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교육
오스본 얼 스미스는 1954년 12월 26일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클로비와 마벨라 스미스 부부의 여섯 자녀 중 둘째(다섯 아들과 한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룩클리 공군 기지에서 샌드블라스터로 일했다. 스미스가 6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와츠 지역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세이프웨이 스토어의 배달 트럭 운전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요양원의 보조원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꿈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등 스미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미스는 어린 시절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지만, 야구를 가장 좋아했다. 그는 집 앞 콘크리트 계단에 공을 튕기고 던질 때마다 반응 시간을 줄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등의 활동을 통해 빠른 반사 신경을 길렀다. 지역 YMCA에 가지 않거나 스포츠를 하지 않을 때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 제재소에 가서 튜브에서 뛰어내려 톱밥 더미로 백플립을 하는 등, 그의 유명한 백플립의 전조가 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1965년, 10살 때 그는 가족과 함께 와츠 폭동을 겪으며 "총격과 약탈 때문에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회상했다.
스미스가 중학교에 다니던 중 부모님은 이혼했다. 야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그는 거의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다저 스타디움에 가서 연간 약 25경기를 관람하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응원했다. 로크 고등학교에 입학한 스미스는 농구와 야구 팀에서 뛰었다. 농구 팀에서는 훗날 NBA 선수가 되는 마키스 존슨과, 야구 팀에서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함께 헌액되는 에디 머레이와 팀 동료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미스는 1974년 캘 폴리 샌 루이스 오비스포에 부분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으며, 야구 팀에 워크온으로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캘 폴리 코치 버디 해르에게서 스위치 히터를 배웠다. 1974년 시즌 중반 캘 폴리의 주전 유격수가 다리가 부러지자 스미스가 주전 자리를 맡았다. 그는 올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되었고, 1977년 졸업 전까지 통산 타석 (754) 및 도루 (110)에서 학교 기록을 세웠다.
1.2. 야구 경력 시작
스미스는 1976년 6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의해 아마추어 드래프트 7라운드에서 지명될 당시 아이오와주 클라린다에서 세미프로 야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에 합의하지 못했는데, 스미스는 계약금 1.00 만 USD를 원했지만 타이거스는 8500 USD를 제시했다. 스미스는 캘 폴리로 돌아가 마지막 학년을 보냈고, 1977년 드래프트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의해 4라운드에서 지명되어 최종적으로 계약금 5000 USD에 계약했다. 스미스는 1977년 첫 프로 야구 시즌을 노스웨스트 리그의 클래스 A 왈라왈라 파드리스에서 보냈다.
2. 프로 야구 경력
스미스는 메이저리그 데뷔 초부터 뛰어난 수비력으로 주목받았으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된 후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1.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78-1981)
스미스는 파드리스 시절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초기부터 뛰어난 수비력을 선보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1.1. 데뷔와 초기 활약
스미스는 1978년 애리조나주 유마에 있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 비로스터 초청 선수로 참가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스미스는 파드리스 감독 앨빈 다크가 기자들에게 유격수 자리가 스미스에게 주어질 것이며 그가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그의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 자신감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다크 감독은 스프링 트레이닝 도중 해고되었지만, 스미스는 1978년 4월 7일 MLB에 데뷔했다.
스미스가 메이저리그에서 인정을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의 루키 시즌 10경기 만에 일부 사람들이 그의 가장 위대한 수비 플레이라고 여기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1978년 4월 20일, 파드리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홈으로 불러들였고, 4회초 2아웃 상황에서 애틀랜타의 제프 버로우즈가 중간으로 땅볼을 쳤다. 스미스는 이 플레이를 "모두가 중견수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을 그가 중간으로 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돌려 2루 뒤로 다이빙했다. 공중에서 공이 불규칙 바운드되어 내 뒤로 튀었지만, 맨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땅에 착지한 후 다시 튀어 올라 버로우즈를 1루에서 아웃시켰다"고 묘사했다.

1978년 시즌 후반, 휴스턴 원정 경기 중 스미스는 릴라이언트 애스트로돔 밖에서 팀 버스로 가던 중 파트타임 안내원 데니스와 만났다. 두 사람은 때때로 장거리 관계를 유지하며 관계를 발전시켰고, 결국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1978년 시즌 동안 스미스는 그의 상징적인 동작을 선보였다. 파드리스 홍보 이사 앤디 스트라스버그는 스미스가 백플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팬들이 경기장에 들어오기 전 연습 중에만 백플립을 했다. 스트라스버그는 10월 1일 파드리스의 마지막 홈 경기인 팬 감사일에 스미스에게 팬들을 위해 백플립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베테랑 팀 동료 진 테나스와 상의한 후, 스미스는 백플립을 진행했고, 이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스미스는 1978년 시즌을 타율 .258, 수비율 .970으로 마쳤으며, 내셔널 리그 신인상 투표에서 밥 호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오프시즌 동안 타격 코치와 훈련했지만, 스미스는 1979년 시즌 첫 32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1979년 내셔널 리그 트리플 크라운 자격을 갖춘 타자들 중 스미스는 타율 (.211), 홈런 (0), 타점 (27)에서 모두 최하위를 기록했다. 경기장 밖에서는 파드리스 구단주와 스미스, 그리고 그의 에이전트 에드 고틀립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1980년 시즌을 앞두고 계약 분쟁이 발생했고, 협상이 스프링 트레이닝까지 이어지자 파드리스는 스미스의 계약을 1979년 연봉인 7.25 만 USD로 갱신했다. 스미스의 에이전트는 파드리스에게 스미스가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하기 위해 시즌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미스는 투르 드 프랑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인정했다. 파드리스의 계약 협상 태도에 분노한 고틀립은 샌디에이고 유니온-트리뷴에 "파드리스 야구 선수가 수입 보충을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원한다"는 구인 광고를 냈다. 파드리스 구단주 레이 크록의 아내 조안 크록이 스미스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보조 정원사 일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자, 스미스와 고틀립의 구단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2.1.2. 수비력 인정과 별명
한편, 스미스는 경기장에서의 업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80년, 그는 유격수 단일 시즌 최다 보살 (621개) 기록을 세웠고, 13년 연속 골드글러브상 수상의 시작을 알렸다. 스미스의 수비 플레이는 1981년 3월 유마 데일리 선(Yuma Daily Sun)의 스미스 특집 기사에서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더 위자드 오브 오즈영어)라는 별명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오즈의 마법사"라는 별명은 1939년 동명의 영화를 암시하는 것이었지만, 스미스는 선수 경력 동안 단순히 "마법사"(the Wizard더 위자드영어)로도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스미스의 야구 명예의 전당 명판에도 기록되어 있다. 1981년, 스미스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예비 선수로 출전했다.
2.1.3. 트레이드
스미스가 파드리스 구단주들과 문제를 겪는 동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또한 그들의 유격수 게리 템플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템플턴과 카디널스 팬들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마침내 1981년 8월 26일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정점에 달했다. 템플턴은 땅볼을 치고 뛰지 않은 것에 대해 야유를 받자 팬들에게 외설적인 제스처를 취했고, 화이티 허조그 감독이 그를 경기장에서 물리적으로 끌어내야 했다.
구단주 거시 부시로부터 카디널스 팀을 개편하라는 임무(특히 템플턴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받은 허조그는 1981년 야구 윈터 미팅에서 파드리스 단장 잭 맥키언이 접근했을 때 템플턴을 트레이드하려고 했다. 맥키언은 이전에 허조그에게 스미스는 어떤 트레이드에서도 건드릴 수 없는 선수라고 말했지만, 파드리스는 이제 스미스의 에이전트 고틀립에게 너무 화가 나서 맥키언이 거래를 할 의향이 있었다. 맥키언과 허조그는 템플턴과 스미스를 핵심으로 하는 6인 트레이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때 파드리스 감독 딕 윌리엄스는 허조그에게 스미스의 1981년 계약에 노 트레이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렸다.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때, 스미스의 초기 반응은 조항을 발동하여 샌디에이고에 머무는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카디널스가 할 말을 듣고 싶어 했다. 템플턴과 스미스 외의 선수들에 대한 거래가 성사되는 동안, 허조그는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스미스와 고틀립을 만나기 위해 샌디에이고로 날아갔다. 스미스는 나중에 "화이티는 내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유격수로 뛰면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원한다는 느낌을 주었고, 이는 파드리스에게서 빠르게 잃어가던 느낌이었다. 화이티가 우리와 이야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다는 사실 자체가 세인트루이스가 내가 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데 충분했다"고 회상했다.
2.2.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82-1996)
카디널스에서 스미스는 오랜 기간 동안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수많은 개인 상을 수상했다. 그의 수비력은 전설이 되었고, 은퇴 전까지 팀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다.
2.2.1. 월드 시리즈 우승 (1982)
1981년 12월 10일, 파드리스는 스미스, 스티브 뮤라, 그리고 추후 지명 선수를 카디널스로 트레이드하고, 템플턴, 식스토 레스카노 그리고 추후 지명 선수를 받았다. 양 팀은 1982년 2월 19일 파드리스가 앨 올름스테드를 카디널스로 보내고, 세인트루이스가 루이스 드 레온을 파드리스로 보내면서 트레이드를 완료했다. 허조그는 스미스가 더 많은 땅볼을 쳐서 공격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임무에 집중하도록 돕기 위한 동기 부여 도구를 만들었다. 어느 날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스미스에게 다가가 허조그는 "네가 플라이볼을 칠 때마다 나에게 1달러를 빚지고, 땅볼을 칠 때마다 내가 너에게 1달러를 빚진다. 이걸 1년 내내 계속하자"고 말했다. 스미스는 내기에 동의했고, 시즌이 끝날 무렵 허조그에게서 거의 300 USD를 땄다. 1982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허조그가 새로 구성한 팀은 4월 한 달 동안 12연승을 거두었고, 시즌을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1위로 마쳤다. 허조그는 나중에 스미스의 기여에 대해 "그가 수비에서 경기당 2점을 절약했다면, 그리고 그는 많은 밤에 그렇게 했다. 그것은 공격에서 경기당 2점을 타점으로 올리는 선수만큼이나 팀에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1982년 4월 28일 아들 O.J. (현재 니코 스미스로 알려짐)의 탄생으로 1982년 시즌 동안 아버지가 되었다. 스미스는 또한 시즌 동안 팀 동료 윌리 맥기와 지속적인 우정을 쌓았으며, 스미스는 자신이 "윌리가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 데 겪었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나중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5전 3선승제 NLCS에서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참가했다. 1차전에서 스미스는 맥기를 득점시킨 희생 플라이를 쳐서 시리즈의 첫 득점을 올렸고, 결국 세인트루이스의 3연승 스윕 경기에서 9타수 5안타를 기록했다.
허조그가 12월에 예측했던 대로, 스미스는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7전 4선승제 월드 시리즈에서 팀의 주전 유격수로 나섰다. 시리즈 동안 스미스는 3득점, 5안타를 기록했으며 수비에서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다. 세인트루이스가 7차전 6회 1아웃 상황에서 3대1로 뒤지고 있을 때, 스미스는 좌익수 쪽으로 안타를 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결국 그 이닝에 팀의 3득점 중 첫 득점을 올렸다. 카디널스는 8회에 2점을 더 추가하여 6대3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983년 1월, 스미스와 카디널스는 스미스에게 연간 100.00 만 USD를 지급하는 새로운 계약에 합의했다. 1983년 시즌 동안 스미스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서 내셔널 리그의 주전 유격수로 선정되었고, 시즌이 끝날 무렵 4년 연속 골드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84년 7월, 스미스는 파드리스를 상대로 타격하다가 투구에 맞아 손목이 부러졌다. 한 달 후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했지만, 그의 복귀는 카디널스를 포스트시즌 진출로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2.2. 주요 활약과 수상 (1980년대)
1985년, 스미스는 타율 .276, 31도루, 591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카디널스 팀은 시즌 동안 101승을 거두며 또 다른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제 7전 4선승제로 진행되는 NLCS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첫 네 경기에서 2승 2패를 기록하며 부시 스타디움에서 5차전이 열리게 되었다. 9회말 2대2 동점 상황에서 다저스 감독 토미 라소다는 마무리 투수 톰 니덴푸어를 마운드에 올렸다. 스미스는 1아웃 상황에서 니덴푸어를 상대로 좌타석에 들어섰다. 스미스는 이전에 좌타석에서 2,967번의 메이저리그 타석에서 홈런을 친 적이 없었지만, 몸쪽 직구를 잡아당겨 우익수 라인을 따라 끝내기 홈런을 쳐서 5차전을 3대2 카디널스 승리로 이끌었다. 스미스는 "나는 장타를 쳐서 득점권에 들어가려고 했다. 다행히 공을 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홈런은 잭 벅 아나운서의 "미쳐버려라, 여러분!"("Go crazy, folks!"고 크레이지, 폭스!영어)이라는 실황 중계를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카디널스 팬들에 의해 부시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선정되었다.
스미스의 팀 동료 잭 클라크가 6차전에서 늦은 이닝에 홈런을 쳐서 다저스를 물리친 후, 카디널스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게 되었다. 다시 한번 스포츠 기자들은 스미스의 23타수 2안타라는 타격 성적 대신 그의 뛰어난 수비 플레이에 주목했다. 카디널스가 3승 2패로 앞서가는 상황에서, 돈 덴킹거 심판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6차전 판정은 나머지 시리즈 (로열스가 7차전에서 승리)를 압도했다.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 동안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스미스가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파드리스와의 홈 경기에서 오른쪽 어깨에 충돌을 겪은 후 회전근개 파열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견제구에 1루로 다시 다이빙하다가 충돌을 겪은 후, 스미스는 투구 동작을 너무 많이 변경하여 회전근개 파열이 발생했다. 178 cm, 82 kg의 스미스는 수술을 포기하고 대신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팔 힘을 키웠고, 통증을 겪으면서도 경기를 뛰었다. 스미스는 "나는 부상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계속 뛰고 싶었고, 아무도 나를 상대로 뛰거나 부상을 악용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원했다. 야구공을 던지는 것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문을 열고, 라디오를 켜는 등 모든 것을.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했다"고 말했다.
부상 때문에 스미스는 1986년 시즌 카디널스의 첫 홈 경기 개막일에 그의 네 살짜리 아들 니코가 전통적인 개막일 백플립을 대신하도록 했다. 스미스는 그 시즌 후반인 8월 4일, 부시 스타디움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9회초, 필리스의 대타 본 헤이즈가 좌익수 쪽으로 짧은 플라이볼을 쳤는데, 스미스와 좌익수 커트 포드가 모두 공을 쫓았다. 홈 플레이트에 등을 대고 달리던 스미스는 앞으로 다이빙하며 공을 잡았고, 동시에 땅과 평행하게 날아다이빙하는 포드를 몇 인치 차이로 피하며 충돌을 피했다.
1987년 시즌 동안, 스미스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대부분 2번 또는 8번 타순에서 타격했지만, 허조그는 그를 2번 타자로 고정시켰다. 그 해 스미스는 타율 .303, 43도루, 75타점, 104득점, 40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유격수 부문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하기에 충분한 성적을 거두었다. 8년 연속 유격수 골드글러브상을 수상한 것 외에도, 스미스는 경력 최고인 출루율 .392를 기록했다. 스미스는 또한 1987년 올스타전에서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카디널스는 95승으로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획득했고, 이어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맞붙었다. 스미스는 시리즈 동안 3루타를 기록했고, 카디널스는 7경기에서 승리했다.
198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카디널스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미네소타 트윈스와 맞붙었다. 홈 팀이 모든 경기를 이겼고, 미네소타가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시리즈 동안 28타석에서 스미스는 3득점, 2타점을 기록했다. 스미스는 시카고 컵스 소속의 앙드레 도슨이 최하위 팀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스미스와 팀 동료 잭 클라크가 1위 표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었다. 1987년 시즌 후, 스미스는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큰 계약인 234.00 만 USD를 받았다.
팀은 1980년대 남은 기간 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스미스는 계속해서 올스타 출전과 골드글러브를 쌓아 올렸다. 계약으로 받은 관심과 함께 스미스는 계속해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세련된 옷차림으로 유명했던 그는 1988년 4월 GQ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스미스는 1989년 구단주 거시 부시가 사망하고 1990년 시즌 동안 허조그가 감독직을 사임하면서 카디널스 조직 내 변화를 목격했다.
2.2.3. 수비 기록 및 수상
오지 스미스는 유격수로서 넓은 수비 범위, 민첩한 반사 신경, 창의적인 수비 동작으로 유명했다. 그는 1980년부터 1992년까지 13년 연속으로 골드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이 부문에서 내셔널 리그 유격수 최다 기록을 세웠다. 그의 통산 보살 수 8,375개는 메이저리그 기록이며, 통산 병살 수 1,590개는 2007년 오마르 비스켈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최다 기록이었다. 1980년에는 단일 시즌 유격수 최다 보살 기록인 621개를 세웠고, 경기당 5.75라는 충격적인 레인지 팩터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다른 유격수들의 평균인 4.30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였다.
그의 수비는 "신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유격수 최심부(거의 좌익수 앞)의 땅볼을 노바운드로 점프하며 송구하여 아웃시키거나, 다이빙하면서 불규칙 바운드된 공을 맨손으로 처리하는 등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스미스가 배트로 1점을 내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는 글러브로 확실히 2점을 막아준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91년에는 151경기에 출전하여 단 8개의 실책만을 기록하며 수비 기회가 많은 유격수로서 이례적인 안정감을 보여주었다. 2007년에는 올타임 골드글러브팀(수비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2.2.4. 후기 경력과 은퇴
조 토레가 1990년 스미스의 새로운 감독이 되었지만, 팀은 토레의 거의 5년 재임 기간 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카디널스가 1992년 100주년을 기념하는 동안, 스미스는 4월 26일 통산 500번째 도루를 기록했고, 5월 26일 홈 관중 앞에서 3루타로 2,000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자신의 이정표를 세웠다. 세인트루이스는 1992년 6월 1일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에서 1경기 차 선두를 달렸지만, 스미스가 7월 말 처음으로 수두에 걸려 2주간 병을 앓는 등 부상이 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그의 전국적인 인기를 증명하듯, 스미스는 1992년 심슨 가족의 "호머 앳 더 배트"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스미스는 1992년 11월 2일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지만, 12월 6일 카디널스와 재계약했다.
스미스는 1992년에 마지막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으며, 내셔널 리그 유격수로서 13년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1993년 시즌은 스미스가 1981년에서 1996년 사이에 올스타 팀에 들지 못한 유일한 해였으며, 스미스는 1993년 시즌을 타율 .288, 수비율 .974로 마쳤다. 그는 파업으로 단축된 1994년 시즌 동안 98경기에 출전했으며, 5월 31일 어깨 수술 후 1995년 시즌 거의 3개월 동안 결장했다. 스미스는 그의 지역사회 봉사 노력으로 1994년 브랜치 리키 상과 1995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했다. 1994년 2월, 스미스는 미주리 주지사 신체 건강 위원회의 명예 의장이자 공식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1996년 시즌에 들어서면서 스미스는 상반기 동안 아내 데니스와의 이혼을 마무리했다. 한편, 토니 라 루사 감독은 새로운 구단주 그룹과 함께 카디널스에서의 첫 시즌을 시작했다. 단장 월트 조케티가 오프시즌 동안 유격수 로이스 클레이튼을 영입한 후, 라 루사는 카디널스가 승리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자리를 놓고 공개 경쟁을 강조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이 끝났을 때, 스미스는 타율 .288과 수비에서 실책 0개를 기록했고, 클레이튼은 타율 .190에 8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스미스는 자신의 스프링 트레이닝 성적으로 주전 자리를 얻었다고 믿었지만, 라 루사는 동의하지 않았고, 스미스가 보통 세 경기마다 한 번씩 출전하는 플래툰 상황에서 클레이튼에게 더 많은 출전 시간을 주었다. 라 루사는 "그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로이스와 어떻게 비교되는지 오해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코치들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의 전체 경기를 평가했을 때, 로이스는 공격적으로 매우 느리게 시작했지만 점차 나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수비와 주루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로이스는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할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시즌 첫 달을 결장했으며, 스프링 트레이닝이 끝난 후 라 루사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계속 품고 있었다. 5월 중순 비공개 회의에서 라 루사는 스미스에게 트레이드되고 싶은지 물었다. 대신, 스미스와 그의 에이전트는 카디널스 구단과 타협안을 협상하여, 스미스가 은퇴를 발표하는 것과 함께 계약의 특별 조항을 매수하는 데 동의했다. 이 합의로 1996년 6월 19일 부시 스타디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고, 스미스는 시즌이 끝날 때 야구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스미스가 내셔널 리그의 마지막 투어를 하는 동안, 그는 많은 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1996년 필라델피아 올스타전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6월 19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스미스의 타율은 .239에서 .286으로 상승했다. 9월 2일, 스미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10회말 경기에서 홈런을 포함하여 4득점을 기록하며 경력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홈 플레이트에서의 아슬아슬한 플레이로 득점했다. 이 승리로 카디널스는 내셔널 리그 중부 지구에서 휴스턴에 반 경기 차로 다가섰고, 카디널스는 결국 지구 우승을 6경기 차로 차지했다. 카디널스는 1996년 9월 28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 전에 부시 스타디움에서 특별 행사를 열어 스미스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를 기렸다. 개막일, 올스타전, 포스트시즌 경기 전에 백플립 의식으로 유명했던 스미스는 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백플립을 선보였다.
포스트시즌에서 카디널스는 먼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1996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맞붙었다. 1차전을 결장한 후, 스미스는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 선발 출전하여, 타석에서 1득점, 1안타, 2볼넷을 기록하고 수비에서 1보살, 1자살을 기록하며 팀이 시리즈에서 2승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카디널스는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3차전에서 승리하며 시리즈를 스윕했다.
카디널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1996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맞붙었다. 스미스는 1차전에 선발 출전하여 수비에서 3자살, 1보살을 기록했지만, 카디널스의 4대2 패배에서 4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카디널스는 이어서 스미스가 출전하지 않은 2, 3, 4차전에서 승리했다. 5차전에 선발 출전한 스미스는 4자살, 1보살을 기록했지만, 4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또 다른 카디널스의 패배를 맛봤다. 카디널스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6차전이나 7차전에서도 승리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10월 17일 7차전에서 카디널스가 10점 차로 뒤지고 있을 때, 스미스는 6회에 대타로 나와 우익수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나며 그의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스미스는 통산 올스타 투표에서 2,750만 표 이상을 획득한 것부터 만루 홈런 없이 가장 많은 MLB 타석을 기록한 것까지 다양한 기록을 남기며 경력을 마쳤다.
3. 플레이 스타일과 특징
오지 스미스는 그의 독특한 야구 스타일과 기술적 특징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형 유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1. 뛰어난 수비력
스미스의 수비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넓은 수비 범위, 민첩한 반사 신경, 그리고 창의적인 수비 동작은 그를 "오즈의 마법사"로 불리게 했다. 그는 유격수로서 통산 8,375개의 보살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웠고, 13년 연속 골드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이 부문에서 내셔널 리그 유격수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1980년에는 단일 시즌 유격수 최다 보살 기록인 621개를 달성하며 그의 수비 지배력을 입증했다. 그의 수비는 단순히 공을 잡고 던지는 것을 넘어, 다이빙 캐치, 노바운드 송구, 맨손 처리 등 상식을 뛰어넘는 플레이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1985년 어깨 부상에도 불구하고 수술 대신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팔 힘을 키워 통증을 이겨내고 경기를 뛰는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3.2. 타격 능력 향상
선수 경력 초반 스미스는 타격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1978년 데뷔 시즌 타율 .258을 기록했지만, 1979년에는 .211로 떨어지는 등 부진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한 후 화이티 허조그 감독의 지도 아래 타격 자세를 개선하고 땅볼 타구를 늘리는 데 집중하면서 점차 타격 능력을 향상시켰다. 1985년에는 타율 .276을 기록하며 타격에서 꾸준한 발전을 보였고, 특히 1985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에서 좌타석에서 그의 경력 유일한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극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1987년에는 타율 .303, 출루율 .392, 장타율 .383, 182안타, 40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개인 최고 시즌을 보냈고, 유격수 부문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하며 "수비만의 선수"라는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또한 보내기 번트의 달인이었고, 히트 앤 런 능력도 뛰어났다.
3.3. "오즈의 마법사" 별명과 쇼맨십
"오즈의 마법사"라는 별명은 그의 마법 같은 수비력에서 유래했으며, 1939년 동명의 영화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경기 중 선보인 화려한 쇼맨십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경기 시작 전 유격수 포지션에 들어서면서 선보인 백플립(공중제비)은 그의 상징적인 동작이 되었다. 이 백플립은 팬 감사일 행사에서 처음 선보인 후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개막일, 올스타전, 포스트시즌 경기 등 특별한 날에 팬들을 위해 공연되었다. 이러한 쇼맨십은 팬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고, 그를 야구계의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15번의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그 중 11번은 팬 투표로 선정될 정도로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스미스가 올스타 팬 투표에서 받은 통산 2,700만 표 이상은 내셔널 리그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4. 은퇴 후 활동
선수 은퇴 후 오지 스미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야구계와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4.1. 방송 및 미디어 활동
은퇴 후 스미스는 1997년 멜 앨런의 뒤를 이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디스 위크 인 베이스볼(This Week in Baseball디스 위크 인 베이스볼영어)의 진행을 맡았다. 또한 1997년부터 1999년까지 KPLR-TV에서 카디널스 경기 지역 방송의 컬러 코멘테이터로 활동했다. 디스 위크 인 베이스볼 진행을 마친 후에는 1999년부터 CNN-SI에서 일했다. 2011년 토니 라 루사가 카디널스 감독에서 은퇴한 후, 스미스는 2012년 팀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서 특별 강사로 활동하는 등 다시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현재 구단에 대한 주간 뉴스 매거진 텔레비전 쇼인 카디널스 인사이더(Cardinals Insider카디널스 인사이더영어)의 진행자이다.
4.2. 사업 및 지역사회 공헌
스미스는 은퇴 후 다양한 사업 벤처에서 기업가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오지스"(Ozzie's오지스영어)라는 레스토랑 겸 스포츠 바를 열었고, 1990년에는 유소년 스포츠 아카데미를 시작했으며, 1999년에는 식료품 체인에 투자했고, 2000년대 초에는 데이비드 슬레이와 파트너십을 맺어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 사업들 중 유소년 아카데미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레스토랑은 소유권과 위치가 한 번 변경된 후 2010년에 문을 닫았다. 야구에서 은퇴한 이후 세인트루이스 지역에서 수많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는 것 외에도, 스미스는 2006년에 아동 도서 헬로 프레드버드!(Hello Fredbird!헬로 프레드버드!영어)를 저술했으며 2008년에는 자신만의 샐러드 드레싱 브랜드를 출시했다. 2016년부터는 미주리 주에 5개의 재생 의학 클리닉을 열었다.
4.3. 야구계 복귀
스미스는 은퇴 후에도 야구계와 관련된 활동을 이어갔다. 2001년 여름에는 세인트루이스 시립 오페라의 오즈의 마법사 공연에서 마법사 역할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서 특별 강사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을 지도했다. 2023년 3월에는 그의 모교인 캘 폴리의 배겟 스타디움에 있는 그의 동상이 오지 스미스 플라자(Ozzie Smith Plaza오지 스미스 플라자영어)의 일부로 재헌정되었다.
5. 명예와 평가
오지 스미스는 그의 뛰어난 수비력과 팬들에 대한 헌신으로 야구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5.1. 명예의 전당 헌액
2002년 1월 8일, 스미스는 전화 한 통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첫 번째 투표 자격 연도에 91.7%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2002년 동계 올림픽을 위해 솔트레이크시티로 향하는 올림픽 성화가 세인트루이스를 통과하고 있었고, 스미스는 그날 저녁 세인트루이스 램스의 쿼터백 커트 워너와 함께 성화 봉송자로 참여했다. 스미스는 2002년 7월 28일 열린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연설을 했다.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야구 경험을 소설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의 등장인물들과 비교했고, 이후 그의 아들 더스틴이 그의 명예의 전당 명판을 수여했다.
5.2. 영구 결번 및 기념물
헌액식 며칠 후인 8월 11일, 스미스는 부시 스타디움으로 돌아와 조각가 해리 웨버가 제작한 자신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웨버는 스미스가 야구공을 잡기 위해 땅과 수평으로 몸을 뻗은 모습을 통해 그의 수비 기술을 강조했다. 제막식에서 웨버는 스미스에게 "당신은 경력의 절반을 공중에서 보냈다. 그것이 조각가가 작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2023년 3월에는 그의 모교인 캘 폴리의 배겟 스타디움 입구에 있는 오지 스미스 플라자의 일부로 그의 동상이 재헌정되었다.
스미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활약했던 등번호 1번은 1996년 그의 은퇴와 함께 구단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5.3. 기타 수상 및 영예
야구 명예의 전당 외에도 스미스는 다른 명예의 전당 및 표창에 헌액되거나 수상했다. 1999년, 그는 더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87위에 올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 센추리 팀 유격수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그는 미주리 스포츠 명예의 전당, 앨라배마 스포츠 명예의 전당, 세인트루이스 워크 오브 페임에 헌액되었으며, 캘 폴리로부터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4년 1월, 카디널스는 스미스를 2014년 초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22명의 전 선수 및 관계자 중 한 명으로 발표했다. 2007년에는 올타임 골드글러브팀에 선정되었다.
6. 개인사
6.1. 가족
스미스는 전 부인 데니스와의 결혼을 통해 세 자녀를 두었다: 아들 니코 (O.J.)와 더스틴, 그리고 딸 태린. 니코는 2005년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4에서 최종 10인 안에 들며 화제가 되었다. 2012년, 스미스는 그의 13개 골드글러브 전부를 경매에 부쳐 50.00 만 USD 이상에 팔았다는 소식으로 다시 한번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6.2. 세인트루이스에서의 삶
스미스는 여전히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며 지역사회에서 눈에 띄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는 2001년 여름 세인트루이스 시립 오페라의 오즈의 마법사 공연에서 마법사 역할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현재 구단에 대한 주간 뉴스 매거진 텔레비전 쇼인 카디널스 인사이더의 진행자이다. 2016년부터는 미주리 주에 5개의 재생 의학 클리닉을 개설했다.
7. 통산 기록
7.1. 타격 기록
| 분류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
| 통계 | 2,573 | 9,396 | 1,257 | 2,460 | 402 | 69 | 28 | 793 | 580 | 1,072 | 589 | .262 | .337 | .328 |
7.2. 수비 기록
| 분류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수비 기회 | 병살 | 수비율 | RF/9 | 이닝 |
|---|---|---|---|---|---|---|---|---|---|
| 통계 | 2,511 | 4,249 | 8,375 | 281 | 12,624 | 1,590 | .978 | 5.22 | 21,785.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