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세키네 시노부(関根 忍세키네 시노부일본어)는 일본의 유도 선수이자 은퇴 후 유도계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43년 이바라키현 오아라이정에서 태어나 2018년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1972년 뮌헨에서 열린 1972년 뮌헨 올림픽 남자 유도 80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이 업적은 그의 선수 경력의 정점을 이룬다. 은퇴 후에는 전일본유도연맹의 코치와 이사, 그리고 올림픽 심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 유도계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유도 스타일은 변형된 자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독특한 기술이 특징이었으며, 이는 훗날 많은 유도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초반 및 교육
세키네 시노부는 1943년 9월 20일 이바라키현 히가시이바라키군 오아라이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유도 훈련을 시작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이바라키현립 나카미나토 제일고등학교(茨城県立那珂湊第一高等学校)를 졸업한 후, 주오 대학에 진학하여 학업과 유도 훈련을 병행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경시청 유도단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경시청 유도단 시절, 그는 왼손을 어깨 너머로 길게 뻗어 상대의 등 부분을 움켜쥐는 독특하고 변형된 형태의 잡기(変形の組み手헨케이노 쿠미테일본어)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실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러한 독특한 기술은 그의 유도 스타일을 상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3. 선수 경력
세키네 시노부의 유도 선수 경력은 경시청 유도단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같은 이바라키현 출신이자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던 오카노 이사오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을 보고 올림픽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1968년 하계 올림픽에는 유도가 정식 종목에서 제외되면서 그의 올림픽 출전 꿈은 잠시 미뤄졌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기량을 갈고닦았고, 1972년에는 중량급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일본 유도계의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28세의 베테랑 선수였던 세키네는 1972년 뮌헨에서 열린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3.1. 주요 국제 대회 성적
세키네 시노부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전에도 여러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실력을 입증했다. 다음은 그의 주요 국제 대회 성적이다.
연도 | 대회명 | 체급 | 성적 |
---|---|---|---|
1961 | 전국 고등학교 종합 체육 대회 유도 경기 대회 | 무제한급 | 2위 |
1964 | 전일본 학생 유도 선수권 대회 | 우승 | |
1966 | 1966년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 | 80kg급 | 우승 |
1966 | 1966년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3위 |
1969 | 전일본 선발 유도 체중별 선수권 대회 | 3위 | |
1971 | 전일본 선발 유도 체중별 선수권 대회 | 우승 | |
1971 | 1971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3위 |
1972 |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 | 우승 | |
1972 | 1972년 뮌헨 올림픽 | 80kg급 | 우승 |
3.2. 1972년 뮌헨 올림픽 금메달
1972년 뮌헨 올림픽 유도 남자 80kg급에서 세키네 시노부는 극적인 과정 끝에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토너먼트 5회전에서 대한민국의 오승립 선수에게 패배했으나, 오승립 선수가 계속해서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함으로써 패자부활전을 통해 구제되어 결승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 결승전에서 세키네는 다시 한번 오승립 선수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전 경기는 대부분 수비 위주로 진행되었고, 경기 내내 오승립 선수가 점수에서 앞서 나갔다. 그러나 경기 종료를 불과 몇 초 남겨둔 상황에서 세키네는 과감하게 어깨떨어뜨리기 (태오토시) 기술을 시도하며 오승립 선수를 매트 위에 넘어뜨렸다. 이 기술의 성공 여부를 놓고 두 명의 부심은 1대1로 의견이 갈렸으나, 네덜란드 출신 주심이 세키네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에게 판정승을 선언했다. 이로써 세키네 시노부는 접전 끝에 귀중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 은퇴 후 활동
올림픽 금메달 획득 직후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세키네 시노부는 일본 유도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전일본유도연맹의 강화 코치와 강화 위원, 그리고 이사를 역임하며 일본 유도 대표팀의 기량 향상에 기여했다. 또한 심판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유도 경기의 공정한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유도 경기 심판으로 활동하며 국제 무대에서의 전문성을 선보였다.
교육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과거 자신이 소속되었던 경시청의 주석 사범으로 유도 강사 역할을 수행했으며, 헤이세이 국제 대학의 사범으로도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도쿄도 유도 연맹 회장을 지내며 도쿄 지역의 유도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5. 수상 및 영예
세키네 시노부는 선수 경력과 은퇴 후 유도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수상과 영예를 얻었다.
- 단 승단:** 2012년 4월 28일, 강도관 창립 130주년 기념식에서 9단으로 승단하며 빨간띠를 허락받았다.
- 오아라이정 주민 영예상:** 2004년에는 같은 오아라이정 출신인 야구 선수 이가와 케이 및 오쿠보 히로모토와 함께 오아라이정 주민 영예상을 수상했다.
- 욱일쌍광장**: 2017년에는 욱일장 중 하나인 욱일쌍광장(旭日双光章교쿠지쓰소코쇼일본어)을 수훈했다.
- 정육위**: 사망 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정육위(正六位쇼로쿠이일본어)에 추서되었다.
6. 사망
세키네 시노부는 2018년 12월 18일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일본 유도계와 스포츠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7. 평가 및 유산
세키네 시노부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일본 유도 역사에 큰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유도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독특한 유도 스타일과 끊임없는 노력은 후대 유도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전일본유도연맹과 교육 기관에서의 활동은 일본 유도의 저변을 확대하고 기량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올림픽 심판으로 활동한 것은 국제 유도계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는 평생을 유도에 바치며 스포츠맨십과 헌신의 모범을 보였고, 그의 유산은 일본 유도계에 길이 남아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