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짧지만 격동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의 생애는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정권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1.1. 유년기 및 교육
보르헤르트는 함부르크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리츠 보르헤르트는 교사이자 다다이즘 잡지 붉은 지구(Die Rote Erde디 로테 에어데독일어)의 발행인이었고, 어머니 헤르타 보르헤르트는 함부르크 라디오에서 활동하며 방언 시로 유명했던 작가였다. 보르헤르트의 가족은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이었으며, 함부르크의 지식인 사교계에서 활발히 교류했다. 보르헤르트는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던 히틀러 청소년단 활동을 몹시 싫어했으며, 모임 불참으로 인해 결국 탈퇴할 수 있었다. 그는 15세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실업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1940년 함부르크 그로세 블라이헨에 위치한 C. 보위젠 서점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1.2. 전전 활동 및 저항
보르헤르트는 견습 기간 동안 동료들에게 반나치주의 시를 돌리곤 했다。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의 전전 작품들, 예컨대 요릭, 바보(Yorrick, der Narr요릭, 데어 나르독일어), 그란벨라! 검은 추기경(Granvella! Der schwarze Kardinal그란벨라! 데어 슈바르체 카르디날독일어), 치즈 가게(Der Käseladen데어 캐제라덴독일어) 등을 통해 나치 독재에 저항했다. 이 작품들은 과거를 배경으로 개인과 국가 권력 간의 투쟁을 그렸다. 1940년 4월,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다. 서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부모님 몰래 연기 수업을 들었으며, 1941년에는 견습 생활을 조기에 그만두었다. 1941년 3월 21일, 연기 시험에 합격한 후 그는 뤼네부르크에 기반을 둔 순회 레퍼토리 극단인 란데스뷔네 오스트-하노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막 시작된 연극 경력은 1941년 6월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면서 단절되었다.
1.3. 군 복무 및 투옥
보르헤르트는 동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했다. 그는 전투에서의 수많은 사상자와 추위, 굶주림, 불충분한 장비로 인한 피해를 목격했다. 1942년 2월 23일, 러시아 전선에서 보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왼손 중지 손가락을 잃었다. 그는 러시아 병사를 기습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소총이 발사되어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상급 장교는 그가 군 복무를 회피하기 위해 자해를 시도했다고 비난하며 그를 체포하고 독방에 가두었다. 재판에서 군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보르헤르트의 진술을 믿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정권에 반하는 발언을 한 혐의로 하이므튀케게제츠(Heimtückegesetz하이므튀케게제츠독일어)라는 반체제적 언행에 대한 법률에 따라 재차 체포되었다. 그는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발언"을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6주간의 엄중한 구금형을 선고받은 뒤, "전선에서 자신을 증명하라"는 지시와 함께 동부 전선으로 다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동상과 간염을 여러 차례 앓았고, 그 결과 의학적 휴가를 받았다. 휴가 중 그는 이미 폭격으로 폐허가 된 함부르크의 나이트클럽에서 다시 연기를 했다. 이후 병영으로 돌아와 육군 극단으로의 전속을 성공적으로 신청했다.
그는 코블렌츠의 임시 수용소로 전속되었으나, 1943년 11월 30일 저녁 기숙사에서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풍자하는 이야기를 다시 풀어놓았다. 기숙사의 다른 병사 중 한 명의 고발로 인해 보르헤르트는 체포되었고, 1944년 8월 21일 9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 집행은 종전 시점까지 유예되어 그는 다시 군대에 복귀했으며, 주로 예나의 병영에서 시간을 보낸 후 1945년 3월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주변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부대는 1945년 3월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전쟁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보르헤르트와 다른 병사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탈출했고, 이후 약 595456 m (370 mile)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함부르크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함부르크가 영국군에 항복한 지 일주일 후인 5월 10일 완전히 지친 상태로 도착했다.
1.4. 전후 활동과 말년
전쟁 후 보르헤르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1946년 한 의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보르헤르트가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르헤르트 본인에게는 이 예후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연극 활동을 재개하고 계속 글을 썼다. 그는 짧은 산문들을 썼고, 1946년 12월에는 14편의 시를 수록한 시집 가로등, 밤과 별(Laterne, Nacht und Sterne라테르네, 나흐트 운트 슈테르네독일어)을 출판했다. 1946년 12월 또는 1947년 1월에 그는 희곡 문 밖에서를 집필했다. 이 희곡은 출판되기도 전인 1947년 2월 13일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되어 큰 호평을 받았으며, 이후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희곡은 서독의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반복적으로 방송되었다. 1946년에 26편, 이듬해에는 21편의 산문(대부분 단편 소설)을 썼으며, 1947년에는 산문집 민들레(Die Hundeblume디 훈데블루메독일어)와 이 화요일에(An diesem Dienstag안 디젬 딘스타크독일어)가 출판되었다. 1947년 9월, 그는 스위스 바젤의 한 요양소로 간 질환 치료를 위해 입원했으나, 이미 간 질환이 치료 불가능한 수준으로 진행된 상태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단편 소설들을 계속 썼고, 죽기 직전에는 반전 선언문인 그렇다면 오직 한 가지만!(Dann gibt es nur eins!단 기프트 에스 누어 아인스!독일어)을 집필했다.
1.5. 사망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1947년 11월 20일 바젤의 병원에서 간 부전으로 사망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활동은 그렇다면 오직 한 가지만!이었다. 함부르크 극장에서 문 밖에서가 초연된 것은 그의 사망 다음 날이었다.
2. 문학 작품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시, 산문, 희곡 등 다양한 형태의 문학 작품을 통해 전쟁과 전후 독일 사회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2.1. 시
보르헤르트는 10대 중반부터 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시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슈테판 게오르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유명 시인들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었다. 특히 릴케는 그의 롤모델이었으며, 릴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한때 자신의 작품에 "볼프 마리아 보르헤르트"라고 서명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시인들에게서 예술적 충족감을 얻었으며, 예를 들어 군대에 입대해야 했을 때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폴 베를렌, 알프레드 드 뮈세, 프리드리히 실러,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작품들을 읽으며 예술에 대한 갈증을 표현했다.
보르헤르트에게 시를 쓰는 것은 산문보다 더 쉬웠다. 그는 하루에 5편에서 10편 정도의 시를 쓸 정도로 왕성한 시 창작률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아버지가 검토했는데, 볼프강은 이를 지지로 여겼다. 그는 이후 어떤 결과가 있든 필요할 때마다 시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보르헤르트의 글은 작품의 질보다는 시를 창작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충족감에 더 관심을 보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그가 자신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배우가 된 극장 활동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알리네 부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듣는 것보다 그 글이 그녀를 기쁘게 했는지 여부를 묻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보르헤르트의 작품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배포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다른 이유들과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볼프강의 작품이 널리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저 내보내야 할 자기표현의 필요성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지만 저는 얼마 전부터 제 시를 잃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수천 편(점점 그렇게 많아질 것입니다) 중에서 겨우 두세 편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남는다면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전히 형편없는 시들을 계속 쓰는 것은 단지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성장하면서 볼프강은 그 당시와 관련 없는 많은 시들을 파괴하며 자신의 창작물을 정화했다. 볼프강의 눈에는 남아있는 시들의 질이 그리 높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시 중 남아있는 것들은 주로 알리네 부스만, 루스 하거, 칼 알베르트 랑게, 휴고 자이커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들은 출판될 의도가 없었거나, 적어도 보르헤르트는 그렇게 의도했다. 그러나 1960년에 그의 어머니 헤르타 보르헤르트와 미국인 스탠리 츠코프가 약 200편의 시를 모아 출판하려 했으나, 실제로 출판된 것은 1996년 나의 그림자와 달과 단둘이(Allein mit meinem Schatten und dem Mond알라인 미트 마이넴 샤텐 운트 뎀 몬트독일어)라는 제목의 볼프강 보르헤르트 시 선집이 출간되면서였다.
볼프강의 시를 비평적으로 연구할 때는 그가 출판을 인정한 후기 작품들만 연구해야 한다. 이는 그의 시들이 대부분 특정 사건이나 특정 인물을 위해 쓰인 일시적인 문학 작품이었고, 그의 초기 시들은 젊은 시절에 쓰였기 때문이다. 그의 장시 중 하나인 가로등, 밤과 별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등대가 되고 싶다
밤과 바람 속에서 -
대구와 빙어를 위해 -
어떤 배든 -
하지만 나 자신은
난파선이다!
2.2. 산문
보르헤르트의 산문은 대부분 짧은 단편 소설(독일어로 '掌編小説'로도 불림) 형태로, 그의 문학 스타일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냈다. 전쟁을 겪으며 얻은 경험은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으며, 그의 작품은 그가 겪었던 트라우마를 그대로 반영한다. 보르헤르트의 글에서 나타나는 전쟁과 전후 시대에 대한 집착은 전선에서의 기억, 전쟁 포로로서의 삶, 파괴된 독일로 돌아온 병사의 모습, 그리고 황폐한 전쟁 이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의 글은 갑작스럽고 파편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기억에 남을 만한 특정 인물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즉, 그는 사회나 국가가 부여한 라벨 없이 사람과 사물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자신, 부모님 또는 다른 어떤 사람과 같은 특정 인물을 제시하는 대신 '남자들', '병사들', 또는 '과부들'과 같이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한다. 이러한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고통을 느꼈으며, 이는 그가 단순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도달한 인도주의적 성공을 보여준다. 그가 사용한 기본적인 언어는 전쟁 시기에 사람들이 겪었던, 그리고 그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라는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산문 작품으로는 세 명의 어두운 왕(Die drei dunklen Könige디 드라이 둥켈렌 쾨니게독일어), 이 화요일에, 민들레, 빵(Das Brot다스 브로트독일어), 밤에는 쥐들도 잠든다(Nachts schlafen die Ratten doch나흐츠 슐라펜 디 라텐 도흐독일어), 체리(Die Kirschen디 키르셴독일어), 아주 길고 긴 길을 따라서(Die lange lange Strasse lang디 랑게 랑게 슈트라세 랑독일어) 등이 있다.
특히 단편 소설 부엌 시계(Die Küchenuhr디 퀴헨우어독일어)는 트라우마 문학의 훌륭한 예시로, 그는 이 이야기에서 시계를 어머니와 잃어버린 가족을 상기시키는 은유로 사용했다. 이야기 속에서 돌아온 병사는 "그는 자신의 시계를 보며 생각에 잠겨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선생님, 아니오, 그 점에서는 틀리셨어요. 폭탄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계속 폭탄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세요. 아니오. 새벽 2시 30분에. 밤에요. 거의 항상 2시 30분에요. 바로 그거에요..."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인물은 익명으로 묘사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시계"를 가졌고 그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3. 희곡: 문 밖에서
문 밖에서는 1946년 12월 또는 1947년 1월에 집필되었다. 이 작품은 "돌아온 병사의 비극"으로, 희망 없는 허무주의적 주제를 담고 있다. 이 희곡은 아무것도 살 가치가 없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음을 강조하며, 죄책감의 냄새가 모든 곳에 퍼져 있고 그 죄책감의 가장 큰 몫은 신의 죄책감이라고 말한다. 운명에 대한 관용이나 수용은 없었다. 이는 보르헤르트가 내면에서 느꼈던 감정과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고자 했던 방식을 묘사한다. 그는 단절된 사건들을 조각난 거울처럼 제시하여 관객이 그것을 관람하는 대신 느끼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보르헤르트의 글에는 그가 겪어야 했던 강렬한 경험 때문에 일반적인 이야기 서술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보르헤르트의 이야기들이 절망, 죄책감, 고독, 그리고 믿음과 의지의 결여라는 단편들로 나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전쟁 경험으로 인해 산만해진 정신, 흔들리는 영혼, 그리고 뒤죽박죽된 감정들 때문에 야기되었다. 문 밖에서는 출판되기도 전인 1947년 2월 13일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서독의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반복적으로 방송되면서 보르헤르트의 이름을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연극으로는 그의 사망 다음 날인 1947년 11월 21일 함부르크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전후 독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폐허 속에서 비상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유일한 연극으로 평가받는다.
3. 문학적 스타일 및 사상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학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전쟁 경험이 녹아든 독특한 스타일과 깊은 사상을 담고 있다.
3.1. 전쟁 경험의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중 겪었던 트라우마와 고통은 보르헤르트의 문학 스타일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전선에서의 기억, 전쟁 포로로서의 삶, 파괴된 독일로 돌아온 병사의 현실, 그리고 황폐한 전쟁 이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글을 갑작스럽고 파편적인 이미지들로 채웠으며, 파편적이고 절망적인 묘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3.2. 스타일의 특징
보르헤르트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문체는 다음과 같다.
- 단절적이고 파편적인 서술**: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단절된 사건들을 조각난 거울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전쟁 경험으로 인한 산만해진 정신, 흔들리는 영혼, 그리고 뒤죽박죽된 감정들을 반영한다.
- 익명화된 인물 묘사**: 그는 특정 개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대신 '남자들', '병사들', '과부들'과 같이 보편적인 명칭으로 인물들을 묘사한다. 이러한 익명성은 독자들이 특정 인물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도록 이끌어 인도주의적 성공을 거두었다.
- 간결한 언어 사용**: 그가 사용한 기본적인 언어는 전쟁 시기에 사람들이 겪었던, 그리고 그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라는 원하는 메시지를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 절망감과 죄의식의 강조**: 그의 작품은 절망, 죄책감, 고독, 그리고 믿음과 의지의 결여라는 단편들로 나뉘어 있으며, 특히 '문 밖에서'에서는 아무것도 살 가치가 없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허무주의적 주제가 강조된다.
3.3. 주요 주제 및 철학
보르헤르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핵심적인 주제와 그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허무주의**: 그의 대표작 문 밖에서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아무것도 살 가치가 없으며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절망적인 인식이 나타난다. 죄책감, 심지어 신의 죄책감까지도 이야기되며, 운명에 대한 관용이나 수용이 부재하다.
- 인간의 조건과 인간성**: 그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과 본질적인 인간성에 대해 질문하며, 고통받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 죄의식과 절망감**: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깊은 죄의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가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이는 전후 '잃어버린 세대'의 심리를 대변한다.
3.4. 문학적 영향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여러 문학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는 은유, 환유, 그리고 모순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보르헤르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글에 많은 은유를 활용하게 했다. 예를 들어, 보르헤르트의 단편 소설 부엌 시계에서 그는 시계를 어머니와 잃어버린 가족을 상기시키는 은유로 사용했다. 이는 트라우마 문학과의 큰 유사성을 보여준다.
- 프리드리히 횔덜린: 횔덜린은 인물과 장소에 알려진 이름 대신 상징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보르헤르트에게 영감을 주었다. 부엌 시계에서도 보르헤르트는 인물들을 묘사할 때 상징을 사용한다.
- 월트 휘트먼: 보르헤르트는 다른 나라의 시인들의 작품도 즐겨 읽는 독서가였다. 그는 미국의 남북 전쟁 시인 월트 휘트먼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보르헤르트의 가로등, 밤과 별은 휘트먼의 청춘, 노년, 그리고 밤(youth, old age, and night유스, 올드 에이지, 앤드 나이트영어)과 매우 유사하다. 이 두 작품은 추위, 굶주림, 그리고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서 있는 것과 섞인 불면증과 어둠이라는 동일한 이미지를 공유한다.
4. 유산과 평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작품은 그의 사망 이후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전후 독일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4.1. 사후의 인정과 영향
보르헤르트의 작품은 전후 독일 시기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오늘날까지 독일 학교에서 연구되고 있다. 전쟁 경험이 그의 글에 '영원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최고의 전쟁 문학"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는 잔해 문학(Trümmerliteratur) 운동의 대표 작가로서 전후 독일 문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고통받는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의 희곡 문 밖에서는 '잃어버린 세대'의 고발인 복원병극으로 불리며, 전후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비상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극이었다.
4.2. 국제적 확산 및 연구
보르헤르트의 작품은 이후 국경을 넘어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특히 영어로 많이 번역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희곡 문 밖에서는 1952년 데이비드 포터에 의해 처음 영어로 번역되었으나, 이 번역본은 원작의 예술적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영국인 프로듀서 토마스 피셔가 이 희곡을 다시 번역하여 1998년 런던 게이트 극장에서 상연했다. 보르헤르트 작품의 번역은 외국인들이 그의 시와 단편 소설에 훌륭하게 제시된 트라우마 문학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1988년, 볼프강 보르헤르트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일단의 사람들이 국제 볼프강 보르헤르트 학회(International Wolfgang-Borchert Society인터내셔널 볼프강 보르헤르트 소사이어티영어)를 설립했다. 이 학회는 보르헤르트의 글에 대한 연구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주요 작품 목록
- Die drei dunklen Könige (세 명의 어두운 왕) (1946)
- An diesem Dienstag (이 화요일에) (1946)
- Die Hundeblume (민들레) (1946)
- Das Brot (빵) (1946)
- Draußen vor der Tür (문 밖에서) (1946)
- Nachts schlafen die Ratten doch (밤에는 쥐들도 잠든다) (1947)
- Die Kirschen (체리) (1947)
- Dann gibt es nur eins! (그렇다면 오직 한 가지만!) (1947)
- Die lange lange Strasse lang (아주 길고 긴 길을 따라서) (1947)
- Laterne, Nacht und Sterne (가로등, 밤과 별) (시집, 1946년 12월)
- Allein mit meinem Schatten und dem Mond (나의 그림자와 달과 단둘이) (시집, 1996년 출판)
6. 한국어 번역본
- 박규호 옮김,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 볼프강 보르헤르트 전집》, 문학과지성사, 2020년 3월 30일
- 작가의 모든 작품, 즉 시, 소설, 희곡, 에세이, 서평, 그 밖의 산문 등 모두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