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샤오훙의 생애는 불행한 유년기와 불안정한 개인적인 관계, 그리고 끊임없는 방랑으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녀의 문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가족 배경
샤오훙은 1911년 6월 1일 단오절에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후란현(현재의 후란구) 외곽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탐욕스럽고 냉정하며 무자비한 인물로, 하인들과 자녀들, 심지어 그녀의 할아버지에게까지 인색하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다. 샤오훙은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면 할아버지의 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샤오훙이 9살 때 사망했으며, 샤오훙은 어머니를 무서워했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재혼했고, 계모 또한 샤오훙을 학대했다. 샤오훙이 3~4세 때 남동생이 태어나자 아버지는 모든 사랑을 아들에게 쏟았고, 샤오훙은 더욱 소외되었다.
반면, 그녀의 할아버지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샤오훙을 이해하고 사랑해 준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그녀를 쓰다듬으며 "자라거라! 자라는 것이 좋다"고 말해 주었고, 샤오훙은 할아버지에게서 따뜻함과 사랑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인류애와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진선미를 가르쳤으며, 샤오훙이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워했던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운 유일한 가족 구성원이었다. 할머니는 샤오훙이 6살 때 사망했는데, 그녀에게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는 등 가혹하게 대했다. 할아버지는 샤오훙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녀의 말년에 작은 기쁨을 주었다. 가족에게 학대받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샤오훙의 미래 관계와 작품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1.2. 유년기와 교육
샤오훙의 유년기는 불행했으며,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의 미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부터 후란 남진의 을종농업소학교(현 샤오훙 소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시작했고, 5년 후에는 권학소학교(현 현립제일여자초고양급소학교)로 전학하여 1926년에 졸업했다. 1927년에는 하얼빈 특수구의 구립제일여자중학교(현 하얼빈 제7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보수적인 명문 여학교였으나, 당시 중국은 5·4 운동의 영향으로 정치적 격변과 문화 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샤오훙은 입학 직후부터 학생 시위에 매료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만주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제일여자중학교에서 샤오훙이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회화와 역사였다. 그녀는 첫해에 회화에 몰두하여 두 점의 작품을 지역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이듬해부터는 문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역사 교수의 소개로 신문학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하얼빈의 주요 신문인 '국제협보'의 문학 부록을 읽으며 '신문학'에 흥미를 느꼈다. 당시 학생들처럼 루쉰, 쉬즈모, 마오둔, 빙신 등 중국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업턴 싱클레어 등 미국 작가, 그리고 러시아 작가들의 번역본을 읽으며 사회 지향적인 문학에 매료되었다. 이를 통해 샤오훙은 과묵하고 고독하며 사색적이던 소녀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가, 그리고 후일 항일에 맞서는 애국적인 작가로 변모했다.
1929년에서 1930년 겨울 방학 동안 후란의 집을 방문한 후 1930년 봄 학기 초에 학교로 돌아왔다. 1930년 여름 초급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집을 방문했는데, 이때 아버지가 그녀를 지역 군벌의 아들과 정략결혼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 두 가지 이유와 아버지, 계모의 학대에 대한 고통으로 샤오훙은 20세에 가출하여 하얼빈으로 돌아갔으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3. 개인적인 삶과 관계
샤오훙의 개인적인 삶은 복잡하고 불행한 관계들로 가득했다. 그녀의 유년기 경험은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 패턴을 형성했으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받거나, 혹은 버림받고 고통받는 존재로 여기게 했다.
1.3.1. 첫 번째 관계와 결혼
1929년, 샤오훙은 아버지의 강요로 왕언자(王恩甲)와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결혼을 두려워하고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후란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샤오훙은 집을 떠났다. 그녀는 '초동(初冬)'에서 "나는 그런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와 정반대편에 서 있는 아버지에게 부양받고 싶지 않다"고 썼다.
하얼빈으로 돌아온 샤오훙은 이전에 만났던 젊은 지식인(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리(李) 씨 성을 가진 제일여자중학교 교수 또는 법대생으로 추정됨)을 찾아갔다. 샤오훙은 그와 몇 달간 동거했으나, 그가 유부남임을 알게 되자 그를 떠나거나 혹은 그에게 버림받았다. 1931년, 샤오훙은 그와 함께 베이징으로 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버림받았다. 당시 샤오훙은 임신 중이었다.
샤오훙은 무일푼으로 하얼빈으로 돌아왔고,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낮에는 친구 집에서 자고 밤에는 노숙하며 지냈다.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절망에 빠진 샤오훙은 "나는 인류와 나를 가로막는 큰 구덩이를 느꼈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러시아 백계가 운영하는 싸구려 호텔에 머물게 되었으나, 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감금당했다. 1932년, 왕언자는 임신한 샤오훙을 호텔에 버려두고 떠났다. 아이를 부양할 수 없었던 샤오훙은 아이를 입양 보냈다. 왕언자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샤오훙은 지역 신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1.3.2. 샤오쥔과의 관계
신문 편집자였던 페이샹위안(裴香園중국어)은 샤오훙의 사연에 충격을 받고 샤오쥔(蕭軍중국어, 본명: 류훙린)을 보내 사건의 진위를 확인하게 했다. 이것이 샤오훙과 샤오쥔의 첫 만남이었다. 샤오쥔은 샤오훙의 재능에 매료되어 그녀를 구하기로 결심했고, 이는 샤오훙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1932년 8월, 샤오훙과 샤오쥔은 동거를 시작했다. 샤오쥔은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자주 벌이며 때로는 폭력적이고 바람기 있는 성격으로, 샤오훙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오만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샤오쥔의 불같은 성격 때문에 두 사람은 갈 곳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샤오훙은 샤오쥔의 변덕스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의지하며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샤오훙은 1933년에 샤오쥔과 함께 공동 작품집 '발섭(跋涉)'을 사비로 출판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샤오쥔의 불같은 성격은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결국 6년 후인 1938년에 관계가 파국을 맞았다.
1.3.3. 두안무훙량과의 관계
1938년, 샤오훙은 우한에서 돤무훙량(端木蕻良중국어)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1938년 5월 우한에서 결혼했다. 샤오훙은 돤무훙량과 함께 삶을 꾸려갔지만, 홍콩에서 병으로 고통받던 중 돤무훙량에게 버림받기도 했다.
1.3.4. 자녀
샤오훙은 첫 번째 관계에서 딸을 낳았으나, 1932년 7월에 입양 보냈다. 샤오쥔과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낳았으나 출산 후 사망했다. 돤무훙량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았으나 곧 사망했다.
2. 문학 활동
샤오훙의 문학 활동은 격동의 시대 속에서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며 발전했다.
2.1. 문학 활동의 시작
샤오훙은 1927년 하얼빈에서 5·4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사상과 중국 및 외국 문학을 접하며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샤오쥔과 함께 공동 작품집 '발섭(跋涉)'을 자비로 출판했다. 이 책은 일본 당국에 의해 배포가 금지되었고, 두 사람은 인쇄된 책의 대부분을 불태워야 했다.
2.2. 주요 작품
샤오훙은 소설, 수필, 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 발섭(跋涉중국어, 1933년): 샤오훙과 샤오쥔의 공동 작품집.
- 기아(棄兒중국어, 1933년): 샤오훙의 첫 출판 단편 소설로, 차오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 생사의 장(生死場중국어 (한자), 1934년): 칭다오에서 집필된 샤오훙의 데뷔 장편 소설이다. 루쉰은 이 작품을 "날카로운 관찰력과 비범한 문체"라고 평했다. 이 작품에서 샤오훙은 현재 알려진 '샤오훙'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했으며, 이 작품을 통해 그녀의 인기가 시작되었다. 국민당 정부에 의해 유통이 금지되었으나, 오히려 이로 인해 더 많은 독자들이 찾게 되었다.
- 영구적 동경과 추구(永久的憧憬與追求중국어 (한자), 1936년): 샤오훙의 스케치 작품집.
- 상시가(商市街중국어, 1936년): '하얼빈의 한 중국 여성'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샤오쥔과 하얼빈에서 보낸 첫 2년간의 일상생활을 스케치한 연작이다.
- 회고 루쉰 선생(回憶魯迅先生중국어 (한자), 1940년): 루쉰에 대한 회고록.
- 마보러(馬伯樂중국어 (한자), 1940년): 칭다오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풍자 소설.
- 후란허전(呼蘭河傳중국어 (한자), 1942년): 자전적 소설로, 개인사와 지역사를 함께 엮으려 한 전례 없는 시도로 현대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손(手중국어): 고통받는 노동 계급의 삶을 다룬 중요한 작품.
- 그 외 작품: '소록(小綠, 1935년)', '교(橋, 1936년)', '우차상(牛車上, 1937년)', '광야적호함(曠野的呼喊)', '연화지(蓮花池)', '산하(山下)', '도난(逃難)', '몽롱적기대(朦朧的期待)', '민족혼(民族魂, 희곡)', '소성삼월(小城三月)'.
2.3. 문체와 주제
샤오훙의 작품은 사회 문제, 빈곤층의 고통, 여성의 경험, 그리고 개인적인 서사를 중심으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공동체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감정과 경험이라는 관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문체는 사회적 불의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깊은 동정과 애정을 담고 있다. 특히, 그녀는 작품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을 비판적으로 다루며 여성 인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녀의 작품은 불안정한 사회의 희생자들을 조명하며, 사회 정의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반영한다.
2.4. 루쉰과의 관계
샤오훙은 1927년부터 신문학의 독자가 되었고, 루쉰의 작품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샤오훙과 샤오쥔은 상하이로 가기 전 자신들의 원고를 루쉰에게 보냈고, 루쉰은 이들의 원고를 읽은 후 젊은 좌파 작가 그룹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했다. 루쉰은 샤오훙과 샤오쥔의 소설을 자신의 노예총서(奴隸叢書)에 출판했다.
1934년 11월 1일, 샤오훙과 샤오쥔은 상하이로 이주했고, 루쉰의 집 근처에 작은 방을 얻었다. 두 사람은 루쉰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문학적 조언을 구하고 돈을 빌리기도 했다. 루쉰은 이들의 편지에 모두 답장하며 친절하게 조언해 주었고, 두 사람에게 20 CNY를 빌려주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루쉰의 주변 작가 그룹과 루쉰의 아내 허광핑, 아들 루하이잉과도 친해졌으며, 거의 매일 루쉰을 찾아갔다.
루쉰과 샤오훙의 관계는 점점 더 긴밀해졌다. 루쉰은 샤오훙에게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을 대부분 자신의 친한 친구인 언론인들에게 소개했다. 또한 루쉰은 자신의 돈을 들여 샤오훙의 '생사의 장'과 샤오쥔의 '팔월적향촌'을 출판하도록 도왔다. 1935년 초, 루쉰은 샤오훙을 "가장 유망한 여성 작가로, 딩링을 능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하며 그녀의 밝은 미래를 예견했다. 루쉰의 전폭적인 격려와 도움 덕분에 샤오훙은 1935년에서 1936년 동안 활발하게 글을 썼다.
3. 시대적 배경과 경험
샤오훙의 삶은 중국의 격동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녀는 이 시대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이동하고 방랑했다.
3.1. 전쟁과 사회적 혼란
샤오훙의 삶은 20세기 초 중국을 휩쓴 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전개되었다. 1919년의 5·4 운동은 그녀의 어린 시절 교육에 영향을 미쳤고, 진보적인 사상과 문학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하얼빈의 상황은 더욱 긴박해졌고, 이는 샤오훙과 샤오쥔이 하얼빈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36년 시안 사건은 그녀가 시안에 머물던 시기에 발생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샤오쥔과의 동거 관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상하이가 함락되자, 샤오훙은 우한을 거쳐 중국 내륙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1940년 충칭 폭격이 격화되면서 그녀는 홍콩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1941년 일본군의 홍콩 점령은 그녀의 마지막 날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처럼 샤오훙은 평생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으며,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녀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2. 방랑과 망명
샤오훙은 평생을 중국 각지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했다.
- 후란 (1911-1927):** 출생지이자 유년기를 보낸 곳.
- 하얼빈 (1927-1934):**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항일 시위에 참여했으며, 샤오쥔을 만나 초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당국의 탄압을 피해 떠났다.
- 칭다오 (1934):** 샤오쥔과 함께 피신하여 '생사의 장'을 집필했다. 이 시기 샤오쥔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 상하이 (1934-1937):** 중국 문학의 중심지에서 루쉰을 만나 그의 지지와 도움을 받으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다. 1936년에는 건강 문제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1937년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베이징에 한 달간 머물렀고, 루쉰 기념집 편집에 참여했다.
- 우한 (1937):** 중일전쟁 발발 후 상하이가 함락되자 1937년 9월 우한으로 피신하여 돤무훙량을 처음 만났다. '우차상'을 출판했다.
- 우창 (1937):** 10월에 우한에서 우창으로 이동했다.
- 린펀 (1938) / 시안 (1938):** 1938년 1월, 산시성 린펀의 민족혁명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이동했다. 이 시기에 시안 사건을 겪었고, 샤오쥔과의 동거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 우한 (1938):** 1938년 4월, 돤무훙량과 함께 우한으로 돌아왔다.
- 산시 (1938-1940):** 1938년 9월, 산시성으로 이동하여 가락산(歌樂山), 자링강(嘉陵江)변, 황융수진(黃湧樹鎭) 등지에서 머물며 '광야적호함', '연화지', '산하', '도난', '몽롱적기대', '회고 루쉰 선생', '후란허전' 등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 충칭 (1939-1940):** 산시성 이후 쓰촨성 충칭에 머물며 '회고 루쉰 선생'과 항일 전쟁에 관한 단편 소설들을 출판했다.
- 홍콩 (1940-1942):** 1940년 1월, 돤무훙량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병마와 싸우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했다.
4. 사상 및 사회 비평
샤오훙의 작품은 그녀의 깊은 사상과 사회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다. 특히 여성주의적 관점과 사회 정의, 빈곤층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4.1. 여성주의적 관점
샤오훙은 가부장적 사회와 그 안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와 가혹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억압받고 희생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계모에게 학대받고, 정략결혼을 강요당했으며, 연인들에게 버림받는 등 개인적으로도 남성들과 사회 시스템의 희생자였다. 그녀의 작품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여성 희생자들은 남성들과 사회에 의해 억압받고 학대받는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주며, 이는 그녀가 중국 여성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는 여성을 단순히 놀잇감이나 무급 하인으로 여기는 사회 시스템에 반대했다.
4.2. 사회 정의와 빈곤층
샤오훙은 소외된 계층, 특히 빈곤한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작품은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사회 정의에 대한 그녀의 열망을 드러낸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약자들이 겪는 비극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녀의 글은 단순히 개인적인 서사를 넘어,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사회 비평의 역할을 수행했다.
5. 죽음과 유산
샤오훙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녀의 문학적 유산과 사회적 영향력은 후대에 걸쳐 재평가되고 있다.
5.1. 마지막 날과 죽음
1940년 1월, 샤오훙은 돤무훙량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홍콩에서 병을 앓는 동안 돤무훙량에게 버림받기도 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그녀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41년 봄, 홍콩에서 우연히 미국 작가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났는데, 스메들리는 샤오훙의 병세가 위중함을 보고 그녀에게 퀸 메리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유하고 의료비를 감면받도록 도왔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하면서 샤오훙의 폐병은 더욱 악화되어 피난조차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퀸 메리 병원에 머물렀다. 1942년 1월 13일 황혼 무렵, 샤오훙은 바오마디 양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무책임한 의사 리수페이(李樹培)가 그녀의 목에 종양이 있다고 오진하여 후두를 절개하는 의료사고를 저질러 샤오훙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1월 18일, 양허 병원 구급차로 퀸 메리 병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다음날,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 샤오훙은 종이에 "나는 푸른 하늘과 푸른 물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며, 반쯤 쓴 '홍루'를 다른 사람에게 남기겠다"고 썼다. 또한 "반평생 동안 냉대와 멸시만 받았으니... 몸이 먼저 죽는 것이 한스럽고, 한스럽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1942년 1월 22일 오후, 홍콩의 세인트 스티븐스 여자 중학교 임시 병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월 24일, 샤오훙의 유해는 바오마디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다음날 유골은 홍콩 담수만(淡水灣)의 례두 화원(麗都花園) 근처 바닷가 묘지에 안장되었다. 15년이 지난 1957년 8월 15일, 중국 작가 협회 광저우 지부는 샤오훙의 유골을 광저우 시 동부의 인허 광저우 혁명 공묘로 이장했다.
5.2. 사후 평가와 영향
샤오훙은 사망 직전까지도 항일 투쟁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수많은 미완성 원고를 남겼다. 1945년부터 그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초기에는 주로 회고록이나 개인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췄다. 본격적인 연구는 1955년 대만, 1962년 일본, 1976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서야 샤오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그녀의 작품이 재출판되었다. 이는 그녀의 여성주의적 관점과 실험적인 서술 방식이 당시 당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조와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오늘날 샤오훙은 생애 동안 남성들과 사회에 의해 억압받고 학대받은 여성 희생자들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로 인해 특히 주목받고 있으며, 중국 여성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현대 중국 문학에서 가장 저명하고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6. 대중문화
샤오훙의 비극적이고 극적인 삶은 여러 차례 대중문화 콘텐츠로 각색되었다.
6.1. 영화 각색
샤오훙의 삶을 다룬 영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샤오훙(蕭紅중국어, 2013년): 훠젠치(霍建起중국어) 감독의 작품.
- 황금시대(黃金時代중국어, 2014년): 홍콩의 쉬안화(許鞍華중국어, Ann Hui) 감독이 연출했으며, 배우 탕웨이가 샤오훙 역을 맡았다.
6.2. 번역 및 작품집
샤오훙의 작품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
- 영어 번역:** 하워드 골드블랫(Howard Goldblatt영어)이 번역한 '생사의 장 & 후란허전(The Field of Life and Death & Tales of Hulan River, 1979)', '중국 현대 단편소설 및 소설 선집(Anthology of Modern Chinese Stories and Novels, 1980)', '염색공의 딸: 샤오훙 단편선(The Dyer's Daughter: Selected Stories of Xiao Hong, 2005)' 등이 있다.
- 프랑스어 번역:** '바셰(Bashe, 1933)', '생사창(Sheng si chang)', '뉴처상(Niucheshang, 1936)', '교(Qiao, 1936)', '상시제(Shangshijie, 1937)', '회고 루쉰 선생(Huiyi Luxun Xiangshen)', '샤오훙 산문(Xiaohong sanwen)', '마보러(Ma Bole)', '후란허전(Hulanhe zhuan, 1942)' 등이 번역되었다.
- 한국어 번역:** '가족이 아닌 사람', '생사의 장' 등이 출판되었다.
- 작품집:** '샤오훙 전집(蕭紅全集)' 5권이 2010년에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