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베른트 프랑케(Bernd Franke독일어, 1948년 2월 12일 출생)는 독일의 전직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했다. 그는 주로 분데스리가의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오랜 기간 헌신하며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백업 골키퍼로서 활약했다. 프랑케는 당대 최고의 골키퍼들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순간마다 찾아온 불운한 부상으로 인해 국제적인 성공을 충분히 거두지 못한 비운의 선수로 평가된다. 특히, 1974년 FIFA 월드컵과 1978년 FIFA 월드컵 출전 기회를 연이어 놓치면서 그의 경력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이 문서는 그의 클럽 및 국가대표팀 경력을 상세히 다루며, 그의 선수로서의 평가와 축구계에 남긴 유산을 조명한다.
2. 클럽 경력
베른트 프랑케는 유소년 시절부터 프로 선수로서 은퇴하기까지 한 클럽에서만 활약하며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2.1. 유소년 및 초기 프로 경력
베른트 프랑케는 유소년 시절 처음에는 골키퍼가 아닌 아웃필드 플레이어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는 자르 05 자르브뤼켄의 유소년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프로 선수단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당시 자르 05 자르브뤼켄의 감독이었던 오토 네플러(Otto Knefler독일어)는 신예 골키퍼였던 프랑케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다. 이후 네플러 감독이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이끌게 되자, 그는 프랑케를 뒤셀도르프로 데려왔다. 1971년, 네플러 감독은 분데스리가 팀인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고, 그는 프랑케를 다시 한번 영입했다. 당시 브라운슈바이크의 주전 수문장은 호르스트 볼터(Horst Wolter독일어)였는데, 프랑케는 그의 준수한 백업 골키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프랑케는 곧바로 전직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볼터를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그는 팀의 1973년 강등을 막을 수는 없었다. 브라운슈바이크가 강등된 그 해 여름, 프랑케는 강등되지 않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이적하여 분데스리가에 남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4년 FIFA 월드컵을 1년 앞두고 분데스리가 잔류 기회를 거절하고 브라운슈바이크에 잔류하는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2.2.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시기
1974년, 베른트 프랑케는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와 함께 다시 분데스리가로 복귀했고, 이전과 다름없이 믿음직한 활약을 이어갔다. 특히 1977년에는 소속팀이 리그 3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78년 FIFA 월드컵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부터 프랑케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남은 선수 생활 동안 종종 1군 경기에 결장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보여주며 팀에 남았다. 1980-81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밖에 있던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한 시즌 더 활약했고, 부상 없이 건강할 때는 1985년 팀이 다시 한번 분데스리가에서 강등될 때까지 꾸준히 주전으로 뛰었다. 프랑케는 1985년 여름, 축구 외적인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오직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한 팀에서만 뛰면서 총 345번의 분데스리가 경기에 출전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베른트 프랑케는 클럽에서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으나, 그의 국제 경력은 불운한 부상과 함께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3.1. 서독 대표팀 발탁 및 초기 활동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에서의 뛰어난 경기력을 바탕으로, 베른트 프랑케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백업 골키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73년 3월 28일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주로 제프 마이어(Sepp Maier독일어)나 볼프강 클레프(Wolfgang Kleff독일어)가 헬무트 쇤(Helmut Schön독일어)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할 때 친선 경기에서 출전 기회를 얻었다. 1973년 소속팀 브라운슈바이크가 강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에 잔류하겠다는 그의 결정은 자국에서 열리는 1974년 FIFA 월드컵 서독 대표팀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릴 기회를 놓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FC 샬케 04의 노버트 니크부어(Norbert Nigbur독일어)가 서독의 세 번째 골키퍼로 발탁되었다.
3.2. 월드컵 및 올림픽 대회 참가
베른트 프랑케에게 더욱 비극적이었던 것은 1978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1978년 5월에 발생한 부상이었다. 당시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한 아마추어 팀과의 친선 경기를 위해 1978년 FIFA 월드컵 선수단에 소집되었으나, 이 부상으로 인해 선수단에서 낙마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는 두 대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 참가가 좌절되는 아쉬움을 겪었다. 따라서 그는 1982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 마침내 포함되자 매우 기뻐했지만, 이 대회에서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 대회에 앞서 그는 포르투갈과 노르웨이와의 친선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그의 마지막 두 차례 국가대표팀 출전(총 7회)을 기록했다. 비록 주전 군단(Die Nationalmannschaft독일어)과의 경쟁에서는 밀려났지만, 프랑케는 1984년 하계 올림픽 축구 대회에서 서독의 주전 골키퍼로서 4경기에 모두 출전할 기회를 얻었다.
4. 선수 평가 및 유산
현역 시절 내내 베른트 프랑케는 제프 마이어와 하랄트 슈마허(Harald Schumacher독일어)와 같은 당대 최고의 골키퍼들과 대등한 실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많은 이들은 프랑케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불운한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1970년대 후반에는 제프 마이어의 뒤를 이어 서독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커리어는 불운한 부상이 한 선수의 잠재력과 국제적인 성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비록 큰 국제 대회에서의 주전 활약은 없었지만, 그는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의 상징적인 선수로서 오랜 기간 팀에 헌신하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5. 같이 보기
-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분데스리가
- 제프 마이어
- 하랄트 슈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