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세고에 겐사쿠는 일본 바둑계의 주요 전환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바둑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촉망받는 신예 기사로 성장했고, 이후 일본기원 설립에 앞장서며 바둑계의 통합과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원폭 대국에 휘말리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일본기원 재건에 힘써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바둑계 재건의 선봉에 섰다. 말년에 신체적 쇠약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나, 바둑에 대한 그의 열정과 헌신은 변함이 없었다.
1.1. 유년기 및 교육
세고에 겐사쿠는 1889년 5월 22일, 히로시마현 사에키군 노미촌(現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시)에서 현의회 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성장한 노미섬은 예로부터 바둑이 번성했던 지역으로, 조부 역시 혼인보 슈겐에게 초단을 받을 정도로 바둑 애호가였다. 세고에는 5세 때 안질과 이명을 앓던 중 조부에게 바둑을 배웠으며,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2~3단 실력의 사람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히로시마 제일중학교(現 히로시마현립 고쿠타이지 고등학교)에서는 가야 오키노리와 동급생이었다. 1905년 여름 방학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고베시에서 나카네 호지로, 아베 가메지로, 고하바라 요시타로, 하시모토 도산부로 등에게 3점 접바둑에서 2점 접바둑으로 지도를 받았다.
1.2. 초기 바둑 경력
세고에 겐사쿠는 1909년, 20세의 나이로 도쿄에 상경하여 당시 아버지를 잘 알던 현의회 의원 모치즈키 게이스케의 소개로 호엔샤에 입문했다. 당시 바둑계는 혼인보 문하와 호엔샤가 대립하고 있었고, 모치즈케이가 세고에에게 "호엔샤에 들어가 혼인보를 이겨 보지 않겠나"라고 부추기자 세고에도 이에 동조했다. 입사 후 그의 성적은 매우 좋았으며, 같은 해 도쿄 아사히 신문의 '소장 기객 혈전회'에서 무단임에도 불구하고 다카베 도이헤이 4단과 선번으로 대국하여 4집을 이기는 이변을 연출하며 '4단과 무단의 승부'로 큰 화제를 모았다. 같은 해 병역을 위해 귀향하면서 스즈키 다메지로 3단과의 시험 바둑에서 선상선으로 4승 2패를 거두며 3단으로 비약적으로 승단하여 당시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 청년'으로 큰 이목을 끌었다.
1917년에 5단으로 승단했으며, 1920년에는 당대 최강자였던 혼인보 슈사이에게 선(先)의 맞바둑까지 실력이 상승했다. 혼인보 문하와 호엔샤 젊은 기사들이 모인 '육화회'에서도 회우로서 바둑 연구에 협력했다. 1921년에 6단으로 승단했으며, 같은 해 가네코 준이치, 스즈키 다메지로, 다카베 도이헤이와 함께 비성회를 설립했다. 비성회는 전 호선 및 제한 시간제 도입 등 봉건적인 관습에 얽매여 있던 바둑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1.3. 일본기원 설립
세고에 겐사쿠는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분열된 바둑계의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혼인보파와 호엔샤를 화해시키고, 대재벌 오쿠라 기하치로를 후원자로 삼아 1924년에 일본기원을 설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일본 바둑계의 근대화와 체계적인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4. 전전(戰前) 활동
일본기원 설립 후 1926년, 세고에 겐사쿠는 추천을 통해 7단으로 승단했다. 1927년부터 시작된 일본기원 '오테아이'의 동서 대항전에서는 동군 주장을 맡아 서군 주장 스즈키 다메지로와 함께 맹활약했다. 그러나 1928년 가을 오테아이에서 8단 승단을 눈앞에 두었을 때, 다카하시 시게유키와의 대국에서 만년패 문제가 발생하여 승패가 일시 보류되는 등 혼란이 있었고, 이후 미야사카 게이지에게 패배하여 승단이 좌절되었다. 또한 동서 대항전도 이 해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1939년부터 시작된 제1기 혼인보전에서는 최종 토너먼트의 4차전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과를 보였다. 1942년에는 스즈키 다메지로, 가토 신과 함께 8단으로 추대되었고, 1944년에는 준명인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1.5. 태평양 전쟁 시기 및 원폭 대국
1945년 태평양 전쟁 말기,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일본기원 회관이 소실되면서 바둑 도구와 기록물 등 많은 것을 잃었다. 제3기 혼인보전은 세고에 겐사쿠가 히로시마로 피난해 있던 중에 그의 노력으로 같은 해 8월 히로시마 시 외곽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제2국은 이쓰카이치정 요시미엔(現 사에키구 요시미엔)에서 하시모토 우타로 본인방과 도전자 이와모토 가오루 7단의 대국 도중 원자폭탄이 작렬하여 강렬한 폭풍에 휩싸였다. 당시 시내에 남아 있던 히로시마 지부 관계자는 전원 사망했으며, 세고에 본인도 피폭되었고, 셋째 아들과 조카 역시 희생되었다. 이는 역사에 원폭 대국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훗날 이와모토 기금으로 시애틀에 세워진 일본기원 바둑 센터의 벽에는 원폭 투하 당시의 바둑판 상황이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1.6. 전후 재건 및 일본기원 이사장
종전 후 세고에 겐사쿠는 이와모토 가오루 등과 함께 일본기원 재건에 헌신했다. 1946년에는 일본기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같은 해 4월, '오테아이'를 재개하고 잡지 「기보」도 복간시켰다. 1948년에는 일본기원 회관(도쿄도 미나토구 시바 다카나와)을 개관했으나, 같은 해 요미우리 신문 지면에서 실언을 한 일로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1950년에는 기시 노부스케가 회장, 아다치 마사시가 이사(이듬해 사장)로 취임한 도요 파루푸의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1.7. 말년 및 영예
이사장직 사임 이후에도 세고에 겐사쿠는 바둑의 발전과 국내외 보급에 꾸준히 힘썼다. 에도 시대의 어성기의 기보를 모은 『어성기보』 전 10권, 『메이지 기보』의 편집에 참여했으며, 직접 집필한 「세고에 바둑 교본」 등 다수의 기술서를 저술했다. 1952년에는 전본인방 전8단전에 출전했다.
1955년에 바둑계에서 은퇴했으며, 같은 해 스즈키 다메지로와 함께 명예 9단으로 추대되었다. 1958년에는 바둑 기사로서 최초로 자수포장을 수훈했으며, 1966년에는 훈2등서보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2009년에는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바둑 경력
세고에 겐사쿠는 바둑 스타일을 보여주는 여러 인상적인 대국을 남겼다. 특히 1920년 만조보에서 혼인보 슈사이 명인과 선(先)으로 두었던 대국은 그의 기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1. 승단 내역
- 1909년 비약적 승단 3단
- 1912년 4단
- 1917년 5단
- 1921년 6단
- 1926년 7단
- 1942년 8단
- 1955년 명예 9단
2.2. 주요 대국
세고에 겐사쿠는 바둑 스타일을 보여주는 여러 인상적인 대국을 남겼다. 특히 1920년 만조보에서 혼인보 슈사이 명인과 선(先)으로 두었던 대국은 그의 기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혼인보 슈사이에 대항하던 호엔샤의 세고에 겐사쿠와 스즈키 다메지로는 슈사이에게 선의 맞바둑까지 실력이 상승해 있었다. 위 기보의 백은 초반 흑의 슈사쿠류 포석을 막는 방침으로, 백8부터 12까지 협공하는 포석은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다. 흑은 15부터 19로 선수를 잡고 21로 돌아가 발 빠르게 포석을 전개했다. 백24의 붙임은 흑29의 잇기를 기대했지만, 흑은 이를 생략하고 27로 반발하여 전투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후 흑은 좌변 백을 봉쇄하여 중앙을 두텁게 만들었고, 상변에 큰 백집을 내주었지만, 중앙을 장악하며 판을 압도했다. 177수 만에 흑의 불계승으로 끝났다.
2.3. 기타 기력
- 원사 대항전 (1926년) 0-1 (vs 오노다 지요타로)
- 오테아이(갑조) 우승 (1927년 후기)
- 일중 바둑 교류전
- 1960년 3승 1패 1무승부
3. 저서
세고에 겐사쿠는 수많은 바둑 관련 서적을 저술하고 편찬에 참여하여 바둑 기술의 보급과 이론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바둑 습격전법』(囲碁襲撃戦法), 시분칸, 1911년
- 『소장 기객 결전록』(少壮碁客決戦録), 하쿠분칸, 1917년
- 『신진 기객 쟁패전』(新進碁客争覇戦), 시분칸, 1920년
- 『사활 사전』(手筋辞典) (오청원 공저), 세이분도 신고샤, 1971년
- 『끝내기 사전』(詰碁辞典)
- 『바둑 실력을 강하게 하는 책』(囲碁の力を強くする本)
- 『어성기보』(御城碁譜) (야하타 교스케, 와타나베 히데오 공저), 어성기보 정리 배포위원회, 1950년~1951년
- 『메이지 기보』(明治碁譜), 일본경제신문사, 1959년
- 『바둑 백년 1 선번 필승을 찾아서』(囲碁百年 1 先番必勝を求めて), 헤이본샤, 1968년
- 『사활 빨리 알기』(手筋早わかり)
- 『손해 없는 함정수』(損のないハメ手)
- 『바둑 형태를 가르치는 금언집』(碁の形を教える金言集)
- 『작전 사전』(作戦辞典)
- 『수가 있는 집, 수가 없는 집』(手のある地・手のない地)
- 『승부의 결정타』(勝負のキメ手) 외 다수
4. 국제 교류 및 제자 양성
세고에 겐사쿠는 바둑의 국제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1928년 오청원의 일본 이주에 적극적으로 힘썼으며, 그를 자신의 문하로 받아들여 지도했다. 또한 1919년 만주와 중국을 방문했고, 1942년에는 아오키 가즈오의 초청으로 오청원 등과 함께 중국을 다시 찾았다. 1950년에는 하와이 기원의 초청으로 하와이를 방문했으며, 1957년에는 타이완 사절단 단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제1회 일중 바둑 교류전 방문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바둑의 국제적 확산에 힘썼다.
그는 많은 뛰어난 제자들을 양성하여 일본 바둑계의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문하에는 오청원, 하시모토 우타로, 스기우치 마사오, 이요모토 모모이치, 히사이 게이시, 그리고 한국 바둑의 전설인 조훈현 등이 있다.
5. 사망
세고에 겐사쿠는 1972년 7월 27일, 83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그는 80세가 되면서 눈과 귀가 약해지고 이어서 다리까지 쇠약해지는 등 신체적 쇠퇴로 고통받았다. 그의 유서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죽는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의 장남은 "바둑계에 봉사할 수 없다면 시신을 내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제자 오청원은 "눈이 불편해져서 프로 기사 외에는 바둑을 둘 수 없게 되자 낙담하셨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사망은 제자인 조훈현이 대한민국의 군 복무 문제로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지 약 4개월 뒤에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관계자들은 "그 나이에 죽을 필요는 없었는데"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6. 평가와 유산
세고에 겐사쿠는 일본 바둑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바둑계의 통합과 현대화, 그리고 국제화를 이끌었으며, 특히 인재 양성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6.1. 긍정적 평가
세고에 겐사쿠는 바둑계의 '일본기원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그는 일본기원 설립을 주도하여 분열되었던 일본 바둑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기원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황폐해진 바둑계를 재건하는 데 헌신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오청원, 조훈현 등 세계적인 기사를 배출한 스승으로서 인재 양성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중국, 대만, 하와이 등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바둑의 국제화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현대 바둑의 발전과 세계적 보급의 토대가 되었다.
6.2. 비판 및 논란
세고에 겐사쿠의 생애와 활동 중에는 몇 가지 논란이나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1928년 8단 승단을 앞두고 만년패 문제로 대국이 보류되고 승단이 좌절된 사건은 그의 바둑 경력에서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또한 1948년 일본기원 이사장 재임 중 요미우리 신문 지면을 통한 실언으로 이사장직을 사임하게 된 것은 그에게 내부적인 고립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6.3. 바둑계에 대한 영향
세고에 겐사쿠는 현대 바둑의 발전과 보급, 그리고 교육 시스템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성회를 통해 제한 시간제와 같은 현대적인 대국 방식을 도입하여 바둑을 더욱 체계화했다. 또한 일본기원 설립과 재건을 통해 프로 기사 제도와 승단 시스템을 확립하고, 바둑 잡지 발행을 통해 바둑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특히 수많은 기술서의 저술은 일반 바둑 애호가들의 기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의 국제 교류 활동은 바둑이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각자의 바둑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것은 그의 교육 철학과 통찰력이 뛰어났음을 증명한다.
6.4. 기념물
세고에 겐사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3년 조각가 엔쓰바 쇼조가 제작한 동상이 그의 고향인 노미섬에 건립되었다. 이는 그가 바둑계에 남긴 지대한 영향과 업적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기념물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는 2009년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