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본인방 슈겐의 생애는 일본 바둑계가 전통적인 가문 제도에서 근대적인 형태로 전환되던 격동기에 본인방 가문의 중요한 위치를 두 차례 맡아 그 명맥을 잇는 데 기여했다.
1.1. 유년기 및 가족 관계
본인방 슈겐은 1854년 (안세이 원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쓰치야 햐쿠사부로이다. 그는 14세 본인방 슈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법명은 일존이다. 그의 넷째 아들인 쓰치야 잇페이(土屋 一平쓰치야 잇페이일본어) 또한 바둑 기사로 촉망받았으나, 1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슈겐의 장남 만키치(萬吉만키치일본어)의 아들인 손자 쓰치야 한시치(土屋 半七쓰치야 한시치일본어) 역시 기사로서 2단까지 올랐으나, 1952년 32세에 요절했다.
1.2. 16세 본인방 계승 및 활동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바둑계는 전통적인 가문 중심 체제의 쇠퇴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 특히 15세 본인방 슈에쓰는 이러한 바둑계의 침체에 따른 심적 고통으로 병을 얻었다. 이에 슈에쓰의 둘째 아들이자 당시 하야시 가문을 계승하고 있던 슈에이와 함께, 슈와의 문하생 중 당시 최고의 실력자로 평가받던 무라세 슈호를 본인방 당주로 모시려 했다. 그러나 이를 중재하던 나카가와 가메사부로의 반대로 인해 계획은 무산되었다.
결국 1879년 9월, 슈에쓰는 은퇴하고 햐쿠사부로가 본인방 가문을 계승하여 16세 본인방 슈겐이 되었다. 당시 슈겐의 단위는 3단으로, 이는 본인방 가문의 역사상 가장 낮은 단위의 당주였기 때문에 그의 자격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슈겐은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 방원사의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가문 체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방원사의 방식에 반발하여 슈에이, 야스이 산에이와 함께 탈퇴했다. 이 과정에서 본인방 문하의 방원사 회원들의 단위를 박탈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후 방원사의 성장에 따라 가문 체제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슈겐은 슈에이에게 본인방 당주 자리를 양보하여 17세 본인방 슈에이가 탄생했다.
1.3. 두 차례의 본인방 계승 사이 활동
16세 본인방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슈겐은 바둑계의 주요 무대에서는 잠시 비켜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슈겐은 술을 즐기는 생활을 보내며 주변으로부터 '주선'(酒仙슈센일본어, 술에 취해 신선처럼 사는 사람) 또는 '기인'(畸人키진일본어, 기이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했다. 1886년에는 슈에이와 방원사가 화해하고 슈호가 18세 본인방이 되었으나, 이듬해 슈호가 사망하면서 슈에이가 다시 본인방을 계승하게 되었다. 슈에이는 8단과 명인의 칭호까지 얻으며 본인방 가문의 세력이 방원사를 능가할 정도로 다시 부흥했다.
슈겐은 이 시기 동안 슈에이의 시소카이(四象会시소카이일본어)에도 참석했으며, 단위는 4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슈에이로부터 "벽옥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또는 "6단의 가치에 도달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는 그가 비록 높은 단위에 오르지는 못했더라도, 동시대 최고 기사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4. 20세 본인방 재계승 및 역할
1907년, 19세 본인방 슈에이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바둑계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실력 면에서 가장 뛰어났던 다무라 야스히사(田村 保寿다무라 야스히사일본어)를 지지하는 파와, 슈에이의 미망인 등이 후원하는 가리가네 준이치(雁金 準一가리가네 준이치일본어)를 지지하는 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계승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 슈겐은 스스로 잠시 20세 본인방을 계승했다. 이듬해인 1908년 슈에이의 일주기를 기다려 다무라 야스히사에게 본인방 자리를 양보했고, 다무라는 21세 본인방 슈사이가 됨으로써 사태가 수습되었다. 슈겐은 이 계승 과정에서 주변의 권유로 잠시 동안 6단으로 승단하기도 했으며, 시사신보(時事新報지지 신보일본어) 지상에서 하루 동안만 6단의 직함을 달기도 했다.
1.5. 만년과 죽음
q=본묘지|position=right
20세 본인방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슈겐은 다시 쓰치야 슈겐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소는 도쿄도 도시마구에 위치한 혼묘지(本妙寺혼묘지일본어)에 있다.
2. 바둑 기량과 평가
본인방 슈겐의 바둑 기량은 동시대의 다른 본인방 당주들이나 이후의 뛰어난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특정 강점과 함께 주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1. 기량에 대한 평가
슈겐은 19세기 초반에 확립된 바둑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출중한 실력을 가진 기사로 평가받지는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는 4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량은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슈에이는 슈겐의 바둑에 대해 "고금에 보기 드문 매우 능숙한 바둑이며, 형태와 모습에 밝다"라고 평가하며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기미담기』(奇美談碁기미담기일본어)). 이는 슈겐이 대국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독특한 기풍과 형세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2. 주요 대국 및 성과
슈겐은 20세 본인방에 재취임했던 1907년부터 이듬해까지 요로즈 죠호(万朝報요로즈 죠호일본어) 신문사의 바둑 기전인 본인방 가문 승계전(坊門勝継戦보몬쇼케이센일본어)에서 7인 연속 승리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는 슈사이가 슈에이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슈사이와도 많은 대국을 남겼다.
3. 유산 및 일화
본인방 슈겐은 바둑 실력 자체보다는 격동기에 본인방 가문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독특한 역할과 흥미로운 일화를 통해 일본 바둑사에 이름을 남겼다.
3.1. 본인방 계승에서의 독특한 역할
슈겐은 본인방 가문의 혼란스러운 계승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중간 역할(stopgap leader)'을 수행하며 가문의 안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19세 본인방 슈에이가 사망한 후 발생한 후계자 분쟁에서, 실력파 다무라 야스히사와 슈에이의 미망인 등이 후원하는 가리가네 준이치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슈겐은 스스로 20세 본인방을 계승하여 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이후 그는 원만하게 다무라에게 본인방 자리를 넘겨주어 21세 본인방 슈사이가 탄생하는 데 중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본인방 가문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의 수장에게 원활하게 권위를 이양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2. '야오초(八百長)' 일화
'야오초'(八百長야오초일본어)는 오늘날 일본에서 승부 조작이나 미리 결과를 정해놓은 경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표현의 어원은 본인방 슈겐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에서 유래한다. 에코인(回向院에코인일본어) 근처의 한 바둑 회관 개장식에 손님으로 초대된 야오야 쵸베이(八百屋の長兵衛야오야 쵸베이일본어, 채소 가게의 쵸베이라는 뜻)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바둑 실력이 보잘것없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슈겐과의 대국에서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이며 자신의 진짜 실력을 드러냈다. 이 일화가 퍼지면서,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경기에 임하는 행위를 '야오야 쵸베이'에서 따와 '야오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슈겐은 이 유명한 일화의 중심 인물로서 일본어 숙어의 어원에 기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