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배경
세쓰코 비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은 그녀의 명문가 출신 배경과 국제적인 교육 환경이 어우러져 독특한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가족

세쓰코 비는 1909년 9월 9일 영국 월턴온템스에서 명문 마쓰다이라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친부는 마쓰다이라 쓰네오(松平恆雄일본어)로, 후에 주미 일본 대사 (1924년)와 주영 일본 대사 (1928년)를 거쳐 일본 궁내대신 (1936~1945년, 1946~1947년)을 지낸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다. 친모인 마쓰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일본어, 결혼 전 이름은 나베시마 노부코)는 나베시마 가문 출신이었다. 친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일본어)는 아이즈 번의 마지막 다이묘이자 도쿠가와 가문의 아이즈-마쓰다이라 분가의 수장이었다. 외할아버지인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일본어) 후작은 사가 번의 전 다이묘였다. 외숙모인 이쓰코(Itsuko, 1882~1976)는 고준 황후의 삼촌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자와 결혼했다. 이처럼 세쓰코는 기술적으로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양가 모두 일본 황실과 가까운 저명한 화족 귀족 가문과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후 수개월 만에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이후 중국 베이징, 톈진, 미국 워싱턴 D.C.의 영사관 및 대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 교육 및 결혼 전 활동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세쓰코는 부친이 주미 대사로 재직 중이던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시드웰 프렌즈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영어에 능통했으며, 때로는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학생을 일컫는 '귀국자녀'로 간주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세쓰코는 정명 황후에 의해 그녀가 평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배우자로 선택되었다. 세쓰코는 삼촌인 마쓰다이라 모리오 자작에게 정식으로 입양되어 친왕과의 신분 차이를 해소한 뒤 결혼했다.
세쓰코는 여자 학습원 초등과 3학년 때 가바야마 아이스케 백작의 둘째 딸인 시라스 마사코와 동급생이 되어 평생 친구로 지냈다. 마사코는 세쓰코를 너그럽고 학업에 열심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가바야마 아이스케는 훗날 정명 황후의 뜻을 받아 야스히토 친왕과 세쓰코의 혼례를 주선했다.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혼인 과정에서 발생했던 '궁중 모 중대 사건'과 구니노미야 가문과의 불화로 인해, 정명 황후는 둘째 아들인 야스히토 친왕의 배우자 선택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세쓰코가 건강하여 출산이 가능한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정명 황후의 기대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결혼 이전에 야스히토 친왕과 세쓰코 사이에 이미 만남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세쓰코 비 본인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를 부정했다.
2. 치치부노미야 친왕비 시절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의 결혼 이후 세쓰코 비는 황실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역할과 공무를 수행하며, 황위 계승 문제와 전시 상황 등 격동의 시기를 함께 겪었다.
2.1.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의 결혼
1928년 1월 18일 천황의 칙허가 내려졌고, 같은 해 9월 28일, 당시 19세였던 마쓰다이라 세쓰코는 쇼와 천황의 둘째 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결혼하여 지치부노미야 친왕비가 되었다. 당시 구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족의 배우자는 황족이나 화족이어야 했으나, 세쓰코의 친부인 쓰네오는 평민 신분이었다. 따라서 친부의 족적(族籍)으로는 황족에게 시집갈 수 없었기에, 그녀는 일단 숙부이자 해군 소장이었던 마쓰다이라 야스오 자작의 양녀가 되어 화족 신분을 얻은 후에 결혼식에 임했다.

'역적'이자 '조적'의 수괴였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손녀인 세쓰코 비가 황실에 입적한 것은 아이즈 번 출신 사족들의 복권으로 이어져 아이즈 사람들의 감격이 지대했다고 전해진다. 다이쇼 천황의 네 황자(쇼와 천황,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중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친왕비를 제외한 세 친왕비(고준 황후, 세쓰코 비, 다카마쓰노미야 기쿠코 친왕비)는 모두 거물 좌막파(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였으며, 이들 본인들도 이를 농담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성혼에 앞서, 야스히토 친왕의 생모인 정명 황후의 이름 '사다코'(節子)와 동자(同字)인 것을 피하기 위해, 황실과 인연이 깊은 이세국과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과 인연이 깊은 아이즈에서 한 글자씩 따와 동음이의어인 세쓰코(勢津子세쓰코일본어)로 개명했다.
결혼식 후인 같은 해 10월 17일, 세쓰코 비는 첫 궁중 제사인 신상제에 참석했으며, 부부는 그날 곧바로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 신궁과 후시미모모야마릉에 참배했다. 11월 10일에는 교토 어소에서 거행된 쇼와 천황의 즉위식에도 참석했다.
야스히토 친왕과 세쓰코 비는 사가 번의 초대 번주였던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후손으로, 삼종숙질 관계였다. 세쓰코 비의 유일한 임신은 유산으로 끝났고, 부부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하지만 여러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2.2. 황실 내 역할 및 공무

1937년 쇼와 천황을 대리하여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영국 조지 6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을 순방할 때 세쓰코 비가 동행했다. 이들은 수개월에 걸친 서유럽 순방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1937년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에 일본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이후 스웨덴의 구스타프 5세 국왕과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의 초청을 받아 이들 국가를 방문했다. 순방의 막바지에 야스히토 친왕이 뉘른베르크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을 때, 세쓰코 비는 스위스에 머물렀다.
세쓰코 비는 미국과 영국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영국 애호가(Anglophile)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추축국 편에 참전하자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2.3. 황위 계승 문제와 전시 생활
세쓰코 비가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결혼한 1928년 당시,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 사이에는 두 명의 황녀만 있었을 뿐 황자가 없었기에, 야스히토 친왕은 황위 계승 서열 1위였다.
당시 궁중에서는 여관(女官) 제도 폐지나 천황과 황후가 자녀를 직접 양육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다. 지치부노미야 부부의 결혼 다음 날, 황태후(정명 황후)는 세쓰코 비에게 기모노를 입고 자주 궁에 들를 것을 권했다. 1929년 9월 14일 세 번째 황녀인 다카노미야 가즈코 내친왕의 탄생에 앞서, 황태후는 황후에게 순산을 기원하는 선물로 도미를 보냈다. 그로부터 2주 후, 지치부노미야 부부의 결혼 1주년 축하를 위해 황태후는 야스히토 친왕의 어인(御인)인 '소나무'와 마쓰다이라 가문과 인연이 깊은 와카마쓰성(쓰루가성)에서 유래한 '학'이 노니는 모습을 직접 기른 명주솜으로 만들어 선물했다. 나아가 황태후는 두 편의 와카를 지어, 지치부노미야 부부가 자녀를 두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당시 야스히토 친왕은 '스포츠 황족'으로 인기가 높았고, 천황 부부에게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상황 때문에 한때 야스히토 친왕을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1933년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다섯 번째 자녀로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탄생하면서 후계자 문제는 해결되었다.

1937년 (쇼와 12년) 쇼와 천황의 명으로 야스히토 친왕이 영국 조지 6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포함한 유럽을 방문할 때 동행했다. 1939년 (쇼와 14년)에는 고준 황후의 칙령에 따라 세쓰코 비를 총재로 하는 결핵 예방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듬해 야스히토 친왕이 결핵에 걸리게 되었다. 세쓰코 비는 총재 취임을 위해 결핵에 대해 공부하던 중 야스히토 친왕의 증상이 결핵 초기 증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의사 진단에서는 확정하기 어려워 발견이 늦어졌다. 1941년부터 야스히토 친왕의 요양을 위해 고텐바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그녀는 남편 야스히토 친왕을 대신하여 공무를 수행하고 간병했지만, 야스히토 친왕은 1953년 1월 4일 폐결핵으로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과부 시절 및 말년
남편 야스히토 친왕의 사망 이후 세쓰코 비는 홀로 남아 왕가의 당주로서 공적 활동을 이어갔으며, 만년에는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업적을 남겼다.
3.1. 미망인으로서의 삶과 공적 활동
1953년 남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결핵으로 사망한 후, 세쓰코 비는 지치부노미야 가문의 당주로서 공무에 매진했다. 그녀는 결핵 예방회 총재직을 회가 설립된 1939년부터 1994년 문인친왕비 기코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55년간 역임했다. 그녀는 1957년 결핵 예방회 지치부노미야 기념 진료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그녀는 일본-영국 협회, 일본-스웨덴 협회의 명예 총재를, 일본 적십자사의 명예 부총재를 맡았다. 세쓰코 비는 여러 차례 해외를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에는 영국과 스웨덴을 방문했고 (프랑스와 덴마크에 잠시 들렀다), 1967년에는 일본-영국 협회 창립 75주년을 맞아 영국을 재방문했다. 1970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이은 황태자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1974년, 1979년, 1981년에도 각각 영국을 방문했다. 1985년에는 네팔을 방문하는 등 폭넓은 사회 봉사 활동과 국제 교류에 기여했다.
3.2. 사망 및 그 이후
세쓰코 비는 1986년 심근경색을 앓은 후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녀는 1995년 8월 25일 도쿄에서 85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는 도쿄도 분쿄구의 도시마가오카 묘지에 있는 야스히토 친왕의 무덤과 같은 곳에 치러졌다.
세쓰코 비의 사망으로 지치부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1996년 고텐바 별장은 고텐바시에 유증되었고, 정비 작업을 거쳐 2003년 지치부노미야 기념공원으로 개원했다. 또한, 지치부노미야 가문의 많은 유품은 황거 내에 위치한 산노마루쇼조칸에 기증되었다. 그녀의 자서전인 『은빛 봉봉그릇』(The Silver Drum: A Japanese Imperial Memoir)은 사후 출판되었으며, 도로시 브리턴이 영어로 번역했다.
4. 평가 및 영향
세쓰코 비는 평생 동안 다양한 공적 활동과 개인적 행보를 통해 사회에 긍정적 및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4.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세쓰코 비의 생애와 활동은 사회에 여러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녀는 특히 결핵 예방회 총재로서 55년간 헌신하며 1957년 결핵 예방회 지치부노미야 기념 진료소를 설립하는 등 일본의 결핵 예방 및 퇴치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일본-영국 협회, 일본-스웨덴 협회의 명예 총재와 일본 적십자사의 명예 부총재를 맡으며 국제 교류와 친선 증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영국과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국가를 수차례 방문하며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영국 애호가로서의 면모는 양국과의 관계 증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남편의 병을 계기로 결핵에 대해 깊이 공부하며 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을 보였고, 이는 그녀의 공적 활동의 진정성을 더했다.
4.2. 비판 및 논란
세쓰코 비는 고준 황후와 다카마쓰노미야 기쿠코 친왕비와 함께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과 쇼다 미치코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리에 스케마사 일기』에 따르면, 이들은 "황태자 전하의 혼담이 평민과 이루어진다는 것은 지당치 못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세쓰코 비의 어머니이자 정명 황후의 어용계(御用掛)를 지낸 마쓰다이라 노부코 역시 이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다. 마쓰다이라 노부코는 우익 단체를 동원하여 쇼다 가문에 혼담 철회를 압박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반대에는 미치코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과 동시에, 이 결혼이 전후 구 황족의 신적강하와 화족 제도 폐지 등에 이은 '상류 사회의 몰락'을 상징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세쓰코 비는 황실회의에서는 황족 의원 중 한 명으로서 결혼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편, 세쓰코 비의 어머니인 마쓰다이라 노부코는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자 비 이쓰코의 여동생이자 여자 학습원 동창회 조직인 '도키와카이'(常盤会)의 회장을 지냈으며, 구 황족·구 화족 부인들의 대표를 자처했고, 딸인 세쓰코 비와 함께 반(反)미치코파 구 황족·구 화족 부인들의 핵심 인물로 남아있었다.
5. 개인적 삶과 일화
세쓰코 비는 공적인 면모 외에도 다양한 개인적 삶과 일화를 가지고 있었다. 1971년 영국의 J. 하크니스사로부터 그녀의 이름을 딴 오렌지 핑크색 장미 '프린세스 치치부'가 헌정되기도 했다.
남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은 일본 알프스를 즐겨, 폐결핵 발병 전에는 종종 등산을 다녔다. 이때 현지 가이드로는 '가미코치의 쓰네사'로 불리던 우치노 쓰네지로(内野常次郎, 1884~1949)가 늘 동행했다. 산의 주인인 쓰네지로는 세쓰코 비를 "오카미상"(おかみさん, 부인)이라고 부르며 주변을 긴장시켰지만, 야스히토 친왕은 오히려 "쓰네 씨, 오카미상으로 괜찮아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세쓰코 비는 요시유키 아구리를 오랜 기간 주치의 미용사로 두었으며, 그녀의 사망 직전까지 고객과 미용사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야스히토 친왕이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의 대일본제국 육군 제8사단 보병 제31연대에 근무 중이던 1935년 말, 세쓰코 비의 임신 징후가 확인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6년 2.26 사건 발생 직후 친왕과 함께 히로사키에서 상경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기차 여행이 몸에 무리가 되어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녀는 평생 아이즈 번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바 료타로가 할아버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그린 소설 『왕성의 수호자』가 잡지에 연재되자마자 즉시 읽어보고, "할아버지의 입장을 처음으로 공정하게 써주셨다"는 말을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의 당주인 마쓰다이라 야스사다를 통해 시바에게 전했다고 한다.
요코하마시 네기시선 이소고역 앞에는 그녀의 시가 담긴 비석이 1970년 5월에 건립되었다.
6. 저서
세쓰코 비는 회고록과 여러 저작들을 남겼다.
- 『은빛 봉봉그릇』(銀のボンボニエール긴노 본보니에루일본어) (주부노토모사, 1991년)
- 고단샤 플러스 알파 문고판 『은빛 봉봉그릇 - 친왕의 비로서』 (1994년)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은 사후 『The Silver Drum: A Japanese Imperial Memoir』라는 제목으로 도로시 브리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 『추억의 쇼와 천황 - 가까이서 뵌 천황의 본모습』 (고분샤 갓파 북스, 1989년 12월) - 공저
- 『지치부노미야 담화집 - 황족으로 태어나서 Ⅱ』 - 「미국의 추억」 외 수록 (와타나베 출판, 2008년)
7. 영예
세쓰코 비는 일본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다.
8. 가족 관계 및 가계
세쓰코 비의 가계는 일본의 주요 다이묘 가문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세쓰코 비 | 부: 마쓰다이라 쓰네오 | 조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아이즈 번주) | 증조부: 마쓰다이라 요시타쓰 (다카스 번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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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모: 고모리 치요코 | |||
조모: 가와무라 나가코 | 증조부: 가와무라 겐베이 | ||
증조모: (불명) | |||
모: 마쓰다이라 노부코 | 조부: 나베시마 나오히로(사가 번주, 후작) | 증조부: 나베시마 나오마사(사가 번주) | |
증조모: 도쿠가와 다쓰코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 | |||
조모: 히로하시 나가코 | 증조부: 히로하시 다네요리 | ||
증조모: 요네 (가노조보) |
세쓰코 비의 부계 혈통은 닛타 씨와 도쿠가와/마쓰다이라 씨 사이의 검증 가능한 연결 고리에 일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진무 천황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진무 천황 (전설적인 조상)
- 게이타이 천황 (약 450년-534년)
- 긴메이 천황 (509년-571년)
- 비다쓰 천황 (538년-585년)
- 오시사카 황자 (약 556년-미상)
- 조메이 천황 (593년-641년)
- 덴지 천황 (626년-671년)
- 시키 황자 (미상-716년)
- 고닌 천황 (709년-786년)
- 간무 천황 (737년-806년)
- 사가 천황 (786년-842년)
- 닌묘 천황 (810년-850년)
- 몬토쿠 천황 (826년-858년)
- 세이와 천황 (850년-881년)
- 사다즈미 황자 (873년-916년)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894년-961년)
- 미나모토노 미쓰나카 (912년-997년)
-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968년-1048년)
-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988년-1075년)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1039년-1106년)
-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1091년-1155년)
- 미나모토노 요시시게 (1114년-1202년)
- 닛타 요시카네 (1139년-1206년)
- 닛타 요시후사 (1162년-1195년)
- 닛타 마사요시 (1187년-1257년)
- 닛타 마사우지 (1208년-1271년)
- 닛타 모토우지 (1253년-1324년)
- 닛타 도모우지 (1274년-1318년)
- 닛타 요시사다 (1301년-1338년)
- 닛타 요시무네 (1331년?-1368년)
- 도쿠가와 지카스에? (미상)
- 도쿠가와 아리치카 (미상)
- 마쓰다이라 지카우지 (사망 1393년?)
- 마쓰다이라 야스치카 (미상-1400년대)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약 1404년-1488/89년?)
- 마쓰다이라 지카타다 (1430년대-1501년)
- 마쓰다이라 나가치카 (1473년-1544년)
- 마쓰다이라 노부타다 (1490년-1531년)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1511년-1536년)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1526년-1549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년-1616년) - 초대 도쿠가와 쇼군
- 도쿠가와 요리후사 (1603년-1661년) - 초대 미토 번주
- 마쓰다이라 요리시게 (1622년-1695년) - 초대 다카마쓰 번주
- 마쓰다이라 요리유키 (1661년-1687년)
- 마쓰다이라 요리토요 (1680년-1735년) - 3대 다카마쓰 번주
- 도쿠가와 무네타카 (1705년-1730년) - 4대 미토 번주
- 도쿠가와 무네모토 (1728년-1766년) - 5대 미토 번주
- 도쿠가와 하루모리 (1751년-1805년) - 6대 미토 번주
- 마쓰다이라 요시나리 (1776년-1832년) - 9대 다카스 번주
- 마쓰다이라 요시타쓰 (1800년-1862년) - 10대 다카스 번주
-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1836년-1893년) - 9대 아이즈 번주
- 마쓰다이라 쓰네오 (1877년-1949년)
- 마쓰다이라 세쓰코 (1909년-1995년)
세쓰코 비의 친오빠인 도쿄 은행 회장 마쓰다이라 이치로는 도쿠가와 종가 17대 당주인 도쿠가와 이에마사의 딸 도요코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중 한 명이 도쿠가와 종가 18대 당주인 도쿠가와 쓰네나리이다.
또한 세쓰코 비는 의자매인 다카마쓰노미야 기쿠코 친왕비와 사종자매 관계였다. 이는 세쓰코 비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기쿠코 비의 할아버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육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