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발데마르 2세는 1170년 6월 28일에 발데마르 1세 국왕과 폴로츠크의 소피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 활동은 덴마크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형성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발데마르 2세는 1182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겨우 12세였다. 그는 남윌란 공작(dux slesvicensis라틴어)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훗날 슐레스비히 공국이 될 영토였다. 그의 섭정은 크누드 5세 국왕의 사생아인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였다.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는 야심가였으며, 자신의 야망을 어린 발데마르의 이름으로 숨겼다. 1192년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가 브레멘 대주교로 임명되자, 그는 독일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발데마르의 형인 크누드 6세 국왕을 전복시키고 덴마크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드러났다.
1.2. 초기 활동

발데마르 공작은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가 위협적인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는 1192년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를 아벤라로 초대했으나, 주교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도주했다. 이듬해인 1193년,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지원을 받아 35척의 함대를 조직하여 덴마크 해안을 약탈하고, 자신이 크누드 5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덴마크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1193년 크누드 6세 국왕에 의해 체포되어 노르보르 성에 1193년부터 1198년까지, 그리고 셸란섬의 쇠보르 성 탑에 1206년까지 감금되었다. 그는 훗날 발데마르 공작의 아내인 보헤미아의 다그마르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주도로 덴마크 문제에 다시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에야 풀려났다.
어린 발데마르는 홀슈타인의 아돌프 3세 백작으로부터 또 다른 위협에 직면했다. 아돌프는 다른 독일 백작들을 선동하여 남윌란을 덴마크로부터 빼앗고,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의 덴마크 왕위 찬탈 음모를 돕으려 했다. 주교가 다시 감옥에 갇히자, 발데마르 공작은 아돌프 백작을 추격하여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렌즈부르크에 있는 아돌프의 새로운 요새를 점령했다。 그는 1201년 스텔라우 전투에서 아돌프 백작을 격파하고 생포하여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 옆 감방에 가두었다. 2년 후, 아돌프 백작은 병으로 인해 엘베강 북쪽의 모든 슐레스비히 영토를 발데마르 공작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1202년 11월, 발데마르 공작의 형인 크누드 6세 국왕이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통치와 주요 업적

발데마르 2세의 통치 기간은 덴마크의 영토 확장과 법률 개혁이라는 중요한 업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덴마크를 북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으나, 말년에는 영토를 상실하는 좌절을 겪기도 했다.
2.1. 왕위 계승 및 영토 확장

크누드 6세 국왕의 사망 후, 발데마르 공작은 윌란반도 의회에서 덴마크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당시 이웃한 신성 로마 제국은 벨프가의 오토 4세와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슈바벤의 필리프 두 명의 경쟁자가 왕위를 다투는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발데마르 2세는 오토 4세와 동맹을 맺고 필리프에 대항했다.
1203년, 발데마르는 뤼베크와 홀슈타인을 침공하여 정복하고 이들을 덴마크 영토에 편입시켰다. 1204년에는 노르웨이 내전 시대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덴마크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노르웨이의 비켄으로 가서 노르웨이 왕위 주장자인 에를링 스테인베그를 지원했다. 이는 1208년까지 이어진 제2차 바글레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노르웨이 왕위 계승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되었고, 노르웨이 국왕은 덴마크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2.2. 군사 활동과 대외 관계

발데마르 2세는 노르웨이 계승 분쟁뿐만 아니라 브레멘 대주교 임명과 슐레스비히 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교황청과도 갈등을 겪었다. 1207년, 브레멘 수도회 대의원 대다수가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를 다시 대주교로 선출했으나, 소수파는 함부르크로 도피했다. 독일의 필리프 국왕은 발데마르 크누드센을 브레멘의 합법적인 대주교로 인정했는데, 이는 그가 발데마르 2세에 대항하는 동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발데마르 2세와 도피한 대의원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항의했고, 교황은 사건 조사를 원했다. 그러나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가 교황의 결정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어기고 로마를 떠나 브레멘으로 돌아가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1208년 슐레스비히 주교직에서도 해임했다. 1208년, 함부르크로 도피한 대의원들은 슈툼펜하우젠의 부르크하르트 백작을 경쟁 대주교로 선출했고, 발데마르 2세는 제국의 권력을 찬탈하여 부르크하르트에게 왕권의 상징을 수여했다. 이는 엘베강 북쪽의 대주교령과 교구 영토에서만 효력을 발휘했다. 1209년, 인노첸시오 3세는 마침내 발데마르 국왕의 측근이자 고문이었던 슐레스비히의 니콜라스 1세를 해임된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을 승인했다. 1214년, 발데마르 국왕은 니콜라스 1세 주교를 사망한 로스킬레 주교 페데르 수네센의 후임으로 덴마크 재상에 임명했다.
같은 해, 발데마르 2세는 덴마크 군대를 이끌고 엘베강 남쪽의 대주교령을 침공하여 슈타데를 정복했다. 8월에 발데마르 크누드센 대주교가 도시를 탈환했으나, 곧 다시 발데마르 2세에게 빼앗겼고, 발데마르 2세는 엘베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하르부르크에 전초 기지를 요새화했다. 1209년, 오토 4세는 발데마르 2세에게 엘베강 북쪽으로 철수할 것을 설득했고, 부르크하르트에게 사임할 것을 촉구하며 발데마르 크누드센 대주교를 추방했다.
1210년, 인노첸시오 3세는 올덴부르크-빌데스하우젠 백작 게르하르트 1세를 브레멘의 새로운 대주교로 임명했다. 1211년, 안할트 백작 베른하르트 3세는 교황에 의해 해임된 그의 처남 발데마르 크누드센 대주교를 브레멘 시로 호위하여 사실상 교구를 되찾았고, 시칠리아 문제로 인노첸시오와 불화가 생긴 오토 4세의 갑작스러운 지지를 얻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발데마르 2세는 슈타데를 탈환했지만, 1213년 라인 궁정백 하인리히 5세가 발데마르 크누드센 대주교를 위해 슈타데를 정복했다.
1213년, 발데마르는 노르웨이에 전쟁세를 부과했고, 농민들은 트뢰넬라그 의회에서 발데마르의 세금 징수원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봉기는 노르웨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216년, 발데마르 2세와 덴마크 군대는 슈타데 백작령을 황폐화시키고 함부르크를 정복했다. 2년 후, 발데마르 2세와 게르하르트 1세는 동맹을 맺어 하인리히 5세와 오토 4세를 대주교령에서 추방했다. 발데마르 크누드센 대주교는 마침내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발데마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지원했고, 그 대가로 황제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모든 벤드족 영토 및 포메라니아 공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
2.2.1. 린다니세 전투와 덴마크 국기

1219년경, 동부 발트해 지역의 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심한 압박을 받고 발데마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발데마르의 에스토니아 침공을 십자군으로 승격시켰다. 발데마르는 군대를 소집하고 모든 덴마크 함대를 동원하여 군대를 동쪽으로 수송했다. 집결한 함대는 1,500척에 달했다.
군대가 현대의 탈린 근처 에스토니아에 상륙했을 때, 에스토니아의 추장들은 덴마크인들과 협상하여 덴마크 국왕을 자신들의 군주로 인정하기로 동의했다. 그들 중 일부는 세례를 받기도 했는데, 이는 좋은 징조처럼 보였다. 그러나 3일 후인 1219년 6월 15일, 덴마크인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을 때 수천 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사방에서 덴마크 진영을 습격했다. 혼란이 지배했고 발데마르의 십자군은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뤼겐 공작 비츠라프 1세는 자신의 병사들을 두 번째 진영에 모아 에스토니아인들을 후방에서 공격했다.
린다니세 전투 중에 전설에 따르면, 수네센 주교가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덴마크인들은 전진했고, 팔이 지쳐 내려올 때마다 에스토니아인들이 덴마크인들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수행원들이 달려와 그의 팔을 다시 들어 올리자 덴마크인들은 다시 전진했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수네센 주교가 징조를 위해 기도하자 덴마크인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하늘에서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 천이 내려왔다. "이 깃발이 높이 솟으면 너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전해진다. 덴마크인들은 전진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날 수천 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전장에 쓰러졌고, 에스토니아는 덴마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강제로 기독교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역사가 에드거 작스의 Liber Census Daniæ라틴어에 대한 심층 연구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인들은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발데마르는 전투 현장 근처의 레발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언덕 위의 성 주위에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에스토니아어로 "덴마크 성/도시"를 의미하는 탈린으로 불린다. 하얀 십자가가 있는 붉은 깃발인 '단네브로'는 1219년부터 덴마크의 국기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사용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기 디자인이다. 그러나 덴마크 국기 디자인이 실제로 확인된 것은 14세기 중반 발데마르 4세 시대라는 역사적 기록도 존재한다.
2.2.2. 독일 북부에서의 분쟁

1223년, 발데마르 국왕과 그의 장남인 발데마르 젊은 왕자는 퓐섬 근처의 뤼외섬에서 사냥 중 슈베린 백작 하인리히 1세에게 납치되었다. 하인리히 백작은 덴마크가 20년 전에 정복했던 홀슈타인 영토를 포기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 사절단은 이 조건을 거부하고 덴마크는 전쟁을 선포했다. 발데마르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대부분의 독일 영토는 덴마크로부터 이탈했다. 덴마크군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전쟁은 1225년 오를라뮌데의 알베르트 2세가 지휘하는 덴마크군이 묄른에서 패배하면서 끝났다. 발데마르는 석방을 위해 독일 내 이탈 영토를 인정하고, 44,000 은 마르크를 지불하며, 하인리히 백작에게 복수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서명해야 했다.
발데마르는 즉시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자신의 맹세를 무효화해 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승인했다. 호노리우스 3세는 발데마르를 강요된 맹세에서 면제해 주었고, 그는 즉시 독일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발데마르는 조카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오토 1세와 조약을 맺고 남쪽으로 향하여 자신의 정당한 영토라고 생각하는 곳을 되찾으려 했으나, 그의 운은 그를 저버렸다. 1227년 7월 22일 보른회베트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연이은 패배를 겪으면서 덴마크의 북독일 영토 상실이 확정되었다. 발데마르 자신은 독일 기사의 기사도적인 행동 덕분에 말에 태워져 안전한 곳으로 옮겨지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2.3. 법률 개혁과 사회적 영향

그때부터 발데마르 2세 국왕은 국내 문제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가 도입한 변화 중 하나는 봉건제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봉사를 대가로 재산을 주었다. 이는 귀족 가문(højadelen덴마크어)의 권력을 증가시키고, 덴마크 대부분을 지배하는 하급 귀족(lavadelen덴마크어)의 등장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자유 농민들은 바이킹 시대 이래 누려왔던 전통적인 권리와 특권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발데마르 2세 국왕은 남은 생애를 윌란반도, 셸란섬, 스카니아를 위한 법전을 편찬하는 데 보냈다. 이 법전들은 1683년까지 덴마크의 법률로 사용되었다. 이는 오랫동안 전통이었던 지역 의회(landting덴마크어)에서의 지역 법률 제정 방식에서 중요한 변화였다. 신의 심판과 결투 재판을 포함한 유죄 또는 무죄를 결정하는 여러 방법들이 불법화되었다. 유틀란 법전(Jyske Lov덴마크어)은 발데마르가 사망하기 직전인 1241년 보르딩보르 성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발데마르는 셸란섬의 링스테드에 있는 그의 첫 번째 아내 보헤미아의 다그마르 옆에 묻혔다.
3. 개인 생활
발데마르 2세의 개인 생활은 두 번의 결혼과 여러 자녀를 통해 그의 왕조적 안정과 정치적 동맹에 기여했다.
3.1. 결혼과 자녀
첫 번째 결혼 전에 발데마르는 바이에른 공작의 딸인 리크사와 약혼했으나, 이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는 1205년 보헤미아의 다그마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녀는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1세 국왕과 그의 첫 번째 아내 마이센의 아델라이데의 딸이었으며, 곧 덴마크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결혼을 통해 발데마르는 아들 발데마르 젊은 왕자를 얻었고, 1218년 슐레스비히에서 그를 공동 국왕으로 승격시켰다. 발데마르 젊은 왕자는 1231년 북윌란의 레프스네스에서 사냥 중 우발적으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다그마르 왕비는 1212년 출산 중 사망했다. 오래된 민요에 따르면, 그녀는 임종 직전에 발데마르에게 칼 폰 리세의 딸 키르스텐과 결혼하고 "아름다운 꽃"인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Bengerd덴마크어)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는 베렝가리아의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어 덴마크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그녀의 예언으로 해석된다.
다그마르의 사망 후, 플랑드르와의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발데마르는 1214년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와 재혼했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산슈 1세 국왕과 아라곤의 둘세의 고아 딸이자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의 누이였으며, 결혼 전까지 그와 함께 지냈다. 베렝가리아 왕비는 아름다웠지만 마음이 강퍅하여 1221년 출산 중 일찍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았다. 발데마르의 두 아내는 덴마크 민요와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그마르는 온화하고 경건하며 인기 있는 이상적인 아내로, 베렝가리아는 아름답지만 거만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발데마르 2세는 첫 번째 아내 다그마르와 사이에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발데마르 젊은 왕자 (1209년 ~ 1231년 11월 28일):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 사산된 아들 (1212년)
두 번째 아내 베렝가리아와 사이에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에리크 4세 (1216년 ~ 1250년 8월 10일)
- 덴마크의 소피아 (1217년 ~ 1247년): 1230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요한 1세와 결혼했다.
- 아벨 (1218년 ~ 1252년 6월 29일)
- 크리스토페르 1세 (1219년 ~ 1259년 5월 29일)
- 사산된 아들 (1221년)
그는 또한 혼외 자녀를 두었다.
- 헬레나 구토름스도테르와의 사이에서 크누드 발데마르센 (1207년 ~ 1260년 11월 15일): 1219년 에스토니아 공작, 1232년 블레킹에 공작, 이후 롤란섬 공작을 역임했다.
- 알려지지 않은 정부와의 사이에서 닐스 발데마르센 (1216년 ~ 1218년): 할란드 백작을 역임했다.
4. 죽음
발데마르 2세는 1241년 3월 28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유틀란 법전이 승인된 보르딩보르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셸란섬의 링스테드에 있는 첫 번째 아내 다그마르 왕비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에리크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5. 유산과 평가
발데마르 2세는 덴마크 역사에서 '단네브로의 왕'이자 입법자로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사후에 이어진 내전과 왕국의 해체는 그를 '황금기'의 마지막 왕으로 보이게 했다.
5.1. 긍정적 평가
발데마르 2세는 위대한 정복자이자 입법가로서 덴마크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법률 체계를 정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단네브로 국기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은 그의 통치를 국가적 상징과 결부시켜 덴마크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1912년부터 6월 15일은 공식적으로 '발데마르의 날'(Valdemarsdag덴마크어)로 지정되어 덴마크의 33개 연례 '국기 기념일' 중 하나로, 단네브로를 게양하며 기념한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툼페아에는 '덴마크 왕의 정원'이 있는데, 이곳이 전설에 따라 단네브로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진다. 매년 6월 15일에는 이 정원에서 '덴마크 국기의 날'이 기념된다.
5.2. 비판과 논란
발데마르 2세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가 도입한 봉건제는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하급 귀족들을 등장시켰지만, 동시에 자유 농민들이 바이킹 시대 이래 누려왔던 전통적인 권리와 특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그의 말년에는 보른회베트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북독일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는 등 군사적 실패를 겪기도 했다. 단네브로 국기의 기원에 대한 전설은 덴마크의 국가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실제 국기 디자인이 14세기 중반 발데마르 4세 시대에야 확인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전설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6. 영향력
발데마르 2세는 덴마크의 법률, 국가 정체성, 그리고 후대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가 편찬한 유틀란 법전은 1683년까지 덴마크의 주요 법률로 기능하며 사법 체계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 법전은 신의 심판이나 결투 재판과 같은 구시대적인 사법 방식을 폐지하여 덴마크 법률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국가 정체성 측면에서, 단네브로 국기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은 덴마크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연대감을 고취하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비록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발데마르의 날'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국기를 게양하는 전통은 발데마르 2세가 덴마크의 국가적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바를 보여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영토 확장과 이후의 상실은 중세 덴마크의 지리적 경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발트해 연안 지역에 대한 덴마크의 영향력은 그의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봉건제 도입으로 인한 사회 구조의 변화, 특히 농민 권리의 상실은 후대 덴마크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발데마르 2세의 통치는 덴마크가 북유럽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으나, 동시에 사회적 변화의 복잡성과 그에 따른 논란을 남긴 시기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