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압둘라 빈 질루위 알 사우드(عبد الله بن جلوي آل سعودʿAbd Allāh ibn Jalawī Āl Suʿūd아랍어; 1870년 ~ 1938년)는 초기 사우디의 주요 총독 중 한 명이자 사우드 가문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사우드 왕국의 창시자인 투르키 빈 압둘라의 손자이자 질루위 빈 투르키 알 사우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자이자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가까운 사촌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다. 압둘라 빈 질루위는 1902년 마스마크 성 공격을 통해 리야드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13년 동부주 정복에도 참여하여 사우디 국가 건설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알 아하사 주, 카심 주, 그리고 동부주의 총독을 역임하며 사우디 국가의 중앙 집권화와 지역 통치 체제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동부주 총독으로서 엄격한 통치 방식을 확립하고 해당 지역을 거의 반독립적인 영지처럼 만들었으며, 이는 그의 아들들이 총독직을 계승하며 질루위 가문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이어졌다.
2. 생애 및 배경
압둘라 빈 질루위는 사우드 가문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사우디 국가의 격동기에 태어나 성장하며 건국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압둘라 빈 질루위는 1870년에 태어났다. 그는 제2차 사우드 왕국의 창시자인 투르키 빈 압둘라의 손자이며, 질루위 빈 투르키 알 사우드의 아들이다. 그는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창시자이자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가까운 사촌이었으며, 압둘아지즈의 아버지인 압둘 라흐만 빈 파이살 알 사우드의 사촌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압둘아지즈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2.2. 교육
압둘라 빈 질루위의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까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사우드 가문의 일원으로서 부족 전통과 이슬람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압둘아지즈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실질적인 군사 및 행정 경험을 쌓았다.
2.3. 망명과 초기 활동
사우드 가문이 수도 리야드에서 퇴각한 후, 압둘라 빈 질루위는 사촌인 압둘 라흐만 빈 파이살 알 사우드와 함께 쿠웨이트로 망명했다. 이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압둘아지즈와 함께 사우디 국가 재건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초기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압둘아지즈의 가장 신뢰받는 동반자 중 한 명으로, 사우드 가문의 재기를 위한 중요한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3. 사우디 국가 건설에서의 역할
압둘라 빈 질루위는 현대 사우디 국가 건설 과정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압둘아지즈의 통치 기반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1. 마스마크 성 공격과 리야드 탈환
1902년 1월 15일, 압둘라 빈 질루위는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리야드를 탈환하기 위해 감행한 마스마크 성 공격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공격은 사우디 국가 재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전투 과정에서 그는 라시드 왕조의 리야드 총독인 아즐란 알 샴마르를 직접 살해하며 압둘아지즈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스마크 성 입구의 나무 문에는 압둘라 빈 질루위가 던진 창이 박힌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그의 용맹함을 증명하고 있다. 이 승리로 리야드를 탈환한 압둘아지즈는 사우디 국가 재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3.2. 동부 주 정복
1913년, 압둘라 빈 질루위는 압둘아지즈의 부사령관으로서 동부주 정복 작전을 지원했다. 동부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이곳을 정복함으로써 사우디 국가는 페르시아만으로의 접근성을 확보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작전에서도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며 압둘아지즈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4. 총독 재임
압둘라 빈 질루위는 사우디 국가가 건국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주요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행정 및 통치 경험을 쌓았다.
4.1. 아하사 및 카심 주 총독
사우디 국가의 기반이 다져진 후, 압둘라 빈 질루위는 먼저 알 아하사 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카심 주의 총독직을 수행했다. 알 아하사 총독 재임 중 그는 이흐완의 도덕적 자경주의와 충돌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이후 동부주를 통치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4.2. 동부 주 총독
이후 압둘라 빈 질루위는 동부주 총독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이 시기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다음으로 사우드 가문 내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동부주로 전임된 이유 중 하나는 압둘라 빈 질루위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으며, 당시 압둘아지즈의 아들들이 총독의 책임을 맡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부주는 그의 통치 아래 엄격하게 다스려졌으며, 거의 반독립적인 가족 영지처럼 운영되었다. 이는 사우디 국가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나타난 특이한 형태로, 질루위 가문의 강력한 지역적 기반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엄격한 통치 방식은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질루위 가문의 영향력은 동부주에서 대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5. 개인 생활
압둘라 빈 질루위의 개인 생활은 그의 공적인 역할만큼이나 사우드 가문 내의 복잡한 관계와 사건들로 얽혀 있었다.
5.1. 가족 및 결혼
압둘라 빈 질루위는 여러 명의 배우자를 두었다. 그의 배우자 중 한 명인 와스미야 알 다미르는 훗날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의 여러 아내 중 한 명이 되었으나, 압둘아지즈와의 결혼에서는 자녀를 두지 않았다. 또한 그는 수바이 부족 출신의 여성과도 결혼했다.
그의 장남인 파하드 빈 압둘라 알 질루위는 1929년 5월 아즈만 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아즈만 부족 지도자 다이단 빈 히슬라인의 살해 이후 발생한 부족 간의 충돌과 관련이 있었다. 아들의 죽음은 압둘라 빈 질루위의 개인적인 삶에 큰 비극으로 남았다.
6. 사망
압둘라 빈 질루위는 1938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장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죽음은 사우디 건국 초기의 주요 인물 한 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의 장례 절차는 사우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엄숙하게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7. 평가 및 유산
압둘라 빈 질루위의 삶과 업적은 현대 사우디 국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통치 방식과 가문의 영향력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7.1. 총독직 승계와 가문의 영향력
압둘라 빈 질루위가 1938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사우드 빈 압둘라 알 질루위가 동부주 총독직을 승계하여 1938년부터 1967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또 다른 아들인 압둘 무히신 빈 압둘라 알 질루위가 1967년부터 1985년까지 총독직을 이어받았다. 이처럼 압둘라 빈 질루위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동부주 총독직을 수행함으로써, 동부주는 사실상 질루위 가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연속적인 총독직 승계는 사우드 가문 내에서도 질루위 가문의 독특하고 강력한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질루위 가문의 동부주 통치는 1985년 파하드 국왕이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파하드 알 사우드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막을 내렸다.
7.2. 국가 건설에 대한 기여
압둘라 빈 질루위는 마스마크 성 공격과 동부주 정복을 통해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군사적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사우디 국가의 영토 확립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주요 지역의 총독으로서 사우디 국가의 중앙 집권화와 효율적인 지역 통치 체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동부주에서 보여준 그의 엄격한 통치 방식과 해당 지역을 가족 영지처럼 운영한 사례는 사우디 국가가 초기 단계에 권력의 통합과 지역적 충성심을 확보하는 데 사용된 전략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의 유산은 사우디아라비아가 현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통합과 분배, 그리고 특정 가문의 지역적 영향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