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그바르드 오스카르 프레드리크 베르나도테(Sigvard Oscar Fredrik Bernadotte, 1907년 6월 7일 ~ 2002년 2월 4일)는 스웨덴의 왕자이자 산업 디자이너였다. 그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과 코넛 공녀 마거릿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래 우플란드 공작 시그바르드 왕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1934년 평민과의 결혼으로 왕실 칭호를 상실하고 왕위 계승 순위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이후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로 불리게 되었으나, 1951년 룩셈부르크로부터 '비스보리의 베르나도테 백작' 칭호를 받았다. 그는 평생 동안 왕자 칭호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1983년 스스로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 왕자'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스웨덴 왕실과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심지어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소하기도 했으나 그의 노력은 사후에 기각되었다.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탁월한 산업 디자이너로서 광범위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조지 젠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역임하고 악톤 비외른과 함께 베르나도테 & 비외른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를 공동 설립했으며, 이후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인 베르나도테 디자인 AB를 운영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마르그레테 그릇, 베르나도테 물병 등 수많은 실용적이고 미학적인 제품들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영화 산업에서도 조감독 및 기술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 중 최장수 기록을 세우며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유년기와 교육
2.1. 출생과 어린 시절
시그바르드 오스카르 프레드리크 베르나도테는 1907년 6월 7일 스톡홀름의 드로트닝홀름 궁전에서 미래의 국왕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세자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코넛 공녀 마거릿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친삼촌이자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와 그리스 왕비 아나마리아의 외삼촌이다. 또한 그는 아서 코넛 공작과 프로이센 공녀 루이제 마르그레테의 외손자이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이다.
시그바르드는 당시 왕실의 엄격한 관습과는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현대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 마거릿 공주는 자녀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던 현대적인 여성이었다. 특히 여름철 소피에로 궁전에서의 생활은 가족이 아름다운 바다와 넓은 공원 속에서 외부의 방해 없이 온전히 가족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시그바르드는 어머니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자주 어머니의 그림 도구를 직접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총명한 아이였으며, 스웨덴 왕실의 일부 다른 자녀들이 겪었던 읽기나 쓰기 장애를 앓지 않았다. 학업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2.2. 교육과 초기 관심
시그바르드는 1926년 룬즈베리 스쿨을 졸업하고 웁살라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1929년에 졸업하면서 그는 베르나도테가에서 처음으로 학위를 취득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도 학생극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0년에는 스톡홀름의 디자인 학교인 콘스트파크에 입학했으며, 올레 효르츠베리 교수가 그의 스승 중 한 명이었다.
스톡홀름에서 학업을 하는 동안, 그는 유명한 덴마크 기업인 조지 젠슨과 접촉하여 여러 작은 물건들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연극과 연기에 대한 꿈을 쫓아 독일로 가서 가명으로 조감독으로 일하며 무대 장치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베를린에서 그는 한 독일 평민 여성과의 첫사랑을 경험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베아 생명 근위대의 중위로 복무했다.
3. 왕실 칭호와 결혼
3.1. 결혼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세 번 결혼했다.
- 첫 번째 결혼: 1934년 3월 8일 런던의 캑스턴 홀에서 독일 사업가 안톤 파체크와 마리아 안나 랄라의 딸인 에리카 마리아 레기나 로잘리 파체크(Erica Maria Regina Rosalie Patzek, 1911년 7월 12일 ~ 2007년 7월 20일)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는 신부의 오빠 게오르크 파체크와 변호사 고든 씨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들은 1943년 10월 14일에 이혼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 두 번째 결혼: 1943년 10월 26일 코펜하겐에서 소냐 헬레네 로베르트(Sonja Helene Robbert, 1909년 10월 12일 ~ 2004년 5월 21일)와 결혼했다. 그녀는 로베르트 알렉산더 크리스텐센 로베르트와 에바 엘리자베트 스벤손의 딸이었다. 둘 사이에는 1944년 8월 21일 아들 미카엘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Michael Sigvard Bernadotte)가 태어났다. 미카엘은 1976년 2월 6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크리스티네 디오티마 엘리자베트 벨회퍼(Christine Diothema Elisabeth Wellhöfer, 1947년 4월 26일 ~)와 결혼하여 딸 카이사 미카엘라 소피아 베르나도테 아프 비스보리 백작부인(Countess Kajsa Michaela Sophia Bernadotte af Wisborg, 1980년 10월 12일 ~)을 두었다. 시그바르드와 소냐는 1961년 6월 6일에 이혼했다.
- 세 번째 결혼: 1961년 7월 30일 스톡홀름의 오스카르 교회에서 스웨덴 여배우 마리안네 린드베리 창(Marianne Lindberg Tchang, 1924년 7월 15일 ~)과 결혼했다. 그녀는 헬게 린드베리와 티라 달만의 딸이며, 이후 비스보리의 마리안네 베르나도테 백작부인이 되었다.
3.2. 왕자 칭호 상실
시그바르드는 태어날 때부터 스웨덴의 왕자이자 우플란드 공작이었다. 그러나 1934년 평민인 에리카 파체크와 결혼하면서 이른바 귀천상혼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효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적인 남자의 딸"(enskild mans dotter사적인 남자의 딸스웨덴어)과 왕자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항은 1809년 정부 수립법과 1810년 왕위 계승법에 모두 명시되어 있었으며, 이 위반으로 인해 그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그는 의회에서 왕이 결정한 대로 왕자 및 공작 칭호를 상실했다. 국왕의 뜻에 따라 스웨덴 내에서는 그를 단순히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 씨'로 불러야 했다. 2년 전 같은 경험을 했던 그의 사촌 레나르트 베르나도테는 자신과 시그바르드가 결혼 때문에 왕실로부터 수십 년간 매우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3.3. 왕자 칭호 회복 노력
1951년 7월 2일, 룩셈부르크의 샤를로트 대공에 의해 시그바르드와 그의 아내, 그리고 혼인으로 맺어진 후손들에게 비스보리의 베르나도테 백작이라는 룩셈부르크 귀족 칭호가 부여되었다. 이 칭호 수여 시에는 그를 '시그바르드 오스카르 프레드리크 베르나도테 왕자'라고도 칭했다.
스웨덴 내에서 그의 지위와 칭호를 둘러싼 논쟁과 논란이 30년 넘게 지속되었으며, 1973년 그의 아버지 사망 이후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198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스웨덴 국빈 방문 중 왕실로부터 노골적인 무시를 당하자, 시그바르드는 그해 5월 28일 티드닝가르나 텔레그람뷔로 통신사에 자신을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 왕자'로 칭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수년간 그는 1888년 그의 큰삼촌 오스카르에게 확립된 선례를 바탕으로, 1892년 룩셈부르크 정부에 의해 확인된 오스카르의 귀족 칭호를 인용하며 스웨덴에서 '베르나도테 왕자' 칭호의 인정을 청원했다. 그는 왕위 계승 순위에 복귀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삼촌과 소원해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시그바르드는 스웨덴 정부가 자신의 왕자 칭호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소했으나, 2004년 그의 사후에 재판소는 해당 신청을 기각했다.
4. 산업 디자이너 경력
4.1. 초기 디자인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후,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덴마크의 유명한 은 세공 회사인 조지 젠슨 A/S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1938년에 디자인된 그의 초기 아르 데코 양식의 "베르나도테" 컬렉션은 오늘날까지도 이 회사의 대표적인 제품으로 남아 있다. 그는 1980년까지 조지 젠슨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1950년, 그는 덴마크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악톤 비외른과 함께 코펜하겐에 디자인 스튜디오인 베르나도테 & 비외른 산업 A/S를 공동 설립했다. 이 스튜디오는 코펜하겐에 본사를 두고 스톡홀름과 뉴욕에 지사를 두었다. 그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조언자이자 믿음직한 멘토로서, 재능을 선별하고 빛나게 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 파트너십은 성공적이었으며, 수많은 유명 디자인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4.2. 상징적인 디자인과 창의적인 작품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조지 젠슨을 위한 고급 은제품부터 플라스틱으로 된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제품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독특한 은제품 디자인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 박물관과 유명 컬렉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가장 상징적인 디자인으로는 다음 제품들이 있다.
- 1938년 조지 젠슨 A/S를 위해 디자인한 "베르나도테" 보온 물병

- 레드 클라라 오프너
- EKA 스웨드 38 접이식 칼
- 조카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의 이름을 딴 마르그레테 그릇. 이것은 로스티를 위해 베르나도테 & 비외른 산업 디자인 A/S에서 1954년에 디자인했다.

- 베르나도테 물병
- 파시트 프라이빗 타자기
- 안경테
그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을 만들고자 열망했으며, 이러한 소망은 현실이 되었다.
4.3.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후기 경력
1964년,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스톡홀름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베르나도테 디자인 AB를 설립했다. 이 스튜디오는 아쉽게도 1970년대 초에 문을 닫았다. 스웨덴과 국제적인 여러 단체에서의 그의 선도적인 지위는 그의 전문적인 프로필에 더해졌다.
1997년, 그는 국립미술관에서 '디자인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라는 자신의 전시회를 개최하여 영예를 안았다. 이 전시회는 빅토리아 왕세녀와 그의 아내 마리안네가 참석한 가운데 개막되었으며, 1998년까지 이어지며 스웨덴에서 예상보다 큰 성공과 인정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그는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으로부터 프린스 유겐 메달을 받았다. 이 부지런한 발명가는 평생 동안 활발하게 일했다. 디자인에 대한 그의 애정은 명확히 드러났으며, 90대가 되어서도 말년에는 몇몇 중요한 작품을 선보였다.
4.4. 영화 산업 참여
시그바르드는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의 MGM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또한 그는 1937년 영화 젠다의 포로의 기술 고문으로 참여했다. 그는 1968년 이탈리아의 몬도 영화 스웨덴: 천국과 지옥에 짧게 출연했는데, 이 영화에는 베르나도테 디자인 AB에서의 그의 산업 디자인 작품과 일부 대표작들이 소개되었다.
5. 말년과 사망
5.1. 장수와 말년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살아있는 증손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94세까지 살면서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성 후손 중 가장 오래 살았으나, 2011년 6월 29일 그의 남동생인 비스보리의 칼 요한 베르나도테 백작에 의해 이 기록은 경신되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다른 세 명의 증손자가 생존해 있었다.
5.2. 사망과 장례식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2002년 2월 4일 스톡홀름의 보르가르헴메트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94세 7개월 28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2002년 2월 15일 엥겔브렉트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스웨덴과 덴마크 왕실의 구성원들이 참석했다. 그는 솔나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비에는 '스웨덴 왕자로 태어남'이라는 문구가 명확히 새겨져 있다.
6. 유산과 평가
6.1. 산업 디자인에 미친 영향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광범위한 산업 디자인 경력을 통해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의 작업은 수많은 성공적인 발명품의 기반을 다졌으며, 그의 독특한 은제품 디자인은 전 세계 박물관과 명망 있는 컬렉션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실용성과 미학을 결합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물건들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그의 염원은 실현되었다. 평생 동안 디자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90대에도 여러 중요한 작품을 선보이며 활동을 이어갔다.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 '디자인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스웨덴 내에서 큰 인정과 찬사를 받았다.
6.2. 대중 및 역사적 인식
룩셈부르크로부터 받은 칭호에 대한 그의 해석은 평생 동안 스웨덴 왕실과의 논쟁의 핵심이었다. 1973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더욱 심화된 그의 지위와 칭호를 둘러싼 30년 이상의 분쟁 끝에, 그는 1983년 스스로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 왕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왕위 계승 순위 복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왕자 칭호 인정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그의 투쟁은 왕실 전통의 경직성을 드러냈다.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이 삼촌의 칭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소원해진 관계에 대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후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기한 항소가 기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의 정체성과 지위에 대한 깊은 집념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7. 훈장과 혈통
7.1. 훈장과 표창
- 스웨덴 국가
- 북극성 훈장 대십자장 기사 (1952년 3월 21일)
- 구스타프 5세 국왕 즉위 50주년 기념 메달 (1928년)
- 구스타프 5세 국왕 즉위 50주년 기념 메달 II (1948년)
- 프린스 유겐 메달 (1997년)
- 해외
- 코끼리 훈장 기사 (덴마크)
7.2. 혈통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과 코넛 공녀 마거릿의 아들이다.
그는 구스타프 5세 국왕과 바덴의 빅토리아, 그리고 아서 코넛 공작과 프로이센 공녀 루이제 마르그레테의 손자이다.
또한 그는 오스카르 2세 국왕과 나사우의 소피아,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와 프로이센 공녀 루이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앨버트와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자와 안할트데사우의 마리아 아나 공녀의 증손자이다.

1 |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 왕자, 비스보리 백작 |
---|---|
2 |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스웨덴 국왕) |
3 | 코넛 공녀 마거릿 |
4 | 구스타프 5세 (스웨덴 국왕) |
5 | 바덴의 빅토리아 |
6 | 아서 코넛 공작 |
7 | 프로이센 공녀 루이제 마르그레테 |
8 | 오스카르 2세 (스웨덴 국왕) |
9 | 나사우의 소피아 |
10 |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 |
11 | 프로이센 공녀 루이제 |
12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앨버트 |
13 | 빅토리아 여왕 |
14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자 (1828년-1885년) |
15 | 안할트데사우의 마리아 아나 공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