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어린 시절과 교육
에드가르 장 포르는 1908년 8월 18일 에로주 베지에에서 프랑스 육군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학생이었다. 15세에 바칼로레아를 취득했으며, 19세에는 파리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21세에 변호사 협회 회원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최연소 변호사 기록이었다. 파리에 거주하며 그는 프랑스 제3공화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29년 급진당에 입당했다.
1.2. 제2차 세계 대전 및 레지스탕스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포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마키에 합류하여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1942년, 그는 샤를 드 골의 지휘 아래 알제에 있는 임시정부 본부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입법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프랑스 측 검사 고문으로 활동하며 전범 재판에 기여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2.1. 정치 경력
1946년, 에드가르 포르는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에 쥐라주 지역구 급진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급진당의 득표율은 전체 투표의 10% 미만이었으나, 다른 정당들이 명확한 다수를 얻지 못하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연립 내각 구성에 불균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포르 자신도 1952년 1월부터 2월까지, 그리고 1955년 2월부터 12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내각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급진당 내 보수파의 지도자로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이끄는 당내 좌파와 대립했다.
프랑스 제4공화국 시기 동안 포르의 정치적 견해는 변화했다. 그는 초기에는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에 반대했으며, 1962년 196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직선제에 반대 투표를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골주의로 선회하여 신공화국연합에 합류했다. 1963년에는 당의 비공식 대표 자격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5공화국 정부에서 그는 여러 장관직을 수행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농업부 장관, 1968년부터 1969년까지 국민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며 대학 개혁을 추진했다. 1972년부터 1973년까지는 사회부 장관을 지냈다. 1974년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직을 고사하고, 골주의 후보인 자크 샤방델마스 대신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지지했다.
그의 주요 정부직책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재임 기간 |
---|---|
내각 의장 | 1952년 1월 ~ 2월, 1955년 2월 ~ 12월 |
재무 차관 | 1949년 ~ 1950년 |
예산부 장관 | 1950년 ~ 1951년 |
법무부 장관 | 1951년 ~ 1952년 |
재무경제부 장관 | 1953년 ~ 1955년 |
외무부 장관 | 1955년 1월 ~ 2월 |
재무경제기획부 장관 | 1958년 5월 ~ 6월 |
농업부 장관 | 1966년 ~ 1968년 |
국민교육부 장관 | 1968년 ~ 1969년 |
국무사회부 장관 | 1972년 ~ 1973년 |

2.2. 의회 및 지방 정부 활동
에드가르 포르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쥐라주 지역구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67년부터 1980년까지는 두주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나, 1978년 의장 재선에 도전했다가 자크 샤방델마스에게 패배했다. 상원에서는 1959년부터 1967년까지 쥐라주 상원 의원이었고, 1980년부터 1988년 사망 시까지 두주 상원 의원을 지냈다.
지방 정부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1947년부터 1971년까지, 그리고 1983년부터 1988년 사망 시까지 포르레네 시장을 역임했으며, 1971년부터 1977년까지는 퐁타를리에 시장을 지냈다. 또한 1949년부터 1967년까지 쥐라주 총평의회 의장을 맡았고,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두주 총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74년부터 1981년, 그리고 1982년부터 1988년 사망 시까지 프랑슈콩테 지역 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유럽 지역 의회 (AER)의 창설과 초기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초대 의장을 맡았다.

2.3. 저술 및 학술 활동
에드가르 포르는 197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며 프랑스 학술계에서의 그의 지적 위상을 인정받았다. 그는 정치 활동 외에도 다수의 서적과 에세이를 저술하며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주요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Pascal: le procès des provinciales (1930)
- Le pétrole dans la paix et dans la guerre (1938)
- Pour rencontrer M. Marshes (1942, 탐정 소설, 에드 포르 명의)
- L'installation du président Fitz Mole (탐정 소설, 에드 포르 명의)
- Mr Langois n'est pas toujours égal à lui-même (1950, 에드가르 상데이 명의)
- Le serpent et la tortue (les problèmes de la Chine populaire) (1957)
- La disgrâce de Turgot (1961)
- La capitation de Dioclétien (1961)
- Prévoir le présent (1966)
- L'éducation nationale et la participation (1968)
- Philosophie d'une réforme (1969)
- L'âme du combat (1969)
- Ce que je crois (1971)
- Pour un nouveau contrat social (1973)
- Au-delà du dialogue avec Philippe Sollers (1977)
- La banqueroute de Law (1977)
- La philosophie de Karl Popper et la société politique d'ouverture (1981)
- Mémoires I, "Avoir toujours raison, c'est un grand tort" (1982)
- Mémoires II, "Si tel doit être mon destin ce soir" (1984)
- Discours prononcé pour la réception de Senghor à l'Académie française (1984)
특히 교육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두드러진다. 1970년, 그는 유네스코 교육개발국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평생교육에 관한 중요한 보고서인 Learning To be (포르 위원회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전 세계 교육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교육의 국제화와 평생 학습 개념 확산에 기여했다.
2.4. 국제 정책 및 관계
에드가르 포르는 국제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세계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회의 소집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으로,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지구 연방 헌법을 초안하고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국제 사회의 평화와 협력을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1963년에는 골주의 정당의 비공식 대표 자격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국제 관계에서의 프랑스의 입지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66년에는 에드윈 O. 라이샤워 등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교육 조사단에 참여하여 "일본 교육 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일본 교육이 고도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을 언급하고 초등 교육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고등 교육의 경직성과 계층화를 일본 교육의 과제로 지적했으며, 교육의 국제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3. 사상 및 철학
에드가르 포르의 정치적 사상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유연하게 변화했다. 그는 급진당의 보수파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 초기에는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 골주의로 선회했다. 이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지지하며 프랑스 민주연합 (UDF)과 공화국연합 (RPR) 등 다양한 정치적 소속을 거쳤다.
이러한 잦은 정치적 행보로 인해 그는 '풍향계' (girouette지로에트프랑스어)라는 별명을 얻으며 출세 지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포르 자신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회전하는 것은 풍향계가 아니라 바람입니다!"라고 응수하며 자신의 정치적 유연성을 옹호했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불안정한 연립 내각 정치 환경 속에서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특정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최적의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다.
사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포르의 이러한 유연성은 사회적 진보를 위한 실용적인 접근으로 평가될 수 있다. 특히 그가 국민교육부 장관으로서 추진한 대학 개혁과 유네스코를 통한 평생교육 강조, 그리고 세계 헌법 제정 운동에 참여한 것은 국제 협력과 인권 증진이라는 사회 자유주의적 가치와 궤를 같이한다. 그의 사상은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지식인이자 정치인의 고뇌와 결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사생활
에드가르 포르는 1931년 작가이자 실크 상인의 딸인 뤼시 포르 (Lucie Meyer)와 결혼했다.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한 달간 소련을 방문했다.

5. 사망
에드가르 포르는 1988년 3월 3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파리에서 치러졌으며, 그는 파리 파시 묘지 (Passy Cemetery)에 아내 뤼시 포르와 함께 안장되었다.

6. 평가
6.1. 긍정적 평가
에드가르 포르는 프랑스 정치와 학술 분야에 걸쳐 다방면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21세에 프랑스 최연소 변호사가 될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과 법률적 배경을 갖추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프랑스 측 검사 고문으로 활동한 것은 그의 애국심과 정의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국민교육부 장관 재임 시 프랑스 5월 혁명 이후 대학 운영안을 개편한 '포르 법안' (Loi Faure)을 추진하여 프랑스 고등 교육 시스템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유네스코 교육개발국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평생교육에 대한 중요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전 세계 교육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 헌법 제정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교육 정책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발표하는 등 국제적인 시각과 활동은 그의 기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의 정치적 비판에 대한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응수는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6.2. 비판 및 논란
에드가르 포르는 그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풍향계'라는 별명을 얻으며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급진당, 골주의 정당, 프랑스 민주연합, 공화국연합 등 여러 정당을 거치며 정치적 소속을 자주 변경했는데, 이는 일부에서 그를 출세 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정치적 유연성이 때로는 원칙 없는 변신으로 비춰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1955년에는 영국을 따라 수소폭탄 제조 계획을 발표했으나,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하여 한 달 만에 이를 철회하는 등 정책 결정 과정에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정책 결정에 대한 신중성 부족이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7. 영향
에드가르 포르의 업적과 사상은 프랑스 사회와 국제 사회에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 교육 분야
- 1968년 국민교육부 장관 재임 시 추진한 대학 개혁, 일명 '포르 법안'은 프랑스 고등 교육 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법안은 대학의 자율성 확대, 학제 간 통합, 학생 참여 증진 등을 목표로 하여 프랑스 대학의 현대화와 민주화에 기여했다.
- 유네스코 교육개발국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발표한 평생교육 보고서 Learning To be는 전 세계 교육 정책에 영향을 미치며, 교육의 국제화와 평생 학습 개념 확산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 국제 관계
- 세계 헌법 제정 운동에 참여한 그의 활동은 세계 정부와 세계 연방주의 사상 확산에 기여했다. 이는 국제적인 협력과 평화 구축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되며, 오늘날에도 국제 거버넌스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유럽 지역 의회의 초대 의장으로서 유럽 지역 간 협력 증진에 기여하며 유럽 통합 과정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8. 기념 및 추모
에드가르 포르는 197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어 프랑스 학술계에서 그의 지적 업적을 영원히 기리게 되었다. 그의 묘비는 파리 파시 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이는 그를 추모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그의 삶과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되어 후대에 그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베르나르 파브르 감독의 Edgar Faure, l'enragé du Bien Public (2007)과 크리스티앙 파브르 감독의 La Loi (201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