과장되거나 명백히 허구적인 내용, 혹은 제3자의 잘못된 해석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모습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이스탄불만을 다루며, 마지막 권은 이집트를 다룬다.
2.2. 주요 여행 기록
에블리야 첼레비는 오스만 제국 및 주변 지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지역의 역사, 지리, 문화, 사회상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의 주요 여행 기록은 다음과 같다.
2.2.1.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주변 지역
163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서의 기록은 도시의 건물, 시장, 풍습, 문화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는 『세야하트나메』의 첫 번째 권을 이룬다.
2.2.2. 아나톨리아
1640년의 여행 기록은 아나톨리아 전역의 도시, 지역, 문화, 민속, 건축 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포함한다. 그는 퀴타히아, 디야르바크르, 마니사 등 여러 도시를 방문했으며, 특히 동부 아나톨리아의 쿠르드어에 대해 상세히 분석했다.
2.2.3. 캅카스 및 중앙아시아
1640년 체르케시아를 방문한 에블리야 첼레비는 그곳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했으며, 무슬림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모스크와 시장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체르케스인들의 환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체르케스어를 문자로 기록할 수 없었으며 그 언어를 "까치의 외침"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과 시르반 지역의 기록에서는 바쿠의 석유 상인들에 대해 언급하며, "알라의 뜻에 따라 땅에서 석유가 솟아나는데, 뜨거운 샘처럼 물웅덩이가 형성되고 그 표면에 크림처럼 굳은 석유가 생긴다. 상인들은 이 웅덩이로 들어가 국자로 석유를 모아 염소 가죽에 채우고, 이 석유 상인들은 그것을 여러 지역에서 판매한다. 이 석유 무역의 수입은 매년 직접 사파비 샤에게 전달된다"고 썼다.
2.2.4. 발칸반도 및 유럽
에블리야 첼레비는 발칸반도와 유럽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그곳의 역사, 지리, 민족, 사회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 크로아티아: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그는 북부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메지무레, 바니야 등 현대 크로아티아의 다양한 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직접 경험한 내용, 제3자의 증언, 그리고 창작된 요소를 포함한 다양한 역사적 및 민족지학적 자료를 기록했다.
- 보스니아: 당시 오스만 보스니아에 속했던 모스타르를 방문한 그는 도시 이름 '모스타르'가 "다리 지킴이"를 의미한다고 기록했다. 이는 길이 28 m, 높이 20 m에 달하는 유명한 오래된 다리를 가리킨다. 첼레비는 이 다리에 대해 "하늘로 솟아오르는 무지개 아치처럼 한 절벽에서 다른 절벽으로 뻗어 있다. ...나는 가난하고 비참한 알라의 종으로서 16개국을 지나왔지만, 이렇게 높은 다리는 본 적이 없다. 하늘만큼 높이 바위에서 바위로 던져진 것 같다"고 썼다.

- 불가리아 (도브루자): 17세기에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를 여행한 에블리야 첼레비는 불가리아 북동부를 우즈(Oğuz) 지역으로 언급했으며, 실리스트라에 중간 키의 쾌활하고 강한 사람들로 구성된 '치타크(Çıtak)'라는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사회가 살았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도브루자에서 '도브루자 치타클라르(Dobruca Çitakları)'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는 또한 '치타클라르'가 타타르족, 왈라키아인, 불가리아인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코소보: 1660년에 코소보를 방문한 첼레비는 이 지역의 중앙부를 '아르나부드'(Arnavud)라고 불렀고, 부슈트리 주민들이 주로 알바니아어나 튀르키예어를 사용했으며, 보스니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테토보, 페야, 프리슈티나 주변의 고지대를 "아르나부드룩(Arnavudluk) 산맥"으로 간주했다. 첼레비는 "페야 산맥"이 아르나부드룩(알바니아)에 있다고 언급했으며, 미트로비차에서 합류하는 이바르강이 코소보와 보스니아의 국경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는 '킬라브'(Kılab) 또는 라피강이 아르나부드룩(알바니아)에서 발원하며, 싯니차강도 그 강줄기의 일부라고 보았다. 첼레비는 또한 코소보의 중앙 산맥을 아르나부드룩 내에 포함시켰다.
- 알바니아: 첼레비는 알바니아 전역을 세 차례(1662년, 1670년)에 걸쳐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1662년에는 티라나, 레저, 슈코더르, 부샤트를 방문했으며, 1670년에는 델비너, 지로카스터르, 테펠레너, 스크라파르, 페르메트, 베라트, 카니너, 블로러, 바슈토바, 두러스, 카바여, 페친, 엘바산, 포그라데츠를 방문했다.
- 파르테논 신전: 1667년 첼레비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들에 경탄하며 이 건물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고 묘사했다. 그는 파르테논 신전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하늘 그 자체의 작품이므로 영원히 서 있어야 한다"는 시적인 간청을 작곡하기도 했다.
- 오스트리아: 1665년에서 1666년 사이에 빈을 방문했을 때, 첼레비는 독일어와 페르시아어 단어들 사이에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이는 후에 두 인도유럽어족 언어 사이의 관계로 알려지게 될 관계에 대한 초기 관찰이었다.
- 크레타: 『세야하트나메』 2권에서는 하니아가 술탄에게 함락된 것을 묘사하며, 8권에서는 칸디아 전역을 기록했다.
- 네덜란드: 1663년 로테르담 방문 시,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만났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우리 세상은 평화로웠지만, 매년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탐욕스러운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사제들을 저주했다고 기록했다.
- 헝가리: 1663년에서 1664년 사이에 일어난 제4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동안 헝가리에서 벌어진 오스만 제국의 군사 작전들을 기록했다.
2.2.5.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에블리야 첼레비는 17세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럽 및 일부 유대인 여행기와는 대조적으로, 이슬람적 관점에서 몇 안 되는 상세한 여행기를 작성했다. 그는 1649년과 1670년에서 1671년에 걸쳐 두 차례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또는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으며, "모든 연대기는 이 나라를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했다.
- 메카: 1671년 메카로의 하즈 순례를 기록하며, 메카의 셰리프들이 부유한 상인들의 박람회를 장려하여 지역 무역을 활성화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순례 기간 동안 메카에서 많은 구매와 판매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2.2.6. 북아프리카
2.2.7. 기타 지역 (크림반도, 러시아 등)
- 크림반도: 1664년 크림 칸국 영토에 대한 카자크의 습격이 무역로를 파괴하고 지역 인구를 심각하게 감소시켰다고 언급했다. 첼레비가 도착할 당시 방문했던 많은 도시들이 카자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안전하다고 보고한 크림반도의 유일한 장소는 아라바트 사주에 있는 오스만 요새였다.
그는 크림반도의 노예 무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시장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에게서, 아들은 아버지와 형제에게서 거기서 헤어져, 통곡과 도움의 외침, 울음과 슬픔 속에서 팔려나간다." 첼레비는 크림반도에 약 40만 명의 노예가 있었으나 자유 무슬림은 18만 7천 명에 불과했다고 추정했다.
- 러시아: 1656년 러시아를 방문한 기록도 남아 있다.
2.3. 《세야하트나메》의 내용과 특징
『세야하트나메』는 건축, 음악, 언어, 민속, 사회 구조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첼레비는 각 지역의 건물, 시장, 풍습, 문화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기록했다. 그의 서술 방식은 때로는 과장되거나 허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생활 방식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 오스만 고전 음악의 악기에 대한 두 장을 할애하기도 했다.
2.4. 언어학적 기여
에블리야 첼레비는 여행하는 각 지역에서 언어 샘플을 수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야하트나메』에는 약 30개에 달하는 튀르크 방언과 언어들이 목록화되어 있다. 첼레비는 독일어와 페르시아어의 몇몇 단어들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했지만, 그들이 공통된 인도유럽어족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했다. 『세야하트나메』는 또한 많은 캅카스어족과 차코니아어의 첫 번째 전사(轉寫)를 포함하며, 언어학 문헌 외에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우비흐어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는 또한 아라비아 말과 그들의 다양한 혈통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다.
2.5. 번역 및 학술 연구
현재 『세야하트나메』 전체의 영어 번역본은 없지만, 다양한 부분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가장 긴 단일 영어 번역본은 1834년 오스트리아의 동양학자 요제프 폰 하머-푸르크슈탈이 "에블리야 에펜디"(Evliya Efendi)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으며, 이는 1권과 2권(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을 다루지만 언어가 구식이다. 다른 번역본으로는 에리히 프로코쉬(Erich Prokosch)의 10권 독일어 번역본, 로버트 단코프의 2004년 입문서 『에블리야 첼레비의 세계: 오스만적 사고방식』(The World of Evliya Çelebi: An Ottoman Mentality), 그리고 단코프와 김수영의 2010년 10권 발췌 번역본 『오스만 여행자: 에블리야 첼레비의 여행기 발췌록』(An Ottoman Traveller: Selections from the Book of Travels of Evliya Çelebi) 등이 있다.
3. 영향 및 평가
에블리야 첼레비의 저작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삶과 작품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되며 문화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1. 문화적 영향
그의 광범위한 여행기와 상세한 기록은 오스만 제국 및 주변 지역의 문화, 역사, 지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야하트나메』는 17세기 오스만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3.2. 대중 문화 속 에블리야 첼레비
에블리야 첼레비는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묘사되고 활용되었다.
- 오르한 파묵의 1985년 소설 『하얀 성』에 등장한다.
- 슬로바키아 작가 유라이 체르베나크(Juraj Červenák)의 소설 『바토리 선장의 모험』(Dobrodružstvá kapitána Báthoryho) 시리즈에 등장한다.
- 1996년 영화 『내 날개 아래 이스탄불』(İstanbul Kanatlarımın Altında)은 전설적인 비행사 형제인 헤자르펜 아흐메트 첼레비와 라가리 하산 첼레비(Lagâri Hasan Çelebi)의 삶과 17세기 무라트 4세 통치 시기의 오스만 사회를 에블리야 첼레비의 시선으로 목격하고 서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2014년 세르칸 젤젤레(Serkan Zelzele)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에블리야 첼레비와 생명의 물』(Evliya Çelebi ve Ölümsüzlük Suyu)은 첼레비의 모험을 각색한 최초의 터키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 유네스코는 에블리야 첼레비 탄생 400주년을 기념행사 일정에 포함했다.
- 2015년 터키 TV 시리즈 『무흐테솀 유즈이을: 쾨셈』에서는 터키 배우 네지프 메밀리(Necip Memili)가 에블리야 첼레비 역을 맡았다.

3.3. 학술적 의의
그의 기록은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민속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7세기 오스만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그가 수집한 언어 자료들은 초기 언어학 연구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3.4. 명명된 분류군
잉어과에 속하는 조기어류의 일종인 리키아 봄 미노우(Pseudophoxinus evliyae)는 2010년 요르그 아르투르 프레이호프(Jörg Arthur Freyhof)와 뮈피트 외줄루(Müfit Özuluğ)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어종은 터키 서부 아나톨리아의 배수구에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