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성낙운은 1926년 2월 2일 조선, 즉 당시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축구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선수로서의 기량을 키워나갔다.
2. 선수 경력
성낙운은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의 선수 경력은 뛰어난 득점력과 경기 이해도를 바탕으로 국내외 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2.1. 클럽 경력
성낙운은 서울 축구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서울 축구단은 당시 국군 소속의 팀으로, 한국 축구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팀 중 하나였다. 그는 클럽 팀에서도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주요 득점원으로 자리매김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성낙운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이다. 그는 한국 전쟁 직후의 어려운 시기에 국가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다.

그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1954년 FIFA 월드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공격수로 참가했다. 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로, 성낙운은 당시 홍덕영, 박규정, 우상권, 최정민, 정남식 등과 함께 대표팀의 주요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비록 팀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본선 무대에서 세계적인 강팀들과 겨루며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성낙운은 아시아 축구의 최정상에 서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56년 홍콩에서 개최된 1956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끌며 초대 아시안컵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6년 아시안컵 우승은 대한민국 축구가 아시아의 강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성낙운은 아시안 게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54년 아시안 게임과 1958년 아시안 게임에 연이어 참가하여 두 대회에서 총 6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이 2회 연속 은메달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의 득점력은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3. 은퇴 후 활동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성낙운은 축구 심판으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약 12년간 국제 심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국제 경기에 참여했다. 심판으로서의 활동은 그가 선수 시절 쌓은 깊은 축구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기 운영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4. 사망
성낙운은 1997년 5월 28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을 지켜보며 깊은 관심을 가졌다.
5. 평가와 유산
성낙운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초기 황금기를 이끈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 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량과 리더십으로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국민들에게 희망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월드컵 첫 본선 진출, 아시안컵 우승, 아시안 게임 2회 연속 은메달 획득 등 그의 업적은 한국 축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수 은퇴 후 심판으로서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며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와 국제적 교류에도 기여했다. 성낙운은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어려운 시기에 스포츠를 통해 국민적 단합과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일조한 역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축구의 도전과 성공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