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에리크 폰 로젠은 스웨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탐험가이자 민족지학자로 활동했으며, 가족 관계를 통해 헤르만 괴링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카를 구스타프 블룸필드 에리크 폰 로젠은 1879년 6월 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를 구스타프 폰 로젠 백작이며, 어머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신의 엘라 칼턴 무어였다. 그의 어머니는 윈스롭 가문의 후예였으며, 그의 할머니는 작가이자 독지가인 클라라 제시업 무어였다. 에리크 폰 로젠에게는 클래런스 폰 로젠이라는 형이 있었다.
1.2. 결혼 및 자녀
폰 로젠은 마리 포크(1886년-1967년)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자녀들의 이름과 출생 연도는 다음과 같다: 비외른(1905년생), 마리(1906년생), 카를 구스타프 폰 로젠(1909년생), 브리기타(1913년생), 에길(1919년생), 안나(1926년생). 그의 외손자(브리기타의 아들)는 영화감독 페터 네슈틀러이며, 네슈틀러는 2009년에 폰 로젠에 대한 영화인 《죽음과 악마》(Tod und Teufel)를 제작하기도 했다.
1.3. 탐험 및 초기 활동
에리크 폰 로젠은 생애 초기부터 탐험과 민족지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01년 남아메리카 탐험을 포함한 여러 탐험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족지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독지가로서 활동하며 후원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1909년에는 이바르 텡봄과 에른스트 토룰프에게 의뢰하여 현재 약스투구스코겐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사냥 오두막을 건축하기도 했다.
2. 갈고리십자 상징과 그 의미
에리크 폰 로젠은 개인적인 상징으로 갈고리십자를 사용했으며, 이 상징은 이후 핀란드 공군의 초기 도안으로 채택되는 등 여러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갈고리십자 사용은 나치당의 상징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2.1. 개인적 사용과 기원
폰 로젠은 학생 시절 고틀란드섬의 룬돌에서 갈고리십자 상징을 처음 접했다. 그는 이 상징이 바이킹들에게 행운의 부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자신의 개인적인 표식으로 채택했다. 1901년 남아메리카 탐험을 떠날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수하물에 이 갈고리십자를 새겨 넣었다. 또한, 그가 건축을 의뢰한 사냥 오두막에도 이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2.2. 핀란드 공군의 상징
폰 로젠은 친핀란드 인사였으며, 1918년 3월 핀란드 내전 중 핀란드 백군에게 항공기 한 대를 기증했다. 이 항공기는 모란-솔니에르 타입 L/툴린 D 기종으로, 그의 개인 표식인 흰색 바탕에 파란색 갈고리십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 항공기의 기증은 신생 핀란드 공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핀란드 공군은 폰 로젠의 갈고리십자 도안을 자신들의 표장으로 채택하여 한동안 사용했다.
2.3. 나치즘과의 연관성
폰 로젠의 갈고리십자 사용은 나치당의 상징과 유사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인 로켈스타드성에 머물던 헤르만 괴링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괴링은 폰 로젠의 처제인 카린 폰 칸초와 결혼하여 그의 동서가 되었다. 괴링은 로켈스타드성에 머물면서 벽난로에 주조된 갈고리십자 장식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나치당은 괴링이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기 2년 전인 1920년에 이미 갈고리십자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폰 로젠의 갈고리십자가 나치 갈고리십자의 직접적인 유래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폰 로젠은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나치즘과 깊은 연관성을 보였다.
3. 정치 활동 및 사상
에리크 폰 로젠은 1930년대 스웨덴에서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3.1.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운동
폰 로젠은 1930년대 스웨덴의 국가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35년 국가사회주의 블록이 주최한 집회에서 주요 연설자로 나서는 등 공개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행보는 그가 나치 이념에 동조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4. 평가 및 논란
에리크 폰 로젠은 핀란드 공군 창설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의 나치 이념 동조와 관련된 활동은 민주주의, 인권, 사회 정의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논란을 야기한다.
4.1. 역사적 평가
에리크 폰 로젠은 1918년 핀란드 백군에게 항공기를 기증하여 신생 핀란드 공군의 설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핀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개인적인 갈고리십자 상징이 핀란드 공군의 초기 표장으로 채택된 것 또한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헤르만 괴링과 인척 관계를 맺는 등 나치즘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 부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한다.
4.2. 비판 및 논란
폰 로젠에 대한 가장 큰 비판과 논란은 그의 나치 이념 동조와 관련된 활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1930년대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공개적으로 활동했으며, 이는 그가 나치즘의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사상에 동조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그의 갈고리십자 사용이 나치당의 상징과 유사하다는 점은 그가 나치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했거나, 심지어 이를 옹호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민주주의, 인권, 사회 정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며, 그의 역사적 유산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5. 영향
에리크 폰 로젠은 특히 핀란드 공군의 설립과 초기 정체성 확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5.1. 핀란드 공군에 대한 영향
폰 로젠이 1918년 3월 핀란드 백군에게 기증한 모란-솔니에르 타입 L/툴린 D 항공기는 신생 핀란드 공군의 첫 번째 항공기가 되었다. 이 기증은 핀란드 공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폰 로젠의 개인 표식인 파란색 갈고리십자가 흰색 바탕에 그려진 도안은 핀란드 공군의 공식 표장으로 채택되어 1945년까지 사용되었다. 이는 폰 로젠이 핀란드 공군의 초기 정체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