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배경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1885년 2월 26일에 태어나 평생을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했다. 그의 초기 생애는 리투아니아의 격동적인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정치적 신념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스툴긴스키스는 어린 시절 카우나스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독일의 할레 대학교 농업 학부로 진로를 변경하여 농업 과학을 연구했다. 1913년에 할레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국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게 된다.
1.2. 초기 활동 및 사회 참여
리투아니아로 돌아온 스툴긴스키스는 농부로서 활동하며 농업 분야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언론에 농업 관련 기사를 다수 발표했으며, 1918년에는 직접 농업 전문 잡지인 "Ūkininkas우키닝카스리투아니아어" (우키닝카스, 농부)와 "Ūkininko kalendorius우키닝코 칼렌도리우스리투아니아어" (우키닝코 칼렌도리우스, 농부의 달력)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농업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리투아니아 기독교 민주당의 주요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1917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의장직을 맡으며 초기부터 리투아니아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중요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2. 리투아니아 독립으로의 여정
스툴긴스키스는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리투아니아가 독립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활동은 민족 자결과 독립 국가 건설을 향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염원을 대변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스툴긴스키스는 빌뉴스로 이주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리투아니아 기독교 민주당의 중심 인물로서 활동했으며, 1917년에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리투아니아 국가 승인을 요청하는 각서에 서명했다. 당시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스툴긴스키스는 연합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17년 개최된 빌뉴스 회의의 공동 주최자 중 한 명이었고, 이 회의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을 위한 준비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2.2.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서명
1918년 2월 16일, 스툴긴스키스는 역사적인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20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국가 형태에 대해 강력한 민주 공화제 지지자였으며, 당시 일부에서 논의되던 군주제(실제로 민다우가스 2세가 1918년 7월 11일부터 11월 2일까지 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도입 시도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2.3. 국가군 조직 및 방어 활동
독립 직후, 리투아니아는 볼셰비키와 폴란드의 침공이라는 외부 위협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툴긴스키스는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국가군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리투아니아는 신생 독립 국가로서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3. 정치 경력 및 대통령직
리투아니아의 독립 이후,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새로운 공화국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으며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리투아니아의 제2대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재임 기간을 보냈다.
3.1. 다양한 장관 및 의회 직책
스툴긴스키스는 독립 리투아니아의 초기 정부에서 여러 중요한 장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부총리, 내무부 장관, 농업부 장관 등을 지내며 국가 행정 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1920년 5월부터 1922년까지 그는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이 기간 동안 사실상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 역할을 수행했다.
3.2. 리투아니아 제2대 대통령
1922년에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리투아니아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26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1922년 재선에 성공하며 국민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1926년 6월 7일 카지스 그리뉴스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했다. 대통령으로서 스툴긴스키스는 근면하고 야심을 절제하는 리더십으로 평가받았다.
3.3. 권한 대행과 1926년 쿠데타
1926년 12월 17일, 카지스 그리뉴스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임하자 스툴긴스키스는 잠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12월 19일, 그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안타나스 스메토나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그는 대통령직에서 축출되었다. 이 쿠데타는 스툴긴스키스의 후임인 그리뉴스를 전복시키고 스메토나를 다시 권좌에 앉혔다.
3.4. 후기 의회 활동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스툴긴스키스였지만, 그는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세이마스 (리투아니아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세이마스는 1927년 4월에 해산되었다.
4. 정치 은퇴 후 삶과 소련의 박해
스툴긴스키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농장 경영에 전념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 당국에 의해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그의 삶은 리투아니아의 민주주의와 독립을 향한 열망, 그리고 그에 대한 소련의 탄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1. 정계 은퇴와 농장 운영
1927년,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여 리투아니아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 경영에 전념했다. 그는 농부로서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간헐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조국의 민주적 가치 수호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신념을 드러냈다.
4.2. 소련 당국에 의한 체포 및 수감
1941년 6월, 스툴긴스키스와 그의 아내는 소련의 비밀 경찰인 NKVD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의 굴라그로 강제 이송되었고, 그의 아내는 코미 공화국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52년, 스툴긴스키스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전전 리투아니아에서의 반사회주의 및 성직자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기소되어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그가 독립 리투아니아의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고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4.3. 석방 및 리투아니아 귀환
1956년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이후 정치적 해빙기인 탈스탈린화가 시작되면서 스툴긴스키스는 석방되었다. 소련 당국은 그에게 해외 이주를 허용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리투아니아 SSR로 돌아왔다. 그는 카우나스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5. 사망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1969년 9월 22일, 84세의 나이로 카우나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던 인물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서명자로 기록되며,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로 기억된다.
6. 유산과 평가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리투아니아 독립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삶과 정치적 경력은 리투아니아의 격동적인 근현대사를 반영하며, 그의 정신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6.1. 역사적 평가
스툴긴스키스는 대통령으로서 매우 근면하며, 개인적인 정치적 야심을 절제하고 오직 국가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수호하고 민주 공화제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그의 임기 동안 리투아니아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군대 조직은 신생 독립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2. 비판과 논란
스툴긴스키스가 소련 당국에 의해 1952년 선고받은 "전전 리투아니아에서의 반사회주의 및 성직자 정책"이라는 혐의는 소련의 일방적인 비판적 관점을 보여준다. 이는 스툴긴스키스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기독교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했기 때문에 부여된 정치적 낙인으로, 그의 민주주의 수호 활동에 대한 소련의 부당한 탄압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6.3. 헌정 및 기념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는 1924년에 농업 아카데미 설립에 관여했으며, 그의 사망 후인 2011년 6월에는 리투아니아 농업 대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 대학교로 개명되었다. 이 대학은 현재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 농업 아카데미의 일부이다.

7. 같이 보기
- 리투아니아의 대통령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