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빈스톤 로이드 보하르더는 1970년 10월 22일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이르스터 디비시 소속의 SVV에서 측면 미드필더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1991년 여름에는 고향 연고의 스파르타 로테르담에 입단하며 에레디비시 무대를 밟았다. 스파르타 로테르담 입단 전에는 같은 2부 리그 소속인 SBV 엑셀시오르에서 짧은 임대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1993-94 시즌에는 리그에서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인 11골을 기록하며 팀의 UEFA 인터토토컵 진출에 기여했다.
2. 선수 경력
빈스톤 보하르더는 1988년 프로 데뷔 이후 2004년까지 약 16년간 다양한 클럽에서 활약하며 수비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2.1. 초기 경력 및 아약스

보하르더는 SVV에서 측면 미드필더로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1994년 AFC 아약스로 이적하면서 그의 포지션과 역할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아약스를 이끌던 루이 판 할 감독은 보하르더의 강인한 체격과 뛰어난 스피드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수비수로 전향시켰다. 이 결정은 보하르더를 강력한 스토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약스에서의 첫 시즌인 1994-95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나, 결승전에서는 벤치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후 그는 아약스 수비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하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
2.2. AC 밀란 및 FC 바르셀로나
1997-98 시즌을 앞두고 보하르더는 AC 밀란으로 이적하며 세리에 A 무대에 도전했다. 그러나 밀란에서의 생활은 짧았고, 그는 반 년 동안 리그 3경기 출전에 그쳤다. 1998년 1월, 그는 다시 루이 판 할 감독의 부름을 받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1997-98 시즌 후반기에 19경기에 출전하며 팀이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를 모두 석권하는 2관왕을 달성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 네덜란드 선수들의 입지가 점차 줄어들면서 보하르더의 역할 또한 축소되었다. 1998-99 시즌에는 부상까지 겹쳐 리그 단 1경기 출전에 그치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1999-2000 시즌에는 21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2.3. 첼시 FC
2000-01 시즌을 앞두고 보하르더는 같은 네덜란드인 마리오 멜히오트의 권유를 받아 프리미어리그 소속의 첼시 FC에 입단했다. 당시 첼시의 감독은 잔루카 비알리였으나, 비알리 감독은 보하르더의 영입이 진행되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며, 이는 콜린 허친슨 단장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보하르더가 첼시에 합류하면서 기존 중앙 수비수였던 이메르송 토미는 선덜랜드 AFC로 이적했다. 그러나 보하르더가 첼시에 입단한 지 몇 주 만에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고, 라니에리 감독은 보하르더를 전력 외 선수로 분류하며 그의 방출을 요청했다.
보하르더는 첼시가 자신에게 제시한 계약 조건(주당 4.00 만 GBP의 주급)과 유사한 수준의 제안을 다른 클럽에서 찾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가치가 1군 출전 기회 부족으로 심각하게 평가절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고 매일 훈련에 성실히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는 첼시에서 4년간의 계약 기간 동안 단 11경기에만 출전했으며, 특히 마지막 세 시즌 동안은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 경기 출전은 2000년 박싱 데이에 있었던 입스위치 타운 FC와의 경기(교체 출전)와 2002년 11월 6일 질링엄 FC와의 풋볼 리그 컵 경기(교체 출전)였다. 첼시는 높은 주급을 받는 보하르더를 처분하기 위해 그를 2군 및 유소년팀으로 강등시키는 등 이적을 압박했으나, 보하르더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약을 만료할 때까지 팀에 잔류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AFC 아약스에서의 꾸준한 활약 덕분에, 빈스톤 보하르더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어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총 20경기에 출전했다.
보하르더는 UEFA 유로 1996 대회에 참가하여 선발 선수로 활약했다. 또한 1998년 FIFA 월드컵에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나, 이 대회에서는 주로 아르튀르 뉘만의 후보 선수로 출전했다.
1998년 월드컵 준결승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선발 출전할 기회를 잡았다. 이는 주전 선수였던 아르튀르 뉘만이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8강전에서 경고 누적으로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하르더는 브라질전을 앞둔 훈련 도중 정강뼈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결국 이 중요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의 대체자로는 필립 코퀴가 낙점되었다.
4. 지도자 경력
2005년 11월 8일, 34세의 나이로 빈스톤 보하르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의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그는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2017년 여름, 그는 친정팀인 AFC 아약스로 복귀하여 전 동료 마이컬 레이지허르가 이끄는 용 아약스 (2군 팀)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2017년 12월 22일, 레이지허르가 1군 감독인 마르셀 케이저르의 해임으로 인해 임시 감독을 맡게 되자, 보하르더는 FC 폴렌담과의 경기에서 2군 감독을 대행하여 팀을 7-0 대승으로 이끌었다.
2020년 3월, 보하르더는 크리스티안 포울센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면서 에릭 텐 하흐 1군 감독의 요청으로 1군 코치진에 임시로 합류했다. 이후 SC 헤이렌베인과의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면서 그는 정식으로 1군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1군 수석 코치로서 3년 계약을 체결하며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2022년 6월 1일, 우승팀이었던 아약스는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보하르더와 결별하기로 결정했다.
5. 개인사
빈스톤 보하르더의 조카들인 멜라이로 보하르더와 라마러 보하르더 또한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네덜란드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 뛴 경험이 있다.
6. 수상 경력
빈스톤 보하르더는 선수 경력 동안 AFC 아약스와 FC 바르셀로나에서 여러 주요 타이틀을 획득했다.
- AFC 아약스
- 에레디비시: 1994-95, 1995-96
- 요한 크라위프 스할: 1995
- UEFA 챔피언스리그: 1994-95
- 인터콘티넨털컵: 1995
- UEFA 슈퍼컵: 1995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1997-98, 1998-99
- 코파 델 레이: 1997-98
- UEFA 슈퍼컵: 1997
7. 비판 및 논란
빈스톤 보하르더의 선수 경력 중 가장 큰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기는 첼시 FC에서의 4년간의 계약 기간이었다. 그는 2000년 첼시에 입단하며 주당 4.00 만 GBP에 달하는 매우 높은 주급을 받는 계약을 체결했으나, 이 기간 동안 단 11경기에만 출전하는 극히 낮은 출전율을 보였다. 특히 마지막 세 시즌 동안은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첼시 구단은 그의 높은 주급 부담과 낮은 기여도 때문에 그를 매각하려 했으며, 심지어는 2군 및 유소년팀으로 강등시켜 이적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하르더는 구단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영국 언론의 비판에 대해 보하르더는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응수하며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미 내 손에 들어온 1500.00 만 EUR를 왜 버려야 하는가? 내가 계약서에 서명했을 때, 그것은 사실상 내 돈, 내 계약이었다. 양측이 전적으로 동의했다. 더 적은 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내 과거를 이해해야 내가 왜 그러지 않는지 알 것이다. 어릴 적 가난했고, 쓸 돈도 놀 것도 없었다. 이 세상은 돈에 관한 것이므로, 그런 수백만 유로를 제안받으면 당연히 받아야 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그런 행운을 잡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악의 영입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발언과 낮은 출전율 대비 높은 연봉 수령은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야기했으며, 축구계에서 '돈을 위해 계약을 끝까지 지킨 선수'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