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교육
스윈튼은 1868년 인도 마이소르의 벵갈루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드라스 민간 복무단의 판사였다. 가족은 1874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스윈튼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 럭비 스쿨, 첼트넘 칼리지, 블랙히스 사립학교, 그리고 울위치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88년 2월 17일 영국 왕립공병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영국령 인도에서 복무하며 1891년 2월 17일에 중위로, 1899년 2월 17일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2. 초기 군 경력
스윈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보어 전쟁 참전과 전술 서적 집필, 그리고 참모 장교 활동 및 러일 전쟁 역사가로서의 다양한 군사 활동과 직책을 수행했다.
2.1. 보어 전쟁과 전술 서적 집필
그는 제2차 보어 전쟁(1899년~1902년) 동안 대위로 복무했으며, 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1902년 9월에 귀국했다. 그는 복무 공로를 인정받아 1901년 9월 남아프리카 포상 명단에 무공 훈장 (DSO)을 수훈받았다. 비록 주로 철도 건설에 관여했지만, 그는 전술, 요새 건설, 그리고 최근 도입된 기관총을 포함한 현대 무기의 효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쟁 후, 그는 소규모 부대 전술에 관한 책인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전』을 저술했다. 이 책은 캐나다 육군과 영국 육군이 부사관과 장교를 훈련하는 데, 그리고 미국군이 장교를 훈련하는 데 사용된 소규모 전술에 대한 군사 고전이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그는 참모 장교로 복무했으며 러일 전쟁의 공식 역사가로 활동했다. 그는 1906년 12월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과 전차 개발
스윈튼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공식 전쟁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전차의 구상과 개발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여 최초의 전차 부대 훈련과 장갑전술 수립을 이끌었다.
3.1. 전쟁 특파원 활동
전쟁부 장관인 키치너 경은 스윈튼을 서부 전선의 공식 영국 전쟁 특파원으로 임명했다. 당시 기자들은 전선에 접근할 수 없었기에, 스윈튼의 보고서는 검열을 거쳤고, 이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공정한 보도가 이루어졌다. 그는 1914년 8월에 중령 임시 계급으로 진급했다.
3.2. 전차 구상과 발전 기여
스윈튼은 자신의 책 『목격자』(Eyewitness아이위트니스영어)에서 1914년 10월 19일 프랑스에서 차를 운전하던 중 갑자기 전차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얻게 된 과정을 회고한다. 1914년 7월,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만난 광산 기술자 휴 F. 매리어트라는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매리어트는 때때로 스윈튼에게 군사적 활용 가능성이 있는 기술 개발 소식을 전했는데, 그의 편지에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본 미국제 홀트 트랙터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었다. 매리어트는 이 기계가 운송에 유용할 것이라고 제안했고, 스윈튼은 이 정보를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군사 및 정치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당시 전쟁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는 단순히 운송 효율성의 문제로 여겨졌고, 스윈튼은 이 문제를 잊고 있었다. 전투 차량의 기반으로서 궤도형 트랙이라는 아이디어는 10월 19일 아침 생오메르에서 칼레로 운전하던 중에야 그에게 떠올랐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혼스비 앤 선즈의 데이비드 로버츠가 1911년부터 궤도형 차량에 대한 영국 군 관계자들의 관심을 얻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홀트 제조 회사의 벤저민 홀트는 1914년에 리처드 혼스비 앤 선즈로부터 "체인 트랙" 관련 특허를 4000 GBP에 사들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참호전 문제와 전선으로 보급품을 운송하는 어려움이 부각되자, 궤도형 트랙터의 견인력이 군의 관심을 끌었다. 영국 전쟁부는 올더숏에서 홀트 트랙터 시험을 진행했지만, 이들을 단지 중포 견인에만 적합하다고 보았다.
소령 스윈튼은 육군 전쟁 특파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1914년 11월, 그는 제국 국방 위원회의 비서인 모리스 행키 경에게 적의 기관총을 파괴할 수 있는 방탄 궤도형 차량의 건설을 제안했다. 1915년 7월, 스윈튼은 전쟁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고, 전적으로 영국 해군본부의 통제하에 있던 랜드십 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위원회 비서인 앨버트 제럴드 스턴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 스윈튼은 총리를 설득하여 1915년 8월 28일에 부서 간 회의를 소집하도록 했으며, 이는 육군이 랜드십 위원회의 작업에 협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육군이 요구하는 성능 사양을 작성한 것도 스윈튼이었다.
3.3. 전차 부대 훈련과 전술 수립
1916년에 스윈튼은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최초의 전차 부대 훈련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기갑전술에 대한 최초의 전술 지침을 수립했다. 전후 발명가 포상 왕립 위원회는 전차의 발명가가 포스터스의 전무이사인 윌리엄 트리튼 경과 월터 고든 윌슨 소령이라고 결정했지만, 스윈튼은 그의 공헌에 대해 1000 GBP를 수여받았다. 1918년까지 전쟁부는 2,100대의 홀트 트랙터를 확보했다.

1918년 4월, 미국 순회 중 스윈튼은 캘리포니아 스톡턴을 방문하여 벤저민 홀트와 그의 회사가 전쟁에 기여한 공로를 공개적으로 기리고, 발명가에게 영국의 감사를 표했다. 벤저민 홀트는 스톡턴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서 스윈튼 장군에 의해 인정받았다.
4. 전후 경력과 활동
스윈튼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군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민간, 학술 및 저술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4.1. 민간 및 학술 활동
1919년 스윈튼은 소장으로 은퇴했다. 이후 그는 공군성의 민간 항공 부서에서 근무했다. 1922년에는 시트로엥의 이사로 합류했다. 그는 1925년부터 193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칙클리 군사사 교수이자 올 솔즈 칼리지의 펠로우였으며,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영국 왕립전차군단의 연대장을 역임했다.
4.2. 저술 활동 및 편집
그는 1938년에 조지 뉴네스 사의 출판물인 『20년 후: 1914-18년의 전장: 그때와 지금』(Twenty Years After: the Battlefields of 1914-18: then and Now)을 편집했다. 이 출판물은 원래 20부로 기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42부까지 발행되었다. 잡지 형태의 이 출판물에는 전쟁 당시와 현재(약 1938년)의 프랑스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의 주요 저작 및 편집 활동은 다음과 같다:
- [https://archive.org/details/defenceofduffers0000swin/page/n3/mode/2up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전』](The Defence of Duffer's Drift, 1905, 가명: '중위 백사이트 포어소트')
-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210464 『목격자: 대전쟁의 특정 국면에 대한 개인적 회고록, 전차의 기원을 포함』](Eyewitness: Being Personal Reminiscences of Certain Phases of the Great War, Including the Genesis of the Tank, 1932)
- [https://archive.org/details/truthaboutporta00swingoog/page/n7/mode/2up 『아서 항에 대한 진실』](The Truth About Port Arthur, 1908, 편집자)
- [https://archive.org/details/russianarmyandj00swingoog/page/n12/mode/2up 『러시아군과 일본 전쟁, 1권』] & [https://archive.org/details/russianarmyandj01kurogoog/page/n12/mode/2up 『러시아군과 일본 전쟁, 2권』](The Russian Army and the Japanese War, Vol. I & II, 1909, 편집자)
- [https://archive.org/details/McCluresMagazineV34n06191004/page/n7/mode/2up?q=tank 『매클루어스 매거진』](McClure's Magazine)에 두 편의 기사 기고 (1910, 가명: '올레 룩-오이')
- [https://archive.org/details/greencurveothers0000swin/page/n3/mode/2up 『녹색 곡선』](The Green Curve, 1914, 가명: '올레 룩-오이')
- [https://archive.org/details/greattabdopeothe00swiniala/page/n5/mode/2up 『대단한 속임수』](The Great Tab Dope, 1916, 가명: '올레 룩-오이')
- [https://archive.org/details/tanksbyrequestwi00swin/page/n1/mode/2up 『전차들』](Tanks, 1918, 스트랜드 매거진 재인쇄)
- 『전쟁 연구』(The Study of War, 1926)
- 『내 어깨 너머』(Over My Shoulder, 1951, 사후 출판)
- 『동방 오디세이: 하르트와 오디온-두브레이유의 세 번째 탐험』(An Eastern Odyssey: The Third Expedition of Haardt and Audion-Dubreuil, 1935, 번역)
5. 개인 생활
스윈튼은 1897년 그레이스 루이스 클레이턴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그들의 딸 마거릿 엘리자베스는 1944년에 자전거를 타던 중 미국 육군 차량에 치여 40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심문 결과, 사고사로 판명되었다.
6. 사망
스윈튼은 1951년 1월 15일 옥스퍼드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수상 및 영예
스윈튼은 군 복무와 업적을 통해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영예를 받았다.
- 무공 훈장 (DSO, Companio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1900년 11월 29일, 남아프리카 작전 중 공로를 인정받아 수훈.
- 바스 훈장 (CB, Companion of the Order of the Bath): 1917년 2월 12일, 전쟁 중 공로를 인정받아 수훈.
- 대영 제국 훈장 (KBE, 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1923년 6월 2일, 국왕 탄신일 포상으로 수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십자 (Croix de Chevalier of the Legion of Honour, 프랑스): 1916년, 캠페인 중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훈.
8. 평가와 유산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전장 환경에서 전차의 필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아이디어를 실제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히 개념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홀트 트랙터와 같은 기존 기술을 군사적 목적으로 연결하고, 정부 및 군 당국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전차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도록 이끌었다. 또한, 최초의 전차 부대 훈련과 초기 장갑전술 지침을 수립함으로써 전차의 실제 전장 운용 가능성을 입증하고 미래 기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군사적 저서들, 특히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전』은 오늘날까지도 소규모 전술 훈련의 고전으로 활용되며, 그의 군사 사상과 전술적 통찰력이 시대를 초월하여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후 그의 민간 및 학술 활동 또한 그의 폭넓은 지식과 사회적 기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