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빌럼 판하네험의 어린 시절 배경과 축구 선수로서의 초기 단계를 다룬다.
1.1. 유년기와 가족
판하네험은 1944년 2월 20일 브레스켄스에서 새우 어부였던 로 판하네험(Lo van Hanegem, 1905-1944)과 안나 판흐롤(Anna van Grol)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9월 11일, 브레스켄스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있었고, 이 폭격으로 그의 아버지 로, 형 이자크(Izaäk), 그리고 누나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 후, 1946년 봄에 그의 어머니는 남은 자녀들을 데리고 위트레흐트로 이주했으며, 빌럼도 그곳에서 성장했다.
1.2. 유소년 경력과 초기 클럽
어린 시절 거리 축구 선수였던 판하네험은 강력한 왼발 킥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펠록스의 훈련장에서 그의 정확한 킥에 감명받은 감독 다안 판 베이크의 요청으로 펠록스에 입단하게 되었고, 6개월 만에 구단의 1군 팀에서 뛰었다. 그는 펠록스에서 6년 동안 109경기에 출전하여 39골을 기록했다. 펠록스에서 6년 후, 판하네험은 위트레흐트에서 로테르담으로 이주하여 당시 에레디비시로 승격한 크세르크세스에 입단했다. 1967-68 시즌에는 67경기에 출전하여 32골을 기록했으며, 에레디비시에서 득점 2위를 차지했다.
아약스가 판하네험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아약스의 감독 리누스 미헐스는 그의 느린 발과 "단조로운"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현대 축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영입을 거부했다. 대신 판하네험은 아약스의 라이벌인 페예노르트와 계약하며 선수 경력의 가장 큰 성공을 경험하게 된다. 커리어 초반 몇 년 동안은 종종 '빔 하네험'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1968년 스코틀랜드와의 첫 국가대표 경기 프로그램 안내에도 잘못 기재되어 세 번째 국가대표 경기를 마친 후에야 KNVB에 의해 정식 명칭이 수정되었다.
2. 선수 경력
빌럼 판하네험의 선수 시절 주요 활동과 업적을 클럽 경력과 국가대표 경력으로 나누어 다룬다.
2.1. 클럽 경력
판하네험은 1968년 페예노르트에 입단하여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빔 얀선, 프란츠 하시우, 쿤 모라윈, 오베 킨드발, 루드 헤이스, 테오 라세롬스, 리누스 이스라엘, 테오 더 용, 요한 보스캄프, 빔 라위스베르헌과 같은 팀 동료들과 함께 뛰었으며, 구단 감독 에른스트 하펠과는 부자 관계 같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는 페예노르트에서 247경기에 출전하여 88골을 기록했으며, 판하네험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페예노르트가 3번의 에레디비시 우승(1968-69, 1970-71, 1973-74), 1번의 KNVB컵 우승(1968-69), 1970년에 유러피언컵과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그리고 1974년에 UE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70년에는 챔피언스컵을 제패한 팀의 핵심 일원이었고, 에스투디안테스를 상대로 인터콘티넨탈컵도 따냈다. 1974년에는 토트넘 홋스퍼를 꺾고 UEFA컵을 우승했다.
1976년, 판하네험은 페예노르트를 떠나 AZ'67에 입단하여 스트라이커 케이스 키스트와 미드필더 페터 아른츠, 얀 페터스와 함께 3시즌 동안 75경기에 출전해 10골을 기록하며 1977-78 시즌 KNVB컵을 우승했다. 1979년에는 시카고 스팅에서 짧은 기간 27경기에 출전해 6골을 기록한 후 같은 해 네덜란드로 돌아와 젊은 시절 뛰었던 펠록스가 합병된 FC 위트레흐트에서 54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다시 페예노르트로 돌아와 두 시즌 동안 51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1974년 월드컵 대표팀과 페예노르트 간의 은퇴 경기에서 그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었으며, 주심 샤를 코르버로부터 레드 카드를 받은 뒤 선수들에게 어깨에 들려 피치를 떠났다.
2.2. 국가대표 경력
판하네험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총 52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는 동료 페예노르트 팀 동료인 빔 얀선과 아약스의 미드필더 요한 네스켄스와 함께 강력한 미드필더진을 구축했다. 그는 또한 UEFA 유로 1976에도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초 1978년 FIFA 월드컵에도 네덜란드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AZ 팀 동료 위고 호번캄프가 무릎 부상을 당하자 불참을 선언했다. 그는 1979년에 국가대표팀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3. 플레이 스타일
요한 크라위프는 판하네험에 대해 "판하네험은 나보다 한 가지 장점이 있다. 내가 경기가 안 풀리면 쓸모가 없지만, 판하네험은 경기가 안 풀리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태클을 시작한다"고 평가했다. 에른스트 하펠은 그를 "빌럼은 경기를 만들 수도, 망가뜨릴 수도 있고, 빠르게도 느리게도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다. 나에게 그는 완벽한 선수다"라고 극찬했다.
판하네험은 역대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되며, 일부에게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로 모두 뛸 수 있었던 판하네험은 전술적 통찰력으로 유명했으며, 환상적인 패스 범위와 발밑에서의 공 다루는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밴디 레그스(O자형 다리)와 왼발 아웃사이드로 공에 커브를 주는 기술 때문에 '데 크로메'(De Kromme데 크로메네덜란드어, '삐뚤어진' 또는 '구부러진' 이라는 뜻)라는 별명을 얻었다. 플레이메이커로 알려져 있었지만, 득점 능력도 뛰어나 1967-68 시즌 에레디비시에서는 득점 2위를 기록했으며, 태클을 통해 상대 공격을 저지하는 등 수비적인 임무에서도 뛰어났다. 때로는 팀 동료 리누스 이스라엘이 부상당했을 때 리베로로 뛰기도 했고, 페예노르트에서의 마지막 해에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판하네험은 또한 그의 리더십,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끈기로도 유명했다. 그의 주요 약점은 속도 부족이었다.
4.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판하네험은 1983년에 페예노르트의 수석 코치로 합류하여 1986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83-84 시즌에는 아약스에서 이적해 온 요한 크라위프에게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넘겨주었으며, 루드 굴리트, 벤 바인스테커스, 페터르 하우트만 등을 포함한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FC 위트레흐트의 수석 코치를 거쳐 FC 바헤닝언으로 옮겼다.
1992년에는 감독으로서 페예노르트로 돌아와 1992-93 시즌 에레디비시 우승과 KNVB컵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으며, 1993-94년과 1994-95년에도 KNVB컵을 우승했다. 하지만 1995년 10월 PSV전 패배 후 "선수들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1995년에는 알힐랄에서 잠시 감독직을 맡았고, 1997년에는 AZ의 감독을 맡았다. 2001년에는 스파르타 로테르담에 합류했지만 짧은 기간 머물렀고, 이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지냈다. 현장에서 잠시 멀어졌던 그는 2007년 7월 FC 위트레흐트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2008년 12월 프랑스 판 쇠메런과의 논쟁 끝에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지도자로서의 직업을 맡지 않았다.
5. 은퇴 후 활동
감독직 은퇴 후 판하네험은 TV 축구 해설가(NOS, RTL, 현재는 Ziggo Sport)와 알헤메인 다흐블라트의 주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좋은 축구를 사랑하고 항상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해설과 칼럼으로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의 예측이 자주 빗나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6. 사생활과 논란
판하네험은 1963년에 트루스 더 나이스와 결혼했지만 1983년에 이혼했다. 그의 아들 빌럼 판하네험 주니어는 국제적인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아티스트이자 DJ이며, 와르트 판 더르 하르스트와 함께 DJ/프로듀서 듀오 W&W를 결성했다. 그의 다른 아들인 헤르트 판하네험도 FC 위트레흐트에서 프로 축구 선수로 뛰었다.
판하네험은 2018년 1월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지만, 그해 3월에 회복되었다. 그는 2024년에 오라녜나사우 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독일 축구팀과의 경기에 대해 거칠고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그는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독일인들을 박살 내자"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독일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일 선수들을 상대할 때마다 전쟁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증오는 1974년 결승전 이후 "중요한 것은 어떤 점수로든 독일을 이기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굴욕시킬 수 있다면. 그들은 내 아버지와 누나, 두 형제를 죽였다. 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을 증오한다"는 발언으로 요약되기도 했다. 2-1로 독일이 승리한 이 경기 후, 판하네험은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며 필드를 떠난 네덜란드 선수였다. 그러나 후년에는 전쟁에 대해 보다 화해적인 어조로 언급하기도 했다.
7. 수상 및 업적
선수와 감독으로서 빌럼 판하네험이 달성한 모든 주요 수상 및 업적을 정리한다.
7.1. 선수 수상
페예노르트
- 에레디비시: 1968-69, 1970-71, 1973-74
- KNVB컵: 1968-69
- 유러피언컵: 1969-70
- 인터콘티넨탈컵: 1970
- UEFA컵: 1973-74
AZ'67
- KNVB컵: 1977-78
네덜란드
- FIFA 월드컵: 준우승 1974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3위 1976
- 투르누아 드 파리: 1978
개인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71
7.2. 감독 수상
페예노르트
- 에레디비시: 1992-93
- KNVB컵: 1993-94, 1994-95
7.3. 개인 업적
- 오라녜나사우 훈장: 2024
8. 유산과 평가

빌럼 판하네험은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특히 페예노르트의 클럽 아이콘으로 쿤 모라윈 다음으로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요한 크라위프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전술적 통찰력, 뛰어난 패스 능력, 그리고 강한 정신력은 축구계에서 높이 평가받는 요소들이다. 그는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의 준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페예노르트가 네덜란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우승하는 데 기여한 스타 플레이어였다.
선수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경력을 쌓으며 페예노르트에서 리그와 컵 대회를 우승시켰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축구 해설가와 칼럼니스트로서 활동하며 솔직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예측이 자주 빗나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독일인에 대한 공개적인 적대감과 그에 따른 논란은 그의 개인적인 비극(가족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는 그의 경력과 대중적 이미지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후에는 보다 화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판하네험은 네덜란드 축구계에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