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나, 가문의 사정으로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이후 뛰어난 학업 성적과 전략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일본 해군의 핵심 인재로 성장하여 러일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전후에는 군의 요직을 거치며 해군 개혁에 힘썼으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1868년 4월 12일(게이오 4년 3월 20일) 이요국 마쓰야마번의 마쓰야마 성 아래 중도정(현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인 아키야마 히사타카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마쓰야마 번사 야마구치 가문의 사다였다. 출생 당시 가세가 너무 어려워 그를 절에 보내려 했으나, 그의 형인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아버님, 아기를 절에 보내지 마세요. 제가 공부해서 두부만큼의 돈을 벌어 올게요"라며 부모에게 간곡히 청하여 그러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는 문학, 특히 전통 와카 시에 관심을 가졌다. 지역의 한학 학원에서 배우고 와카도 익혔다. 그는 장난기 많은 골목대장이었으며, 많은 아이들을 이끌고 전쟁놀이를 하는 것을 넘어 책을 참고하여 불꽃놀이를 직접 만들어 쏘아 올리기도 했다. 또한 그림, 수영, 달리기에도 능했다. 아침에 화장실 가는 것을 귀찮아 창문으로 소변을 보면서 "눈 오는 날 북쪽 창을 열고 오줌을 누니 너무 추워 고추가 오그라드네"라는 와카를 읊기도 했다.
그의 평생 친구가 될 유명한 시인 마사오카 시키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다. 시키가 먼저 상경한 것에 자극받아, 사네유키는 에히메현 마쓰야마 중학교 5학년을 중퇴하고 1883년(메이지 16년)에 장차 태정대신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도쿄로 향했다. 그는 수험 준비를 위해 교리쓰 학교(현 가이세이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수험 영어를 배웠고, 대학 예비문(후의 일고, 현 도쿄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1.2. 교육 및 초기 경력
대학 예비문에서 제국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아키야마 가문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사네유키는 형 요시후루에게 학비를 의존하고 있었다. 결국 졸업 후 문학을 지망하여 제국대학 문학부로 진학한 마사오카 시키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886년(메이지 19년)에 그는 해군병학교에 17기생으로 입교하며 해군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해군병학교는 도쿄 쓰키지에 있었으나, 사네유키가 학생이던 중 히로시마현 에타지마로 이전하여 해군병학교로 개칭되었다.
아키야마는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1890년 7월 17일 88명의 사관생도 중 17기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졸업은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고전적 연구서인 『해양력의 영향, 1660-1783』의 일본어 번역본 초판이 출판된 지 불과 몇 주 뒤였다.
졸업 후 그는 방호순양함 히에이에 승선하여 실지 훈련을 거듭했으며, 좌초된 오스만 제국 군함 에르투으룰호 생존자 송환(에르투으룰호 조난 사건)에도 참여했다. 1892년(메이지 25년) 5월 23일 해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전함 류조에 승선하여 분대장을 맡았다. 이후 태평양, 지중해, 유럽 해역을 아우르는 다양한 정기 함상 임무와 배치를 통해 진급했다. 그는 마쓰시마, 요시노, 쓰쿠시(청일 전쟁 웨이하이웨이 전투 당시), 이즈미, 야에야마 등에서 근무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통보함 쓰쿠시에 승선하여 정찰 등 후방 지원 활동에 참여했다. 전쟁 후에는 해군 어뢰 학교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해군 정보국에 배속되어 수개월 동안 노동자로 위장하여 만주와 조선에서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3. 미국 유학 및 연구

1896년 10월 24일 해군 대위로 진급한 아키야마는 1897년 6월 26일부터 1899년 12월 27일까지 미국에 해군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는 미국 해병대와 정착민들에 의한 하와이 왕국 전복으로 인해 일본과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외교 관계가 단절될 뻔했던 시기였다.
뉴욕에 도착한 아키야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나 미국 해군대학에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과 추천을 얻기 위해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마한은 아키야마에게 읽을 책 목록을 주는 것 외에는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아키야마는 이어서 해군 차관보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연락했지만, 해군대학 입학 허가를 요청하는 그의 간청은 거절당했다.
아키야마의 근무 기간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시작과 겹쳤고, 그는 외국 군사 참관인 자격으로 미국 함대에 합류했다. 그는 1898년 6월 미국군이 산티아고데쿠바를 점령하는 것과 7월 아바나 항구 봉쇄를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아키야마는 자신의 관찰 결과와 봉쇄 및 상륙 작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일본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후에 "극비 첩보 제118호"로 명명됨)에서 산티아고데쿠바 해전의 일환으로 미국 해군이 실시한 산티아고 항구 봉쇄 작전을 목격한 경험은 러일 전쟁의 뤼순항 폐쇄 작전의 기초가 되었다고도 지적된다. 근무를 마친 후 그는 워싱턴 D.C.의 일본 대사관에서 짧은 기간 해군 무관으로 근무했다.
1899년 2월, 일본 대사의 노력 덕분에 아키야마는 미국 해군 전함 USS 뉴욕에 6개월간 승선할 허가를 받았다. 그는 이 함선에서 북대서양과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전술과 함대 작전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이 함상 근무의 결과로 아키야마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해군대학에서 여러 강의에 참여했다. 미국에서의 연구를 마친 후 아키야마는 1899년 12월 27일부터 1900년 5월 20일까지 영국으로 건너가 시찰을 진행했다.
1.4. 해군 대학 교관 시절
1900년 8월 일본으로 귀국한 아키야마는 해군성 군무국 제1과원, 상비함대 참모를 거쳐 1901년 10월 1일 해군 소좌로 진급했다. 1902년(메이지 35년) 7월 17일부터 1903년 11월까지 일본 해군대학의 선임 전략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아키야마는 가상 상황을 활용하여 명령 수립과 현실적인 비상 계획 개발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교육 과정을 개혁했다. 그는 또한 워게임과 탁상 지도 훈련 개념을 도입했으며, 미국-스페인 전쟁 중 자신의 관찰을 바탕으로 일본 해군을 위한 새로운 전략 및 전술 교리를 개발했다. 아키야마는 강의에서 러시아를 일본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설정하고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아키야마는 34세였으며, 자신과 동년배이거나 심지어 연장자인 장교들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전문 지식과 역량, 그리고 인품 덕분에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03년 6월에는 궁내성 어용계 이나오 마후쿠의 셋째 딸인 스에와 쓰키지의 스이코샤에서 결혼했다. 그는 대러시아 개전론자로서 고게쓰카이의 멤버가 되어 러일 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1.5. 러일 전쟁 참전

왼쪽 중앙부터 가토 도모사부로, 도고 헤이하치로, 아키야마
1904년 9월 1일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해군 중좌로 진급한 아키야마는 연합함대 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참모진에 남아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도고는 아키야마가 자신의 기함 미카사에 참모로 동행할 것을 고집했다. 아키야마는 뤼순항 공격, 황해 해전의 계획 수립, 그리고 러시아 발틱 함대의 도착과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의 격멸 작전 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목표는 러시아 함대를 완전히 파괴하여 동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키야마는 적 앞에서 함대의 방향을 바꾸는 전술을 고안했는데, 이는 12세기 후반의 『노지마류 옛 해적 전술』이라는 고서에서 일본 해적들이 사용했던 전술을 차용한 것이었다.
일본의 승리 이후 아키야마는 포츠머스 조약의 예비 협상을 위한 해군 대표로 지명되었으나, 그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교체되었다.

1.6. 전후 활동 및 말년

1905년 12월 연합함대가 해산된 후 해군대학 교관으로 복귀했다. 1908년 9월 25일 해군 대좌로 진급한 아키야마는 미카사의 부함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아키쓰시마의 함장으로 첫 지휘관 임무를 맡았다. 이후 그는 오토와, 하시다테, 이즈모, 이부키의 함장을 역임했다.
1912년 12월 1일부터는 군령부 제1반장(후의 군령부 제1부장) 겸 해군대학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12월 1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며 제독의 반열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14년의 지멘스-비커스 해군 군비 스캔들이 정부를 뒤흔들었고, 이로 인해 야마모토 곤노효에와 오쿠마 시게노부가 사임해야 했다. 아키야마는 의혹이나 부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몇 안 되는 고위 장교 중 한 명이었으며, 야시로 로쿠로에 의해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군 군무국장으로 지명되었다. 아키야마는 1917년 12월 1일 퇴역할 때까지 일본 제국 해군 군령부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순양함 오토와를 상하이에 영구 주둔시켜 중국 각지에서 교환학생으로 위장한 대규모 정보원 네트워크를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동시에 아키야마는 쑨원과 정기적이고 비밀스러운 서신을 주고받으며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는 것을 막으려는 그의 노력을 물질적으로도 지원했다. 그는 친우인 이누즈카 신타로 등과 함께 쑨원과 교류했다고 전해지며, 비공식적으로 혁명 운동을 원조했다. 또한 고이케 초조 등과 동지들을 모아 혁명 운동을 지원하는 '고이케 방'을 결성하고 구하라 후사노스케 등 실업가들에게 협력을 구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타도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황제로 추대되자 중국 각지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일본 정부 등 여러 외국도 항의했다. 이 무렵 그는 가와시마 나미와 등 대륙낭인과 참모본부 차장 다나카 기이치 등이 주도한 제2차 만몽 독립 운동에도 외무성 정무국장이 된 고이케와 함께 가담했다. 이후 군령부로 전출되면서 대중국 정책에서는 멀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키야마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핀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 전쟁을 시찰했다. 1916년 5월 영국에 도착하여 옛 지인이었던 영국 해군 참관인 윌리엄 패커넘 중장과 함대 사령관 존 젤리코 제독 등의 환영을 받았다. 프랑스, 이탈리아에 머문 후 1916년 9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10월에 귀국했다. 1916년 6월, 조지 5세 국왕은 그에게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나이트 커맨더 작위를 수여했다. K.C.M.G. 작위를 받은 '사네유키 경'은 일본 황실 외부 인물로는 최초로 영국 군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1916년 12월 제2수뢰전대 사령관이 되었다. 1917년 7월 16일 해군 장관 회의 의원으로 재임명되었으나, 이 무렵 이미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1917년 12월 중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대기 발령을 받았고, 결국 퇴역할 수밖에 없었다.
해군대학 교관 시절 사토 데쓰타로 등이 주재하던 연구회 '텐세이카이'에 권유받아 경전을 연구하게 되었고, 만년에는 영적 연구와 종교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전쟁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생사나 전쟁의 승패에 대해 인지 밖의 힘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전후 해군 제독 및 장교들이 모인 『해군 반성회』에서 노모토 다메키치 소장은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성적으로) 너무 많이 놀아 매독이 머리로 올라가서 만년의 행동과 언행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시미즈 미쓰미 중장에게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는 군인 신봉자가 많았던 니치렌슈에 귀의했으며, 신도 학자 가와쓰라 본지를 사사하여 신도 연구를 하고 황전연구회를 설립했다.
해군 기관학교 교관 아사노 와사부로와의 인연(아키야마와 아사노의 첫 만남은 대본 시절)으로 신종교 '오모토'(당시 황도대본)에 입교하여 아야베 참배 등을 행했으나, 그 목적은 신앙이 아니라 신도 연구였다고 전해진다. 대본 측 자료에 따르면, 1916년 12월 14일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초청으로 아야베에 들러 대본 교주 고문이 되었으나, 1917년 5월에 결별했다고 한다.

(오다와라시 타이초카쿠)
1917년 5월 충수염을 앓아 하코네에서 요양에 힘썼으나, 이듬해 1918년에 재발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복막염을 합병했고, 2월 4일 야마시타 가메사부로의 별장인 오다와라의 타이초카쿠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교육칙어와 반야심경을 외웠다고 전해진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 묘지에 있었으나, 후에 가마쿠라 레이엔으로 이장되었다.
2. 사상 및 전략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해양력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아 일본 해군 독트린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러일 전쟁에서 혁신적인 전술을 구사하여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그의 문학적 소양과 말년의 종교적 탐구는 그의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준다.
2.1. 해군 전략 사상
아키야마는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해군 교리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스페인-미국 전쟁 관찰을 바탕으로 일본 해군을 위한 새로운 전략 및 전술 교리를 개발했다. 그는 강의에서 러시아를 일본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설정하고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그는 적 함대 앞에서 함대의 방향을 바꾸는 혁신적인 전술을 고안했는데, 이는 12세기 후반의 『노지마류 옛 해적 전술』이라는 고서에서 일본 해적들이 사용했던 전술을 차용한 것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그의 작전 입안 능력을 "지모여용"(智謀如湧치보 뇨요일본어, 지혜와 꾀가 샘솟듯 하다)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부관이었던 야마나시 가쓰노신은 아키야마를 "보통 사람이 아니다. 늘 머리가 회전하고 있었다"고 평했다. 다카기 소키치는 아키야마와 호리 데키치 두 명을 제국 해군 역사상 최고의 영재로 평가했다. 아키야마의 업적 중 일부는 시마무라 하야오의 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같은 작전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된다.
러일 전쟁 승리 후, 아키야마는 냉철하게 국력을 분석하여 잠수함과 공군의 강화를 주장했으며, 미국과의 비전을 역설하기도 했다.
2.2. 문학 및 종교적 관심사
아키야마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 특히 전통 와카 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마사오카 시키와 평생에 걸친 우정을 유지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만년에는 영적 연구와 종교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 그는 오모토 운동과 니치렌슈 불교, 그리고 반야심경에 심취했다. 사망 직전에도 교육칙어와 반야심경을 외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전쟁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생사나 전쟁의 승패에 대해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힘"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키야마 히로시는 "아버지는 종교에 부정적이었다"는 말을 남겨 그의 종교적 심취에 대한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3. 개인사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가난한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형제들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결혼 후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그의 성격은 다소 기이한 면모를 보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지성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부모**: 아버지 아키야마 히사타카, 어머니 사다
- 형제**: 형 아키야마 요시후루, 둘째 형 오카 마사오키
- 배우자**: 스에(이나오 마후쿠의 셋째 딸)
- 자녀**:
- 장남: 아키야마 히로시 (종교학자)
- 차남: 가타시 (해군 대좌, 아오야마 요시토쿠의 양자)
- 삼남: 다다시
- 장녀: 와카코
- 사남: 야스시
- 차녀: 다카코 (해군 중좌 오이시 무네쓰구의 부인)
- 손녀**: 오이시 히사코 (전 참의원 의원)
아키야마는 어린 시절부터 장난기 많고 활발했으며, 야구팀을 창단하여 해군 야구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해군병학교 시절 후배들이 "맹렬히 공부하지도 않는데 왜 항상 성적이 최고냐"고 묻자, 그는 "과거 시험 문제를 참고하고 교관의 버릇을 간파하는 것이다. 또한 필요한 부분은 몇 번이고 설명하기 때문에 시험 문제를 추측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볶은 콩을 좋아하여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자주 먹었다. 특히 1904년 11월 23일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언가 좋은 편의가 있다면 완두콩과 잠두콩 두세 말 정도 볶아서 보내 주십시오"라고 쓰여 있어, 완두콩과 누에콩 두 종류를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군복 소매로 콧물을 닦거나, 작전 구상에 몰두하면 며칠간 목욕하지 않는 등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으로 전해진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방귀를 뀌거나 소변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아키야마의 참모였던 이이다 히사쓰네 소좌는 "이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명참모지만, 보통이라면 괴짜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귀국하던 중 도박 사기를 당한 일화도 있다. 사기임을 눈치챈 아키야마는 우두머리 남자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가만히 두니 기고만장하군. 이대로는 사무라이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돈을 돌려줘"라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단도의 칼집을 뽑았다. 겁먹은 남자는 돈을 돌려주고 도망쳤다고 한다.
러일 전쟁 후에는 일본과 러시아 양측의 희생자를 직접 목격하고 출가를 원했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단념했다. 대신 장남 히로시에게 승려가 되도록 교육을 시켰다. 만년에는 오모토교에 입교하는 등 여러 종교 단체에 관여하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의 장남은 "아버지는 종교에 부정적이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4. 평가 및 영향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일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사상과 전술은 일본 해군 독트린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삶은 대중문화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져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4.1. 군사적 평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아키야마의 작전 입안 능력을 "지모여용"(智謀如湧치보 뇨요일본어, 지혜와 꾀가 샘솟듯 하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의 부관이었던 야마나시 가쓰노신은 아키야마를 "보통 사람이 아니다. 늘 머리가 회전하고 있었다"고 평했다. 다카기 소키치는 아키야마와 호리 데키치 두 명을 제국 해군 역사상 최고의 영재로 꼽았다.
아키야마의 참모로서의 공적은 오랫동안 도고 제독의 그림자에 가려져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시마다 긴지의 『미국에서의 아키야마 사네유키』(1969년 초판)에 의해 소개되었고, 시바 료타로가 발표한 역사 소설 『언덕 위의 구름』(1972년 초판)의 주인공이 되면서 국민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일본해 해전 출격 시 보고 전보의 한 구절인 "금일 날씨 청랑한데 파도가 높다"(本日天気晴朗ナレドモ浪高シ혼지쓰 텐키 세이로 나레도모 나미 타카시일본어)는 "금일 날씨가 맑아 우리 연합함대는 적 함대 격멸을 위해 출격 가능하나, 파도가 높아 구식 소형 함정 및 수뢰정은 출격 불가하므로 주력함만으로 출격한다"는 의미를 한자 포함 13자, 히라가나만으로도 불과 20자라는 경이적인 짧은 길이로 설명하고 있어, 지금도 짧은 문장으로 많은 것을 정확하게 전달한 명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모스 부호를 이용한 전신에서는 미세한 끊김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이 될 수 있어, 문장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일본해 해전에서 승리한 연합함대의 해산식에서 도고 제독의 훈시("연합함대 해산의 사") 초안 또한 아키야마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장에 감동한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전문을 영어로 번역시켜 미국 해군에 배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명문가이자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후세에는 "아키야마 문학"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그의 형 요시후루는 장례식에서 "동생은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라도 잠시라도 '나라를 위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4.2. 문화적 영향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그의 형 아키야마 요시후루, 그리고 친구인 마사오카 시키는 시바 료타로의 인기 다권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 소설은 또한 3년간 방영된 NHK 텔레비전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의 원작이 되기도 했다.
마쓰야마에 있는 아키야마의 생가는 현재 관광 명소가 되어 많은 방문객을 맞고 있다.
4.3. 비판 및 논쟁
"황국의 흥망은 이 한판 승부에 달려 있다. 각자 더욱 분발 노력하라"(皇国ノ興廃コノ一戦ニ在リ。各員一層奮励努力セヨ코코쿠 노 코하이 코노 잇센 니 아리. 카쿠인 잇소 훈레이 도료쿠 세요일본어)는 Z기 신호문은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다카마 쇼조의 편지 문구("천황은 명덕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무사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사랑한다. 황국의 흥망은 오늘의 싸움에 달려 있다. 이 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사나이가 죽어야 할 때는 지금이다")를 모방하여 히로시마 출신의 연합함대 참모장이었던 가토 도모사부로가 만들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어, 아키야마가 원작자가 아니라는 설도 존재한다. 뤼순항 공격의 서두에서도 "승패의 결정은 이 한판 승부에 달려 있다. 각원 노력하라"는 신호가 나왔지만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러시아 함대가 항복할 때 항복 깃발을 올리자, 아키야마는 도고에게 "장관님, 적이 항복했습니다. 포격을 중지할까요?"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도고 장관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태도에 아키야마는 "장관님, 무사의 인정입니다"라며 발포 중지를 간청했다고 한다.
원 시카이의 황제 추대 반대 운동과 관련하여, 하라 다카시는 "소책으로 나라를 그르치는 일은 가토 외상 시대에도 속료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외무의 고이케, 육군의 후쿠다, 해군의 아키야마 세 사람이 연합하여 기획했다"(하라 다카시 일지 1916년 7월 9일)며 아키야마의 정치적 개입을 비판하기도 했다.
해군 반성회에서 노모토 다메키치 소장이 시미즈 미쓰미 중장으로부터 들었다며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성적으로) 너무 많이 놀아 매독이 머리로 올라와 만년의 행동이나 언행이 이상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5. 관련 항목
- 가토 도모사부로
- 고노씨
- 군령부
- 니치렌슈
- 도고 헤이하치로
- 러일 전쟁
- 뤼순항 폐쇄 작전
- 마사오카 시키
- 미국 해군대학
- 미국-스페인 전쟁
- 미카사 (전함)
- 발틱 함대
- 반야심경
- 사무라이
- 사카노우에노쿠모 박물관
- 상하이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 소장 (군사 계급)
- 쑨원
- 시바 료타로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멘스 사건
-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 연합함대
- 오모토
- 요코스카시
- 위안스카이
- 제1차 세계 대전
- 제2차 만몽 독립 운동
- 조선
- 중장 (군사 계급)
- 지멘스 사건
- 청일 전쟁
- 충수염
- 쓰시마 해전
- 태정대신
- 포츠머스 조약
- 황해 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