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드윈 스탠턴 포터(Edwin Stanton Porter영어, 1870년 4월 21일 ~ 1941년 4월 30일)는 미국의 영화 개척자이자 프로듀서, 감독, 스튜디오 관리자, 촬영 기사였다. 그는 주로 에디슨 제조 회사와 페이모스 플레이어스 필름 컴퍼니에서 활동하며 영화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포터는 영화 상영 기술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영화 제작에 반영하여 다양한 트릭 필름과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는 1903년작인 《대열차 강도》가 꼽히는데, 이 작품은 교차 편집과 클로즈업 기법을 혁신적으로 사용하여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그는 《미국인 소방수의 생활》(1903년)에서 용해 효과(dissolves)를, 《엉클 톰스 캐빈》(1903년)에서 자막(intertitles)을 사용하는 등 초기 영화 기법의 발전에 기여했다. 포터는 연속 편집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샷'이 영화의 기본 단위임을 인식하여 D. W. 그리피스와 같은 후대 감독들의 영화 언어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또한 최초의 3D 영화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1915년)를 제작하며 3D 영화 분야의 선구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영화 산업 은퇴 후에는 심플렉스 영사기 제조사의 사장으로 활동하며 발명가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에드윈 스탠턴 포터는 펜실베이니아주 코넬스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영화 산업에 입문하기 전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고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다.
2.1. 출생 및 가족
포터는 1870년 4월 21일 펜실베이니아주 코넬스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이었던 토마스 리처드 포터이고, 어머니는 메리 클라크 포터였다. 그는 일곱 자녀 중 넷째로, 찰스 W., 프랭크, 존, 에버렛 멜버른 네 명의 형제와 메리, 아다 두 명의 누이가 있었다. 태어날 때 이름은 에드워드였으나, 후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전쟁부 장관을 지낸 오하이오주의 민주당 정치인 에드윈 스탠턴의 이름을 따 에드윈 스탠턴으로 개명했다.
2.2. 교육 및 초기 직업
코넬스빌의 공립학교를 졸업한 후, 포터는 다양한 잡다한 일을 했다. 그는 전시 스케이터, 간판 화가, 전신 기사 등으로 일했다. 어린 나이에 전기에 관심을 가졌으며, 21세에는 램프 조절기에 대한 특허를 공동 소유하기도 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선박 및 엔진 제조 회사인 윌리엄 크램프 앤 선즈의 전기 부서에서 처음으로 고용되었다. 3년간의 근무 기간 동안 그는 통신 개선을 위한 전기 장치 발명에 재능을 보였다. 결국 양복 재단사가 되었으나, 1893년의 공황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2.3. 군 복무
1893년 6월 15일 파산 신청을 한 지 나흘 후인 6월 19일, 포터는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포수로 3년간 복무했으며, USS 뉴욕 (ACR-2)와 브루클린 해군 공창에서 근무했다.
3. 영화 경력
에드윈 포터는 1896년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래 에디슨 제조 회사와 페이모스 플레이어스 필름 컴퍼니 등에서 활동하며 영화 기법과 영화 언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1. 영화 산업 입문
포터는 1896년 영화가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대형 스크린에 처음 상영되던 해에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잠시 뉴욕 시에서 토머스 에디슨이 제작한 영화와 영사 장비의 대리인인 래프 앤 개먼에 고용되었다. 이후 경쟁사인 쿤 & 웹스터의 프로젝터스코프를 사용하는 순회 영사 기사가 되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그는 서인도 제도와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박람회장과 야외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나중에 캐나다와 미국을 순회하는 두 번째 투어를 진행했다.
1898년 초 뉴욕 시로 돌아온 포터는 맨해튼의 밀랍 인형 박물관이자 오락실이며 에디슨 제조 회사의 라이선스를 받은 에덴 뮤제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에덴 뮤제에서 포터는 에디슨 영화 프로그램을 조립하는 일을 맡았는데, 특히 미국-스페인 전쟁 관련 에디슨 제작 영화 전시회에 주력했다. 이 영화들은 뉴욕 시에서 애국심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상영자로서 포터는 이러한 프로그램에 대한 엄청난 창의적 통제권을 가졌으며, 음악과 라이브 해설을 곁들여 영화 목록을 선보였다.
3.2. 에디슨 제조 회사에서의 활동
포터는 1900년 11월 (혹은 1899년) 에디슨 제조 회사에 합류했다. 곧이어 그는 에디슨의 뉴욕 스튜디오에서 영화 제작을 총괄하며 카메라를 조작하고, 배우들을 연출하며, 최종 필름을 조립했다. 그는 조지 S. 플레밍을 포함한 여러 다른 영화 제작자들과 협력했다. 다음 10년 동안 포터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순회 영사 기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포터는 대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에디슨을 위해 트릭 필름과 코미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3.2.1. 초기 영화 및 혁신
그의 초기 영화 중 하나는 1901년 2월에 제작된 당시 부통령 당선자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대한 풍자극인 《테러블 테디, 더 그리즐리 킹》이었다. 모든 초기 영화 제작자들처럼 그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했지만, 단순히 영화를 복사하기보다는 빌려온 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잭과 콩나무》(1902년)와 《미국인 소방수의 생활》(1903년)에서는 프랑스의 조르주 멜리에스와 영국의 브라이턴 학파의 일원인 제임스 윌리엄슨의 이전 영화들을 따랐다. 그러나 포터는 샷(shot) 사이의 갑작스러운 연결이나 컷 대신,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용해 효과(dissolves)를 만들었다. 특히 《미국인 소방수의 생활》에서 이 기법은 관객이 복잡한 야외 움직임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엉클 톰스 캐빈》은 자막(intertitles)을 사용하여 장면과 주요 인물들을 식별함으로써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을 준 최초의 미국 영화였다.
3.2.2. 《대열차 강도》
포터의 다음 영화인 《대열차 강도》(1903년)는 다임 노벨과 멜로드라마 무대 공연을 통해 관객에게 이미 익숙했던 전형적인 미국 서부극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만들었다. 단편 영화인 이 작품은 상영 시간이 12분이었고, 20개의 개별 샷으로 구성되었으며, 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는 강도의 놀라운 클로즈업 장면이 포함되었다. 이 영화는 실내외를 포함하여 10개에 달하는 다양한 장소를 활용했으며,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교차 편집을 사용한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이전 어떤 영화도 이처럼 빠른 움직임이나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열차 강도》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수년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했으며, 1905년에는 최초의 니켈로디언 극장에서 주요 상영작이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미국에서 영화를 상업적 오락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했다.

3.2.3. 영화 기법의 발전
《대열차 강도》 이후에도 포터는 새로운 기법들을 계속 시도했다. 그는 1905년작 《클렙토매니악》에서 두 개의 평행한 이야기를 제시했는데, 이는 1904년작 《전과자》와 같은 사회 비판적 영화였다. 1905년작 《일곱 시대》에서는 측면 조명, 클로즈업을 사용하고 한 장면 내에서 샷을 변경했는데, 이는 각 장면에 하나의 샷만 사용하는 연극적 비유에서 벗어난 초기 영화 제작 사례 중 하나이다. 그는 또한 윈저 매케이의 만화를 기반으로 한 트릭 필름인 《레어빗 광의 꿈》(1906년)도 감독했다.
1903년부터 1907년 사이에 그는 영화를 통한 시각적 소통의 기본 방식이 될 대부분의 기법들을 성공적으로 시연했다. 예를 들어, 그는 특히 《트레이너의 딸; 또는 사랑을 위한 경주》(1907년)에서 연속 편집의 현대적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영화 구조의 기본 단위가 장면(무대의 기본 단위)이 아닌 '샷'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종종 평가받는다. 이는 D. W. 그리피스의 편집 및 스크린 스토리텔링 발전에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혁신들을 단지 개별적인 실험으로만 여겼고, 결코 통일된 영화 제작 스타일로 통합하지 않았다. 포터는 1908년작 《독수리 둥지에서 구출되다》에서 미래의 영화 제작자 그리피스를 배우로 연출하기도 했다.
3.3. 타 회사에서의 활동
1909년, 급성장하는 니켈로디언 사업을 위한 산업 시스템에 지친 포터는 에디슨을 떠나 심플렉스 영사기를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1910년에는 디펜더 필름 컴퍼니를 설립했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11년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렉스 모션 픽처 컴퍼니를 조직했다.
1912년 그는 회사를 매각하고 아돌프 주커의 제안을 받아 새로운 페이모스 플레이어스 필름 컴퍼니의 수석 감독이 되었다. 이 회사는 미국에서 정기적으로 장편 영화를 제작한 최초의 회사였다. 그는 이 회사에서 첫 장편 영화인 《젠다성의 포로》(1913년)에서 무대 배우 제임스 K. 해켓을 연출했다. 또한 메리 픽퍼드의 첫 장편 영화인 《어 굿 리틀 데블》(1913년)을 감독했으며, 폴린 프레더릭과 존 배리모어도 연출했다. 1915년에는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의 대성공에 맞서 스펙터클 대작 《영원의 도시》를 제작하기도 했다.
3.4. 3D 영화 분야의 선구자
그러나 그의 연출 기술은 급변하는 영화 예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3D에 대한 그의 기술적 재능은 빛을 발했다. 포터의 마지막 영화는 1915년 6월 10일에 개봉한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는 최초의 아나글리프 3D 영화였다. 1916년, 그는 회사 재편성 과정에서 페이모스 플레이어스를 떠났다.
4. 영화 산업 은퇴 후 경력
1917년부터 1925년까지 포터는 심플렉스 영사기 제조사인 프리시전 머신 컴퍼니의 사장을 역임했다. 1925년 은퇴 후에도 그는 발명가이자 디자이너로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스틸 카메라와 영사기 장치에 대한 여러 특허를 확보했다. 1930년대에는 한 가전 회사에 고용되어 일했다.
5. 사생활
에드윈 포터는 1893년 6월 5일 캐롤라인 라이딩어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6. 사망
포터는 1941년 4월 30일, 71세의 나이로 뉴욕 시 호텔 태프트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펜실베이니아주 서머싯에 있는 허스밴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7. 유산 및 평가
에드윈 포터는 영화 역사에서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남아있다. 《대열차 강도》와 다른 혁신적인 초기 영화들의 감독으로서 그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사용한 혁신을 거의 반복하지 않았고, 일관된 연출 스타일을 개발하지도 않았다. 또한 후년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기법을 재발견하고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도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그는 겸손하고 조용하며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1912년부터 자신이 감독한 유명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불편해했다. 아돌프 주커는 포터에 대해 그가 극적인 예술가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기계공이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기계와 다루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터는 미국 영화의 기초를 다진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열차 강도》는 미국 영화사상 최초로 스토리 라인을 가진 영화로 불리며, 서부극의 원조로도 인정받는다. 그는 초기 영화의 기술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영화 언어의 진화를 이끌어낸 선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