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발터 벤크(Walther Wenck발터 벤크독일어, 1900년 9월 18일 ~ 1982년 5월 1일)는 독일의 장교이자 산업가이다. 그는 독일 육군에서 최연소 장군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 말기에는 베를린 전투에 참전한 제12군을 지휘했다. 특히 이 시기 벤크는 전투와 소련군으로부터 민간인과 군인들을 구출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집중하여 수십만 명의 피난민을 엘베강을 건너 미군 점령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성과는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의 노래 "Hearts of Iron"에 담기기도 했다.
벤크는 전쟁 후 연합군에 항복한 뒤 군을 떠나 산업계에서 두 번째 경력을 시작했다. 1957년 서독이 재무장하는 과정에서 연방군의 총감직을 제안받았으나, 그가 제시한 조건(총감이 단순한 행정적 리더가 아닌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등)이 충족되지 않아 거절했다. 역사가들은 벤크를 유능한 지휘관이자 뛰어난 임기응변가로 평가하지만, 1945년 베를린을 구원하는 불가능한 임무를 맡았다고 본다. 전쟁 중 그의 별명은 '소년 장군'("The Boy General"영어)이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발터 벤크는 1900년 9월 18일 독일 작센안할트주 비텐베르크에서 장교인 막시밀리안 벤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1911년, 벤크는 나움부르크의 프로이센 육군 사관생도단에 입대했다. 1918년 봄부터 그로스리히터펠데의 중등 군사 학교에 다녔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 참전하지는 않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벤크는 1919년 자유군단의 라인하르트 의용연대(Freiwilligen-Regiment Reinhard독일어)에 참여했으며, 1920년(또는 1921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인 라이히스베어에 입대했다. 1923년 뮌헨의 보병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서 깊은 제9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소위로 임관했다. 1928년에 결혼하여 1930년에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벤크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보유가 금지되었던 전차 부대의 위장 명칭인 자동차 부대에 자원하여 1933년 베를린의 제3자동차대대로 전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자동차 부대 총감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 중령과 인연을 맺었다. 1934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935년부터 베를린의 육군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이듬해 졸업 후 참모본부의 장갑과에서 근무하며 동시에 한스 폰 제크트 전 참모총장의 부관을 지냈다. 1938년에는 제2장갑연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1월에는 제1기갑사단의 참모가 되었다.
3. 군 경력
발터 벤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에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중요한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3.1. 초기 경력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벤크는 1920년(또는 1921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인 라이히스베어에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초기부터 자동차 부대(사실상의 전차 부대)에 관심을 보였으며, 1933년 베를린의 제3자동차대대로 전속되어 당시 자동차 부대 총감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 중령과 인연을 맺었다. 1934년 대위로 진급한 그는 1935년부터 베를린의 육군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졸업 후 참모본부의 장갑과에서 근무하며 한스 폰 제크트 전 참모총장의 부관을 지냈다. 1938년에는 제2장갑연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1월에는 제1기갑사단의 참모가 되었다.
3.2. 제2차 세계 대전 중 경력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벤크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9월 18일 2급 철십자장을, 이듬해 10월 4일 1급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이듬해 서방 전격전에서는 벨포르 공략에서 뛰어난 전략적 수완을 발휘하여 중령으로 진급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제1기갑사단의 작전 참모를 지냈다.
1942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베를린의 육군대학교 교관이 되었다. 같은 해 제57기갑군단의 참모총장을 역임했으나, 곧 동부 전선의 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대장 휘하의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여 루마니아군을 실질적으로 지도했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카를아돌프 홀리트의 이름을 딴 '홀리트 육군 분견대'의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이 부대는 루마니아 제3군에 종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제3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으나, 1942년 11월 19일 시작된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어 5일 만에 사실상 궤멸되었다. 12월 28일, 벤크는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대장의 제1기갑군에서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제6군의 참모총장도 지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는 제1기갑군에서 같은 직책을 수행했다. 1944년에는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동부 전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처음으로 히틀러의 주목을 받았다. 벤크는 "총통 각하, 보시다시피 동부 전선은 구멍투성이 스위스 치즈와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비록 비공식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았지만, 히틀러는 그의 보고서의 "생동감"을 칭찬했다.
3.2.1. 동부 전선에서의 활동
벤크는 동부 전선에서 여러 중요한 참모 직책을 수행했다. 1942년에는 제57기갑군단의 참모총장을 지낸 후, 루마니아 제3군의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여 루마니아군을 실질적으로 지도했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으나,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홀리트 육군 분견대'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1943년에는 제6군의 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부터 1944년까지는 제1기갑군의 참모총장으로 복무했다. 1944년에는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의 참모총장을 맡았으며, 이때 아돌프 히틀러에게 동부 전선의 심각한 상황을 솔직하게 보고하여 주목을 받았다.
3.2.2. 서부 전선 및 기타 전선에서의 활동
벤크는 1940년 서방 전격전에서 벨포르 공략에 뛰어난 전략적 수완을 발휘하여 중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말기인 1945년 4월 10일, 벤크는 베를린 서쪽에서 진격해오는 미국과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신설된 제12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부 전선이 동쪽으로, 동부 전선이 서쪽으로 움직이면서 양쪽 전선의 독일군이 서로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 결과, 벤크의 군대가 통제하던 엘베강 동쪽 후방 지역은 다가오는 소련군을 피해 도망쳐 온 독일인 피난민들의 거대한 난민 캠프가 되었다. 벤크는 이 피난민들에게 식량과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때 제12군은 매일 25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3.2.3. 독일군 최고사령부(OKH)에서의 역할
1944년 7월 22일경, 벤크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으로 막 임명된 하인츠 구데리안에 의해 OKH의 작전 참모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병참감 제1부를 대체하는 사령부 참모총장(Chief of the Führungsstab)으로 승진했다.
1945년 2월 13일, 오랜 논쟁 끝에 구데리안은 히틀러를 설득하여 벤크를 하인리히 힘러 휘하의 비스와 집단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벤크의 공격은 초기에 성공적이었으나, 히틀러가 매일 총통 브리핑에 참석하도록 요구하여 벤크는 매일 321868 m (200 mile)의 거리를 왕복해야 했다. 1945년 2월 17일, 극도로 피로한 벤크는 쓰러진 운전병 도른 대신 운전대를 잡았고, 운전 중 잠이 들어 차량이 도로 밖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도른의 도움으로 구조된 그는 두개골 골절과 다섯 개의 갈비뼈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 사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4.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주요 활동
발터 벤크의 군사 경력 중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었던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특히 베를린 전투에서의 역할이었다.
4.1. 제12군 사령관 임명 및 임무
1945년 4월 10일, 벤크는 베를린 서쪽에 주둔하여 진격해오는 미국과 영국군에 맞서기 위해 신설된 제12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그는 장갑병대장으로 승진했다(전년 10월로 소급 적용). 그러나 서부 전선이 동쪽으로, 동부 전선이 서쪽으로 움직이면서 양쪽 전선의 독일군이 서로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 결과, 벤크의 군대가 통제하던 엘베강 동쪽 후방 지역은 다가오는 소련군을 피해 도망쳐 온 독일인 피난민들의 거대한 난민 캠프가 되었다. 벤크는 이 피난민들에게 식량과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때 제12군은 매일 25만 명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4.2.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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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1일, 아돌프 히틀러는 친위대 대장 펠릭스 슈타이너에게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주코프의 병력은 북쪽에서 베를린을 포위하고 있었고,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남쪽에서 포위하고 있었다. 슈타이너는 그의 슈타이너 전투단으로 주코프를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가동 가능한 전차가 거의 없고 보병 사단 규모의 병력만 있었기에, 공격 대신 후퇴를 요청했다.
4월 22일, 슈타이너가 후퇴하자 벤크의 제12군은 베를린을 포위망에서 구하려는 히틀러의 비현실적이고 형편없이 계획된 시도의 일부가 되었다.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의 제안에 따라, 벤크는 서쪽의 미군과의 교전을 중단하고 동쪽으로 공격하여 테오도어 부세 보병대장의 제9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함께 서쪽과 남쪽에서 베를린을 포위하고 있는 소련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한편, 루돌프 홀스테 장군 휘하의 제41기갑군단은 북쪽에서 소련군을 공격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러나 제41기갑군단은 슈타이너 전투단의 소모되고 지친 부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월 23일, 벤크는 제12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제군들은 다시 한번 고생해야 할 것이다. 이미 베를린이 문제가 아니고, 독일이 문제가 아니다. 전투와 소련군으로부터 민중을 구하는 것이 제군들의 책무이다."
당시 제12군 공병이었던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이때 "충성, 책임, 그리고 연대감"을 느꼈다고 기록했으며, 공격에 참여한 샤른호르스트 사단의 대대장은 "동쪽에서 이반(러시아인을 지칭)들과 싸우기 위한 급행군이다"라고 썼다.
제12군 예하 제20군단의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베를린을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은 경악하고 혼란에 빠졌다. 제12군 소속 제20군단은 과감하게 베를린 방면으로 진격하여 30 km 가량 전진했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포츠담 근교에서 멈춰 섰다. 한편, 제9군은 베를린으로 거의 진격하지 못했다. 4월 27일 밤까지 베를린을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은 연결되었고, 도시 내부의 병력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4월 28일 밤, 벤크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에 제12군이 전 전선에서 소련군에 의해 밀려났다고 보고했다. 벤크에 따르면, 부세의 제9군으로부터의 지원이 더 이상 기대될 수 없었기 때문에 베를린에 대한 공격은 불가능했다. 대신, 4월 24일부터 벤크는 그의 군대를 할베 숲 쪽으로 이동시켜 할베 포위망을 돌파하고 제9군의 잔존 병력, 헬무트 라이만의 "슈프레 집단군", 그리고 포츠담 수비대와 연결했다. 벤크는 그의 군대와 제9군의 잔존 병력, 그리고 많은 민간인 피난민들을 엘베강을 건너 미군 점령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안토니 비버에 따르면, 벤크의 베를린 동쪽 공격은 베를린 주민과 수비대에게 미군 점령 지역으로의 탈출 경로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벤크는 "동지들, 다시 한번 들어가야 한다. 이제 베를린이 문제가 아니고, 제국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임무는 전투와 러시아인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벤크의 리더십은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인도주의적 작전을 믿는 이들과 러시아인 대신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려는 이들 사이에서 반응은 다양했다. 랜달 한센에 따르면, 벤크의 행동은 행운과 미군 장군 윌리엄 후드 심슨의 도움으로 수많은 병력과 민간인(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다양하게 추정)을 성공적으로 대피시켰으며, 벤크 자신도 강을 건넌 마지막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벤크군이 확보한 피난로를 통해 최대 25만 명에 이르는 난민(제9군의 최대 2만 5천 명의 장병 포함)이 소련군의 진격보다 먼저 미군 점령 지역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4.3. 항복 및 포로 생활
독일이 패전한 후인 1945년 5월, 제12군은 슈텐달 시청 앞에서 미군에 항복했으며, 벤크는 포로가 되었다. 그는 1947년 크리스마스에 석방되었다.
5. 전후 생활
석방된 벤크는 1948년부터 보훔에서 기계 판매 회사의 영업직으로 일하며 산업가로서의 두 번째 경력을 시작했다.
5.1. 산업계에서의 활동
1950년대에는 산업용 오븐 제조업체인 Dr. C. Otto & Comp.의 전무이사를 역임했으며, 1955년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대에는 군수 제조업체인 디엘 그룹의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1966년에 은퇴했다.
5.2. 연방군 총감직 제안 및 거절
1957년, 벤크는 서독에서 재건된 연방군의 총감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총감직이 단순한 행정적 리더가 아니라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등 개인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이러한 요구사항이 충족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후 제안을 거절했다.
6. 평가 및 영향
역사가들은 발터 벤크를 유능한 지휘관이자 뛰어난 임기응변가로 평가하지만, 1945년 베를린을 구원하는 불가능한 임무를 맡았다고 본다.
6.1. 군사적 평가
벤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벨포르 공략에서 뛰어난 전략적 수완을 발휘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동부 전선의 심각한 상황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솔직하게 보고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쟁 말기 베를린 전투에서 제12군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서 싸웠으나, 병력과 보급의 한계로 인해 베를린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사적 역량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엘베강을 건너 미군 점령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
6.2. 문화적 영향
발터 벤크의 마지막 군사적 노력과 인도주의적 활동은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의 노래 "Hearts of Iron"의 주제가 되어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 노래는 전쟁 말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피난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벤크의 제12군의 분투를 다루고 있다.
7. 수상 경력
- 철십자장 (1939)
- 2급 철십자장 (1939년 9월 13일)
- 1급 철십자장 (1939년 10월 4일)
- 독일십자장 금장 (1942년 1월 26일)
- 기사 철십자장 (1942년 12월 28일, 홀리트 육군 분견대 참모총장 시절)
8. 사망
1982년 5월 1일, 벤크는 오스트리아 여행 중 그의 차가 나무와 충돌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며칠 후 니더작센주 바트 로텐펠데에 있는 고향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