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출생과 가족
미래의 복드 칸은 1869년 10월 13일, 청나라 쓰촨성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리탕현 지역의 티베트 관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아그바안 루브산 초이지냠 단잔 반추그(Богд Живзундамба Агваанлувсанчойжинямданзанванчүг몽골어)이다. 그의 아버지 곤치크세렌은 달라이 라마 12세 궁정의 회계 담당자였으며, 어머니는 오이도브둘람이었다. 그는 세 명의 형제를 두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출생 연도를 1870년 또는 1870년대 초로 기록하기도 하며, 티베트어 초기 전기에는 1869년 음력 8월에 라싸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는 유아기를 후허하오터와 라싸에서 보냈다.
1.2. 종교적 인정과 몽골 이주
그는 4세 때 제8대 제쯋담바 후툭투의 환생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이 인정은 포탈라궁에서 달라이 라마 13세와 판첸 라마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1874년(그가 5세였을 때) 그는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당시 우르가)로 이주했으며, 이후 줄곧 몽골에서 거주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1875년 말에 가족과 함께 이흐 후레(이흐 후레)에 도착했다고도 한다. 그는 다쿠룬에 도착하여 간덴사에서 즉위했다. 어린 시절부터 청나라 관리들의 음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몽골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캠페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몽골의 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라마들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라마들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칭기즈 칸의 위대한 몽골 제국을 복원하거나, 적어도 몽골을 중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자립하려는 열망을 가졌다. 그는 귀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사랑받았다. 그는 티베트나 중국으로부터 몽골에 대한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총명하고 독립적인 통치자였다.
2. 종교 지도력

제8대 제쯋담바 후툭투로서 복드 칸은 티베트 불교 계층에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다음으로 세 번째로 중요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복도 라마"로도 불렸다. 17세기 몽골의 왕자 자나바자르가 초난파 학자 타라나타의 환생자로 인정받고 이후 겔룩파로 개종하면서 시작된 제쯋담바 후툭투의 계보는 역대 몽골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특히 제3대 제쯋담바 후툭투 이후의 환생자들은 청나라에 대한 충성도를 고려하여 티베트인 중에서 선발되었다.
그는 몽골 내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0년 군왕 도르지파람과 대립했을 때, 광서제는 제쯋담바를 지지하여 군왕의 작위를 박탈했다가 제쯋담바의 탄원으로 다시 돌려주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왕공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권력 행사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일부 적들은 신성모독죄로 처형되기도 했다. 폴란드 여행가 페르디난트 안토니 오센도프스키는 그가 "왕자들과 칸들의 모든 생각, 모든 움직임, 그에 대한 사소한 음모까지도 알고 있었으며, 범죄자는 대개 친절하게 우르가로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오센도프스키의 주장은 그의 저서와 원고를 비교 분석한 결과 확인되지 않았다.
복드 칸은 우르가에 주둔한 청나라 행정부와 여러 차례 대립했다. 1882년 그는 광서제에게 서한을 보내, 중국 상인들이 우르가 수도를 떠나지 않으면 수도를 에르데니 주로 옮기겠다고 통보했다. 청나라 관리들은 그의 요구를 수용하여 상인들에게 사원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청나라 지방 관리인 더링의 세금 인상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그를 접견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더링은 베이징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사임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1900년대 초반, 청나라 황실 정부의 통제력 강화에 맞서 몽골 불교의 강력한 새 지도자로서 복드 칸의 위상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3. 몽골의 독립과 통치
3.1. 몽골 독립 운동
청나라의 통치에 불만을 품던 몽골의 노얀과 귀족들은 독립을 추진했다. 1903년 청나라 조정은 중국인들이 외몽골을 탐험하고 광산을 개발, 채굴하도록 장려하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으며, 몽골의 구 행정 제도를 폐지하고 외몽골을 지방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외몽골에 대한 청나라의 광산 개발, 채굴 및 새 토지 정책은 몽골인들의 이익을 침해했고 많은 몽골인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투시예트칸부 부족의 왕자 혼도 도르지 등은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의 티베트 침공으로 인해 달라이 라마 13세는 러시아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라싸에서 그레이트 쿨룬으로 도피했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다쿠룬에 1년 이상 피신하면서 간덴사원에 머물며 제8대 제쯋담바 후툭투를 여러 차례 만났다. 할하에 주둔하는 러시아 국경 관리들의 보고에 따르면 이때 달라이 라마는 제쯋담바를 만났고 몽골인 후툭투, 고위 라마 및 왕자들과 중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한다.
1911년 봄, 퇴그스-오치린 남난수렌 왕자를 포함한 일부 저명한 몽골 귀족들은 제쯋담바 후툭투를 설득하여 독립을 논의하기 위한 귀족 및 성직자 회의를 소집했다. 후툭투는 이에 동의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는 종교 축제를 핑계로 삼았으며, 이때 모인 지도자들은 호슈운 간 세금 재분배의 필요성을 논의했다. 회의는 7월 10일에 열렸고 몽골인들은 독립을 논의했다. 회의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부는 완전한 저항을, 다른 일부는 부분적인 저항을 주장했다. 18명의 귀족들은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우르가 외곽의 언덕에서 비밀리에 만나 몽골이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후툭투를 설득하여 세 명의 저명한 대표자(세속 귀족, 성직자, 평민 관리)로 구성된 대표단을 러시아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된 대표단의 특정 구성은 임무에 국가적 합의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3.2. 복드 칸국 수립과 즉위
1911년 10월 신해혁명을 계기로 몽골의 노얀과 귀족들은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1911년 12월 29일,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몽골 귀족들은 지도자로 제쯋담바 복드를 추대했다. 12월 1일, 할하 임시 정부는 제쯋담바 후툭투 아래 신정 정권 수립을 알리는 일반 선언문을 발표했다. 12월 29일, 후툭투는 새로운 몽골 국가의 복드 칸으로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몽골의 왕공족들은 그를 몽골어로 칭할 때 복드 칸이라 칭했다. 그는 황제로서 조령, 칙령을 내릴 때는 공문서에 황제라고 지칭하였다. 한자식 존호는 일광황제(日光皇帝)이다.
그는 1911년 12월 29일부터 1919년 12월 29일까지 복드 칸국의 황제로 재위하였고, 1919년 12월 29일부터 1921년 12월 29일까지 몽골 국가원수로 재임하였으며, 1921년 12월 29일부터 1924년 5월 20일 병사할 때까지 몽골 국가주석을 역임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몽골은 공대(共戴몽골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1912년에는 내몽골의 제후들도 그에게 귀순하여 남부 변경 안무대신을 설치했으며, 1913년 1월에는 내몽골에 군대를 파견하여 제정 러시아의 요청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내외 몽골의 통일을 획책했다.
3.3. 통치 기간과 정치적 시련
복드 칸은 1919년 중국의 지배가 복원되면서 권력을 잃었다. 투시예투 칸 아이막의 다르친 친 왕자는 중국의 통치를 지지했으며, 그의 동생 체왕은 로만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을 지지했다. 1919년 8월 중화민국 북양정부는 몽골이 중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고, 11월 7일 북양정부 총통 쉬스창, 총리 돤치루이는 장군 쉬슈 등을 외몽골 원정군으로 파병했다. 북양정부군은 복드 칸을 유궁에 감금했다. 11월 17일 쉬슈는 중국 정부의 64개 조항을 강요했고, 11월 22일 쉬스창은 몽골의 자치권 취소를 선언했다.
웅게른 남작의 군대가 1920년 말 우르가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을 때, 복드 칸은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이후 웅게른 남작이 1921년 우르가를 점령하기 직전, 복드 칸은 그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1921년 예비역 소비에트 육군 중장 로만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가 울란바토르를 장악하고 중국 북양 군벌을 몰아냈다. 1921년 6월 30일부터 1921년 9월 15일까지 스테른베르크가 몽골 자치과도정부국 대리 집정 황제를 역임했는데, 이 와중에 냉궁에 연금되었던 복드 칸은 유폐된 냉궁에서 재기 세력을 규합하여 1921년 9월 15일 역쿠데타를 일으켜 스테른베르크 몽골 대리 집정 황제를 주살하고 몽골 국가원수에 재집권했다. 그러나 웅게른 남작의 폭정으로 인해 인심이 이반하고, 같은 해 4월 복드 칸이 베이징에 지원을 요청했을 무렵, 담딘 수흐바타르가 이끄는 몽골 인민혁명이 발생했다. 복드 칸은 1924년 사망할 때까지 제한된 군주제 하에 왕위에 머무는 것이 허용되었다.
3.4. 몽골 인민당과의 관계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남난수렌은 적군과 접촉하여 협력을 구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혁명 이후, 복드 칸은 몽골 인민당의 명예고문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21년 12월 16일 몽골 인민당 명예고문위원장에 취임했고, 1921년 12월 29일 몽골 자치과도정부국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24년 2월 29일 몽골 인민당 명예고문위원장 직위 사퇴 및 몽골 인민당 탈당을 선언했으며, 그 후로는 무소속 신분으로 몽골 자치과도정부국 국가주석으로 재임했다.
4. 개인적인 삶
4.1. 결혼과 가족

복드 칸은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첸딘 돈독둘람(Tsendiin Dondogdulam영어)이라는 이름의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녀는 에헤 다기나(다키니 어머니)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1895년 7년 연하의 첸딘 돈독둘람을 만나 7년 연애 끝에 1902년 그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다. 그러나 1904년 출생한 복드 칸 부부의 아들은 1912년 복드 칸국 황태자 책봉 대세에도 올랐지만, 황태자 책봉이 단행되기 전인 1913년에 갑작스럽게 병으로 향년 9세로 사망했다.
첸딘 돈독둘람 왕비는 5년간 병을 앓다가 1923년 4월 30일에 사망했다. 첸딘 돈독둘람 왕비의 사망 후, 북방 출신의 게네필(Genepil영어)이라는 여성이 왕비로 선택되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1924년 복드 칸이 사망했다. 이후 게네필은 친정으로 돌아가 생활했지만, 몽골 인민공화국의 스탈린주의 숙청으로 인해 1938년에 처형되었다.
5. 사상과 발언
복드 칸은 중국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건조한 대지에 씨앗을 뿌려 초원을 사막으로 바꾸는 중국인들은 생태계 파괴자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지키고 불구대천의 적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초원에 침입한 중국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중국인과 어울리지 마라! 중국인을 흉내 내면 죽을 것이다. 몽골 각지에 들어와 초원을 개간하여 대지를 누렇게 만들어버린 중국인들을 섬멸하자. 남쪽으로 준마를 몰아 공격해 나가자."
6. 논란과 비판
복드 칸은 몽골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캠페인 대상이 되었으며, 그가 다작의 독살자, 소아성애자, 그리고 방탕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소설 및 비과학적인 문헌(예: 제임스 팔머)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러나 몽골 및 러시아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7. 사망과 사후
7.1. 사망
복드 칸은 몽골 자치과도정부국 국가주석으로 재임 중이던 1924년 5월 20일, 울란바토르의 한 굴룬에서 향년 55세로 병사했다. 사망 당시 그의 공식 사망 원인은 암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의 사주를 받은 할하부 출신의 공산주의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7.2. 사후 정부 조치 및 환생 문제
복드 칸 사망 후, 정부는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라 복드 칸의 인장을 접수했다. 복드 칸 사망 직후 발링긴 체렌도리 몽골 총리가 1924년 5월 20일부터 1924년 11월 24일까지 몽골 국가원수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그의 사후,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의 추종자들이 이끄는 몽골 혁명 정부는 더 이상 활불의 환생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몽골 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같은 해 몽골에서는 제쯋담바 후툭투의 환생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전통적인 환생자 결정 절차는 진행되지 않았다. 1925년에도 또 다른 소문이 나타났다. 1926년 11월 몽골 인민공화국 제3차 대후랄은 복드 게게엔의 환생자 탐색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특별 결의안을 승인했다. 최종적인 금지 조치는 1928년 몽골 인민당 제7차 대회와 제5차 인민대후랄에서 승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제쯋담바 후툭투의 환생자는 1932년 라싸에서 태어난 소년으로 티베트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소련의 해체와 몽골의 1990년 몽골 민주화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제9대 제쯋담바 후툭투는 1991년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에 의해 다람살라에서, 그리고 1999년 울란바토르에서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권은 제8대 복드 칸에 얽힌 전승을 이용하여 "제8대를 끝으로 이 후툭투는 환생을 마친다"고 설명하며 후계자 수색 및 인정을 금지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 국내 신자들과 티베트에서 독자적으로 환생자를 찾는 움직임이 있었다. 몽골 국내에서는 1926년 제쯋담바 8세의 전 측근 요든이 복드 칸 올 아이막의 노용 올 호쇼의 한 부인 체렌자브의 아들을 8세의 환생자로 옹립하려 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권은 국내의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티베트의 간덴포탕 섭정 정부의 인정(1939년)은 막지 못했다. 이때 인정된 제9대 제쯋담바 후툭투는 사회주의 일당 독재 체제가 붕괴된 후 1990년 당시 폰살마깅 오치르바트 대통령의 조회에 대해 티베트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세가 다시 제9대 제쯋담바 후툭투로 인정했다. 그는 말년에 몽골 국적을 취득하고 몽골과 인도를 오가며 생활하다 2012년 3월 1일에 입적했다.
8. 유산과 거주지
8.1. 주요 거주지

그린 궁전, 옐로 궁전, 브라운 궁전, 화이트 궁전은 우르가(울란바토르)에 있던 복드 칸의 네 가지 주요 거주지였다. 이 중 그린 궁전은 잘 보존되어 현재 울란바토르의 관광 명소이자 복드 칸 궁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복드 칸의 여름 궁전 터에는 현재 정부 궁전이 세워져 있다.
8.2. 역사적 평가 및 영향
복드 칸의 통치와 활동은 몽골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이끌고 근대 몽골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지도력은 몽골 민족주의의 부흥과 독립 국가 건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중국의 재점령, 웅게른 남작의 개입, 그리고 몽골 인민혁명 등 격동의 시기였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시련 속에서 몽골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제한된 군주제로 전환되었고, 사후에는 몽골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몽골 인민공화국 정부는 활불 환생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며 종교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드 칸은 몽골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 국가 건설 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