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آقامحمدخان قاجار아카 모함마드 칸 카자르페르시아어, 1742년 3월 14일 ~ 1797년 6월 17일)는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창건하고 1789년부터 1797년까지 샤로서 통치한 인물이다. 본래 카자르족의 쿠완루(Quwanlu) 지파 족장이었던 그는 1789년 이란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794년 자드 왕조의 로트프 알리 칸을 폐위시킨 후 1796년 3월에야 공식적으로 즉위식을 가졌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어린 시절 아델 샤 아프샤르에게 사로잡혀 거세되었기 때문에 자녀가 없었다. 그는 1797년 6월 17일에 암살되었으며, 그의 조카인 파트 알리 샤 카자르가 뒤를 이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의 통치는 중앙 집권적이고 통일된 이란의 회복과 수도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테헤란으로 이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특히 조지아와 케르만 원정에서 보여준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행동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실용적이고 계산적이며 노련한 군사 및 정치 지도자로도 평가된다. 그의 통치는 이란의 영토적 통합을 이루었지만, 민간인과 소수 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약탈 등 극단적인 폭력으로 얼룩진 시기였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는 개인적인 배경과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사건, 그리고 인질 생활을 통해 형성된 그의 성격과 통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출생과 가족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42년경 고르간의 아스타라바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자르족의 쿠완루(Quwanlu 또는 Qawanlu) 지파에 속했다. 카자르족은 10세기에서 11세기경 소아시아에 출현하여 퍼져나간 투르크멘 키질바시 부족 중 하나로, 사파비 왕조 초창기부터 그들에게 병력을 제공했다. 이 부족에는 여러 다른 지파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지파는 데벨루(Develu)로, 쿠완루 지파와 자주 충돌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쿠완루 씨족의 족장인 모함마드 하산 칸 카자르의 장남이자, 타흐마스프 2세 샤(아마도 1736년 이란의 왕위를 찬탈하여 아프샤르 왕조를 세운 나디르 샤의 강요에 의해)의 명령으로 처형된 저명한 귀족 파트 알리 칸 카자르의 손자였다.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는 호세인 콜리 칸 카자르, 모르테자 콜리 칸 카자르, 모스타파 콜리 칸, 레자 콜리 칸, 자파르 콜리 칸, 메흐디 콜리 칸, 아바스 콜리 칸, 알리 콜리 칸 카자르 등 여러 이복형제와 친형제가 있었다.
2.2. 어린 시절과 거세
1747년 나디르 샤가 사망하자 이란의 아프샤르 왕조 통치는 붕괴되었고, 이는 모함마드 하산 칸에게 아스타라바드를 차지할 기회를 주었다. 이에 나디르 샤의 조카인 아델 샤는 그를 사로잡기 위해 마슈하드에서 아스타라바드로 진군했다. 아델 샤는 모함마드 하산 칸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을 붙잡았고 그를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델 샤는 아가 모하마드 칸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그를 거세한 후 풀어주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세 또는 14세였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아가"(آقا페르시아어)라는 표기는 "선생님" 또는 "씨"와 유사한 경칭으로 사용되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의 칭호는 궁정에서 일하는 환관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던 "아غا"(آغا페르시아어)라는 다른 표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거세는 그를 평생 동안 신체적, 정신적으로 손상시켰고, 자녀를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몸이 병약했으며, 1790~1791년에는 뇌졸중으로 인해 사흘 동안 의식을 잃기도 했다.
2.3. 아버지의 죽음과 인질 생활
나디르 샤 사후 10년 동안 호라산의 아프샤르 왕조 통치는 경쟁 부족장들 간의 전쟁과 두라니 제국의 통치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침략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시기 모함마드 하산 칸은 파슈툰족 군사 지도자 아자드 칸 아프간과 자드 왕조의 통치자 카림 칸을 상대로 나디르 샤의 옛 제국 서부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그는 1759년 자드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배신당했고, 이후 오랜 숙적인 사바드쿠흐의 모함마드 칸에게 살해당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호세인 콜리 칸이 쿠완루 지파의 새로운 족장으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아스타라바드는 카림 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카림 칸은 데벨루 부족의 호세인 칸 데벨루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한편, 아가 모하마드 칸과 그의 동생 호세인 콜리 칸은 스텝 지역으로 도피했다. 1년 후,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스타라바드를 침략했으나, 도시 총독의 추격을 받아 도주해야 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슈라프에 도달했지만, 결국 붙잡혀 카림 칸이 통치하는 테헤란으로 인질로 보내졌다. 호세인 콜리 칸 또한 곧 붙잡혀 카림 칸에게 보내졌다.
인질 생활 동안 아가 모하마드 칸은 카림 칸에게 친절하고 명예롭게 대우받았으며, 카림 칸은 그에게 친척들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설득하게 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카림 칸은 그들을 담간에 정착시켰다. 1763년, 아가 모하마드 칸과 호세인 콜리 칸은 자드 왕조의 수도인 시라즈로 보내졌는데, 그곳에는 카림 칸의 하렘에 속해 있던 그들의 고모 카디자 베굼이 살고 있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의 이복형제인 모르테자 콜리 칸과 모스타파 콜리 칸은 그들의 어머니가 도시 총독의 누이였기 때문에 아스타라바드에서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나머지 형제들은 카즈빈으로 보내져 명예롭게 대우받았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카림 칸의 궁정에서 포로라기보다는 존경받는 손님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카림 칸은 아가 모하마드 칸의 정치적 지식을 인정하고 국익에 대한 그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아가 모하마드 칸을 "샤나메" 서사시에서 신화 속 투란의 왕 아프라시아브의 지혜로운 조언자인 피란-에 비세흐에 비유하며 불렀다. 이 시기 카즈빈에 있던 아가 모하마드 칸의 형제 중 두 명도 시라즈로 보내졌다. 1769년 2월, 카림 칸은 호세인 콜리 칸을 담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호세인 콜리 칸은 담간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데벨루 부족 및 다른 부족들과 격렬한 충돌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1777년경 핀다리스크 근처에서 그와 충돌했던 야무트 부족의 투르크인들에게 살해당했다. 1779년 3월 1일, 아가 모하마드 칸이 사냥을 하던 중, 카디자 베굼으로부터 카림 칸이 6개월간의 병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4. 형제들과의 관계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의 형제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권력 다툼과 부족 내 세력 구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마잔다란에서 레자 콜리와 모르테자 콜리 형제와 충돌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모르테자 콜리는 이후 아스타라바드로 도피했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와 평화를 이루려 했으나 모르테자 콜리는 불만을 품고 이스파한의 알리-모라드 칸에게, 그리고 시라즈의 사데크 칸 자드에게 도피했다가 호라산에서 사망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또한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던 자파르 콜리 칸을 처형했는데, 이는 자드 왕조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조가 얼마나 빨리 쇠퇴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3. 권력 장악 및 이란 통일
카림 칸 사후 발생한 권력 공백기는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에게 이란 전역을 통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치밀한 전략과 잔혹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란의 여러 지역을 차례로 정복하며 카자르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3.1. 마잔다란과 길란 정복
카림 칸 사망 후 시라즈에서 내분이 벌어지는 동안, 아가 모하마드 칸은 충성스러운 추종자들과 함께 테헤란으로 향했다. 테헤란에서 그는 데벨루 씨족의 주요 족장들을 만나 평화를 맺었다. 그는 아버지의 해골이 보관되어 있던 샤-압돌-아짐 성지를 방문했다. 이후 그는 마잔다란으로 이동하여 쿠완루 형제들 사이에서 자신의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이로 인해 그는 형제 레자 콜리와 모르테자 콜리와 충돌했고, 4월 2일에 그들을 격파하여 마잔다란을 정복했다.
한편 모르테자 콜리는 아스타라바드로 도피하여 요새를 구축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모르테자 콜리의 어머니가 데벨루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와 전쟁을 시작하면 데벨루와의 취약한 동맹이 깨질 수 있음을 알고 도시를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 동시에 자드 왕조의 왕자 알리-모라드 칸 자드는 아자드 칸 아프간의 아들 마흐무드 칸 휘하의 자드 및 아프간 군대를 마잔다란으로 보냈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의 형제 자파르 콜리 칸이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호세인 콜리 칸의 아들들인 파트 알리 콜리와 호세인 콜리와 함께 마잔다란의 수도 바볼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1780년 가을, 레자 콜리는 라리잔 출신 병력과 함께 바볼을 침략하여 아가 모하마드 칸의 집을 포위하고 몇 시간의 전투 끝에 그를 사로잡았다. 모르테자 콜리는 이 소식을 듣고 1781년 1월 1일 투르크멘 병력과 함께 바볼로 진군하여 아가 모하마드 칸을 풀어주었다. 세 형제는 서로의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과 레자 콜리는 성공한 반면, 모르테자 콜리는 불만을 품고 이스파한의 알리-모라드 칸에게, 그리고 시라즈의 사데크 칸 자드에게 도피했다가 호라산에서 사망했다. 그의 옛 지지자들은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가서 그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때 아가 모하마드 칸은 다시 한번 형제 레자 콜리와의 갈등에 휘말렸지만, 여러 전투에서 그를 격파한 후 다시 평화를 확립했다. 모르테자 콜리는 아스타라바드와 헤자르 자리브 지역의 여러 구역을 사실상 통치하도록 허락받았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알리-모라드 칸은 곧 마잔다란을 침략했고, 이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마잔다란인과 카자르족으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바볼에서 진군하여 알리-모라드 칸을 공격, 그를 마잔다란에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후 쿠미스, 셈난, 담간, 샤흐루드, 바스탐을 점령했다. 또한 그는 길란의 통치자 헤다야트-알라 칸을 자신의 봉신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도시 정복에 도움을 준 보상으로 동생 알리 콜리에게 셈난의 영토를 하사했다.
3.2. 자드 왕조와의 전쟁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드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들과 일련의 전쟁을 벌이며 이란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1781년, 이란과의 무역로를 개척하여 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교역하고자 했던 러시아 제국은 마르코 이바노비치 보이노비치 휘하의 사절단을 고르간 해안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8월 10일에 도착하여 아슈라프에 무역소를 건설할 승인을 요청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이를 거부하자, 보이노비치는 그의 거부를 무시하고 아슈라데흐섬에 임시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배가 없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섬을 탈환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12월 26일 보이노비치와 그의 부하들을 아스타라바드로 연회에 초대하여 속임수로 사로잡았고, 보이노비치가 1782년 1월 13일 아슈라데흐에서 부하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기로 동의할 때까지 그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1년 후 아가 모하마드 칸은 길란의 통치자 헤다야트-알라가 자드 왕조로 충성을 바꿨기 때문에 길란을 침략했다. 헤다야트-알라는 평화를 위해 미르자 사데크와 아가 사데크 라히지라는 두 외교관을 아가 모하마드에게 보냈다. 예방 조치로 그는 시르반으로 피신했다. 외교관들은 아가 모하마드 칸과 유리한 조건을 협상할 수 없었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길란의 수도 라슈트를 약탈하고 그 재물을 강탈했다. 승리에 기뻐하며 그는 동생 자파르 콜리 칸을 보내 페르시아 이라크 북부를 정복하게 했다. 자파르 콜리 칸은 라이 (또는 카라지)에서 자드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카즈빈을 점령했다. 그는 이어서 잔잔으로 진군하여 그곳도 점령했다。1783년 가을 그들은 마잔다란으로 돌아왔다. 1783년 봄,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드 왕조의 통제하에 있던 문제의 도시 테헤란을 포위했다. 포위 공격 중 도시에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아가 모하마드 칸의 군대 진영에도 퍼져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담간 근처의 여름 별장인 알리 볼라그로 돌아갔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후 마잔다란으로 돌아가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알리-모라드 칸은 전년도 아가 모하마드 칸의 테헤란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1784년 6월 마잔다란으로 6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보냈는데, 이는 카자르족을 완전히 궤멸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의 15세 아들 셰이크 베이스 칸이 군대를 지휘했고, 알리 모라드는 테헤란에 남아 있었다. 군대가 마잔다란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재빨리 자드 왕조에 항복했고 귀족들은 이탈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과 그의 소수 지지자들은 아스타라바드로 도피하여 가능한 한 도시를 요새화하려 했다. 한편, 모르테자 콜리는 충성심을 바꾸어 자드 왕조를 섬기기 시작했다. 알리-모라드 칸은 이후 친척 모함마드 자히르 칸 휘하의 8천 명 병력을 아스타라바드로 보내 도시를 포위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미 포위 공격에 대비하여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매일 그의 병력은 포위군의 식량을 제한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키려 노력했다. 이는 결국 포위군의 상황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아가 모하마드 칸이 도시를 떠나 그들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모함마드 자히르 칸은 카라쿰 사막으로 도주했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의 요무트 동맹군에게 붙잡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의 부하 중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11월 14일,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스타라바드에서 마잔다란으로 진군하여 아슈라프에서 자드 군대를 격파했다. 자드 군대는 사리를 방어할 수 없었고 셰이크 베이스 칸은 11월 23일 테헤란으로 도피했다.

한편, 알리-모라드 칸은 또 다른 자드 군대를 모집하여 사촌 루스탐 칸 자드의 지휘하에 마잔다란으로 보냈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패배했다. 알리-모라드 칸은 1785년 2월 11일 사망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테헤란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가 도시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재빨리 성문을 닫고, 그들은 오직 이란의 왕에게만 성문을 열 것이며, 그 왕은 알리-모라드 칸의 뒤를 이은 자파르 칸 자드라고 말했다. 따라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란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파르 칸을 격파해야 했다. 그는 이후 재빨리 이스파한으로 진군했다. 자파르 칸은 그의 진군을 막기 위해 병력을 보냈으나, 그들은 곰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철수했다. 자파르 칸은 이후 더 큰 자드 군대를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보냈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은 카샨 근처에서 그 군대를 격파했다. 자파르 칸은 이후 시라즈로 도피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5월 2일 이스파한에 도착하여 자드 왕조의 보물과 자파르 칸의 하렘의 남은 것들을 발견했다. 카자르 군대는 이후 도시를 약탈했다.
1785년 여름,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스파한을 페르시아 이라크 원정의 본부로 삼았다. 그는 7월 7일 이스파한을 떠나 바흐티아리족 족장들을 자신의 종주권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후 9월 2일 테헤란으로 떠났고, 전 자드 사령관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가 테헤란에 도착하자 도시는 마침내 그에게 복종했다. 동시에 그의 부하들은 하마단을 점령하고 많은 쿠르드족 및 투르크족 족장들을 카자르 통치에 복종시켰다. 1786년 3월 12일, 아가 모하마드 칸은 테헤란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15,000명에서 30,000명이었다. 이 시기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신을 이란의 왕으로 여겼지만, "샤"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가 바흐티아리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이는 동안, 자파르 칸은 재빨리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그곳을 다시 점령했다(비록 타브라크 요새는 4개월 동안 버텼지만). 그는 이후 카샨과 곰으로 병력을 보냈고, 자신은 1786년 1월 초 하마단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는 호스로 칸과 모함마드 호세인 칸 카라고즐루 등 지역 부족장들에게 패배했다. 자파르 칸은 이후 잔다크 족장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파한으로 철수했다. 족장들은 패배하고 자파르 칸에게 복종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드 왕조의 이스파한 침략 소식을 듣고 재빨리 도시로 이동했고, 이는 자파르 칸이 다시 시라즈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후 자파르 콜리 칸을 대신하여 자파르 콜리 칸을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잔잔의 총독이 반란을 일으켰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북쪽으로 돌아가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용서했다.
3.3. 테헤란 수도 이전
1786년 3월 12일,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의 수도를 고향인 마잔다란의 사리에서 테헤란으로 옮겼다. 그는 레이의 후계 도시인 테헤란을 수도로 삼은 최초의 이란 통치자였다. 비록 사파비 왕조와 자드 왕조 모두 도시를 확장하고 궁전을 지었지만, 테헤란을 수도로 삼은 것은 아가 모하마드 칸이었다. 수도를 더 남쪽으로 옮긴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아직 제정 러시아에 할양되지 않았던 이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통합된 캅카스 영토에 가까이 머무르기 위함이었다.
3.4. 아제르바이잔, 파르스, 케르만 정복

자파르 칸 자드의 통치에서 벗어난 자드 왕조를 보며, 아가 모하마드 칸은 시라즈를 완전히 점령할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도시로 진군했고, 가까워지자 로트프 알리 칸의 공격을 받았다. 1789년 6월 25일에 전투가 벌어졌고, 로트프 알리 칸은 시라즈로 후퇴했으며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를 추격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포위는 9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진영을 설치하고 테헤란으로 돌아와 다음 노루즈가 끝날 때까지 머물렀다. 1790년 5월 17일, 아가 모하마드 칸은 다시 시라즈로 진군했다. 그가 파르스에 도착하자 비흐바한의 총독이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로트프 알리 칸은 다시 아가 모하마드 칸의 진군을 막기 위해 시라즈를 떠났으나, 카자르 통치자는 카즈빈과 그 주변 지역으로 철수하여 일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후 자신을 카자르 왕조의 가장 적합한 후계자로 여겼던 자파르 콜리 칸과 다투었고, 그를 처형했다. 그는 자드 가문에서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조가 얼마나 빨리 쇠퇴할 수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이는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로트프 알리 칸이 케르만에서 문제를 겪는 동안,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제르바이잔에 자유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바바 칸을 페르시아 이라크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1791년 봄 아제르바이잔으로 진군했다. 그는 타룸에 멈춰섰고, 친척인 솔레이만 칸 카자르를 보내 탈리시 칸국이 카자르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후 사라브로 가서 사라브 칸국을 복종시켰다. 그는 이후 아르다빌로 가서 아르다빌 칸국을 진압하고 도시의 사당을 방문했다. 그는 마침내 카라다그로 가서 자신에 대한 모든 저항을 종식시켰다. 그는 돈볼리 귀족 호세인 콜리 돈볼리를 호이와 타브리즈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하는 동안, 로트프 알리 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스파한을 공격했다. 그러나 시라즈의 인기 있는 총독 하즈 이브라힘 시라지는 로트프 알리 칸이 도시를 비운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의 형제인 모함마드-호세인 시라지는 자드 통치자의 장군이었는데 많은 병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로트프 알리 칸은 시라즈로 급히 돌아왔으나, 도시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성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시라즈를 점령할 만큼 충분히 큰 군대를 모았다. 하즈 이브라힘은 이후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사절을 보내 파르스의 통치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하며, 그가 수락한다면 3,000마리의 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즉시 이를 수락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파르스에 도착하자 그는 하즈 이브라힘을 파르스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부하 중 한 명을 보내 로트프 알리 칸의 가족을 테헤란으로 데려가고 자드 가문의 소유물을 가져오도록 했다. 또한 그는 바바 칸에게 필요한 경우 하즈 이브라힘을 돕기 위해 시라즈 근처에 수비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부셰르의 셰이크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카자르족에게 이탈했지만, 그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셰이크 나세르 2세는 다슈테스탄, 하르그, 반다르 리그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그는 또한 1792년 1월부터 6월까지 헤슈트를 점령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6월 27일 부셰르로 돌아왔다.
그동안 로트프 알리 칸은 하즈 이브라힘이 보낸 병력을 격파하고 10월 말 카제룬의 요새로 진격하여 점령했다. 그는 이후 시라즈 외곽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굶주리게 할 준비를 했다. 얼마 후, 인근 수비대의 카자르 군대가 로트프 알리 칸의 병사들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있었으나, 로트프 알리 칸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카자르 군대는 패배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 소식을 듣고 7,000명의 기병을 보내 하즈 이브라힘의 병력을 증원하도록 했으며, 인근 수비대의 살아남은 카자르 병력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
로트프 알리 칸은 증원군이 시라즈에 도착하도록 허용했는데, 하즈 이브라힘의 병력이 강화되자마자 시라즈 밖으로 나와 개방된 전투에서 압도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얼마 후 시라즈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로트프 알리 칸은 하즈 이브라힘과 그의 카자르 증원군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는 1791년 말 또는 1792년 초에 일어났다.

시라즈 주민들은 이제 포위 공격으로 인해 극심한 고난에 직면했으며, 그들이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파르스 지역의 많은 부분이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3~4년 동안 전염병이 만연했다. 로트프 알리 칸의 병력 또한 하즈 이브라힘의 병력만큼이나 어려움을 겪었으며, 하즈 이브라힘의 병력은 자드 왕조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파르스로 진군했다. 1792년 6월 5일, 로트프 알리 칸은 소수의 병력과 함께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있는 아가 모하마드 칸의 진영을 과감하게 야간 기습했다.
처음에는 이 선택이 로트프 알리 칸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카자르 군대가 패주했다고 확신했다. 이에 기뻐하며 그는 병사들을 흩어지게 하고 밤새도록 쉬게 했으나, 날이 밝자 아가 모하마드 칸이 여전히 진지를 지키고 있음을 발견했다. 로트프 알리 칸은 이후 네이리즈를 통해 타바스로 도피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92년 7월 21일 시라즈에 입성하여 한 달 동안 머물렀으며, 바그-에 바킬(Bagh-e Vakil)에 자신의 수행원들을 머물게 했다. 시라즈를 떠나기 전, 그는 하즈 이브라힘을 파르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카림 칸 자드의 시신을 발굴하여 테헤란에 재매장하도록 했다. 그는 시라즈에 머문 후 테헤란으로 향했다. 병력은 케르만, 시스탄, 밤으로 파견되었지만, 마지막 두 곳에서는 카자르의 통치가 확고해지지 않았다.
로트프 알리 칸은 호라산으로 도피하여 타바스 족장의 도움을 받았다. 이 도움으로 그는 9월에 돌아와 야즈드로 진군했다. 야즈드의 총독은 그를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아르다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야즈드로 도피했다. 로트프 알리 칸은 이후 아바르쿠흐를 점령하고 10월 초 바바나트로 진군했다.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카자르 군대는 아바르쿠흐를 포위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고, 로트프 알리 칸은 스타흐바나트, 키르, 네이리즈를 점령했다. 그는 다랍으로 진군하여 요새를 포위했으나, 곧 자신을 막기 위해 카자르 군대가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호라산으로 도피했다.
밤의 아프간 족장들은 로트프 알리 칸에게 돌아와 카자르의 지배를 몰아내도록 초대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로트프 알리 칸은 케르만으로 돌아와 3월 30일 도시를 점령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는 이 소식을 재빨리 듣고 5월 14일 케르만으로 진군했다. 포위 공격은 4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케르만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도시는 10월 24일 함락되었고, 로트프 알리 칸은 재빨리 밤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밤의 족장은 로트프 알리 칸을 살해하고 카자르족에게 넘기도록 명령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는 케르만 주민들에게 복수하여 수천 명의 주민들을 실명시켰다(숫자는 "주민 2만 명의 눈을 가져오도록 명령"에서 "7천 명을 실명시켰다"까지 다양하다). 도시는 잔인하게 약탈당했고 많은 아름다운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4. 통치 (1789-1797)
아가 모하마드 칸은 샤로서 통치했던 기간 동안 이란의 통일을 완성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극심한 잔혹 행위로 얼룩져 있었다.
4.1. 샤한샤 즉위 및 카자르 왕조 창건
크르차니시 전투를 통해 동부 조지아와 북캅카스 및 남캅카스의 다른 주요 영토를 이란의 지배권으로 되돌린 지 1년 후, 그는 약 60년 전 나디르 샤가 그랬던 것처럼 무간 평원에서 스스로를 샤한샤(왕중왕)로 선포했다. 그는 1796년에 공식적으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카자르 왕조를 창건했다.
4.2. 코카서스 원정 (조지아 정복)

조지아는 근세 초기인 1502년에 처음으로 이란의 봉신국이 되었고, 1555년 아마시아 평화 조약 이후 간헐적으로 이란의 통치와 종주권 아래 있었으나, 이란의 아프샤르 왕조가 해체된 후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조지아를 재복속시키고 이란 제국에 재통합하는 것은 시라즈, 이스파한, 타브리즈를 그의 통치하에 둔 과정과 동일한 과정의 일부였다. 그 이전의 사파비 왕조와 나디르 샤처럼, 그는 이 영토들을 본토 이란의 영토와 다를 바 없이 여겼다. 조지아는 호라산이 그랬던 것처럼 이란의 한 지방이었다. 캠브리지 이란사에 따르면, 조지아의 영구적인 분리는 상상할 수 없었으며, 파르스나 길란의 분리 시도에 저항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저항해야 했다. 따라서 아가 모하마드 칸이 나디르 샤의 죽음과 자드 왕조의 몰락 이후 최근에 상실된 지역들을 진압하고 재편입하기 위해 캅카스에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이란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지아의 왈리가 저지른 반역 행위를 진압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들 자신의 분쟁 속에서 잠시 평화를 찾고 북부, 서부, 중앙 이란이 안전해지자, 이란인들은 조지아 군주 이라클리 2세에게 러시아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이란의 종주권을 재수용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대가로 그의 왕국의 평화와 안전을 약속했다. 이란의 경쟁국인 오스만 제국은 4세기 만에 처음으로 카르틀리와 카헤티에 대한 이란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라클리 2세는 이론적인 보호자인 예카테리나 2세 여제에게 적어도 3,000명의 러시아 병력을 요청했으나,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지아는 이란의 위협에 홀로 맞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클리 2세는 칸의 최후통첩을 여전히 거부했다.

1795년 8월, 아가 모하마드 칸은 7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라스강을 건넜다. 이 병력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좌익은 예레반 방향으로, 우익은 카스피해와 평행하게 무간을 가로질러 하부 아라스강을 따라 다게스탄과 시르반으로 향했으며, 샤는 직접 중앙군을 이끌고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 슈샤 요새로 진격하여 1795년 7월 8일부터 8월 9일까지 포위했다. 그의 우익과 좌익은 간자와 예레반의 칸들을 동맹으로 강제했다. 조지아 왕세자 알렉산드레 왕자의 도움으로 강화된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슈샤 포위를 포기한 후, 카라바흐의 칸 이브라힘 칼릴 칸은 논의 끝에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항복했다. 그는 정기적인 조공을 바치고 인질을 넘겼지만, 카자르 군대는 여전히 슈샤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주된 목표가 조지아였기 때문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 협정을 통해 카라바흐를 일단 확보하는 데 만족했고, 그와 그의 군대는 이후 더 진격했다. 간자에서 시르반을 확보한 후, 그는 자바드 칸 카자르와 그의 우익 병력의 나머지 부분과 합류했다. 간자에서 모함마드 칸은 이라클리 2세에게 마지막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라클리 2세는 1795년 9월에 이를 받았다.
최후통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폐하께서는 지난 100세대 동안 이란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폐하께서 이란과의 교역 외에는 다른 일이 없는 러시아인들에게 의지하셨다고 말씀드립니다... 작년에 폐하께서는 우리 신민들이 우리의 손에 죽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지아인들을 죽이도록 우리를 강요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폐하께서 현명한 분이시니 그러한 일들을 포기하고 러시아인들과의 관계를 끊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곧 조지아에 대한 원정을 수행할 것이며, 조지아인과 러시아인의 피를 흘려 쿠라강만큼 큰 강을 만들 것입니다...."
카자르 시대의 역사가인 하산-에 파사이의 파르스나마-예 나세리에 따르면, 아가 모하마드 칸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샤 이스마일 1세 사파비는 조지아 지방을 통치했습니다. 선왕의 시대에 우리가 이란 지방을 정복하는 데 몰두했을 때, 우리는 이 지역으로 진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란의 대부분 지방이 우리의 소유가 되었으니, 폐하께서는 고대 법에 따라 조지아(구르지스탄)를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우리 폐하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복종을 따르셔야 합니다. 그러면 조지아의 총독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같이 대우받을 것입니다."
조언자들이 나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클리 2세는 최후통첩을 무시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사절을 보냈다. 당시 게오르기옙스크에 있던 이반 구도비치는 이라클리 2세에게 "비용과 소동"을 피하라고 지시했고, 이라클리 2세는 솔로몬 2세와 일부 이메레티인들과 함께 이란의 위협을 막기 위해 트빌리시 남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군대의 절반을 이끌고 아라스강을 건너 트빌리시로 직접 진군했다. 일부 추정으로는 그의 군대가 35,000명 대신 40,000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도시 남서쪽 경계에 있는 이라클리 2세와 솔로몬의 강력하게 요새화된 조지아 진지를 공격했다. 여러 귀족들에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클리 2세는 조지아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일원이자 이라클리 2세와 먼 친척 관계인 솔로몬 2세 왕 휘하의 인근 이메레티 왕국에서 온 약 2,000명의 지원군을 포함하여 약 5,000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조지아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9월과 10월 10일에 이란의 일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그 후, 일부 배신자들이 이란인들에게 조지아인들이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고 알렸고, 카자르 군대는 이란으로 돌아갈 계획을 취소했다. 9월 11일 이른 아침, 아가 모하마드 칸은 직접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총공세를 이끌었다. 포격전과 격렬한 기병 돌격 속에서 이란인들은 쿠라강을 건너 decimated된 조지아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라클리 2세는 반격을 시도했지만, 트빌리시 외곽의 마지막 남은 진지로 후퇴해야 했다. 밤이 되자 조지아 군대는 지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지막 남은 조지아 포병은 이라클리 2세와 그의 수행원 약 150명이 도시를 통해 산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잠시 진격하는 이란인들을 저지했다. 전투는 트빌리시 거리와 나리칼라 요새에서 계속되었다. 몇 시간 만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조지아 수도를 완전히 장악했고, 도시는 완전히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이란 군대는 전리품을 가득 싣고 약 15,000명의 포로를 이끌고 돌아갔다. 조지아인들은 전투에서 4,000명을 잃었고, 이란인들은 총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3,000명을 잃었다.
이란 군대가 대부분 철수한 지 며칠 후 도시에 들어선 목격자는 자신이 본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시체로 포장된 길을 따라 타피타그 문을 통해 트빌리시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적의 칼에 학살당한 여성과 어린이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릅니다. 한 작은 탑에는 천 명이 넘는 남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습니다! [...] 도시는 거의 완전히 불탔고, 여러 곳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부패하는 시체에서 나는 악취와 만연한 더위는 참을 수 없었고, 분명히 전염성이 있었습니다."
4.3. 호라산 정복
아가 모하마드 샤는 이제 호라산에 집중했다. 호라산은 나디르 샤의 눈이 멀고 늙은 손자 샤로크 샤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는 이전에 두라니 제국의 통치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봉신이었으나, 1772년 후자의 사망 후 아프샤르 왕조의 수도 마슈하드 주변 도시와 마을을 장악한 족장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들 족장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아마도 토르바트-에 헤이다리에를 작전의 중심지로 유지했던 에샤크 칸이었을 것이다. 알보르즈산맥 동부 지역에서는 쿠르드족 족장들이 보즈누르드와 쿠찬과 같은 여러 요새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먼저 아스타라바드로 진군하여 도시와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투르크멘족에게 벌을 주었다. 그는 이후 마슈하드로 계속 진군했고, 그곳의 지역 족장들은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또한 이 지역 족장들에게 인질을 파견하도록 요구했고, 그들은 테헤란으로 보내졌다. 아가 모하마드 샤가 마슈하드에 도착하자 샤로크는 저명한 무즈타히드인 미르자 메흐디와 함께 카자르 진영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가 모하마드 샤의 조카 호세인 콜리 칸에게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얼마 후, 아가 모하마드 샤는 솔레이만 칸 카자르 휘하의 8,000명의 병력을 미르자 메흐디와 함께 마슈하드를 정복하고 샤의 관대함을 시민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파견했다. 하루 뒤, 아가 모하마드 샤는 유명한 이란의 샤 아바스 1세 대제의 관습을 따라 5월 14일 이맘 레자 성지 순례자로서 걸어서 마슈하드에 입성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순례는 23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는 마치 국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나디르 샤의 시신을 발굴하여 테헤란으로 보내 카림 칸 자드의 시신과 함께 재매장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후 샤로크에게 나디르 샤에게 원래 속했던 모든 재물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강요했다. 샤로크는 나디르 샤의 재물을 더 이상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맹세했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무자비하고 복수심에 불타며 보물을 갈망했기에 그를 믿지 않았다. 그는 샤로크 샤에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마지막 보석들의 숨겨진 위치를 자백하도록 심하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샤로크는 말하기를 거부했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직접 고문에 참여했으며, 한 번은 샤로크를 의자에 묶고 머리를 깎은 다음 두꺼운 반죽으로 왕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나서 그는 왕관에 녹은 납 한 주전자 분량을 부었다. 이전 군주를 불쌍히 여긴 샤로크의 하인들 중 일부는 도시의 존경받는 물라를 보내 샤로크를 지지하는 감정적인 호소를 아가 모하마드 샤에게 했고, 샤로크는 가족과 함께 마잔다란으로 보내졌다. 샤로크는 고문으로 인한 부상으로 담간에서 사망했다.
4.4. 행정 및 군사 체제
아가 모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관료제는 소규모로 유지되었다. 대재상 외에 행정의 주요 인물은 최고 세입 책임자(mustaufī)와 군대의 징집관(lashkarnevīs)이었다. 아가 모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각 직책은 한 사람만이 맡았다. 하즈 이브라힘이 대재상을, 미르자 이스마일이 최고 세입 책임자를, 미르자 아사드-알라 누리가 징집관을 맡았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주로 군사 원정에 몰두했기 때문에 그의 궁정은 끊임없이 그의 진영이었고, 하즈 이브라힘을 비롯한 다른 관리들은 보통 그의 원정에 참여했다.
아가 모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지방 행정은 사파비 왕조의 모델을 따랐다. 베글레르베기가 지방을 통치하도록 임명되었다. 도시는 칼란타르와 다루가의 통치하에 있었고, 그 구역은 카드후다의 통치하에 있었다. 지방 총독직은 대부분 부족 족장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나중에 파트 알리 샤 카자르에 의해 그의 친척들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아가 모하마드 샤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군사 지도자에 가까웠으며, 카리스마보다는 단호한 주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군사적 기량은 매우 두드러졌다. 그의 사망 후 몇 년 뒤에 작성된 존 말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의 군대는 피로에 단련되었고,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았다. 그는 모든 부서에 훌륭한 조직을 도입했으며, 그의 알려진 엄격함은 명령 실행에 최대한의 민첩성과 신속성을 가져왔다. 그가 몇 년 더 살았다면, 그의 무력의 진전을 짐작하기 어렵다."
스코틀랜드 여행가 제임스 베일리 프레이저 또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가 모하마드 또한 훌륭하고 용감한 병력을 양성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의 활동적이고 야심찬 성격은 그의 군대를 끊임없이 전투에 참여시켰고, 그들은 다른 아시아 군대보다 우월한 노련한 강인함과 숙련도를 얻었다."
4.5. 건설 및 기반 시설
아가 모하마드 샤는 원정과 전투로 인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많은 건설이나 수리를 하지 않았다. 테헤란에서는 마스지드-에 샤(Masjid-e Shah, "샤의 모스크"라는 뜻)라는 모스크 건설을 명령했고, 마슈하드에서는 이맘 레자 성지의 수리를 명령했다. 아스타라바드에서는 성벽을 수리(또는 요새화)하고, 해자를 비우고, 여러 건물을 지었으며, 그중 하나는 총독을 위한 궁전이었다. 또한 그는 도시의 전반적인 상태를 개선했다. 그는 바볼, 아슈라프, 사리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수행했다. 이 모든 건설 및 수리 작업 중 그의 가장 훌륭하고 지속적인 업적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테헤란을 수도로 만든 것이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란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5. 성격 및 외모
아가 모하마드 칸의 어린 시절 거세는 그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영구적인 손상을 남겼다. 그의 몸은 병약하고 허약했다. 그는 간질을 앓았고, 1790년 또는 1791년에는 뇌졸중으로 인해 사흘 동안 의식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허약함을 숨기려 노력했다. 작은 키 때문에 멀리서 보면 어린 소년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를 매우 짜증 나게 했으며, 특히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쳐다볼 때 더욱 그러했다.
그는 사냥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밤에는 아가 모하마드 칸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샤나메를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 그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보물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징기스 칸, 티무르, 나디르 샤처럼 부족 병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으며,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6. 죽음
아가 모하마드 칸의 성공적인 통치는 짧았다. 그는 1797년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인 슈샤 시를 점령한 지 사흘 만에 자신의 천막에서 암살당했다. 이는 그가 권력을 잡은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6.1. 암살 경위
하산-에 파사이의 파르스나마-예 나세리에 따르면, 아가 모하마드 칸이 슈샤에 머무는 동안 어느 날 밤 조지아인 하인 사데그 고르지(Sadegh Gorji)와 시종 호다다드 이스파하니(Khodadad Esfahani)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그들은 목소리를 너무 높여 샤를 격분시켰고, 샤는 둘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저명한 에미르인 사데크 칸 샤카키가 그들을 위해 중재했지만, 샤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샤는 그날 밤이 금요일 저녁(이슬람의 성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에 토요일까지 처형을 연기하고,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지 않은 채 왕실 천막에서 다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하며 다음 날 처형을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상 왕이 명령한 것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대담해졌다. 샤가 잠들어 있을 때, 그들은 음모에 가담했던 시종 아바스 마잔다라니(Abbas Mazandarani)와 합류했고, 세 명은 왕실 천막에 침입하여 단도와 칼로 샤를 살해했다. 그의 사망 당시 나이는 56세 또는 64세였다.
6.2. 후계자
아가 모하마드 칸은 거세로 인해 자녀가 없었으므로, 그의 조카인 바바 칸(훗날 파트 알리 샤 카자르로 알려짐)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7. 평가 및 유산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의 통치와 업적은 이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지만, 그의 잔혹한 통치 방식은 많은 비판과 논란을 낳았다.
7.1. 긍정적 평가
아가 모하마드 칸은 카림 칸 이후 이란이 잃었던 통일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현대 이란의 영토와 수세기 동안 이란의 개념의 일부였던 캅카스 지역을 재통합했다. 그의 승리는 이 지역에서 이란의 군사력을 회복시켰다. 그는 1796년에 공식적으로 즉위하여 카자르 왕조를 창건하고, 테헤란을 이란의 수도로 삼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비록 러시아가 1796년 원정 동안 데르벤트와 바쿠를 잠시 점령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은 캅카스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확대하여 이 지역의 옛 종속국들에 대한 이란의 주권을 재확립했다.
7.2. 비판 및 논란
그러나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극단적인 폭력의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살해했다. 이는 그의 여러 원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악명 높은 잔혹한 통치자였으며, 트빌리시를 폐허로 만들고 그곳의 기독교인 주민들을 학살하고 끌고 갔는데, 이는 그가 무슬림 신민들에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디르 샤의 전설적인 보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호라산의 통치자이자 나디르 샤의 손자인 샤로크 샤를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케르만에서는 수천 명의 주민들을 실명시키도록 명령했다(숫자는 "주민 2만 명의 눈을 가져오도록 명령"에서 "7천 명을 실명시켰다"까지 다양하다). 도시는 잔인하게 약탈당했고 많은 아름다운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그의 통치는 이란을 통일하고 카자르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그의 잔혹한 통치 방식과 민간인 및 소수 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약탈이라는 부정적인 유산을 동시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