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발 류튼은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하여 새로운 이름과 정체성을 얻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초기 경험과 교육을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작가적 재능을 발휘하며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발 류튼은 1904년 러시아 제국 얄타(Ялта얄타우크라이나어,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호프슈나이더(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Го프шнайдер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고프슈나이데르러시아어) 또는 레벤톤(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Левентон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레벤톤러시아어)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대인 혈통으로, 고리대금업자인 막스 호프슈나이더와 약사의 딸 안나 "니나" 레벤톤의 아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유명한 여배우 알라 나지모바는 그의 어머니 쪽 이모였다. 류튼의 어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후 두 자녀를 데리고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2. 이민 및 미국 정착
1909년, 류튼은 어머니 안나와 누나 올가와 함께 함부르크에서 출항한 SS 아메리카호의 2등 선실 승객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들은 5월 8일 뉴욕에 도착했으며, 당시 명단에는 안나, 올가, 볼로디미르 호프슈나이더로 기재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안나 호프슈나이더와 자녀들은 이모인 알라 나지모바의 뉴욕주 라이에 있는 집에 합류했다. 이후 어머니 안나는 그녀의 결혼 전 성씨인 '레벤톤'을 사용하여 영화 관련 글을 쓰며 생계를 꾸렸다. 이후 가족은 뉴욕주 포트 체스터 교외로 이사했다. 블라디미르 이반 레벤톤이었던 그의 이름은 발 류튼으로 줄여 불리게 되었고, 그는 1941년 6월 로스앤젤레스의 연방 법원에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3. 교육
1920년 16세의 류튼은 자신이 쓴, 뉴욕의 폭염으로 인해 코셔 닭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가 완전히 꾸며낸 것임이 밝혀지면서 데이리언-스탬퍼드 리뷰의 사회부 기자직을 잃었다. 이후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18편의 논픽션, 소설, 시를 집필했다.
1.4. 초기 경력 개발
류튼은 사회부 기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여러 소설을 집필하며 작가로서의 재능을 꽃피웠다. 이 시기 문학 활동은 훗날 그의 영화 제작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영화 경력
발 류튼은 작가와 홍보 전문가로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후, 데이비드 O. 셀즈닉과 협력하며 주요 작품에 기여했다. 특히 RKO 스튜디오의 호러 유닛 책임자로 임명된 이후 저예산 제작 환경에서도 뛰어난 공포 영화들을 연달아 선보이며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1. 작가 및 홍보 활동
1932년, 류튼은 베스트셀러 펄프 소설 내 침대 아닌 곳(No Bed of Her Own영어)을 집필했으며, 이 소설은 1932년 영화 자기만의 남자의 원작이 되었다. 또한 1933년에는 외설 소설 그루셴카: 세 번의 여인(Grushenka: Three Times a Woman영어)을 비밀리에 출판했는데,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출판 시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러시아어 번역본으로 가장되었으나, 이는 실제 저자를 보호하기 위한 기만이었다. 류튼은 뉴욕시 MGM의 홍보 사무실에서 작가로 일하며, 인기 영화를 소설화하여 잡지에 연재하거나 후에 책으로 엮이는 작업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홍보 문구도 작성했다. 내 침대 아닌 곳의 성공 후 이 직책을 그만두었지만, 같은 해에 출간한 세 편의 소설이 실패하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고골의 타라스 불바의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위해 할리우드로 향했다. 이 일자리는 어머니 니나의 인맥을 통해 얻게 된 것이었다.
2.2. 데이비드 O. 셀즈닉과의 작업
타라스 불바의 영화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류튼은 MGM에 고용되어 셀즈닉의 홍보 담당자 겸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첫 스크린 크레딧은 데이비드 O. 셀즈닉의 1935년 두 도시 이야기에서 "바스티유 습격 장면의 혁명 시퀀스 연출"이었다. 류튼은 또한 셀즈닉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공식 작가로 참여했으며,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 애틀랜타 역에 수백 명의 부상병을 보여주는 장면을 집필하기도 했다. 셀즈닉의 또 다른 직원들은 다큐멘터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에서 류튼이 이 영화의 성공적인 제작은 불가능하며, 셀즈닉이 "인생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한 셀즈닉을 위해 스토리 에디터, 셀즈닉 스튜디오의 문학 작품 발굴 스카우트, 그리고 할리우드 검열 시스템과의 중간 역할도 수행했다.
2.3. RKO 호러 유닛 책임자
1942년, 류튼은 RKO 스튜디오의 호러 유닛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주급은 250 USD였다. 그는 세 가지 규칙을 따라야 했다. 각 영화의 예산은 15.00 만 USD 미만이어야 했고, 상영 시간은 75분 미만이어야 했으며, 제작 시작 전에 상위 감독이 영화 제목을 제공해야 했다. 이러한 엄격한 제약 속에서도 류튼은 자신만의 독특한 공포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2.4. 주요 호러 영화 제작
류튼의 첫 번째 제작 작품은 1942년에 개봉한 캣 피플이었다. 이 영화는 자크 투르뇌르가 감독했으며, 투르뇌르는 이후 류튼을 위해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와 레오파드 맨도 감독했다. 13.40 만 USD의 예산으로 제작된 캣 피플은 거의 400.00 만 USD를 벌어들여 그 해 RKO의 최고 수익작이 되었다. 이 성공 덕분에 류튼은 스튜디오의 간섭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다음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었고, 선정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암시와 실존주의적 양가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자신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의 영화 각본의 최종본을 직접 집필했지만, 바디 스내처와 베들램 두 편을 제외하고는 공동 각본가로 스크린에 크레딧을 올리는 것을 피했다. 이 두 작품에서는 그가 이전에 소설 네 명의 아내들, 웃는 여인, 이 어리석은 열정, 코브라가 노래하는 곳에 사용했던 필명 "카를로스 키스"(Carlos Keith영어)를 사용했다.
2.5. 협업 및 연출 기회 제공
RKO가 자크 투르뇌르를 A급 영화 감독으로 승진시킨 후, 류튼은 로버트 와이즈와 마크 롭슨에게 첫 감독 기회를 제공했다. 1945년부터 1946년 사이, 보리스 칼로프는 류튼이 제작한 세 편의 RKO 영화에 출연했다: 죽음의 섬, 바디 스내처, 그리고 베들램. 1946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칼로프는 류튼이 유니버설 픽처스의 확장된 프랑켄슈타인 프랜차이즈로부터 자신을 구해냈다고 언급하며, 류튼에게 큰 애정과 존경을 표했다.
2.6. 기타 스튜디오에서의 활동
1946년 RKO의 수장이자 류튼의 지지자였던 찰스 코너가 사망하자, 스튜디오는 인력 및 경영상의 혼란을 겪었고, 결국 류튼은 실업 상태에 놓였으며 가벼운 심장마비를 겪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인맥을 통해 사용되지 않던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삶에 기반한 각본을 다시 썼다.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의 여배우 폴렛 고다드가 류튼의 각본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고, 그 대가로 류튼은 1948년 7월까지 고용되었다. (고다드 주연 영화 복수의 신부는 내용이 크게 수정되어 1949년에 개봉했다.) 파라마운트에서 류튼은 1949년에 개봉한 영화 나의 진정한 사랑(My Own True Love영어)도 제작했다. 파라마운트와의 계약이 끝난 후, 류튼은 다시 MGM에서 일하며 데보라 카 주연의 영화 날 믿어줘(Please Believe Me영어)를 제작했고, 이 영화는 1950년에 개봉했다. 이 시기 류튼은 이전의 제자였던 와이즈와 롭슨과 함께 독립 제작사를 설립하려 했으나, 어떤 작품을 먼저 제작할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류튼은 제외되었다. 류튼은 집에서 미국 독립 전쟁의 티콘데로가 요새 전투에 대한 각본을 작업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이 작품에 관심을 보였고, 각본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류튼은 1951년에 개봉한 영화 아파치 드럼스(Apache Drums영어)의 제작을 맡게 되었다. 이 영화는 보통 류튼의 초기 RKO 호러 영화들과 가장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3. 문학 활동
발 류튼은 영화 제작 활동 외에도 다수의 소설과 단편 소설을 남기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그의 문학 작품들은 그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주제 의식과 공포 기법의 초기 형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3.1. 주요 소설
발 류튼의 주요 소설로는 1924년 출판된 향상된 길(The Improved Road영어), 1926년 출판된 코사크 검(The Cossack Sword영어, 미국판은 1931년 영광의 강탈(Rape of Glory영어)로 재출판), 1931년 허버트 커코와 공저한 숙명적인 별 살인 사건(The Fateful Star Murder영어, 스타 페이스풀 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함), 1932년 '코스모 포브스'라는 필명으로 출판한 코브라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obra Sings영어) 등이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1932년 작 내 침대 아닌 곳(No Bed of Her Own영어)은 9개 언어로 번역되어 12개국에서 출판되었으며, 독일어 제목은 로제 마호니: 그녀의 우울증(Rose Mahoney: Her Depression영어)이었다. 이 소설은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불태워진 도서 목록에 포함되기도 했다. 1940년대 후반에는 트라이앵글 북스에서 재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카를로스 키스"라는 필명으로 1933년에 네 명의 아내들(Four Wives영어), 웃는 여인(A Laughing Woman영어), 이 어리석은 열정(This Fool Passion영어)을 발표했고, 같은 해 연간 임대(Yearly Lease영어)를 출판했다.
3.2. 단편 소설
류튼의 단편 소설 중 위어드 테일즈에 1930년 7월 발표된 "바기타"(The Bagheeta영어)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훗날 그의 공포 영화에서 나타나는 고양이 공포증과 "어둠을 두려워하는" 공포 기법이 온전하게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기타"는 1988년 마빈 케이가 편집한 위어드 테일즈: 절대 죽지 않는 잡지(Weird Tales: The Magazine That Never Dies영어)에 재수록되기도 했다.
4. 미완성 영화
발 류튼은 여러 스튜디오에서 다양한 영화 프로젝트를 개발했으나, 재정적 문제나 스튜디오의 변화,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 최종적으로 제작되지 못한 작품들이 다수 존재한다.
- 검은수염(Blackbeard the Pirate영어): 보리스 칼로프 주연으로, 아델 레이와 마크 롭슨이 각본을 썼다. 원래 RKO에서 베들램 다음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며, 칼로프는 찰스턴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미국 해적 아길라르 선장을 연기할 예정이었다.
- 부드럽게 죽어라, 낯선 자여(Die Gently Stranger영어): 스톡홀름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로 데이비드 투타예프가 썼으며 RKO에서 개발되었다.
- 말라키 신부의 기적(Father Malachy's Miracle영어): 에든버러를 배경으로 한 로마 가톨릭 사제에 대한 이야기로 RKO에서 개발되었다.
- 이것이 알려진다면(If This Be Known영어): 딕 파월 주연의 살인 이야기로 RKO에서 개발되었다.
- 변호사(The Lawyer영어, 일명 파리에서 가장 큰 도둑: The Biggest Thief in Paris영어): 페렌츠 몰나르의 희곡을 각색한 코미디로, 성공을 위해 서로의 기술에 의존하는 도둑과 변호사의 파트너십에 관한 이야기이다. 로버트 커밍스와 매리언 카가 주연을 맡고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가 감독할 예정이었으며, 1946년 RKO에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다.
- 그 누구도 눈멀지 않으리(None So Blind영어): 미첼 윌슨의 소설을 마이클 호건이 각색한 심리 스릴러로 장 르누아르가 감독할 예정이었다. 1946년 RKO에서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연기된 후 취소되었다.
- 루크레치아의 가면(A Mask for Lucrezia영어): 파라마운트에서 개발되었으며, 마이클 호건과 아델 레이가 각본을 썼다. 이 프로젝트는 류튼 없이 복수의 신부로 제작되었다.
- 난롯가 귀뚜라미(Cricket on the Hearth영어):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파라마운트에서 개발되었다.
- 야생 오렌지(Wild Oranges영어): 조지프 허제이머의 책을 각색한 작품으로, 이전에 킹 비더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으며 MGM에서 개발되었다.
- 티콘데로가(Ticonderoga영어): 류튼이 각본을 쓴 미국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로, 유니버설이 아파치 드럼스를 류튼에게 맡기기 전에 영화화를 고려했던 작품이다.
5. 개인 생활
발 류튼은 시각 예술가인 아들 발 류튼 주니어를 두었다.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많이 공개되어 있지 않지만,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가족과의 유대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6. 사망
발 류튼은 1951년 3월 14일, 46세의 나이에 시더스-사이네이 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그는 담석증 문제를 겪은 후 두 번의 심장마비를 겪으며 건강이 크게 약화되었다. 사망 당시 그는 컬럼비아 스튜디오에서 스탠리 크레이머와 함께 영화 나의 여섯 명의 죄수(My Six Convicts영어)의 제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해 개봉한 영화 야심작 할리우드에서 커크 더글러스의 캐릭터는 부분적으로 류튼을 바탕으로 했다.
7. 평가 및 유산
발 류튼은 할리우드 역사에서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영화 프로듀서로 평가받으며, 특히 저예산 공포 영화 장르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높은 찬사를 받는다.
7.1. 긍정적 평가
류튼은 스튜디오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이고 지적인 공포 영화를 제작하며 저예산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의 영화는 단순한 괴물이나 점프 스케어에 의존하기보다는, 심리적 공포, 분위기,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후대의 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마틴 스콜세지는 류튼을 "그림자 속의 남자"(The Man in the Shadows영어)라고 칭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존경했다. 스콜세지는 2007년에 마틴 스콜세지 프레젠트: 발 류튼 - 그림자 속의 남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여 류튼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기도 했다.
7.2. 비판 및 논란
류튼의 영화나 제작 방식에 대한 큰 비판이나 논란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대한의 예술적 성과를 이끌어낸 인물로 인정받는 경향이 강하다.
7.3. 영향
류튼의 영화들은 후대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공포 장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했으며, 특히 암시와 서스펜스를 활용하는 기법은 많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커크 더글러스가 1952년 영화 야심작 할리우드에서 연기한 캐릭터는 부분적으로 류튼을 기반으로 했다. 그의 삶과 작업은 여러 책과 다큐멘터리의 영감이 되었다. 2017년 5월, 애덤 로시의 팟캐스트 전기 시리즈 할리우드의 비밀 역사(The Secret History Of Hollywood영어)는 류튼의 삶과 작업에 대한 11부작 시즌 "그림자"(Shadows영어)를 시작했으며, 마크 게이티스가 참여했다. 2021년 6월에는 이 "그림자" 시리즈가 라에타 칼로그리디스와 로시가 공동 집필하고 칼로그리디스, 브래들리 J. 피셔가 프로듀서를 맡는 장편 영화로 제작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8. 영화 필모그래피
발 류튼은 다양한 영화에 참여하며 프로듀서, 각본가, 그리고 기타 여러 역할을 수행했다.
8.1. 제작
발 류튼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영화 목록은 다음과 같다.
8.1.1. RKO 스튜디오
- 캣 피플 (1942)
-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1943)
- 레오파드 맨 (1943)
- 일곱 번째 희생자 (1943)
- 유령선 (1943)
- 캣 피플의 저주 (1944)
- 마드모아젤 피피 (1944)
- 청춘의 반항 (1944)
- 바디 스내처 (1945)
- 죽음의 섬 (1945)
- 베들램 (1946)
8.1.2. 기타 스튜디오
- 나의 진정한 사랑 (1949) (파라마운트)
- 날 믿어줘 (1950) (MGM)
- 아파치 드럼스 (1951) (유니버설)
8.2. 각본
류튼이 각본가로 참여하거나 필명을 사용한 작품들이다.
- 자기만의 남자 (1932, 소설 내 침대 아닌 곳 원작)
- 바디 스내처 (1945, 카를로스 키스 필명 사용)
- 죽음의 섬 (1945, 비공식 크레딧)
- 베들램 (1946, 카를로스 키스 필명 사용)
8.3. 기타 역할
발 류튼이 프로듀서나 각본가 외의 역할로 참여한 작품들이다.
- 두 도시 이야기 (1935, 바스티유 습격 시퀀스의 비공식 제2 유닛 감독 보조)
- 스타 탄생 (1937, 비공식 편집 보조)
- 그 해의 작품 (1940, 감독, 허버트 커코 필명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