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슬로보단 프랄랴크(Slobodan Praljaksh; 1945년 1월 2일 ~ 2017년 11월 29일)는 보스니아-크로아티아인 출신의 군인이자 전범으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크로아티아 육군과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의 군대인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에서 복무했다. 그는 군인이 되기 전에는 공학자, TV 및 연극 연출가, 그리고 사업가로 활동했다.
프랄랴크는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중 보스니아인 인구에 대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4년에 자진 출두하여 재판을 받았고, 2013년에 20년형을 선고받았다. 2017년 11월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자, 프랄랴크는 법정에서 "나는 전쟁 범죄자가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판결을 경멸한다!"고 외치며 청산가리를 마시고 사망했다. 그의 법정 내 죽음은 국제 사회와 특히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내에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행동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역사와 민족주의, 국제 형사 재판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했다.
2. 초기 삶과 교육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1945년 1월 2일,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차플리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르코(Mirko)는 유고슬라비아의 보안 기관인 OZNA에서 일했다. 프랄랴크는 시로키 브리예그의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훗날 크로아티아 국방부 장관이 되는 고이코 슈샤크와 동문이다.
프랄랴크는 세 개의 대학교 학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1970년에는 자그레브 대학교 전기 공학부에서 5점 만점에 4.5점의 높은 성적으로 전기공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1971년에는 자그레브 인문사회과학부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다. 1972년에는 자그레브 연극 아카데미를 졸업하며 연극 연출 학위까지 취득했다.
3. 초기 경력
프랄랴크는 군사 활동에 뛰어들기 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학자이자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3.1. 교수 및 예술 활동
프랄랴크는 처음에는 자그레브에 위치한 니콜라 테슬라 직업 고등학교에서 교수이자 전자 공학 연구소 관리자로 근무했다. 이후에는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73년부터는 자유 예술가로 활동하며 자그레브, 오시예크,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극장에서 연극 연출가로 활약했다.
그는 또한 다양한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텔레비전 시리즈 《블레산과 툴리판》(Blesan i Tulipan),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나츠의 장난》(Novela od Stanca)과 《사르가소 해》(Sargaško more)가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개의 죽음》(Smrt psa, 1980), 《산자크》(Sandžak, 1990), 《담배》(Duhan, 1990) 등을 감독했으며, 영화 《카타리나 코줄의 귀환》(Povratak Katarine Kožul, 1989)을 연출했다.
4. 군사 경력
프랄랴크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에서 주요 군사 지휘관으로 복무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4.1. 군 입대 및 주요 보직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9월에 새로 창설된 크로아티아 무장군에 자원입대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자그레브의 예술가와 지식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직접 창설하여 수냐 (시사크모슬라비나 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사라예보 협정 이후인 1992년 4월 3일까지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크로아티아 국방부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는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의 14인 구성원 중 한 명이었고, 유엔 보호군 (UNPROFOR)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크로아티아 국가 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국방부의 고위 대표였으며, 1993년 5월 13일부터는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 (HVO)에서 국방부 대표를 겸임했다.
1993년 7월 24일부터 11월 8일까지는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의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1995년 12월 1일 자신의 요청에 따라 군 복무에서 은퇴했다.
4.2.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참여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중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 (보스니아 무슬림)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프랄랴크는 사라예보 포위전에 처한 보스니아인들을 돕기 위해 무기가 가득 실린 트럭을 보냈다. 또한, 치틀루크에서 저지되었던 유엔난민기구 (UNHCR)의 모스타르행 인도적 지원 호송대의 통과를 허가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4.3. 전쟁 범죄 혐의 및 논란
프랄랴크는 자신이 정보를 받았거나 예측할 수 있었던 수많은 범죄 행위를 막지 못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여기에는 1993년 7월부터 8월까지 프로조르에서 무슬림 인구를 추방하고 구금한 행위, 모스타르 시에서 발생한 살인, 동모스타르의 건물들(모스크와 옛 다리) 파괴, 국제 기구 구성원들에 대한 공격 및 부상 유발, 1993년 1월 고르니 바쿠프, 1993년 8월 라슈타니, 1993년 10월 스투프니 도에서의 재산 파괴 및 약탈 등이 포함된다. 1993년 동안 프랄랴크는 드레텔 수용소를 관할했으며, 이곳에서 보스니아 남성들은 잔혹한 대우를 받고 굶주렸으며 일부는 살해당했다.
프랄랴크는 특히 1993년 11월 모스타르 다리 파괴를 명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이 행위가 "무슬림 민간인 인구에 불균형적인 피해를 입혔다"고 판결했으나, 동시에 그 다리가 정당한 군사 목표물이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프랄랴크는 자신이 다리 파괴를 명령했다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파괴가 발생하기 한 달 전, HVO의 '죄수 대대' 사령관 믈라덴 날레틸리치 투타와의 갈등으로 인해 다리 파괴 전날 HVO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다리가 네레트바 강 좌안에 위치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군대가 설치한 폭발물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진술했다. ICTY는 또한 다리 붕괴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보스니아 세르비아인 병력에 의한 이전 포위 공격이 기여했는지 여부도 조사했다.

5. 전후 활동
군에서 은퇴한 후,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다양한 사업 활동과 저술 활동을 펼쳤다.
5.1. 사업 활동과 재산 논란
1995년, 프랄랴크는 동생 조란과 함께 회사 옥타비얀을 공동 설립하여 사업 활동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초기에는 영화, 비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과 프랄랴크의 서적 출판을 담당했다. 이후에는 자그레브의 '센타르 2000' 사업 단지를 관리하는 등 부동산 사업으로 확장했다. 2005년부터는 그의 의붓아들 니콜라 바비치 프랄랴크가 회사의 소유 및 관리를 맡고 있다. 2011년 옥타비얀은 약 2200.00 만 HRK의 수익을 올렸다.
프랄랴크는 또한 류부슈키 담배 공장의 지분을 소유한 회사 리베란(Liberan)의 공동 소유주였으며, 다른 몇몇 회사의 지분도 가지고 있었다. 2012년부터 헤이그 재판소는 프랄랴크에게 약 280.00 만 EUR에서 330.00 만 EUR에 달하는 변호 비용을 회수하려고 했다. 재판소는 그가 약 650.00 만 EUR에 달하는 자산과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 변호 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프랄랴크와 그의 변호인은 재판 시작부터 자신 명의의 재산이 없었다며 이러한 추정 진술을 거부했다.
5.2. 저술 활동
프랄랴크는 총 25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주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그리고 크로아티아-보스니아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2008년 크로아티아 문화부는 그의 전쟁 관련 저서 18권을 '가치 없는 문학' 또는 '싸구려 문학'으로 평가했으며, 2013년 크로아티아 재무부는 43.50 만 HRK의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6.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과 관련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에 의해 기소된 여섯 명의 피고인 중 한 명이었다.
6.1. 기소 및 재판 과정
프랄랴크는 2004년 4월 5일 헤이그의 ICTY에 자진 출두했으며, 재판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4월 6일 ICTY에 출두하여 무죄를 주장했다. 특히 그는 변호인 없이 스스로를 변호하기로 결정했다. 재판은 2006년 4월 26일 시작되었다. 2013년 5월 29일, 재판부는 그에게 2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형량에는 그가 이미 구금되어 있던 기간이 포함되었다. 프랄랴크는 2013년 6월 28일 항소를 제기했다. 2017년 11월 29일, ICTY의 항소심 재판이 종결되었고,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일부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이 번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년의 초기 형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6.2. 유죄 판결 및 혐의 내용
ICTY는 프랄랴크에게 개인적인 책임과 상급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그가 행동하지 않고 막지 못했다는 점)을 모두 적용하여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공동범죄집단에 연루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8개 지방자치단체에서 보스니아 무슬림 인구에 대해 대규모 전쟁 범죄를 저지른 헤르체그보스니아/HVO 무장 병력을 직간접적으로 지휘한 고위 군사 관료로 기소되었다. 국방부 고위 관리로서 그는 헤르체그보스니아/HVO의 군사 계획 및 작전뿐만 아니라 민간 경찰의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주요 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네바 협정의 중대한 위반 (4건): 고의적 살인; 민간인의 불법 추방, 이전 및 구금; 비인도적 대우;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은 광범위한 재산 파괴 및 약탈.
- 전쟁법 또는 관습 위반 (6건): 잔혹한 대우; 불법 노동; 종교 또는 교육 기관에 대한 파괴 또는 고의적 손상; 공공 또는 사유 재산의 약탈; 민간인에 대한 불법 공격; 민간인에게 불법적으로 공포를 야기한 행위.
- 반인도적 범죄 (5건):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근거에 따른 박해; 살인; 추방; 투옥; 비인도적 행위.
비록 그는 옛 다리(스타리 모스트) 파괴와 관련된 일부 혐의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이미 20년형 중 3분의 2 이상(약 13년 이상)을 복역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만간 석방될 수도 있었다.
7. 법정 내 죽음
2017년 11월 29일,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항소심 선고 공판 도중 법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7.1. 사망 경위
선고가 진행되던 중, 재판부가 그에게 20년형을 재확정하자 프랄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들을 향해 "판사님들,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전쟁 범죄자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의 판결을 경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병에 담긴 액체를 마셨다. 이 충격적인 장면에 재판장은 즉시 심리를 중단했다.
프랄랴크는 법정 의료진에 의해 인근 HMC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네덜란드 당국은 법정을 범죄 현장으로 선포하고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그의 시신은 자그레브에서 비공개 장례식을 통해 화장되었다.
7.2. 사망 원인 및 수사
예비 부검 결과, 프랄랴크는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이는 심장마비를 유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독극물이 어떻게 법정 안으로 반입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네덜란드 당국의 공식 수사 대상이 되었다. 프랄랴크의 변호인 니카 핀터는 그가 전쟁 범죄자로 유죄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오랫동안 계획된 행동이었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네덜란드 당국은 프랄랴크가 청산가리를 어떻게 입수했는지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다. 증인 심문, 영상 자료 검토, 프랄랴크가 머물렀던 방 검사, 수많은 자료 검토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프랄랴크가 해당 물질을 어떻게 소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영상 감시 기록은 프랄랴크가 독극물 병을 직접 가지고 들어왔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건네받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그가 복용한 청산가리가 네덜란드 법률상 금지된 물질로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8. 사망 후 반응 및 평가
슬로보단 프랄랴크의 법정 내 죽음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를 포함한 발칸반도 국가들과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그에 대한 극명하게 다른 평가와 반응을 야기했다.
8.1. 크로아티아 내 반응
크로아티아 정부는 프랄랴크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ICTY가 1990년대 크로아티아 관리들을 잘못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크로아티아의 총리 안드레이 플렌코비치는 프랄랴크의 자살이 "여섯 명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인들과 크로아티아 국민에 대한 깊은 도덕적 불의"를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크로아티아 의회의 사회민주당과 시민자유동맹을 제외한 모든 정당 코커스는 ICTY의 판결이 "역사적 진실, 사실, 증거"를 존중하지 않은 "부당하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프랄랴크의 자살이 모든 판결의 불의를 상징적으로 경고하는 행위였다고 덧붙이면서도, 보스니아 전쟁 중 발생한 범죄 희생자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는 프랄랴크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그를 "범하지 않은 죄로 유죄가 되어 살기보다는 죽음을 택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미로슬라브 투지만은 프랄랴크의 죽음이 "정의나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의 도덕적 입장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모스타르와 차플리나 광장에서는 거의 1천 명에 달하는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인들이 모여 프랄랴크를 추모하며 촛불을 밝혔다. 모스타르에서는 그의 죽음 이후 몇 시간 동안 보스니아 무슬림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과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서부 지역의 경계선에 경찰이 배치되었다. 2017년 12월 11일, 자그레브에서 프랄랴크를 위한 추모식이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다미르 크르스티체비치와 토모 메드베드 등 현직 장관들이 사적인 자격으로, 그리고 크로아티아 민주연합 소속의 여러 의원들과 1990년대 전쟁에 참전했던 일부 퇴역 장교들이 참석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종교 의식도 거행되었다.
대통령 그라바르키타로비치는 프랄랴크와 다른 유죄 판결을 받은 관리들로부터 전시 훈장을 박탈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으나, 그들이 "세르비아 침략에 대한 방어"로 훈장을 받았으며, "크로아티아 법원의 판결 외에는 그러한 조치가 시행된 적이 없다"며 거부했다.
8.2. 국제 사회 및 피해자 측 반응
프랄랴크의 죽음은 국제 사회와 피해자 측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전 ICTY 판사 볼프강 숌부르크와 리처드 골드스톤은 "그러한 상황에서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비극"이라고 평했다. 골드스톤은 "어떤 면에서 피해자들은 이 행위로 인해 (정의 구현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들은 완전한 정의를 얻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언론인 마틴 벨은 프랄랴크를 "연극적인 방식으로 죽은 연극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자유유럽방송의 안드레이 샤리는 "프랄랴크의 사무라이 같은 최후의 행동이 존경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개인적인 명예에 대한 인식은 항상 옳음과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기자 해리 드 퀘트빌은 프랄랴크의 도전적인 자살이 "불편한 현실의 가장 극적인 증거"라며, "발칸반도의 많은 이들이 1990년대의 끔찍한 민족 청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전 미국 전쟁범죄 문제 담당 대사 스티븐 랩은 프랄랴크의 자살을 또 다른 전범인 헤르만 괴링의 자살과 비교하며, 두 경우 모두 판결이 "사실을 확립하고 잔학 행위의 가해자들이 책임을 지게 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역사를 위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프랄랴크는 괴링처럼 법적 절차의 절정에서 이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합평의회의 보스니아인 대표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는 프랄랴크가 공동범죄집단의 프로젝트로 인해 자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반면 크로아티아인 대표이자 대통합평의회 의장인 드라간 초비치는 프랄랴크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했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의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는 프랄랴크의 자살을 조롱하지 않겠지만, 크로아티아 관리들의 반응에 대해 비판하며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을 영웅으로 칭송하거나 ICTY 판결을 비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세르비아의 정치인 보이슬라브 셰셸은 프랄랴크가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경할 만한 영웅적인 행동"이었으며, 재판소에 이처럼 강력한 일격이 더 많았어야 했다고 평했다.
동시에, 인권 청년 이니셔티브 회원들은 크로아티아 군대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당시 정책에 대한 비난을 촉구했다.
8.3. 역사적 평가 및 논란
슬로보단 프랄랴크의 생애와 죽음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복잡한 역사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상반된 측면, 그리고 국제 형사 재판의 역할에 대한 심오한 질문과 논란을 남겼다. 그에 대한 극명한 평가, 즉 일부에서는 영웅으로 추앙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 범죄자로 규탄하는 시각은 발칸반도 내 민족 갈등과 전쟁의 기억이 여전히 첨예하고, 역사 수정주의와 진실 인정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의 법정 내 자살은 정의 구현의 실패로 보는 시각과 개인적인 저항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 사이에서 논쟁을 야기하며, 국제 형사 사법 체계가 과거의 잔학 행위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묻고 화해를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숙제를 던지고 있다.
프랄랴크의 사례는 과거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지역 평화와 안정에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어떻게 대중적 인식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