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수 경력
알피오 바실레는 선수 시절 라싱 클루브와 우라칸에서 중앙 수비수로 활약하며 다수의 국내외 우승을 경험했으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했다.
1.1. 초기 생애 및 유소년 시절
바실레는 1943년 11월 1일 바이아 블랑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인 바이아 블랑카의 벨라 비스타 축구단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65년 엘 그라피코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축구 입문 과정을 설명했다. "라싱 클루브의 한 회원이 저를 그곳으로 데려가 입단 테스트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감독은 카를로스 페우세예였습니다. 테스트를 통과한 후 저는 7부 리그에서 시작하여 상위 리그로 승격했고, 항상 '5번 자리'(중앙 미드필더)에서 활약했습니다. 작년, 델라토레 감독님은 우라칸과의 리그 최종전에서 저를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데뷔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그 경기에서 '6번'(중앙 수비수)으로 뛰었습니다."
1.2. 클럽 경력

바실레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라싱 클루브에서 활약했다. 초기에는 미드필더로 뛰었으나, 후안 호세 피수티 감독이 부임한 후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이 자리에서 바실레는 로베르토 페르푸모와 함께 견고한 수비진을 구축하며 라싱 클루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클럽의 3개 주요 타이틀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1966년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그리고 1967년 셀틱을 꺾고 아르헨티나 클럽으로는 최초로 인터콘티넨탈컵을 들어 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실레는 라싱 클루브 소속으로 총 186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바실레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우라칸으로 이적하여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 지도 하에 1973년 메트로폴리타노 선수권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1975년에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1.3. 국가대표 경력
알피오 바실레는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동하며 총 8경기에 출전하여 1득점을 기록했다.
2. 감독 경력
알피오 바실레는 선수 은퇴 후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두 차례 이끌며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같은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다.
2.1. 초기 클럽 감독 시절
선수 은퇴 후, 바실레는 곧바로 감독으로 변신하여 다수의 아르헨티나 클럽과 해외 클럽을 지도했다. 그는 차카리타 주니어스 (1975-1976), 로사리오 센트랄 (1976), 라싱 클루브 (1977), CA 라싱 (1978, 1980, 1983), 인스티투토 AC 코르도바 (1979, 1981), 우라칸 (1982), 타예레스 (1983), 벨레스 사르스피엘드 (1984-1986, 1989-1990), 라싱 클루브 (1986-1989) 등 아르헨티나의 여러 팀을 지휘했다. 이 중 1988년 라싱 클루브를 이끌고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우승하며 감독으로서 첫 국제 타이틀을 획득했다.
해외에서는 우루과이의 나시오날 (1982)과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5)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2.2.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1기 (1991년-1994년)
바실레의 감독 경력은 199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맡으면서 정점에 달했다. 그는 카를로스 빌라르도의 후임으로 1991년에 부임하여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디에고 시메오네, 페르난도 레돈도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그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는 1991년과 199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2년에는 킹 파흐드컵 (현 컨페더레이션스컵의 전신), 1993년에는 CONMEBOL-UEFA 컵 오브 챔피언스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콜롬비아에 홈에서 0-5로 대패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이 패배의 여파로, 은퇴를 선언했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복귀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의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참여했고, 아르헨티나는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월드컵 본선에서 아르헨티나는 그리스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며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전 후 디에고 마라도나의 도핑 검사에서 에페드린이 검출되어 그가 대회에서 퇴출되는 큰 논란이 발생했다. 아르헨티나는 이어진 불가리아전에서 0-2로 패했지만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팀 사기가 크게 꺾인 상태에서 루마니아에 2-3으로 패하며 대회에서 탈락했다. 월드컵에서의 실망스러운 결과에 책임을 지고 바실레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2.3. 클럽 감독 복귀 및 보카 주니어스 1기 (1995년-2006년)
국가대표팀 감독직 사임 후, 바실레는 산 로렌소 (1998), 멕시코의 클루브 아메리카 (2000-2001, 2001년 CONCACAF 자이언츠컵 우승), 그리고 콜론 산타페 (2004) 등 여러 클럽을 지도하며 다양한 성공을 거두었다.
2005년 7월, 그는 보카 주니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부임 한 달 만인 2005년 8월,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서 2005년 아페르투라에서 우승하며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4일 후, 보카는 멕시코의 UNAM 푸마스를 꺾고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우승하며 2005년 한 해에만 3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4.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2기 (2006년-2008년)

2006년 7월, 바실레는 호세 페케르만의 후임으로 다시 한번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안받아 수락했다. 새로운 임무를 시작하기 전, 그는 2006년 9월 14일까지 보카 주니어스를 계속 지도하며 브라질의 상 파울루를 꺾고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연패를 달성했다.
바실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보다 이탈리아 세리에 A와 스페인 라 리가를 선호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는 카를로스 테베스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에게 이탈리아로 이적할 것을 권유하며, 마스체라노의 경우 "비록 2부 리그에서 뛰게 될지라도 유벤투스로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리오넬 메시가 국제 대회 데뷔를 한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를 이끌었다. 아르헨티나는 조별 리그에서 미국, 콜롬비아, 파라과이를 모두 꺾고 3전 전승을 기록했다. 8강에서 페루, 준결승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브라질에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8년 10월 16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칠레에 0-1로 패배하는 역사적인 결과가 발생하자 바실레는 사임을 표명했다. 이는 35년 만에 아르헨티나가 칠레에게 당한 첫 패배였다. 그의 사임은 이후 디에고 마라도나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2.5. 말년 클럽 감독 시절 (2009년-2012년)
2009년 7월 1일, 바실레는 카를로스 이스치아의 후임으로 3년 만에 보카 주니어스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연이은 부진한 성적, 특히 201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 실패와 마르델플라타에서 열린 여름 토너먼트에서 숙적 리버 플레이트에 1-3으로 참패한 후, 그는 2010년 1월 21일 사임했다.
2011년 12월 26일, 바실레는 디에고 시메오네의 후임으로 라싱 클루브 감독으로 돌아오며 이 클럽에서만 네 번째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1년 후, 아메리카 독립 경기장 라커룸에서 라싱 공격수 테오필로 구티에레스가 동료 선수에게 총을 겨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혼란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결국 사임했다.
3. 은퇴 후 활동

2012년 라싱 클루브를 떠난 이후, 바실레는 더 이상 어떤 팀도 지도하지 않으며 축구 활동에서 "은퇴했다"고 밝혔다. 그는 간헐적으로 인터뷰에 응하거나, 엑토르 베이라와 가수 카초 카스타냐와 함께 TV 쇼 착한 아이들(Buenos Muchachos부에노스 무차초스스페인어)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9년, 바실레는 지구 평면설을 기반으로 한 스페인의 아마추어 팀 플랫 어스 FC의 감독직을 제안받았고, 구단주 하비 포베스의 견해에 동의하며 감독직을 수락 의사를 표명하여 화제가 되었다.
4. 수상 기록
알피오 바실레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다양한 리그 및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4.1. 선수
- 라싱 클루브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7
- 인터콘티넨탈컵: 1967
-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스 수페르컵 준우승: 1969
- 우라칸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73 메트로폴리타노
4.2. 감독
- 라싱 클루브
-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1988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준우승: 1989
- 라싱 데 코르도바
- 리가 코르도베사 데 푸트볼: 1981
- 토르네오 네데르 니콜라: 1981
- 코파 코르도바: 1981
- 벨레스 사르스피엘드
-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985 내셔널
- 클루브 아메리카
- CONCACAF 자이언츠컵: 2001
- 보카 주니어스
-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5 아페르투라, 2006 클라우수라
- 코파 수다메리카나: 2005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005, 2006
-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1991, 1993
- 컨페더레이션스컵: 1992
- CONMEBOL-UEFA 컵 오브 챔피언스: 1993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2007
5. 비판 및 논란
알피오 바실레의 경력 중에는 몇몇 논란이 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1994년 FIFA 월드컵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의 도핑 파문이었다. 마라도나가 나이지리아전 후 도핑 검사에서 에페드린 양성 반응을 보이며 대회에서 퇴출되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고 이는 팀의 조기 탈락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바실레 감독의 리더십과 팀 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그의 사임으로 마무리되었다.
2008년에는 월드컵 예선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칠레에 역사적인 0-1 패배를 당한 후 사임했다. 이는 35년 만에 칠레에게 당한 첫 패배였고, 여론의 큰 비난에 직면하여 감독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말년 클럽 감독 시절이던 2012년에는 라싱 클루브 감독 재임 중 공격수 테오필로 구티에레스가 라커룸에서 동료 선수에게 총을 겨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팀 분위기를 크게 해쳤고, 바실레는 결국 이 사건 이후 라싱 클루브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6. 유산
알피오 바실레는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그의 감독 경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유산 중 하나는 그가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라는 두 명의 아르헨티나 축구 전설을 모두 국가대표팀에서 지도한 유일한 감독이라는 점이다. 이는 아르헨티나 축구의 황금기를 연결하는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다.
그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주요 트로피를 안겨주며 국가대표팀의 경쟁력을 높였다. 또한 보카 주니어스에서 단기간에 여러 우승을 달성하며 빅 클럽에서의 지도력도 입증했다. 그의 카리스마와 선수들과의 소통 능력은 팀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전술적 접근 방식은 아르헨티나 축구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논란과 아쉬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알피오 바실레는 아르헨티나 축구계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