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Félix de la Caridad Carvajal y Soto펠릭스 데 라 카리다드 카르바할 이 소토스페인어, 흔히 Andarín Carvajal안다린 카르바할스페인어('달리는 사람 카르바할'이라는 뜻)로 알려진 그는 쿠바의 우편배달부이자 장거리 육상 선수였다. 1875년 3월 18일 산안토니오데로스바뇨스에서 태어나 1949년 1월 27일 아바나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에서 4위를 차지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카르바할의 생애는 역경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간 한 개인의 투지와 독특한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도박으로 돈을 모두 잃은 후에도 히치하이킹과 도보로 대회 장소까지 이동하는 기이한 여정을 거쳤다. 마라톤 경기 당일에는 평범한 복장에 긴 바지를 잘라 만든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으며, 경기 도중 관중과 대화하고 길가의 과일을 먹는 등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썩은 사과를 먹고 복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완주하여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스포츠 기록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의지와 좌절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낙천적인 태도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2. 생애
펠릭스 카르바할의 생애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 국제적인 무대에서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여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우편배달부로서 쿠바 전역을 걷고 달리며 단련된 체력을 바탕으로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꿈을 품었으나, 재정적 어려움과 예상치 못한 난관에 끊임없이 직면했다.
2.1. 유년기 및 배경
카르바할은 1875년 3월 18일 쿠바 아바나 주의 산안토니오데로스바뇨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며, 우편배달부로 일하면서 쿠바 전역을 걷고 달리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육상에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출전을 꿈꾸기 전까지는 정식 마라톤 경기를 뛰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고 길거리에서 돈을 모으는 등 끈질기게 올림픽 출전 여비를 마련했다.
2.2. 올림픽 출전의 꿈과 여정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카르바할은 쿠바의 유일한 육상 경기 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후 크랩스 도박에 빠져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남은 길을 히치하이킹과 도보로 이동하며 세인트루이스까지 도착해야 했다.
2.3. 사망
펠릭스 카르바할은 1949년 1월 27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시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잊었을지 모른다.
3. 육상 경력
펠릭스 카르바할의 육상 경력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에서의 기이한 일화들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올림픽 이후 여러 대회에 참가하며 독특한 행보를 이어갔다.
3.1.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

1904년 8월 30일, 미국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육상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카르바할의 모습은 참가 선수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프랜시스 필드 경기장에 베레모를 쓰고 긴팔 셔츠와 긴 바지, 그리고 일반 신발이라는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본 미국의 원반던지기 및 포환던지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마틴 셰리던은 그의 긴 바지 밑단과 셔츠 소매를 잘라 반바지와 반팔처럼 보이도록 도와주었다.
경기가 열린 날은 기온이 32 °C에 달하는 무더위였고, 도로는 흙먼지로 가득했으며, 선두 차량이 시종일관 흙먼지를 일으켜 선수들의 시야를 가렸다. 더욱이, 대회는 전체 마라톤 코스 중 19312 m (12 mile) 지점에 위치한 우물 단 한 곳에만 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4개국 32명의 출전 선수 중 절반에도 못 미치는 14명만이 완주할 수 있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카르바할은 선두권에서 경쟁을 벌였다. 그는 경기 도중 관중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관중의 차에서 복숭아를 집어 먹는 등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길가에 서 있는 사과나무를 발견했고, 40시간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그는 그 나무에서 덜 익은 사과 두 개를 따서 먹었다. 이로 인해 심한 복통에 시달렸지만, 그는 잠시 길가에서 낮잠을 자며 회복한 뒤 다시 일어나 달리기를 계속했다. 결국 펠릭스 카르바할은 마라톤 거리인 40 km를 완주하며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이 마라톤에서는 상위 3명과 '새치기 마라톤 사건'으로 실격 처리된 프레드 로어즈의 기록만이 명확히 확인되었다.
3.2. 올림픽 이후의 활동
1904년 올림픽 이후에도 카르바할은 여러 육상 경기에 참여하며 자신의 육상 경력을 이어갔다.
1905년, 그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와 제1회 올-웨스턴 마라톤에 참가하여 3시간 44분의 기록으로 3위를 차지했다.
1906년에는 쿠바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1906년 중간 올림픽 마라톤에 쿠바 대표로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상륙한 후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고, 아테네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쿠바 신문에 부고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증기선을 타고 하바나로 돌아와 건재함을 알렸다.
이후 그는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1907년에는 미국의 장거리 육상 선수인 헨리 W. 셸턴을 상대로 6시간 동안 진행된 경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1909년 5월 8일, 그는 뉴욕 시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마라톤 더비에 참가했다. 1마일(약 1.6 km) 당 6바퀴를 도는 트랙에서 진행된 이 대회에는 도란도 피에트리를 포함한 12명의 다른 프로 마라톤 선수들이 국제적인 경쟁을 펼쳤다. 카르바할은 선두 주자들이 첫 1마일을 5분 2초에 주파했을 때 이미 뒤처지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경기는 프랑스의 앙리 상트 이브가 2시간 44분 5초의 기록으로 우승했으며, 카르바할은 완주했지만 끝까지 최하위로 경기를 마쳤다.
4. 유산 및 대중적 평가
펠릭스 카르바할의 독특한 생애와 올림픽에서의 기이한 행보는 후대에 걸쳐 꾸준히 기억되고 재평가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스포츠인의 기록을 넘어 인간적인 면모와 도전 정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4.1. 문학 및 미디어에서의 재조명
Félix Carvajal, corredor de maratón펠릭스 카르바할, 마라톤 주자스페인어는 카르바할의 생애를 다룬 스페인어 서적으로, 베르나르도 호세 모라가 집필했으며 그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또한, 1956년 방영된 TV 프로그램 Telephone Time텔레폰 타임영어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Felix the Fourth네 번째 펠릭스영어는 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페드로 곤잘레스 곤잘레스가 카르바할 역을 맡아 그의 독특한 여정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이러한 문학적, 미디어적 재조명을 통해 펠릭스 카르바할은 단순한 마라톤 선수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인물로 대중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