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두아르두 몬들라느는 모잠비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양치기로 일하며 포르투갈 식민 지배 하의 어려운 환경을 경험했다. 그는 남아프리카, 포르투갈, 미국을 거치며 인류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며 국제적인 시각을 갖춘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1. 출생 및 성장 배경
에두아르두 시밤부 몬들라느는 1920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현재 모잠비크) 가자주 만자카제 지구의 느와자하니(N'wajahani)에서 태어났다. 그는 반투어를 사용하는 총가족 혹은 샹가안족 족장의 16명의 아들 중 넷째였다. 몬들라느는 12세까지 양치기로 일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 학력
몬들라느는 여러 초등학교를 다닌 후, 만자카제 근처의 스위스계 장로교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트란스발주(현재 림포포주) 엘림 병원 위 엔자카냐카(Njhakanjhaka) 마을에 있는 같은 단체의 교회 학교인 레마나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그 후 그는 얀 H. 호프메이어 사회복지학교에서 1년을 보낸 뒤 요하네스버그의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1949년, 단 1년 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추방되었다.
1950년 6월, 몬들라느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있는 리스본 대학교에 다녔다. 몬들라느의 요청에 따라 그는 미국으로 전학을 갔고, 31세의 나이에 펠프스 스토크스 장학금으로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칼리지에 입학했다. 몬들라느는 1951년 오벌린 칼리지에 3학년으로 입학하여 1953년에 인류학 및 사회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일리노이주 에번스턴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몬들라느는 1955년에 석사 학위를, 1960년에는 멜빌 J. 헤르스코비츠의 지도 아래 '역할 갈등, 준거 집단, 그리고 인종'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했으며, 이 논문은 프란츠 보아스의 '자유주의적' 전통에 초점을 맞추었다.
1956년, 그는 메서디스트 청년 회의에서 만난 인디애나주 출신의 백인 미국인 자네트 래 존슨과 결혼했다.
2. 인류학 및 학술 경력
몬들라느는 유엔 신탁통치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는 1960년에 박사 학위를 마쳤고,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1961년에 유엔 직위를 사임했다. 같은 해, 그는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 동아프리카 연구 프로그램 개발을 도왔다. 1963년에 그는 시러큐스 대학교의 직위를 사임하고 탄자니아로 이주하여 FRELIMO의 해방 투쟁에 참여했으며, 1962년 6월 FRELIMO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3. 정치 활동 및 모잠비크 독립 운동
에두아르두 몬들라느는 모잠비크의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을 창설하고 그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 전쟁을 이끌었으며, 단순한 독립을 넘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모잠비크 사회에 구현하려는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3.1.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 창설 및 지도
대학 졸업 후 에두아르두 몬들라느는 유엔의 관료가 되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가장 중요한 고문 중 한 명이자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정치학 교수 아드리아누 모레이라는 유엔에서 함께 일할 때 몬들라느를 만나 그의 자질을 인정하고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행정부의 직책을 제안하여 그를 포르투갈 측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몬들라느는 그 제안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후 지도자가 부족했던 탄자니아의 모잠비크 독립 운동에 합류했다. 1962년, 몬들라느는 소규모 독립주의 집단들의 요소를 통합하여 새로 결성된 모잠비크 해방전선(Frente de Libertação de Moçambique프렌트 드 리베르타상 드 모삼비크포르투갈어, FRELIMO)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1963년, 그는 FRELIMO 본부를 모잠비크 외곽의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 설립했다.
q=Dar es Salaam|position=right
3.2. 독립 전쟁 및 사회주의적 지향
서방세계와 소련, 그리고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FRELIMO는 1964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모잠비크의 독립을 얻기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FRELIMO의 초기에는 지도부가 분열되어 있었다. 몬들라느가 이끄는 파벌은 단순히 독립을 위한 투쟁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로의 변화를 원했다. 두스 산투스, 마셸, 시사누 및 당 중앙위원회 대다수가 이 견해를 공유했다. 그들의 반대파, 특히 은카반다메와 시망구는 독립을 원했지만 사회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입장은 1968년 7월에 열린 제2차 당 대회에서 승인되었고, 몬들라느는 당 총재로 재선되었다. 이 대회에서 농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장기전 전략이 채택되었다(빠른 쿠데타 시도와는 대조적으로).
4. 사망
1969년, 폭탄이 담긴 책이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FRELIMO 본부에 있는 몬들라느에게 보내졌다. 그가 미국인 친구 베티 킹의 집에서 소포를 열었을 때 폭탄이 폭발하여 그는 사망했다. 그의 암살은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다. FRELIMO 내부의 경쟁자들, 탄자니아 정치인들, 국제 행위자들, 포르투갈 비밀 정보국(PIDE), 특히 포르투갈의 비밀 반공산주의 조직인 아긴터 프레스를 포함한 다양한 세력들이 그의 암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전직 PIDE 요원 오스카르 카르도주는 PIDE 요원 카시미루 몬테이루가 에두아르두 몬들라느를 살해한 폭탄을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5. 유산 및 기념
에두아르두 몬들라느의 갑작스러운 사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잠비크 독립을 향한 투쟁과 사회주의적 비전은 국가 건설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그의 이름은 모잠비크의 국립대학교에 명명되었고, 그의 학술적 기여를 기리는 강연 시리즈가 이어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정신이 기념되고 있다.
5.1. 에두아르두 몬들라느 대학교
1975년, 포르투갈이 모잠비크의 식민 수도였던 로우렌수 마르케스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루렌수 마르케스 대학교'(Universidade de Lourenço Marques우니베르시다드 드 로렌수 마르케스포르투갈어)는 '에두아르두 몬들라느 대학교'(Universidade Eduardo Mondlane우니베르시다드 에두아르두 몬들라느포르투갈어)로 개명되었다. 이 대학교는 현재 독립 모잠비크의 수도인 마푸투에 위치하고 있다.

q=Maputo|position=left
5.2. 기념 강연 및 학술 활동
시러큐스 대학교의 아프리카 이니셔티브는 에두아르두 몬들라느 브라운 백 강연 시리즈를 주최하며, 아프리카 연구 분야의 연사들을 전 세계에서 초청하고 있다.
5.3. 독립 달성 및 가족의 유산
몬들라느의 사망은 1969년 그의 오벌린 칼리지 동창이자 친구인 에드워드 호울리 목사가 주재한 장례식에서 애도되었다. 호울리는 장례식에서 몬들라느가 "인간은 존엄과 자기 결정권을 위해 태어났다는 진실을 위해 그의 목숨을 바쳤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까지 FRELIMO의 7,000명에 달하는 게릴라 병력은 포르투갈 당국으로부터 모잠비크 중부 및 북부의 일부 농촌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독립주의 게릴라들은 약 60,000명의 포르투갈 군대와 교전했는데, 이들은 포르투갈 행정부가 1960년대부터 빠르게 개발하고 있던 주요 수력 발전 댐 건설을 마무리 짓고 있던 카호라 바사 지역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1974년 리스본에서 좌익 군사 쿠데타인 카네이션 혁명 이후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전복되면서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정책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1975년 6월 25일 포르투갈은 FRELIMO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모잠비크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몬들라느의 아내 자네트 래 존슨은 모잠비크 정부의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으며, 그의 딸 니옐레티 몬들라느는 젊음 체육부 장관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젠더, 아동 및 사회행동부 장관이 되었다.
6. 저술 및 연구
몬들라느가 직접 저술한 주요 저서와 그의 학문적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 The Struggle for Mozambique모잠비크를 위한 투쟁영어 (1969, 펭귄 북스). 이 책은 1971년 노마 칸지로(野間寛二郎)와 나카가와 시노부(中川忍)의 번역으로 『아프리카 혁명=모잠비크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이론사에서 출판되었다.
- 노스웨스턴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역할 갈등, 준거 집단, 그리고 인종'(1960).
7. 평가 및 논쟁
에두아르두 몬들라느는 모잠비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끌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모잠비크 사회에 구현하려 했던 주요 인물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 변혁을 추구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1969년 그의 암살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여러 의혹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암살에 대해서는 FRELIMO 내부의 경쟁자들, 탄자니아 정치인들, 국제 행위자들, 포르투갈 비밀 정보국(PIDE), 그리고 포르투갈의 비밀 반공산주의 조직인 아긴터 프레스 등이 연루되었다는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전직 PIDE 요원 오스카르 카르도주는 PIDE 요원 카시미루 몬테이루가 몬들라느를 죽인 폭탄을 설치했다고 주장했으나,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