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볼프람 지퍼스는 1905년 프로이센 왕국 하노버 주 힐데스하임(현재 니더작센주에 위치)에서 개신교 교회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하프시코드, 오르간, 피아노를 연주했고 독일 바로크 음악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학생 시절부터 반유대주의 단체인 Deutschvölkischer Schutz- und Trutzbund독일어에서 활동하다가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교에서 역사, 철학, 종교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판매원으로 일했다. 그는 독일 청년 운동의 일원이었으며, 민족주의적인 '대지로 돌아가기 운동'을 표방하는 Artamanen-Gesellschaft독일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2. 나치당 및 SS 가입
지퍼스는 1929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3년에는 하인리히 힘러가 테우토부르크 숲의 엑스텔른슈타인 연구를 위해 설립한 Externsteine-Stiftung독일어("엑스텔른슈타인 재단")의 수장을 맡았다. 1935년 SS에 합류한 그는 같은 해 힘러에 의해 아넨에르베의 총사령관(Reichsgeschäftsführer독일어)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넨에르베의 실제 운영을 총괄했으며, 종전 무렵에는 SS-상급지도자 계급까지 승진했다.
3. 아넨에르베에서의 역할
볼프람 지퍼스는 하인리히 힘러가 설립한 아넨에르베의 사무총장으로서 조직 내에서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아넨에르베는 표면적으로는 고고학 및 오컬트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나치즘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의사 과학적 연구와 잔혹한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 지퍼스는 아넨에르베의 총재가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모든 실무를 사실상 전적으로 지휘했다.
3.1. 엑스텔른슈타인 재단
지퍼스는 1933년 하인리히 힘러가 테우토부르크 숲에 있는 엑스텔른슈타인의 연구를 위해 설립한 Externsteine-Stiftung독일어("엑스텔른슈타인 재단")을 이끌었다. 이 재단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고대 게르만족의 유적 연구를 명분으로 삼았다.
3.2. 군사과학연구소 소장
1943년, 지퍼스는 Institut für Wehrwissenschaftliche Zweckforschung독일어("군사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연구소는 아넨에르베의 산하 기관으로, 광범위한 인체 실험을 수행했다. 지퍼스는 이 연구소의 최고 행정 책임자로서 범죄적인 실험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조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4. 전쟁 범죄 및 인체 실험
볼프람 지퍼스는 나치 독일 시대 동안 자행된 의료적 잔혹 행위와 인체 실험에 직접적으로 깊이 연루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아넨에르베 산하의 연구소들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
4.1. 아우구스트 히르트의 인골 수집과 유대인 희생
지퍼스는 스트라스부르 라이히 대학교의 아우구스트 히르트 교수의 연구를 위해 두개골과 골격을 수집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112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사진 촬영과 인류학적 측정 과정을 거친 후 살해되었으며, 이들의 유해는 히르트의 인종 연구를 위한 "골격 수집"에 사용되었다. 지퍼스는 이러한 끔찍한 인골 수집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홀로코스트의 잔혹한 면모를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5. 재판 및 처형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볼프람 지퍼스는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중 하나인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의 피고인으로 기소되었다.
5.1.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지퍼스는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나치 푸른 수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언론인 윌리엄 L. 시러가 그의 짙고 검은 수염 때문에 붙인 별명이었다. 검찰은 아넨에르베의 일부로 설립된 군사과학연구소에서 수행된 인체 실험에 대한 책임을 아넨에르베에 물었으며, 지퍼스는 그 최고 행정 책임자로서 범죄적인 실험을 적극적으로 돕고 조장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국제군사재판에 의해 범죄 조직으로 선언된 SS의 일원이었으며,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았다. 지퍼스는 자신의 변론에서 1933년부터 아돌프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를 암살하려던 반나치 저항 운동의 일원이었으며, 힘러에게 접근하여 그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아넨에르베 총사령관 직책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나치 정권 전복에 도움이 될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저항 운동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그 직책에 남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5.2. 유죄 판결 및 사형
지퍼스는 1947년 8월 20일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48년 6월 2일, 바이에른주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6. 영향
러시아의 극우 정치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은 1980년대에 볼프람 지퍼스의 이름을 따서 "한스 지퍼스"라는 페르소나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