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앙브루아즈 토마의 생애는 음악적 재능의 발현과 교육자로서의 헌신,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성공으로 점철되었다.
1.1. 출생 및 초기 생애

토마는 1811년 8월 5일, 프랑스 메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음악 교사였던 마르탱 토마(1770년~1823년)와 잔 빌롬(1780년~1866년) 부부의 네 자녀 중 막내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음악 교사였으며, 이러한 가정 환경 덕분에 토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숙련된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다. 12세가 되던 1823년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후 그의 형 샤를은 첼리스트로서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앙브루아즈 토마는 17세가 되던 1828년에 형을 따라 파리로 가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1.2. 교육 및 초기 경력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토마는 피에르 지메르만에게 피아노를, 빅토르 두를렌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사사했다. 그는 이 과목들에서 1829년과 1830년에 1등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실력을 입증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장-프랑수아 르 쉬외르와 오귀스트 바르베로에게 작곡을 배웠다.
1832년, 토마는 두 번째 시도 끝에 칸타타 《헤르만과 케티》(Hermann et Ketty프랑스어)로 프랑스 최고의 음악상인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으로 그는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가 있는 빌라 메디치에서 3년간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로마 유학 중 그는 아카데미 원장이었던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와 친분을 쌓았는데, 둘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모두 존경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를 만나 격려를 받았고, 베를리오즈는 토마에 대해 호의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다. 로마 체류 기간 동안 토마는 피아노 삼중주, 현악 오중주, 현악 사중주와 같은 실내악곡과 여섯 곡의 가곡 모음집인 《이탈리아의 추억》(Souvenirs d'Italie프랑스어)을 작곡했다. 로마를 떠난 후 잠시 독일에서 머물다가 1835년 파리로 돌아와 무대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2. 주요 활동 및 작품
앙브루아즈 토마의 주요 활동은 오페라 작곡과 파리 음악원에서의 교육자 및 원장 역할로 나뉜다.
2.1. 오페라 작곡 활동

토마가 처음 작곡한 오페라는 1막 코미디인 《이중 사다리》(La double échelle프랑스어, 1837)였다. 이 작품은 베를리오즈로부터 "극도의 활기와 재치"로 칭찬받았으며,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247회 공연되었고, 이후 브뤼셀, 뉴올리언스, 베를린, 빈, 런던에서도 상연되었다.
그의 첫 장편 오페라 《섭정 시대의 가발장이》(Le perruquier de la Régence프랑스어, 1838) 이후 10년간 여섯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했으나, 이들 중 영구적인 인상을 남긴 작품은 없었다. 이 시기 그는 발레 《집시》(La Gipsy프랑스어, 1839)도 작곡했다. 토마의 첫 완전한 성공작인 3막 오페라 《르 카이드》(Le caïd프랑스어, 1849)는 음악학자 엘리자베스 포브스에 의해 《세비야의 이발사》와 《이탈리아의 터키인》의 혼합물로 묘사되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오페라 레퍼토리에 남아 있었으며, 이후 50년간 400회 이상 공연되었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을 위한 토마의 다음 작품인 《한여름 밤의 꿈》(Le songe d'une nuit d'été프랑스어, 1850) 또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조제프-베르나르 로지에와 아돌프 드 뢰벤이 쓴 이 대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셰익스피어의 존 팔스타프 경과 함께 등장인물로 나온다. 파리 초연 이후 유럽과 미국의 많은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뮤지컬 타임스》는 이 작품을 "작은 걸작"이라고 평했다. 자주 재공연되었지만 작곡가 사망 후 레퍼토리에서 사라졌다. 1850년 후반에 토마의 다음 오페라 《레몽》(Raymond프랑스어)이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오페라 레퍼토리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서곡은 인기 있는 관현악곡으로 자리 잡았다. 1851년, 작곡가 가스파레 스폰티니의 사망 후 토마는 그를 이어 아카데미 데 보자르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50년대에도 토마는 작곡을 계속하여 다섯 편의 오페라를 썼지만, 큰 인상을 남긴 작품은 없었다. 1860년대 초의 침체기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작품인 《미뇽》(Mignon프랑스어, 1866)을 작곡했다. 이 작품의 대본은 쥘 바르비에와 미셸 카레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바탕으로 썼다. 포브스는 이례적으로 토마가 잘 판단되고 극적으로 효과적인 대본의 이점을 누렸다고 평가했다. 소설에서는 미뇽이 죽지만, 오페라에서는 행복한 결말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당시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는 행복한 결말이 필수적이었다. 비제의 《카르멘》이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관습을 깨기까지는 9년이 더 걸렸다.) 이 작품의 강력한 초연 캐스트에는 타이틀 롤을 맡은 셀레스틴 갈리-마리가 포함되었는데, 그녀는 이후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 역을 창조한 유명한 가수였다.
토마는 다음 성공작인 《햄릿》(Hamlet프랑스어, 1868)에서도 출연진 운이 좋았다. 이 오페라에는 장-밥티스트 포르가 햄릿 역을, 크리스틴 닐손이 오필리아 역을 맡았다. 이 오페라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와 폴 뫼리스의 프랑스 각색본을 거쳐 카레와 바르비에가 대본으로 다시 각색한 것이다. 이 각색본은 발레 디베르티스망(오페라에서 필수적이었던)과 햄릿이 왕으로 추앙받는 행복한 결말을 포함하여 원작의 패러디로 여겨졌지만, 이 작품은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영어권 비평가들은 대본에 대해 혹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간헐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후 오필리아 역을 맡은 가수로는 엠마 칼베, 엠마 알바니, 넬리 멜바, 메리 가든 등이 있으며, 햄릿 역으로는 빅토르 마우렐, 티타 루포, 마티아 바티스티니, 그리고 최근에는 셰릴 밀네스, 토마스 앨런, 토마스 햄프슨 등이 있었다. 토마는 이미 음악적 보수주의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햄릿》의 악보는 악기 편성에 색소폰을 포함했다는 점에서 한 가지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토마의 후기 생애에는 학문적 경력이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크게 앞질렀다. 《햄릿》 이후 그는 단 하나의 오페라만 더 작곡했는데, 그것은 《리미니의 프랑수아즈》(Françoise de Rimini프랑스어, 1882)였다. 이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규 오페라 레퍼토리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2.2. 교육자 및 음악원장

1856년, 토마는 다니엘 오베르가 원장으로 있던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40년간 교수와 원장으로 재직하며 죽을 때까지 음악원에 몸담았다. 이 기간 동안 그의 학생 중에는 작곡가 쥘 마스네, 가스통 세르페트, 그리고 토마의 경력 말기에는 조르제 에네스쿠 등이 있었다. 미래의 학자로는 테오도르 뒤부아와 샤를 르네프뵈가 있었고, 토마의 제자 중 지휘자로는 에두아르 콜론과 데지레-에밀 앵겔브레히트가 있었다. 그 외에도 루이-알베르 부르고-뒤쿠드레, 샤를-알렉시 쇼베, 루이 디에메르, 옥타브 푸케, 알베르 라비냐크, 샤를-에두아르 르페브르, 이지도르-에두아르 르구이, 이지도르 로토, 올리비에 메트라, 요한 페터 셀메르, 피아니스트이자 교사인 라울 푸뇨,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랜시스 토메, 그리고 사르수엘라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헤로니모 히메네스 등이 토마의 제자였다.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6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토마는 프랑스 국민위병에 자원 입대했다. 이듬해 오베르가 사망 직전 음악원 원장직에서 사임하자, 토마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베르의 후임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교육부 장관 쥘 시몽은 토마에게 직책을 제안하는 서한에서 "당신은 그 직책에 너무나 명백하게 적합하여, 내가 당신을 지명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자리였던 곳에서 당신을 해고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원장으로서 토마는 매우 완고하고 보수적인 체제를 운영했다. 오베르, 프로멘탈 할레비, 특히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음악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모범으로 간주되었고, 장-필리프 라모와 같은 초기 프랑스 음악이나 리하르트 바그너를 포함한 현대 음악은 교육 과정에서 엄격하게 배제되었다. 토마는 진보적인 음악가들이 음악원 교수진으로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세자르 프랑크의 경우 1872년 토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명되었지만, 가브리엘 포레의 음악원 임명은 토마의 사망 이후로 지연되었다.
반면에 토마는 음악원 운영에 있어서 혁신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는 수업 수를 늘리고, 교수진의 근무 조건을 개선했으며, 시창, 초견, 의무적인 오케스트라 연습을 포함하도록 교육 과정을 확장했다. 토마 재임 기간 동안 교수진에는 작곡가 프랑크, 테오도르 뒤부아, 쥘 마스네, 에르네스트 기로 등이 있었고, 가수로는 폴린 비아르도와 로맹 뷔신 등이 있었다.
1889년 오페라 극장에서는 토마의 발레 《폭풍》(La tempête프랑스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각색한 또 다른 작품)이 공연되었으나,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1894년,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미뇽》의 1,000번째 공연이 열린 후, 80대 노인이었던 토마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주세페 베르디에게 무대 위에서 포옹을 받았으며,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최고 등급인 그랑 크루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3. 음악적 특징 및 평가
앙브루아즈 토마의 음악은 당대 프랑스 오페라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독특한 스타일과 비평적 평가를 받았다.
3.1. 음악적 스타일 및 영향

토마는 다양한 스타일로 작곡할 수 있는 절충주의적 작곡가였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페르디난드 에롤드와 오베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음악학자 엘리자베스 포브스는 《르 카이드》가 그의 작품 중 처음으로 진정한 독창성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조아키노 로시니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후기 작품에서도 토마의 음악은 여전히 파생적인 면이 있었다. 포브스는 《프시케》(Psyché프랑스어, 1857)를 샤를 구노의 《사포》의 "열등한 모방작"으로, 《베네치아 카니발》(Le carnaval de Venise프랑스어, 1857)을 빅토르 마세를 모방한 작품으로 언급했다. 그녀는 토마가 최선을 다했을 때(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는 즐겁고 개성 있는 음악을 썼으며, "매우 황홀한"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능했고, 중요한 역할의 성격을 음악적으로 강하고 명확하게 전달했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토마가 《미뇽》과 《햄릿》 외에 다른 무대 작품을 쓰지 않았다면, 그는 19세기 프랑스 오페라 작곡가 중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더 널리 인정받았을 것이다."
3.2. 비평 및 평가
에마뉘엘 샤브리에의 "좋은 음악, 나쁜 음악, 그리고 앙브루아즈 토마의 음악이 있다"는 비꼬는 말은 자주 인용되지만, 음악학자 리처드 랭엄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샤브리에가 토마의 음악이 나쁜 것보다 더 나쁘다는 의미였는지, 좋고 나쁜 것의 중간이라는 의미였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로브 음악 사전》 초판(1889)에서 귀스타브 슈케는 토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무대에 대한 타고난 본능과 가장 다양하고 상반된 극적 상황을 해석하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그의 기술은 완벽하며, 다른 음색의 악기들을 조합하고 새로운 음향 효과를 얻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면서도 결코 목소리를 압도하지 않는다. 약간 더 대담하고 개성적인 멜로디가 있었다면, 이 숙련된 작가, 예술가, 시인(모든 분위기를 마스터하고 우울한 사색에서 가장 활기찬 농담으로 번갈아 가며 넘어가는)은 현대 작곡가 학파의 선두 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스타일의 순수성과 다양성이 그를 일류 극 작곡가로 만든다."
2001년 《그로브 음악 사전》에서 랭엄 스미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오페라의 맥락에서 토마는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상상력이 풍부한 혁신가이자 음악적 성격 묘사의 대가였다"고 썼다. 랭엄 스미스는 수년간의 소외 끝에 토마의 작품이 20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미뇽》과 《햄릿》의 주요 공연과 함께 상당한 재조명을 받았다고 결론지었다.
4. 작품 목록
앙브루아즈 토마는 20여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4.1. 오페라
- 《이중 사다리》(La double échelle프랑스어, 1837)
- 《섭정 시대의 가발장이》(Le perruquier de la Régence프랑스어, 1838)
- 《집시》(La gipsy프랑스어, 1839) - 발레, 2막만 작곡
- 《카르마뇰라 백작》(Le comte de Carmagnola프랑스어, 1841)
- 《미노르카의 병사》(Le minaudière프랑스어, 1843)
- 《콜레트와 피에르》(Colette et Pierrot프랑스어, 1846)
- 《베티》(Betty프랑스어, 1846) - 발레, 2막
- 《카이유》(Le caïd프랑스어, 1849)
- 《한여름 밤의 꿈》(Le songe d'une nuit d'été프랑스어, 1850)
- 《레몽》(Raymond프랑스어, 1851)
- 《셀리멘의 법정》(La cour de Célimène프랑스어, 1855)
- 《프시케》(Psyché프랑스어, 1857)
- 《베네치아 카니발》(Le carnaval de Venise프랑스어, 1857)
- 《엘비르의 로망》(Le roman d'Elvire프랑스어, 1860)
- 《미뇽》(Mignon프랑스어, 1866)
- 《햄릿》(Hamlet프랑스어, 1868)
- 《프랑수아즈 드 리미니》(Françoise de Rimini프랑스어, 1882)
- 《폭풍》(La tempête프랑스어, 1889) - 발레, 3막
4.2. 비오페라 성악곡 (세속)
- 《헤르만과 케티》(Hermann et Ketty프랑스어, 칸타타, 1832)
- 《실비오 펠리코》(Silvio Pellico프랑스어, 1831, 소실)
- 《넬 이지니아 다스티》(Nel iginia d'Asti프랑스어, 스케나 에 아리아, 1834)
- 《넬 포스카리니》(Nel Foscarini프랑스어, 2성부, 오케스트라, 1834)
- 《이탈리아 이중창-테레사》(Duos Italiens-Téresa프랑스어, 2성부, 오케스트라, 1834)
- 《콜럼버스 이야기》(Storia di Colombo프랑스어, 스케나 에 두엣토, 성악, 오케스트라, 1834)
- 《마리아와 레스터》(Maria e Leicester프랑스어, 2성부, 피아노, 1834)
- 《델라 피아》(Della Pia프랑스어, 스케나 에 로망스, 1834)
- 《수도원의 자선》(La charité du couvent프랑스어, 칸타타, 1843)
- 《르 쉬외르에게 바치는 헌정》(Hommage à Lesueur프랑스어, 칸타타, 1852)
- 《보엘디외에게 바치는 헌정》(Hommage à Boieldieu프랑스어, 칸타타, 1875)
- 《가자, 가자!》(Via, via!프랑스어, 베네치아 칸초네, 4성부, 피아노, 미상)
- 《혼성 합창을 위한 합창 장면》(Scènes chorales프랑스어, 1853)
- 《민족의 화합》(L'harmonie des peuples프랑스어, c. 1855)
- 《사냥꾼 합창》(Choeur des gardes-chasses프랑스어, c. 1857)
- 《친구들의 노래》(Le chant des amis프랑스어, 1858)
- 《프랑스 가수들에게 경배를》(Salut aux chanteurs de la France프랑스어, 1859)
- 《프랑스》(France프랑스어, 1860)
- 《대장장이》(Le forgeron프랑스어, 1861)
- 《티롤》(Le Tyrol프랑스어, 1862)
- 《부빈 궁수들》(Les archers de Bouvines프랑스어, 1863)
- 《썰매》(Les traîneaux프랑스어, 1864)
- 《로마의 카니발》(Le carnaval de Rome프랑스어, 1864)
- 《평화의 사원》(Le temple de la paix프랑스어, 1867)
- 《파리!》(Paris!프랑스어, 보댕, 1867)
- 《안식일 밤》(La nuit du sabbat프랑스어, 1869)
- 《대서양》(L'Atlantique프랑스어, 미상)
- 《애국가》(Chant patriotique프랑스어)
4.3. 비오페라 성악곡 (종교)
- 《레퀴엠 미사》(Messe de Requiem프랑스어, 합창, 오케스트라, 1833)
- 《아베 베룸》(Ave verum프랑스어, 모차르트 편곡, c. 1835)
- 《오 살루타리스》(O salutaris프랑스어, 모테트, SAA, 오르간, 1836)
- 《숩 투움 프레시디움》(Sub tuum praesidium프랑스어, 모테트, SSA, 오르간, 1836)
- 《베니 스폰사 크리스티》(Veni sponsa Christi프랑스어, 모테트, TTBB, 오르간, 1836)
- 《장엄 미사》(Messe solennelle프랑스어,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 1852)
- 《피에 예수》(Pie Jesu프랑스어, 테너, 오르간, 1864, 1896)
- 《복된 죽은 자들》(Beati mortui프랑스어, 성악, 오르간)
- 《아뉴스 데이》(Agnus Dei프랑스어, 3성부, 오르간, c. 1895)
- 《오르페옹 미사》(Messe de l'Orphéon프랑스어, TTBB, 미상, 크레도만; 아돌프 아당 및 프로멘탈 할레비와 공동 작업)
- 《아베 마리아》(Ave Maria프랑스어, SAT, 오르간, 미상)
- 《아뉴스 데이》(Agnus Dei프랑스어, 3성부, 오르간)
4.4. 가곡
(독창 및 피아노 반주, 별도 명시된 경우 제외)
- 《이탈리아의 추억: 6개의 이탈리아 및 베네치아 로망스》(Souvenirs d'Italie: 6 romances italiennes et venitiennes프랑스어, 1835)
- 《안녕 아름다운 날들》(Adieu les beaux jours프랑스어, c. 1835)
- 《달콤한 피난처》(Doux abri프랑스어, c. 1835)
- 《조국》(La Patrie프랑스어, c. 1835)
- 《영어 가사에 붙인 로망스》(Romance sur les paroles anglaises프랑스어, c. 1835)
- 《독일어 가사에 붙인 로망스》(Romance sur les paroles allemandes프랑스어, c. 1835)
- 《당신이에요》(C'est vous프랑스어, 1840)
- 《성모 마리아》(La vierge Marie프랑스어, c. 1840)
- 《오세요》(Viens프랑스어, c. 1840)
- 《아, 내 말에》(Ah sur ma parole프랑스어, 1842)
- 《수도원의 자선》(La charité du couvent프랑스어, 1843)
- 《아름다운 스페인 광녀》(Belle folle espagnole프랑스어, 1844)
- 《천사와 필멸자》(Ange et mortel프랑스어, c. 1855)
- 《세레나데》(Sérénade프랑스어, c. 1861)
- 《작은 양배추》(Le petit chou프랑스어, c. 1861)
- 《아, 내 말에》(Ah sur ma parole프랑스어, c. 1862)
- 《저녁》(Le soir프랑스어, 1869)
- 《로이스의 목동》(Le berger de la Reuss프랑스어, c. 1870)
- 《눈꽃》(Fleur de neige프랑스어, 1880)
- 《믿음》(Croyance프랑스어, 2성부, 1885)
- 《시계초》(Passiflore프랑스어, 1887)
- 《마르기안의 노래》(Chanson de Margyane프랑스어, 1896)
- 《눈을 낮추세요》(Baissez les yeux프랑스어, 1897)
- 《추억》(Souvenir프랑스어, 1900)
- 《사랑스러운 봄》(L'amiable printemps프랑스어, 1900)
-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Ainsi va le monde프랑스어, 1903)
- 《아름다운 이여, 자비를 베푸소서》(Belle, ayez pitie프랑스어, 미상)
- 《그것이 행복이다》(C'est le bonheur프랑스어, 미상)
- 《야머스 광녀》(La folle d'Yarmouth프랑스어, 미상)
- 《사랑스러운 봄》(L'aimable printemps프랑스어, 미상)
4.5. 관현악곡
- 서곡 (1832, 소실)
- 《화려한 환상곡》(Fantaisie brillante프랑스어, 피아노, 오케스트라/현악 사중주, 미상, c. 1836년 피아노용으로 편곡)
- 《종교 행진곡》(Marche religieuse프랑스어, 1865)
- 《시편 찬송가》(Chant du psaume laudate프랑스어, 바이올린, 오케스트라, 1883)
-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프랑스어, 군악대용 편곡, 1887)
4.6. 발레
- 《집시》(La gipsy프랑스어, 3막 발레 중 2막, 1839)
- 《베티》(Betty프랑스어, 2막, 1846)
- 《폭풍》(La tempête프랑스어, 환상 발레, 3막, 1889)
4.7. 실내악
- 현악 사중주, 작품1 (1833)
- 피아노 삼중주, 작품3 (c. 1835)
- 현악 오중주, 작품7 (c. 1839)
- 로망스, 바이올린, 피아노 (c. 1835)
- 《콩쿠르 작품》(Morceau프랑스어 [de concours], 트롬본, 피아노, 1848)
- 《콩쿠르 작품》(Morceau프랑스어 [de concours], 바이올린, 첼로, 1850)
- 《추억》(Souvenir프랑스어, 피아노, 바이올린/비올라, 미상)
- 《뱃노래》(Barcarolle프랑스어, 플루트/바이올린, 피아노)
4.8. 피아노 독주곡
- 《6개의 특징적인 왈츠 형식의 카프리스》(6 caprices en forme de valses caractéristiques프랑스어, 작품4, 1835)
- 《부재》(L'absence프랑스어, 녹턴, 작품8, c. 1835)
- 《안단티노》(Andantino프랑스어, c. 1835)
- 《왈라키아 마주르카》(Mazurka valaque프랑스어, c. 1835)
- 《스코틀랜드 선율에 의한 환상곡》(Fantaisie sur un air favori écossais프랑스어, 작품5, 1836)
- 《살롱 왈츠》(Valse de salon프랑스어, 1851)
- 《칸타빌레》(Cantabile프랑스어, 1865)
- 《도둑맞은 것》(La dérobée프랑스어, 브르타뉴 선율에 의한 환상곡, 1888)
- 《몽상》(Rêverie프랑스어, 미상)
- 《봄》(Printemps프랑스어, 미상)
4.9. 오르간 독주곡
- 《압솔루트》(Absoute프랑스어, 1857)
- 《오페르투아르》(Offertoire프랑스어, 1858)
- 《기도》(Prière프랑스어, 1859)
- 3개의 전주곡 (1860)
- 《엘레바치오네》(Elevazione프랑스어, 미상)
- 《애가》(Dirge프랑스어, 미상)
- 10개의 전원곡 (미상)
5. 개인사
토마는 1878년 엘비르 르모리(1827년~1910년)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토마보다 오래 살았다.
6. 사망
토마는 1896년 2월 12일, 84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 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폐울혈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테오도르 뒤부아가 파리 음악원 원장직을 이어받았다.
7. 유산 및 영향
앙브루아즈 토마의 음악과 교육 철학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며 재평가되었다.
7.1. 후대에 미친 영향

토마의 오페라는 20세기 대부분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지만, 최근 수십 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미뇽》과 《햄릿》의 주요 공연과 함께 상당한 재조명을 받으며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오페라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음악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은 간결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효과적인 성격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엑토르 베를리오즈, 샤를 구노, 조르주 비제, 쥘 마스네 등 당대 주요 작곡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파리 음악원 원장으로서 토마는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한 개혁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체제는 보수적이었고 새로운 세대 작곡가들에게는 비우호적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같은 현대 음악을 교육 과정에서 엄격히 배제하려 했으며, 세자르 프랑크나 가브리엘 포레와 같은 진보적인 음악가들이 음악원 교수진으로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는 그의 음악적 유산과 함께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8. 관련 항목
- 프랑스 음악
- 오페라
- 파리 음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