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앙리 랑글루아(Henri Langlois앙리 랑글루아프랑스어, 1914년 11월 13일 ~ 1977년 1월 13일)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기록 보관자이자 시네필로, 영화 보존 분야의 선구자이다. 그는 조르주 프랑쥐 및 장 미트리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공동 설립했으며, 1938년에는 국제영화자료원연맹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랑글루아는 전후 시대에 시네마테크의 수석 기록 보관자인 로테 아이스너와 긴밀히 협력하며 영화와 영화사를 보존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파리에서 진행한 영화 상영회를 통해 작가 이론 발상의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등 프랑스 누벨 바그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 영화인들은 그를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랑글루아는 독특한 방식으로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며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나, 1974년에는 "영화 예술에 대한 헌신, 과거를 보존하는 데 기여한 막대한 공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의 삶은 문화적 유산 보존과 예술적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특히 1968년 문화부 장관에 의한 해임 시도와 이에 맞선 대규모 복직 운동은 영화계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앙리 랑글루아는 1914년 11월 13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스미르나(현 튀르키예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해외에 거주하던 프랑스인이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랑글루아가 태어날 무렵, 전 세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격랑 속에 있었다. 스미르나는 오스만 제국의 옛 그리스 도시였으며,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1918년 중앙 동맹국들이 패배하고 1920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스미르나가 그리스에 편입되자, 새로 건국된 튀르키예 공화국은 그리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고, 스미르나가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방을 재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스미르나는 1922년 9월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전체 그리스인 인구는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유럽인 역시 도시를 떠나야 했고, 랑글루아 가족 또한 프랑스로 귀향하여 파리 9구의 라페리에르 가에 정착했다. 잊혀질 위기에 처한 영화 필름을 구하고자 했던 랑글루아의 열정은 이처럼 고향 스미르나가 전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2. 교육 및 영화계 입문
앙리 랑글루아는 파리 암스테르담 가에 위치한 프티 리세 콩도르세(Petit Lycée Condorcet프티 리세 콩도르세프랑스어)에서 학업을 수행했다. 1933년,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법학부에 입학시키려는 것에 반대하여 일부러 바칼로레아 시험에 백지를 제출하며 낙제했고, 대신 영화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랑글루아는 "나는 가족의 골칫거리였다. 나는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했다"고 회고하며 영화에 대한 강한 열정을 드러냈다.
시험 낙제 후, 랑글루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쇄업자 일을 주선했고, 이 일을 통해 랑글루아는 두 살 위인 조르주 프랑쥐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프랑쥐는 랑글루아를 두고 "그를 통해서 무성 영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둘은 합심하여 단편 영화 <르 메트로>(Le Métro르 메트로프랑스어, 1934년)를 공동 감독하기도 했다.
1935년, 앙리 랑글루아는 폴 오귀스트 아를레가 소유한 주간지 <라 시네마토그라피 프랑세즈>(La Cinématographie française라 시네마토그라피 프랑세즈프랑스어)에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성 영화의 대두가 무성 영화를 소멸시킬 것이므로, 무성 영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10월, 랑글루아는 여성 영화 클럽에서 35세의 영화 역사가 장 미트리를 만났고, 이 영화 클럽을 무성 영화 전문 클럽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회원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클럽은 1935년 12월 세르클 뒤 시네마(Cercle du Cinéma세르클 뒤 시네마프랑스어)로 이름을 바꾸었다. 랑글루아는 "이 클럽은 영화 상영만을 위한 클럽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토론하는 클럽이 아니다. 논쟁은 의미 없다"고 강조했다. 영화 상영으로 얻은 수익은 첫 영화 컬렉션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폴 오귀스트 아를레는 1.00 만 FRF를 지원하여 랑글루아와 프랑쥐는 10여 편의 35mm 필름 영화 복제 필름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시네마테크가 설립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0세의 나이에 앙리 랑글루아는 영화계의 명망 있는 전문가이자 영화 분야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춘 인물로 인정받았다.
3.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 및 활동
앙리 랑글루아의 가장 핵심적인 업적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영화 필름의 보존 활동에 있다.
3.1.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
1936년 9월 2일, 앙리 랑글루아, 조르주 프랑쥐, 장 미트리는 파리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영화 박물관이자 상영관으로 기획되었으며, 본부는 파리 12구 마르술랑 가 29번지에 위치했다. 폴 오귀스트 아를레가 초대 회장을 맡았고, 앙리 랑글루아와 조르주 프랑쥐는 서기장으로, 마리 메르송은 주요 재정 지원자로, 장 미트리는 기록 보관자로 활동했다. 1937년부터 시네마테크는 뤼미에르 형제, 카망카, 파테, 고몽 등 거장들의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많은 영화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3.2. 영화 컬렉션 및 보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컬렉션은 1936년 설립 당시 10편의 영화로 시작하여, 1970년대 초에는 6만 편 이상의 영화를 소장하게 되었다. 랑글루아는 단순한 기록 보관자를 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수많은 영화들을 구원했다. 그는 영화 필름뿐만 아니라 카메라, 영사기, 영화 의상, 세트, 각본, 포스터, 빈티지 극장 프로그램 등 영화와 관련된 모든 품목을 보존 대상으로 삼았다. 1972년에는 그가 수집한 방대한 유물들을 샤이요궁 내 영화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이는 약 3219 m (2 mile)에 달하는 영화 유물과 기념품을 포함했다. 이 컬렉션은 1997년 화재로 인해 손상을 입어 재배치되었다.
랑글루아는 특히 보존이나 복원만큼이나 필름 상영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소장된 필름의 대부분은 보존 기간이 짧고 손상되기 쉬운 셀룰로이드 재질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보존을 위해서는 엄격하게 관리되는 환경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랑글루아의 보존 방식은 종종 비전통적이었고, 기록 관리 방식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9년 7월 10일, 시네마테크는 질산염 필름 화재로 컬렉션의 일부를 소실했는데, 화재의 원인과 손실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1959년 9월에는 랑글루아가 공동 설립에 참여했던 국제영화자료원연맹과 시네마테크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이 분쟁은 랑글루아 사망 후 몇 년이 지나서야 해결되었다. 1945년에는 초현실주의 영화감독 자크 브뤼니우스의 처제인 사진작가 드니즈 벨롱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대한 독특한 르포를 남겼는데, 랑글루아가 칸막이 관람석뿐만 아니라 마차가 다니는 길거리까지 필름 틀로 가득 채웠던 모습을 기록하기도 했다.
3.3.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하에서,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쥘 페리관에서 영화 상영을 계속했으며, 동료들과 함께 수많은 영화들이 파괴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힘썼다. 영화가 잊혀지는 것에 맞서 영화를 보존하고자 했던 랑글루아의 열망은, 그의 출생지인 스미르나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심각하게 약탈당했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4. 영화계에 미친 영향
앙리 랑글루아는 프랑스 영화계, 특히 프랑스 누벨 바그 운동과 영화 이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프랑스 누벨 바그에 대한 영향
랑글루아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알랭 레네, 에릭 로메르 등 프랑스 누벨 바그 감독들과 그 이후 세대의 영화감독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들 젊은 영화인들은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목욕하듯이' 관람하며 성장했으며, 종종 만원 상영회의 맨 앞줄에서 발견되곤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시네마테크의 아이들"(les enfants de la cinémathèque시네마테크의 아이들프랑스어)이라고 칭하며, 자신들만의 시네마 클럽을 만들고,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로 활동하다가 결국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랑글루아와 시네마테크의 명성은 높아져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4.2. 영화 이론 및 비평에 대한 기여
1950년대 파리에서 랑글루아가 주최한 영화 상영회는 작가 이론의 발상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영화에 대한 '낭만적인' 태도는 영국 국립 영화 기록 보관소의 어니스트 린드그렌이 사용한 '과학적인' 접근 방식과는 대조적이었다. 랑글루아의 상영 방식과 비평적 관점은 영화 이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2년, 앙리 랑글루아는 미셸 마르도르와 에릭 로메르와 함께 <카이에 뒤 시네마> 135호(1962년 9월)에서 보존, 복원, 철학에 관한 심도 깊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 인터뷰의 출판은 시네마테크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5. 앙리 랑글루아 사건 (1968년)
앙리 랑글루아 사건(affaire Langlois랑글루아 사건프랑스어)은 1968년 프랑스 문화계를 뒤흔든 중요한 사건으로, 그의 해임 시도와 이에 맞선 대규모 반발, 그리고 복직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5.1. 해임과 복직 과정
1968년 2월,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는 랑글루아의 오만함과 박물관에 대한 독단적인 운영 방식을 이유로 그를 해임하려 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랑글루아의 방만한 경영과 보관된 필름 재고의 부적절한 관리였다. 2월 7일, 국고 지원을 받는 시네마테크 이사회는 랑글루아를 해임하고 피에르 바르뱅으로 교체했다. 이에 프랑스 국내외에서 거센 비난과 반발이 일어났고, 심지어 그해 권위 있는 칸 영화제마저 항의의 표시로 중단되었다. 파리에서는 낭테르 대학교의 학생 운동가 다니엘 콘벤디트를 비롯한 수많은 시위대가 동참했다. 알프레드 히치콕, 구로사와 아키라, 페데리코 펠리니, 지아니 세라 등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로부터 랑글루아의 복귀를 요구하는 전보가 쇄도했다. 파리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피에르 레오, 알랭 레네, 장 뤽 고다르, 장 마레 등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옹호 위원회"를 결성하여 랑글루아의 복직을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당초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프랑스 정부는 4월 22일, 격렬한 논쟁 끝에 랑글루아와 해고된 직원들을 모두 원래 직책으로 복직시키는 것으로 영화인들의 전면적인 승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랑글루아의 자의적인 운영으로 인한 시네마테크의 문제점들도 수면 위로 드러나, 랑글루아 개인의 카리스마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지배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랑글루아 사건은 이후 발생한 오월 혁명의 전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68년 자신의 영화 <훔친 키스>를 랑글루아에게 헌정했으며, 영화는 문이 닫히고 잠긴 시네마테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6. 후기 생애 및 수상
랑글루아는 말년까지 영화계에 대한 헌신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적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6.1. 주요 전시 및 프로젝트
1970년, 랑글루아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시네마테크"에 시네마테크 컬렉션에서 70편의 영화를 직접 선정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시티 센터 오브 뮤직 앤 드라마가 공동 후원한 이 전시회는 1970년 7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35일 연속으로 매일 저녁, 영화 매체의 첫 75년 동안의 영화 70편을 상영했다. 랑글루아는 공식 영화 산업 작품뿐만 아니라 현대 및 초기 아방가르드 감독들의 작품을 포함하여 영화 제작 역사에 중요한 의미와 기여를 한 영화들을 선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미국에서 개최된 영화 전시회 중 가장 다양했으며, 박물관의 첫 주요 영화 프로젝트였다.
또한 랑글루아는 1966년 2월 1일부터 14일, 그리고 3월 14일부터 27일까지 일본 도쿄의 소게쓰 회관에서 열린 "세계 전위 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제의 프로그램을 직접 선정했으며, 상영 프린트의 상당수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소유의 것이었다. 일본 방문 중 랑글루아는 구마이 게이 감독의 <일본열도>와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의 <오소레산의 여인>을 감상했으며, 귀국 후 <일본열도>를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6.2.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
1974년 4월 2일,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에서의 평생에 걸친 업적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특별상(제46회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영화 예술에 대한 그의 헌신, 과거를 보존하는 데 기여한 막대한 공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7. 사망 및 유산
앙리 랑글루아의 사망 이후에도 그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영화 보존 분야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다.
7.1. 사망
앙리 랑글루아는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 3년 후인 1977년 1월 13일, 병으로 인해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시네마테크의 시스템을 미국 등 다른 나라에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유해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7.2. 기념 및 유산

파리 13구에는 앙리 랑글루아의 이름을 딴 '앙리 랑글루아 광장'(Place Henri Langlois플라스 앙리 랑글루아프랑스어)이 조성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고금 동서양 영화의 한 장면들이 콜라주되어 새겨져 있으며, 장 콕토가 그를 기리며 남긴 "우리 보물을 지키는 용"(Ce dragon qui veille sur nos trésors세 드라공 키 베이으 쉬르 노 트레조르프랑스어)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랑글루아의 삶과 업적은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제가 되었다.
- 1970년, 로베르토 게라와 에일라 허숀이 제작 및 감독한 영어 다큐멘터리 <앙리 랑글루아>가 그의 일생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는 잉그리드 버그만, 릴리안 기시, 프랑수아 트뤼포, 카트린 드뇌브, 잔느 모로 등과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의 1994년 다큐멘터리 <시민 랑글루아>는 아마추어 수집가에서 누벨 바그의 영웅이자 스타들의 친구가 되기까지의 랑글루아의 여정을 에세이 형식으로 보여준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2003년 영화 <몽상가들>은 랑글루아의 해임 사건을 다루며 당시의 실제 푸티지를 포함하고 있다.
- 2004년, 자크 리샤르 감독은 랑글루아의 경력을 다룬 3시간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앙리 랑글루아: 시네마테크의 유령>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1936년 시네마테크 설립부터 1977년 랑글루아 사망까지의 위대한 업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친구, 동료, 학자들뿐만 아니라 시몬 시뇨레,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미셸 아르놀드와 같은 영화계 거장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 2014년, 시네마테크는 <앙리 랑글루아: 누가 그를 보았는가>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녜스 바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로만 폴란스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구로사와 기요시, 빔 벤더스 등 13명의 영화감독이 랑글루아와 그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랑글루아가 사망한 해인 1977년,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자신의 영화 <아메리칸 프렌드>를 랑글루아에게 헌정하며 초기 영화에 대한 수많은 오마주를 바쳤다.
8. 관련 항목
- 로테 아이스너
- 카와키타 카시코
9. 외부 링크
- [http://www.cinematheque.fr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공식 웹사이트]
- [http://www.bifi.fr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BiFi (영화 도서관) 웹사이트]
- [https://web.archive.org/web/20091207012012/http://www.indianauteur.com/?p=702 앙리 랑글루아의 여정과 영향 추적 (Indian Auteur)]
- [http://cinescene-sf.blogspot.com/2009/03/pied-piper-of-cinematheque.html 시네신SF - 시네마테크의 피리 부는 사나이]
- [http://www.pia.co.jp/pff/festival/27th/tokyo/invitedworks.html#langlois 앙리 랑글루아: 시네마테크의 유령 (제27회 피아 필름 페스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