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수 경력
안도니 고이코에체아는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유소년기를 거쳐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구단의 황금기를 함께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의 거친 플레이 스타일은 축구 역사에 논란의 순간들을 남겼다.
1.1. 어린 시절과 아틀레틱 빌바오 데뷔
비스카야 주 알론소테기에서 태어난 고이코에체아는 인근의 아르부요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1973년 아틀레틱 빌바오에 입단했다. 그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구단의 2군 팀인 빌바오 아틀레틱에서 뛰며 25경기에 출전해 8골을 기록했다. 1975년에 1군 팀에 데뷔하여 1975-76 시즌 동안 27경기에 출전해 4골을 기록했으나, 이후 3시즌 동안은 총 24경기 출전에 그치며 입지를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2. 아틀레틱 빌바오의 전성기
1980년대, 고이코에체아는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이 이끄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다니, 호세 라몬 가예고, 호세 누녜스, 마누엘 사라비아, 그리고 안도니 수비사레타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아틀레틱 빌바오는 고이코에체아의 활약에 힘입어 1982-83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3-84 시즌에는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같은 시즌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하며 2관왕을 기록했다. 또한 1984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까지 제패하며 구단 역사상 첫 3관왕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
1.3. 논란: 마라도나와 슈스터 반칙 사건

고이코에체아는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차례 거친 플레이로 논란을 일으켰으며, 특히 디에고 마라도나와 베른트 슈스터에게 가한 반칙은 축구 역사에 악명 높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3년 9월 24일, 캄 노우에서 열린 FC 바르셀로나와의 리그 경기에서 고이코에체아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뒤에서 태클을 가해 그의 발목을 골절시켰다. 마라도나는 당시 들린 소리를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이 사건 이후, 잉글랜드 기자 에드워드 오언은 고이코에체아에게 "빌바오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붙였고, 이 별명은 그의 선수 경력 내내 따라다녔다.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는 고이코에체아를 "반축구인의 족속"이라 비난하며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에 영구 출장 정지를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고이코에체아는 1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으며, 이후 그가 마라도나의 발목 인대를 파괴하는 데 사용했던 축구화를 자택의 유리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 사건 발생 2년 전에도 고이코에체아는 바르셀로나의 미드필더 베른트 슈스터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슈스터는 이로 인해 오른쪽 무릎에 중상을 입었고, 이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며 선수 경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1984년 5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빌바오가 1-0으로 승리한 경기 중, 고이코에체아와 마라도나를 포함한 양 팀 선수들 간에 대규모 패싸움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고이코에체아는 마라도나의 가슴을 걷어차는 행동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처음에는 18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으나, 항소 끝에 7경기로 감면되었다.
1.4. 말년 클럽 경력과 은퇴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12년간 활약한 후, 고이코에체아는 1987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3시즌을 보냈으나 출전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으며, 49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해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1990년, 만 33세의 나이로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아틀레틱 빌바오 소속으로 총 369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하여 44골을 기록했으며, 이 중 리그에서는 277경기에 출전하여 35골을 넣었다.
2. 국가대표팀 경력
고이코에체아는 스페인 연령별 국가대표팀부터 성인 국가대표팀, 그리고 바스크 대표팀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국가를 대표했다.
그는 1975년에 스페인 U-18 대표팀에서 1경기를 뛰었으며, 1977년에는 스페인 U-21 대표팀에서 3경기에 출전했다. 1983년에는 스페인 아마추어 대표팀으로 1경기에 나섰다.
고이코에체아는 스페인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총 3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그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1983년 2월 16일 네덜란드를 상대로 치러졌다. 그는 스페인을 대표하여 1984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와 1986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참가했다. 특히 1986년 FIFA 월드컵 덴마크와의 16강전 경기에서는 페널티킥으로 1골을 기록하며 팀의 5-1 승리에 기여했는데, 당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는 이 경기에서 홀로 4골을 터뜨렸다.
또한, 고이코에체아는 1978년부터 1990년 사이에 바스크 대표팀 경기에 4번 출전하기도 했다.
3. 플레이스타일
고이코에체아는 그의 공격적이고 거친 경기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필드 위에서 매우 격렬한 수비수였으며, 상대 공격수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별명은 디에고 마라도나와 베른트 슈스터에게 가한 악랄한 반칙 사건으로 인해 얻게 된 "빌바오의 도살자"이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비 능력과 투지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였다. 2007년 잉글랜드 신문 타임스는 그를 "역대 가장 거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선정했으며, 더 선은 그를 역사상 두 번째로 거친 축구 선수로 꼽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마라도나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막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평가는 그가 단순히 수비적인 능력을 넘어, 강렬하고 때로는 위험한 방식으로 경기에 임했음을 시사한다.
4. 감독 경력
선수 은퇴 2년 후인 1992년부터 고이코에체아는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의 뒤를 이어 스페인 U-21 감독으로 재직했으며, 1995년에는 스페인 U-20 대표팀도 지도했다. 특히 1994년 1994년 FIFA 월드컵에서는 자신의 선수 시절 스승이었던 클레멘테 감독을 보좌하여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6년부터는 클럽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스페인 내 여러 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 살라망카 (1996년-1998년, 2004년-2005년): 1996-97 시즌에 살라망카를 라리가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1997년 10월에 해임되었다. 2004년에 다시 살라망카로 돌아와 두 번째 임기를 수행했다.
- 콤포스텔라 (1998년-1999년)
- 누만시아 (1999년-2000년, 2005년-2007년): 1999년부터 2000년까지 팀을 이끌었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두 번째 임기를 수행했다.
- 라싱 산탄데르 (2000년-2001년): 2000년 12월에 부임했으나, 48시간 만에 해임되는 이례적인 일을 겪었다.
- 라요 바예카노 (2001년): 2001년 10월, "라커룸이 '고이코'를 삼켰다"는 보도와 함께 해임되었다.
- 에르쿨레스 (2007년-2008년): 2007년 6월에 알리칸테 연고의 2부 리그 팀 에르쿨레스에 부임했다. 그러나 구단 내부 구조가 "역겹다"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단으로부터 징계를 받았고, 2007-08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 세우타 (2010년-2011년)
2013년 2월 말에는 적도 기니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며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을 직접 지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개막을 불과 3주 앞둔 2015년 1월, 포르투갈 하부 리그 팀에 패하는 등 친선 경기에서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5. 수상

고이코에체아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5.1. 선수 시절
아틀레틱 빌바오
- 라리가: 1982-83 시즌, 1983-84 시즌
- 코파 델 레이: 1983-84 시즌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4년
스페인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84년
5.2. 감독 시절
스페인 U-21
-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 준우승: 1996년
- 3위: 1994년
6. 경력 통계
6.1. 클럽 통계
다음은 안도니 고이코에체아의 클럽별 시즌 및 대회에 따른 출장 경기 수와 득점 기록이다. '기타' 열은 코파 데 라 리가 출전 기록을 포함한다.
클럽 | 시즌 | 리그 | 코파 델 레이 | 유럽대항전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빌바오 아틀레틱 | 1973-74 | 테르세라 디비시온 | 4 | 0 | 0 | 0 | - | - | 4 | 0 | ||
1974-75 | 21 | 8 | 0 | 0 | - | - | 21 | 8 | ||||
합계 | 25 | 8 | 0 | 0 | 0 | 0 | 0 | 0 | 25 | 8 | ||
아틀레틱 빌바오 | 1974-75 | 라리가 | 0 | 0 | 2 | 0 | - | - | 2 | 0 | ||
1975-76 | 27 | 4 | 1 | 0 | - | - | 28 | 4 | ||||
1976-77 | 10 | 0 | 2 | 0 | 4 | 0 | - | 16 | 0 | |||
1977-78 | 4 | 1 | 0 | 0 | 3 | 0 | - | 7 | 1 | |||
1978-79 | 10 | 1 | 3 | 0 | 0 | 0 | - | 13 | 1 | |||
1979-80 | 30 | 3 | 12 | 4 | - | - | 42 | 7 | ||||
1980-81 | 27 | 4 | 9 | 1 | - | - | 36 | 5 | ||||
1981-82 | 31 | 6 | 7 | 0 | - | 0 | 0 | 38 | 6 | |||
1982-83 | 24 | 4 | 5 | 0 | 1 | 0 | 2 | 0 | 32 | 4 | ||
1983-84 | 28 | 2 | 7 | 0 | 4 | 1 | 0 | 0 | 39 | 3 | ||
1984-85 | 31 | 3 | 6 | 2 | 2 | 0 | 2 | 0 | 41 | 5 | ||
1985-86 | 31 | 5 | 6 | 1 | - | 6 | 0 | 43 | 6 | |||
1986-87 | 24 | 2 | 5 | 0 | 3 | 0 | - | 32 | 2 | |||
합계 | 277 | 35 | 65 | 8 | 23 | 1 | 4 | 0 | 369 | 44 |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87-88 | 라리가 | 13 | 0 | 4 | 0 | - | - | 17 | 0 | ||
1988-89 | 14 | 0 | 8 | 0 | 0 | 0 | - | 22 | 0 | |||
1989-90 | 8 | 0 | 0 | 0 | 2 | 0 | - | 10 | 0 | |||
합계 | 35 | 0 | 12 | 0 | 2 | 0 | 0 | 0 | 49 | 0 | ||
경력 합계 | 337 | 43 | 77 | 8 | 25 | 1 | 4 | 0 | 443 | 52 |
6.2. 국가대표팀 득점
안도니 고이코에체아가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기록한 득점 기록은 다음과 같다.
7. 평가와 유산
안도니 고이코에체아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1980년대 황금기를 이끈 핵심 수비수로서 구단의 두 차례 라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 등 중요한 업적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그의 선수로서의 역량과 팀에 대한 헌신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선수 경력은 "빌바오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대변되는 거친 플레이 스타일과 디에고 마라도나, 베른트 슈스터에게 가한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영구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마라도나의 발목 골절 사건은 스페인 축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반칙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유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그가 축구계에 남긴 인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감독 경력에서는 여러 클럽을 지도하며 살라망카를 라리가로 승격시키는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에르쿨레스나 적도 기니에서의 짧은 임기처럼 논란이나 부진으로 인해 해임되는 경우도 있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안도니 고이코에체아는 성공적인 선수 경력을 보냈고 팀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플레이와 그로 인해 발생한 부상 사건들이 그의 축구 선수로서의 평가와 유산을 복합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거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 플레이는 스포츠맨십과 승리에 대한 열정 사이의 윤리적 경계를 상기시키는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