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배경
모리스 자르는 유년기부터 교육 과정을 거쳐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자르는 1924년 9월 13일 프랑스 리옹에서 라디오 기술 감독인 앙드레 자르와 가브리엘 르네 불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소르본 대학교의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르본을 떠나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 등록하여 작곡과 화성학을 공부했으며, 주 전공 악기로 타악기를 선택했다.

2. 경력
모리스 자르는 프랑스에서의 초기 경력을 시작으로 영화 음악 분야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텔레비전 작업에도 참여하여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2.1. 프랑스에서의 초기 경력
음악 교육을 마친 후 자르는 국립인민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며, 1951년 프랑스에서 첫 영화 음악을 녹음했다. 그는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세상의 모든 기억》의 음악을 작곡했고, 초기에는 조르주 프랑주 감독과의 협업으로 잘 알려졌다.
2.2. 영화 음악 작곡
자르의 영화 음악 경력은 1961년 미국의 영화 제작자 샘 스피겔이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2년 서사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음악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면서 큰 전환점을 맞았다. 이 작품의 찬사받는 음악으로 자르는 첫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린 감독의 모든 영화 음악을 작곡하게 되었다. 이 성공에 이어 그는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영화 《대열차 작전》(1964)과 《그랑프리》(1966)의 음악을 작곡했으며, 그 사이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로 또 다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에는 후에 "썸웨어 마이 러브"(Somewhere My Love)라는 노래의 멜로디가 된 서정적인 멜로디의 "라라의 테마"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곡으로 그는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토파즈》(1969) 작업에도 참여했다. 히치콕 감독은 이 영화 작업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자르의 음악에 대해서는 만족감을 표하며 "나는 당신에게 위대한 영화를 주지 못했지만, 당신은 나에게 위대한 음악을 주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딸》(1970)의 음악은 린 감독의 취향에 따라 전통적인 아일랜드 음악 스타일을 완전히 배제하고 작곡되었다. 《라이언의 딸》에 수록된 "잇 워즈 어 굿 타임"(It Was a Good Time)은 라이자 미넬리와 같은 음악계 스타들에게 녹음되어 1970년대에 널리 불렸다. 자르는 또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1969)과 존 휴스턴 감독의 《왕이 되려던 사나이》(1975)의 음악에도 기여했다.
1976년에는 무스타파 아카드 감독 및 제작자의 영화 《메시지》의 음악으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이후 《목격자》(1985)와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음악을 담당했으며, 《죽은 시인의 사회》로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자르는 《세계의 지붕에 있는 섬》(1974), 《드림스케이프》(1984), 《에너미 마인》(1985), 《매드 맥스 3》(1985)와 같은 공상 과학 영화의 음악에도 도전했다. 《매드 맥스 3》의 음악은 오케스트라에 합창단, 피아노 4대, 파이프 오르간, 디저리두, 푸자라, 이국적인 타악기, 그리고 세 대의 옹드 마르트노가 추가되어 작곡되었다. 옹드 마르트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나사렛 예수》, 《신부》, 《프랜서》 등 자르의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 또한, 발랄라이카는 자르의 《닥터 지바고》 음악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
1990년, 자르는 초자연적 로맨스 스릴러 영화 《사랑과 영혼》의 음악으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음악은 동료 영화 작곡가인 알렉스 노스가 작곡한 "언체인드 멜로디"에 기반을 두었다. 그가 음악을 제공한 다른 영화로는 그가 직접 악보를 쓰고 모든 노래를 작곡한 로맨틱 곡 "마리아치 세레나데"(Mariachi Serenade)가 포함된 《구름 속의 산책》(1995)이 있다. 또한, 《위험한 정사》(1987)의 격정적인 러브 테마와 《어두워진 후에, 내 사랑》(1990)의 분위기 있는 전자 사운드스케이프도 그의 공로이다. 그는 동료 작곡가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는데, 존 윌리엄스는 자르의 사망 시 "그는 영화 음악에 대한 영구적인 기여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의 유산으로 풍요로워졌다"고 말했다. 자르는 "20세기 영화 음악의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리며 "영화 산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이자 "미묘한 언더스코어링과 웅장하고 광범위한 테마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경력 후반에는 전자 사운드를 실험하기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2.1. 주요 감독 협업
모리스 자르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명감독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데이비드 린 감독과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 《라이언의 딸》 등 여러 작품에서 협력하며 그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또한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과 《대열차 작전》, 《그랑프리》, 《피크서》, 《비범한 선원》에서 함께 작업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토파즈》,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 존 휴스턴 감독의 《로이 빈의 삶과 시대》, 《왕이 되려던 사나이》, 《매킨토시의 사나이》에서도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피터 위어 감독과의 협력도 두드러져, 《위험한 해》, 《목격자》, 《모스키토 코스트》, 《죽은 시인의 사회》, 《피어리스》 등의 작품에서 그의 음악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무스타파 아카드 감독과는 《메시지》와 《사막의 라이온》을 함께 작업했다.
2.2.2. 음악 스타일과 악기 구성
자르는 주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지만, 1980년대에는 신시사이저 음악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자르는 《목격자》를 위한 그의 전자 음악이 실제로는 오케스트라 음악보다 제작에 더 많은 노력, 시간, 비용이 들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그의 전자 음악으로는 《위험한 정사》, 《위험한 해》, 《파이어폭스》, 《노 웨이 아웃》 등이 있다. 이 시기의 그의 많은 작품들은 또한 《고릴라 인 더 미스트》, 《죽은 시인의 사회》, 《모스키토 코스트》, 《제이콥스 래더》와 같은 전자 음악과 어쿠스틱 음악의 혼합을 특징으로 한다.
《매드 맥스 3》의 음악에는 합창단, 피아노 4대, 파이프 오르간, 디저리두, 푸자라, 다양한 이국적인 타악기, 그리고 세 대의 옹드 마르트노가 사용되었다. 옹드 마르트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나사렛 예수》, 《신부》, 《프랜서》 등 자르의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특징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발랄라이카는 《닥터 지바고》의 음악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어 러시아적 분위기를 강조했다.
2.3. 텔레비전 작업
자르의 텔레비전 작업에는 1967년 CBS에서 방영된 단명 웨스턴 시리즈 《시마론 스트립》의 주제곡,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미니시리즈 《나사렛 예수》(1977)의 음악, 《쇼군》(1980), 그리고 PBS의 《그레이트 퍼포먼스》의 주제곡이 포함된다. 그는 2001년 홀로코스트를 다룬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봉기》를 끝으로 음악 작업을 마쳤다.
3. 수상 및 후보 지명
모리스 자르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업적으로 수많은 상과 후보 지명 기록을 남겼다. 그는 아카데미상에서 총 9회 후보에 올라 3차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중 8번은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부문이었고, 한 번은 최우수 오리지널 곡 부문이었다.
그는 또한 골든 글로브상에서 10회 후보에 지명되어 4회 수상했으며,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에서는 3회 수상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AFI)는 자르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음악을 '가장 위대한 영화 음악 100선' 목록에서 3위로 선정했다. 그의 다른 작품인 《닥터 지바고》(1965), 《인도로 가는 길》(1984), 《라이언의 딸》(1970)의 음악도 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 외에도 1993년 ASCAP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되었다.
연도 | 시상식 | 부문 | 프로젝트 | 결과 |
---|---|---|---|---|
1962 | 아카데미상 |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수상 |
1963 | 《시벨의 일요일》 | 후보 | ||
1965 | 《닥터 지바고》 | 수상 | ||
1972 | 최우수 오리지널 곡 | 《로이 빈의 삶과 시대》 (Marmalade, Molasses & Honey) | 후보 | |
1976 |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 《메시지》 | 후보 | |
1984 | 《인도로 가는 길》 | 수상 | ||
1985 | 《목격자》 | 후보 | ||
1988 | 《고릴라 인 더 미스트》 | 후보 | ||
1990 | 《사랑과 영혼》 | 후보 | ||
1985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 최우수 영화 음악 | 《인도로 가는 길》 | 수상 |
《목격자》 | 수상 | |||
1989 | 《죽은 시인의 사회》 | 수상 | ||
1962 | 골든 글로브상 |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수상 |
1965 | 《닥터 지바고》 | 수상 | ||
1966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 후보 | ||
1973 | 《로이 빈의 삶과 시대》 | 후보 | ||
1975 | 《왕이 되려던 사나이》 | 후보 | ||
1984 | 《인도로 가는 길》 | 수상 | ||
1985 | 《목격자》 | 후보 | ||
1986 | 《모스키토 코스트》 | 후보 | ||
1988 | 《고릴라 인 더 미스트》 | 후보 | ||
1995 | 《구름 속의 산책》 | 후보 | ||
1999 | 《선샤인》 | 후보 | ||
1962 | 그래미상 | 시각 매체를 위한 베스트 스코어 사운드트랙 | 《아라비아의 로렌스》 | 후보 |
1965 | 《닥터 지바고》 | 수상 | ||
1970 | 《라이언의 딸》 | 후보 | ||
1984 | 《인도로 가는 길》 | 후보 | ||
1985 | 《목격자》 | 후보 | ||
1987 | 《위험한 정사》 | 후보 | ||
1980 | 새턴상 | 최우수 음악 | 《부활》 | 후보 |
1985 | 《신부》 | 후보 | ||
1990 | 《사랑과 영혼》 | 수상 |
4. 사생활
모리스 자르의 사생활은 여러 결혼과 자녀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졌다.
4.1. 결혼과 자녀
자르는 생애 동안 네 번 결혼했으며, 처음 세 번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다. 1940년대에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자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프랑세트 페조와 결혼하여 아들 장 미셸 자르를 낳았다. 장 미셸 자르는 전자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연주자, 음악 프로듀서이다. 장 미셸이 다섯 살이었을 때, 모리스 자르는 아내와 헤어져 미국으로 이주했고, 장 미셸은 프랑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남았다.
1965년에 자르는 프랑스 배우 다니 사발과 결혼했으며, 그들은 딸 스테파니 자르를 두었다. 다음으로 그는 미국 배우 로라 데본과 1967년부터 1984년까지 결혼했으며, 이때 로라 데본의 아들인 케빈 자르를 입양했다. 케빈 자르는 《툼스톤》과 《영광》(1989)과 같은 영화의 각본가로 활동했다. 198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퐁 F. 콩(Fong F. Khong)과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5. 사망
모리스 자르는 암으로 투병하다 2009년 3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유산 및 평가
모리스 자르는 영화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개인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에게 잘못 귀속된 명언 사건은 언론의 정보 처리 방식에 대한 중요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모리스 자르는 "20세기 영화 음악의 거장 중 한 명"이자 "영화 산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묘하고 섬세한 배경 음악부터 웅장하고 광범위한 테마까지 다양한 음악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오케스트라 편곡을 넘어 경력 후반에는 전자 음악 사운드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후대의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저명한 작곡가 존 윌리엄스는 자르의 사망 시 "그는 영화 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기여로 길이 기억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의 유산으로 인해 풍요로워졌다"고 언급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2005년, 자르는 유럽 영화상에서 음악가로는 최초로 '세계적 공헌상'을 수상하며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2007년에는 프랑스에서 그의 음악적 여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모리스 자르의 궤적》(Bandes Originals: Maurice Jarre / In The Tracks Of Maurice Jarre)이 개봉되기도 했다.
6.2. 비판 및 논란
모리스 자르의 사후 유산 상속 문제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모든 재산과 저작권을 그의 미망인에게 남기고, 세 자녀에게는 사실상 상속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자르는 수십 년간 미국 거주자였기 때문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에 따라 유산 분할이 이루어졌으며, 캘리포니아에서는 프랑스와 달리 가족 신탁을 설정하고 유산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이에 자녀들은 프랑스법상의 유류분(상속인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상속 지분)을 받기 위해 그의 유언을 뒤집으려 시도했으며, 그의 마지막 아내는 프랑스 음악 저작권 협회(SACEM)가 보유한 권리를 주장했다.
2017년, 프랑스 파기원은 미셸 콜롱비에의 유사한 사건과 병행하여 2014년 고등법원의 판결을 확정했고, 신탁 관리인 푸이 퐁 콩(Fui Fong Khong)에게 유류분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 판사들은 1819년의 선취상속권이 불평등하다는 이유로 2011년부터 위헌으로 선언되었으며, 유류분의 부재가 프랑스의 국제 공공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원고들이 불안정한 재정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2024년 유럽 인권 재판소는 파기원의 판결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리며 이 분쟁은 종결되었다.
6.3. 영향
모리스 자르의 음악은 영화 장르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혁신적인 오케스트라 사용, 독특한 악기 선택, 그리고 전통과 전자 음악의 조화는 후대의 영화 음악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특정 감독들과의 지속적인 협업을 통해 영화의 서사를 음악적으로 완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영화 음악이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영화의 중요한 요소임을 각인시켰다. 특히 존 윌리엄스와 같은 동료 음악가들의 찬사는 그가 영화 음악계에 남긴 지속적인 유산과 영향력을 분명히 보여준다.
6.4. 잘못 귀속된 인용문 및 언론의 처리 방식
모리스 자르의 사망 직후, "사람들은 나의 삶 자체가 하나의 긴 사운드트랙이었다고 얘기할 것이다. 음악은 내 삶이었고 인생의 활력소였으며, 사람들은 내 음악으로써 나를 기억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그의 명언으로 영어 위키백과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아일랜드 더블린대 학생 셰인 피츠제럴드가 창작한 허위 정보였다.
여러 위키백과 사용자들의 출처 요구 및 문구 삭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가짜 명언은 수많은 언론사를 통해 인용되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셰인 피츠제럴드는 이후 "위키피디아는 통과. 언론은 낙제"라고 말하며,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세태를 보여주기 위해 이 글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100% 모리스 자르의 명언으로 남겨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언론과 블로그를 통해 이 허위 정보가 확산되는 피해를 보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독자란 편집자 칼럼에서 위키백과에 실린 허위 정보를 인용하여 기사로 내보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피츠제럴드는 언론이 "인터넷 정보를 검증하지 않은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오보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비난하기에만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그의 정보가 거짓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짜 인용문은 전 세계로 계속 퍼져나갔다. 이 사건은 "최근 언론의 무분별함을 폭로했다"는 주장과 "전 세계에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게 된 것은 잘못되었다"는 비판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헨리크 바투타 사건과 함께 종종 회자되곤 한다.
7. 필모그래피
모리스 자르가 작업한 시각 매체 음악 작품의 전체 목록은 다음과 같다.
7.1. 영화
연도 | 제목 | 감독 | 비고 |
---|---|---|---|
1957 | 《불타는 퓨즈》 | 앙리 데코앵 | 루이 가스테, 필리프 제라르와 공동 작곡 |
1958 | 《벽에 부딪히다》 | 조르주 프랑주 | |
1959 | 《유혹하는 자들》 | 장피에르 모키 | |
《만에 있는 야수》 | 피에르 슈날 | ||
《정오의 별들》 | 자크 에르토, 마르셀 이샤크 | ||
《Vous n'avez rien à déclarer?》 | 클레망 뒤후르 | ||
《얼굴 없는 눈》 | 조르주 프랑주 | ||
1960 | 《뜨거운 손》 | 제라르 우리 | |
《줄타기의 연인들》 | 장샤를 뒤드루메 | ||
《거울의 균열》 | 리처드 플라이셔 | ||
《재량에 따른 회복》 | 라즐로 베네데크 | ||
1961 | 《대통령》 | 앙리 베르누유 | |
《살인자의 스포트라이트》 | 조르주 프랑주 | ||
《빅 갬블》 | 리처드 플라이셔 | ||
《죄악의 세 얼굴》 | 프랑수아 빌리에 | ||
《유명한 연애사》 | 미셸 브와롱 | ||
1962 | 《정의의 올리브나무》 | 제임스 블루 | |
《당신의 눈에 태양》 | 자크 부르동 | ||
《테레즈 데케루》 | 조르주 프랑주 | ||
《지상 최대의 작전》 | 켄 애너킨, 앤드루 마턴, 베른하르트 비키 | ||
《시벨의 일요일》 | 세르주 부르기뇽 | ||
《낙원의 새》 | 마르셀 카뮈 |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데이비드 린 | ||
《마드리드에서 죽다》 | 프레데리크 로시프 | ||
1963 | 《산만한 왕》 | 프랑수아 레테리에 | |
《주덱스》 | 조르주 프랑주 | ||
1964 | 《죽음, 너의 승리는 어디에?》 | 에르베 브롬베르제 | |
《창백한 말을 보라》 | 프레드 진네만 | ||
《대열차 작전》 | 존 프랑켄하이머 | ||
《덩케르크에서의 주말》 | 앙리 베르누유 | ||
1965 | 《컬렉터》 | 윌리엄 와일러 | |
《닥터 지바고》 | 데이비드 린 | ||
1966 | 《프로페셔널》 | 리처드 브룩스 |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 르네 클레망 | ||
《갬빗》 | 로널드 님 | ||
《그랑프리》 | 존 프랑켄하이머 | ||
1967 | 《장군들의 밤》 | 아나톨 리트바크 | |
《25시》 | 앙리 베르누유 | 조르주 들르뤼와 공동 작곡 | |
1968 | 《판초 빌라의 습격》 | 버즈 쿨릭 | |
《5 카드 스터드》 | 헨리 헤서웨이 | ||
《피크서》 | 존 프랑켄하이머 | ||
《이사도라》 | 카렐 라이스 | ||
1969 | 《비범한 선원》 | 존 프랑켄하이머 | |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 | 루키노 비스콘티 | ||
《토파즈》 | 알프레드 히치콕 | ||
1970 | 《유일한 게임》 | 조지 스티븐스 | |
《엘 콘도르》 | 존 길러민 | ||
《라이언의 딸》 | 데이비드 린 | ||
1971 | 《플라자 스위트》 | 아서 힐러 | |
《붉은 태양》 | 테렌스 영 | ||
《지옥의 계절》 | 넬로 리시 | ||
1972 | 《교황 요안나》 | 마이클 앤더슨 | |
《로이 빈의 삶과 시대》 | 존 휴스턴 | ||
《달에 사는 금잔화의 감마선 효과》 | 폴 뉴먼 | ||
1973 | 《재의 수요일》 | 래리 피어스 | |
《매킨토시의 사나이》 | 존 휴스턴 | ||
1974 | 《세계의 지붕에 있는 섬》 | 로버트 스티븐슨 | |
1975 | 《만딩고》 | 리처드 플라이셔 | 머디 워터스와 공동 작곡 |
《포제》 | 커크 더글러스 | ||
《왕이 되려던 사나이》 | 존 휴스턴 | ||
《시카모어 씨》 | 판초 코너 | ||
1976 | 《악마에게 소리쳐라》 | 피터 R. 헌트 | |
《마지막 거물》 | 엘리아 카잔 | ||
《메시지》 | 무스타파 아카드 | ||
1977 | 《왕자와 거지》 | 리처드 플라이셔 | |
《행진 또는 죽음》 | 딕 리처즈 | ||
1978 | 《등껍질 위의 거북이처럼》 | 뤽 베로 | |
《두 개의 고독》 | 라이오넬 체트윈드 | ||
1979 | 《양철북》 | 폴커 슐뢴도르프 | |
《윈터 킬스》 | 윌리엄 리처트 | ||
《루블린의 마법사》 | 메나헴 골란 | ||
1980 | 《미국 성공 회사》 | 윌리엄 리처트 | |
《블랙 마블》 | 해럴드 베커 | ||
《노아의 방주 마지막 비행》 | 찰스 재럿 | ||
《부활》 | 다니엘 페트리 | ||
1981 | 《사막의 라이온》 | 무스타파 아카드 | |
《츄츄 앤 더 필리 플래시》 | 데이비드 로웰 리치 | 피트 루골로와 공동 작곡 | |
《위조의 원》 | 폴커 슐뢴도르프 | ||
《탭스》 | 해럴드 베커 | ||
1982 | 《울지 마, 그저 천둥일 뿐이야》 | 피터 워너 | |
《파이어폭스》 | 클린트 이스트우드 | ||
《병원광 시대》 | 게리 마셜 | ||
《위험한 해》 | 피터 위어 | ||
1983 |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위해》 | 로베르트 엔리코 | |
1984 | 《탑 시크릿》 | 짐 에이브럼스, 데이비드 주커, 제리 주커 | |
《드림스케이프》 | 조지프 루벤 | ||
《인도로 가는 길》 | 데이비드 린 | ||
1985 | 《목격자》 | 피터 위어 | |
《매드 맥스 3》 | 조지 밀러, 조지 오길비 | 브라이언 메이의 테마곡 포함 | |
《신부》 | 프랑크 로담 | ||
《에너미 마인》 | 볼프강 페터젠 | ||
1986 | 《타이판》 | 대릴 듀크 | |
《모스키토 코스트》 | 피터 위어 | ||
《솔라베이비즈》 | 앨런 존슨 | ||
1987 | 《도쿄 블랙아웃》 | 마스다 토시오 | |
《노 웨이 아웃》 | 로저 도널드슨 | ||
《줄리아 줄리아》 | 피터 델 몬테 | ||
《가비: 진실한 이야기》 | 루이스 만도키 | ||
《위험한 정사》 | 에이드리언 라인 | ||
1988 | 《먼 천둥》 | 릭 로젠탈 | |
《와일드파이어》 | 잘만 킹 | ||
《파라도르의 달》 | 폴 마줄스키 | ||
《고릴라 인 더 미스트》 | 마이클 앱티드 | ||
《눈물의 가마》 | 자크 도르프만 | ||
《칵테일》 | 로저 도널드슨 | 거부된 음악; J. 피터 로빈슨으로 대체 | |
1989 | 《챈스 아 유》 | 에밀 아돌리노 | |
《죽은 시인의 사회》 | 피터 위어 | ||
《프랜서》 | 존 D. 핸콕 | ||
《적, 사랑 이야기》 | 폴 마줄스키 | ||
1990 | 《솔라 크라이시스》 | 리처드 C. 사라피안 | |
《사랑과 영혼》 | 제리 주커 | ||
《제이콥스 래더》 | 에이드리언 라인 | ||
《거의 천사》 | 존 코넬 | ||
1991 | 《온리 더 론리》 | 크리스 콜럼버스 | |
《내면의 불꽃》 | 질리언 암스트롱 | ||
1992 | 《지는 태양》 | 로우 토모노 | |
《스쿨 타이즈》 | 로버트 맨델 | ||
《늑대의 그림자》 | 자크 도르프만, 피에르 마그니 | ||
1993 | 《미스터 존스》 | 마이크 피기스 | |
《피어리스》 | 피터 위어 | ||
1994 | 《더 리버 와일드》 | 커티스 핸슨 | 거부된 음악; 제리 골드스미스로 대체 |
1995 | 《구름 속의 산책》 | 알폰소 아라우 | |
1996 | 《선체이서》 | 마이클 치미노 | |
《화이트 스콜》 | 리들리 스콧 | 거부된 음악; 제프 로나와 한스 짐머로 대체 | |
1997 | 《낮과 밤》 | 베르나르앙리 레비 | |
1999 | 《선샤인》 | 이스트반 사보 | |
2000 | 《나는 아프리카를 꿈꿨다》 | 휴 허드슨 |
7.2. 텔레비전
연도 | 제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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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위대한 유산》 | 텔레비전 영화 |
1975 | 《침묵》 | 텔레비전 영화 |
1977 | 《나사렛 예수》 | 미니시리즈 |
1978 | 《이시: 그의 부족의 마지막》 | 텔레비전 영화 |
《사용자들》 | 텔레비전 영화 | |
《애도하는 일렉트라》 | 텔레비전 영화 | |
1980 | 《쇼군》 | 미니시리즈; 5회 에피소드 |
《에놀라 게이》 | 텔레비전 영화 | |
1982 | 《얼음에서 나오다》 | 텔레비전 영화 |
1984 | 《삼손과 데릴라》 | 텔레비전 영화 |
1986 | 《사과》 | 텔레비전 영화 |
1988 | 《메리 파건 살인 사건》 | 미니시리즈; 2회 에피소드 |
2001 | 《봉기》 | 텔레비전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