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사
박경호는 개인적인 배경과 가족 관계,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축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박경호는 1930년 5월 20일 일본 제국 통치하의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났다. 1946년 해방 후에는 동생 박경화와 함께 대한민국으로 피난했다. 이후 경신중학교를 졸업했다.
1.2. 가족
그의 동생 박경화 또한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39년 6월 2일 태어나 2023년 4월 4일에 사망했다. 박경화 역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바 있다.
1.3. 사망
박경호는 2021년 3월 29일 서울특별시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선수 경력
박경호는 1950년대 한국 축구의 황금기를 이끈 주요 선수 중 한 명으로,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1. 클럽 경력
그는 당시 한국에서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모여 있던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CIC FC) 소속으로 클럽 경력을 쌓았다.
2.2. 국가대표 경력
박경호는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팀의 주요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활약하며 여러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3. 주요 성과 및 수상
박경호는 선수로서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다.
3.1. AFC 아시안컵
박경호는 1956년 홍콩에서 개최된 1956년 AFC 아시안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초대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대표팀에는 그를 비롯해 최정민, 우상권, 성낙운, 함흥철, 김홍복, 이수남, 김지성, 차태성, 박재승, 석진두, 손명섭, 김동근, 김진우, 김영진, 박상훈, 최광석 등의 선수들이 있었으며, 김성간 감독의 지휘 아래 아시아 축구의 정상에 올랐다.
3.2. 아시안 게임
그는 1958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195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종목에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4. 지도자 및 행정 경력
선수 은퇴 후 박경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축구 지도자 및 행정가로서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4.1. 지도자 활동
1961년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박경호는 경희대학교에 편입하여 축구부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다. 이후 한양공업고등학교의 체육 교사를 역임했으며, 건국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서울대학교 축구팀의 감독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썼다.
4.2. 국제 활동 및 고문
박경호는 한국 축구뿐만 아니라 일본 축구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4년 J리그 창설과 함께 오이타 트리니타의 기술 고문으로 합류하여 2010년까지 약 16년간 활동했다. 그는 이마니시 가즈오의 소개로 오이타에 합류했으며, 초대 감독인 문정식과 황보관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 선수들을 오이타에 소개하고 영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노력은 오이타 트리니타의 관중 수 증가에도 기여했다. 또한 그는 노정윤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추천하여 한국인 J리거 1호 탄생을 돕기도 했다. 이 외에도 대한축구협회 이사, 한국프로축구연맹 경기 이사 등 주요 행정직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행정에도 참여했다.
5. 기타 활동
박경호는 축구 선수 및 지도자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5.1. 언론 활동
그는 1972년부터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대중에게 축구 경기를 해설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5.2. 저술 활동
박경호는 칼럼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여러 권의 축구 관련 저서를 출판했다. 특히 『한국 축구 100년 비사』를 공저했으며, 이 책은 일본에서 『日本は敵・JAPANは友 打倒日本を貫いた韓国サッカー百年恨の秘話일본은 적·재팬은 벗 타도 일본을 관철한 한국 축구 백년 한의 비화일본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6. 평가 및 영향력
박경호는 한국과 일본 축구계에 걸쳐 다방면으로 기여하며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6.1. 한국 축구에 대한 기여
박경호는 한국 축구의 역사에서 중요한 선구자이자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1950년대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서 아시안컵 우승과 아시안 게임 은메달 획득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은퇴 후에도 여러 대학 및 기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수많은 후배 축구인들을 양성했고,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 등에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 시스템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언론 및 저술 활동은 축구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 축구 문화 확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2. 일본 축구에 대한 영향
그의 일본 축구계 활동, 특히 오이타 트리니타의 기술 고문으로서의 역할은 한국과 일본 축구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인 선수와 지도자들을 일본 J리그에 소개하며 한국 축구의 우수성을 알리고, 일본 프로축구의 초창기 발전에 기여했다. 노정윤 선수의 J리그 진출을 도운 것은 한국인 선수의 해외 진출을 위한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한 사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