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보노네스 1세(ΟΝΩΝΗΣ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기원전 ? ~ 서기 19년)는 아르사케스 왕조의 파르티아 제국의 왕(재위: 서기 8년~12년)이자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재위: 서기 12년~18년)이었다. 그는 프라아테스 4세의 장남으로, 부친과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협약에 따라 후계자 계승 분쟁을 막기 위해 어린 시절 로마에 인질로 보내졌다. 로마에서 성장하며 로마의 문화와 관습을 습득한 보노네스 1세는 파르티아 귀족들에게 "로마의 꼭두각시"로 불리며 반발을 샀고, 결국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었으나, 파르티아의 압력과 로마의 소극적 정책으로 인해 아르메니아 왕위에서도 물러나 로마의 통제 하에 있다가 사망했다. 그의 파르티아 통치는 로마 친화적인 정책으로 인해 국내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이는 파르티아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2. 초기 생애 및 로마 인질 시기
보노네스 1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며 파르티아 왕으로서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배경을 형성했다.
2.1. 가족 배경 및 로마 인질
보노네스 1세는 파르티아의 왕 프라아테스 4세의 장남이다. 그의 어머니는 비스테이바나프스였다.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보노네스는 스키타이 왕과도 연관이 있었다고 한다. 프라아테스 4세는 기원전 30년경 찬탈자 티리다테스 2세로부터 왕좌를 되찾는 과정에서 스키타이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라아테스 4세가 스키타이 부족장과의 혼인 동맹을 맺어 보노네스 1세가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보노네스는 기원전 10년/9년에 그의 세 형제(프라아테스, 세라스판데스, 로다스페스)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다. 이는 프라아테스 4세의 막내아들 프라아타케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을 파르티아가 로마에 복종했음을 보여주는 선전 자료로 활용했으며, 그의 자서전인 '업적록'에 이를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기록했다.
2.2. 교육 및 로마 문화의 영향
로마에 인질로 보내진 보노네스 1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손님 대접을 받으며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는 로마에서 성장하면서 로마의 풍습과 교양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이러한 로마식 교육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후에 파르티아 왕이 되었을 때 로마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파르티아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3. 파르티아 왕 재위
보노네스 1세의 파르티아 왕위 계승은 파르티아 내부의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그의 로마식 통치 방식은 오히려 더 큰 내분을 야기했다.
3.1. 왕위 계승
서기 6년경 오로데스 3세가 암살당한 후, 파르티아 제국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새로운 왕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요청했다. 당시 바빌로니아에서는 오로데스 3세 반대파가 봉기하여 보노네스의 귀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보노네스 1세를 파르티아로 돌려보냈고, 그는 서기 6년에 파르티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3.2. 내정 정책과 반대 세력
로마에서 교육받은 보노네스 1세는 파르티아로 돌아온 후 로마식 문화를 도입하고 친로마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국내의 그리스인 폴리스들에 대해 강력하게 배려하며 그리스인들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파르티아의 전통적인 대귀족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보노네스 1세를 "로마의 꼭두각시"로 경멸하며 파르티아의 독립성과 전통을 해치는 인물로 간주했다.
3.3. 아르타바누스 2세와의 내전
보노네스 1세에 대한 파르티아 귀족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미디어 아트로파테네를 통치하던 아르사케스 왕조의 다른 일원인 아르타바누스 2세가 왕위로 추대되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는 파르티아 동부의 다한족 유목민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대귀족들과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로 인해 보노네스 1세와 아르타바누스 2세 사이에 4년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 초기, 보노네스 1세는 바빌로니아 방면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며 우세한 전세를 보였다. 그의 주화에는 "아르타바누스의 정복자 보노네스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시적인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 영토로 도주했던 아르타바누스 2세의 반격에 직면하여 결국 패배했다. 서기 12년경, 보노네스 1세는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파르티아에서 추방되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의 주화는 서기 1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4. 아르메니아 왕 재위
파르티아에서 추방된 보노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로 망명하여 새로운 왕위를 얻었으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4.1. 아르메니아 망명 및 왕위 계승
파르티아 왕위에서 쫓겨난 보노네스 1세는 서기 12년경 아르메니아로 피신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왕위는 티그라네스 5세와 에라토가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공백이 발생한 상태였다. 보노네스 1세는 이 틈을 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4.2. 외교적 갈등 및 폐위
새롭게 파르티아의 군주가 된 아르타바누스 2세는 보노네스 1세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며 자신의 아들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임명하려 했다. 이는 로마의 이해관계에 위협이 된다고 간주되었다.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르티아로 보냈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대결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으며, 게르마니아에서의 패배 이후 대외적으로 소극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로마군은 파르티아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고, 아르타바누스 2세와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8년 유프라테스강의 한 섬에서 만나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아르탁시아스 3세가 새로운 아르메니아 왕으로 임명되었고, 로마는 보노네스 1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로써 로마는 아르타바누스 2세를 합법적인 파르티아 통치자로 인정했다. 아르메니아에서 보노네스 1세는 서기 15년에 추방되었으며, 로마 지배 하의 시리아로 도피했다.
5. 말년과 죽음
아르메니아 왕위에서도 쫓겨난 보노네스 1세는 로마의 감시 아래에서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5.1. 로마의 감금 및 유배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된 후 보노네스 1세는 서기 18년에 로마의 통제 하에 있던 시리아로 옮겨져 구금되었다. 그는 왕다운 대우를 받았으나, 사실상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그는 킬리키아로 이송되어 감금 생활을 이어갔다.
5.2. 사망 경위
서기 19년경, 보노네스 1세는 킬리키아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경비병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은 파르티아 내부 정치 지형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6. 주화
보노네스 1세가 발행한 주화는 그의 통치 시기와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그의 주화에는 "ΟΝΩΝΗΣ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라는 이름과 함께, "아르타바누스의 정복자 보노네스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문구는 그가 아르타바누스 2세와의 내전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노네스 1세의 주화는 서기 8년부터 12년까지 발행되었으며, 이는 그의 파르티아 통치 시기와 일치한다. 반면, 아르타바누스 2세의 주화는 서기 1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7. 유산 및 역사적 평가
보노네스 1세의 통치와 죽음은 파르티아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왕조의 부상을 촉진하는 등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7.1. 파르티아 정치 지형에 미친 영향
보노네스 1세의 죽음과 아르타바누스 2세의 확고한 통치권 확보는 파르티아 귀족들 사이의 분열을 야기했다. 모든 귀족이 아르사케스 가문의 새로운 분파가 제국을 장악하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카스탄, 드란기아나, 아라코시아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였던 곤도파레스는 아르타바누스 2세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건국했다. 그는 "대왕 중의 대왕"과 "아우토크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새로 얻은 독립성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타바누스 2세와 곤도파레스는 인도-파르티아인들이 아르사케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합의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노네스 1세의 아들 메헤르다테스는 서기 49년부터 51년 사이에 파르티아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7.2. 역사적 평가 및 비판
보노네스 1세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로마 문화를 습득했으며, 파르티아 왕이 된 후에도 친로마적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파르티아 귀족들로부터 "로마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의 통치는 파르티아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훼손하고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어 국내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는 결국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아르타바누스 2세가 즉위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보노네스 1세의 사례는 외부 세력에 의존한 통치자가 내부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