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는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나 법률 전문가이자 종교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 가족 및 종교적 배경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는 1956년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스트루미차 근교 마을에서 감리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 성장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념은 그의 초기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정부 시절에는 그의 종교 활동으로 인해 한동안 외딴 마을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의 연합감리교회와 연계된 코차니의 가난한 롬족 회중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그는 12년 이상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감리교 청소년 비서로 봉사했으며, 이후 마케도니아 복음주의 감리교회 교회 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8년부터는 마케도니아 감리교회와 영국 버크햄스테드 및 헤멜 헴프스테드 감리교회 간의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91년에는 영국 본머스에 있는 기독교 어학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1.2. 학력 및 법률 경력
트라이코프스키는 1980년 스코페에 위치한 스코페 성 키릴-메토디우스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그는 상법과 노동법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미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 평신도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1980년대 정치적 자유화가 진행된 후에는 스코페에 있는 슬로보다 건설 회사의 법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2. 정치 경력
트라이코프스키는 1991년 북마케도니아 독립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2.1. 정치 활동 시작 및 당내 역할
트라이코프스키는 1991년 11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한 후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곧바로 VMRO-DPMNE에 입당했다. 그는 당의 외교 관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다른 유럽 정당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7년에는 스코페의 한 자치구인 키셀라 보다 시장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2.2. 정부 직책
1998년 11월 총선에서 VMRO-DPMNE가 여당 제1당이 되면서, 트라이코프스키는 1998년 12월 21일 외무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직책에서 물러났다.
2.3. 대통령 선거
온건 개혁파로서의 명성 덕분에 트라이코프스키는 1999년 11월에 치러진 키로 글리고로프 전 대통령의 후임 선거에서 VMRO-DPMNE의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었다. 1999년 11월 14일 치러진 결선 투표에서 그는 티토 페트코프스키를 52% 대 45%로 꺾고 당선되었다. 당초 11월 19일 취임할 예정이었으나, 선거 결과가 논란이 되면서 한 달 뒤 페트코프스키 지지자들의 마지막 항소가 기각될 때까지 국회의장 사보 클리모프스키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이후 트라이코프스키는 1999년 12월 17일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3. 대통령직 수행
트라이코프스키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북마케도니아의 민족 갈등을 해결하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3.1. 2001년 마케도니아 분쟁과 평화 협상
트라이코프스키의 재임 기간은 마케도니아인 다수 민족과 알바니아인 소수 민족 간의 긴장으로 특징지어졌다. 코소보 전쟁의 여파로 2001년 마케도니아 분쟁이라는 몇 달간의 격렬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은 마케도니아 보안군과 민족 해방군 (마케도니아)을 비롯한 알바니아계 반군, 그리고 알바니아 민족군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이들은 합법적인 소수 민족으로서의 지위 향상과 전반적인 경제적, 행정적, 법적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분쟁 중 아라치노보 위기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아라치노보 공격이 중단되고 약 500명의 민족 해방군 반군이 철수하면서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위대는 의사당 건물에 난입하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반역"과 "사임"을 외쳤다. 비록 그의 권한이 제한적이고 역할이 주로 의례적이었지만, 트라이코프스키는 2001년 NATO가 중재한 평화 협상을 주재하여 폭력을 종식시키고 북마케도니아에서 전면적인 내전이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민족 간 대화에서 온건파로 여겨졌으며, 알바니아계의 더 큰 포용을 주장했다. 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의 친구이자 고문이었던 비서실장 조란 욜레프스키는 당시 미국 주재 마케도니아 대사였으며, 마케도니아 국명 분쟁의 협상가이기도 했다.
3.2. 소수 민족 통합 및 민주적 발전
트라이코프스키는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의 권리 신장과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온건 개혁파로서 사회적 형평성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노력은 민족 간의 화합을 증진하고 국가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3. 국제 관계 및 외교
트라이코프스키는 국제 관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003년 10월 7일부터 10월 10일까지 일본을 방문하여 북마케도니아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방문 기간 동안 그는 일본 천황 및 황후를 알현하고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무대신과 회담을 가졌다. 이러한 외교 활동은 국제 사회에서 북마케도니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4. 수상 및 표창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는 재임 기간 동안 그의 평화 증진 노력과 외교적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국내외 상과 훈장을 받았다.
- 헝가리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사슬 포함)
- 폴란드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명예 기사 대십자장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수여)
- 세계 감리교 협의회 평화상 (2002년, 평화와 정치적 안정 증진에 기여한 공로)
5. 사망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대통령은 재임 중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5.1. 비행기 사고 경위
트라이코프스키는 2004년 2월 26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에서 열리는 경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가 탑승한 항공기는 비치크래프트 슈퍼 킹 에어 200 (등록번호 Z3-BAB)으로, 모스타르 남남동쪽 15 km 지점, 포플라트와 브르스니크 마을 근처의 헤르체고비나 남동부 산비탈에 추락했다. 사고 당시 현장은 짙은 안개와 폭우가 내리고 있었으며, 이는 CFIT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해당 활주로는 정밀 착륙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악천후 시 착륙이 더욱 어려웠다.
사고 항공기는 충격으로 세 동강이 났으며, 트라이코프스키를 포함한 7명의 승객과 2명의 승무원 등 총 9명 모두 사망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추락 지점은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지뢰가 많이 매설되었던 지역이어서 구조 및 수색 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북마케도니아 역사상 재임 중 사망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5.2. 장례 및 추모
그의 죽음 이후 국장이 치러졌다. 스트루미차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성경 마태복음 5장 9절의 구절인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6. 유산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는 사후에도 그의 평화와 통합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6.1.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재단
트라이코프스키의 유지를 잇기 위해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재단'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그의 평화 구축 노력과 민족 간 화합 증진이라는 목표를 계승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6.2. 역사적 평가 및 영향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는 북마케도니아의 평화 구축자로서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2001년 마케도니아 분쟁을 해결하고 민족 간 화합을 증진하는 데 기여한 그의 역할은 후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온건한 개혁 노선을 통해 국가의 민주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