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Maurice Denis모리스 드니프랑스어, 1870년 11월 25일 ~ 1943년 11월 13일)는 프랑스의 화가, 장식 예술가, 작가이다. 그는 인상주의와 현대 미술 사이의 전환기에 중요한 인물로, 나비파, 상징주의, 그리고 후기 신고전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드니의 예술 이론은 입체파, 야수파, 추상 미술 등 후대 미술 운동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는 회화의 본질을 '특정 질서로 배열된 색채로 덮인 평면'으로 정의하며, 현대 미술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인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종교 예술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며 성화화단(Ateliers d'Art Sacré)을 설립하고 여러 교회의 내부 장식을 담당했다. 드니는 건축 장식, 서적 삽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종교적 신념과 예술적 이상을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신앙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예술의 본질로 보았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신성하게 여기는 철학을 담고 있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2.1. 어린 시절과 교육
모리스 드니는 1870년 11월 25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해안 도시인 그랑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박한 농민 출신으로, 4년간 군 복무 후 기차역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방앗간 주인의 딸로 재봉사로 일했다. 1865년 결혼 후, 부모님은 파리 교외의 생제르맹앙레로 이사했으며, 아버지는 파리 서부 철도 관리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모리스는 외동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가장 큰 열정은 종교와 예술이었다. 그는 13세 때인 1884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1885년에는 지역 교회에서 열리는 의식의 색채, 촛불, 향에 대한 감탄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여 특히 프라 안젤리코, 라파엘로, 보티첼리의 작품을 존경했다. 15세 때 그는 일기에 "그래, 나는 기독교 화가가 되어야 하고, 기독교의 모든 기적을 기념해야 하며,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으며 종교적 신념과 예술적 소명을 결합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1887년에는 피에르 퓌뷔 드 샤반의 작품에서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발견했다.
드니는 파리에서 가장 명망 높은 학교 중 하나인 리세 콩도르세에 입학하여 철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1887년 말에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1888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줄리안느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화가이자 이론가인 쥘 조제프 르페브르에게 사사했다. 드니는 1888년 7월 에콜 데 보자르 입학 시험에 합격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또 다른 시험에 합격하여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2. 초기 예술적 영향
모리스 드니의 초기 예술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접한 프라 안젤리코, 라파엘로, 보티첼리와 같은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들의 작품이었다. 그는 이들의 작품에서 종교적 주제와 이상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15세 때 일기에 "기독교 화가가 되어 기독교의 모든 기적을 기념해야 한다"고 쓴 것은 이러한 초기 종교적, 예술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1887년에는 피에르 퓌뷔 드 샤반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드 샤반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은 이후 드니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평면성과 양식화된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 부근 카페 볼포니에서 열린 폴 고갱과 그의 동료들의 작품 전시는 드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드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인상주의자들처럼 자연을 향해 열린 창문이 아니라, 견고하게 장식적이고, 강력한 색채를 지녔으며, 거친 선으로 둘러싸여 분할된 표면들이었다"고 썼다. 고갱의 작품, 특히 1889년에 처음 전시된 고갱의 골짜기 위의 암소(Vache au-dessus du gouffre프랑스어)의 밝은 색채 형태는 1890년 10월 드니의 테라스 위의 햇빛 얼룩(Taches du soleil sur la terrace프랑스어)과 이후 그리스도의 고독(Solitude du Christ프랑스어, 1918)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들은 드니가 인상주의를 넘어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예술 경력 및 발전
3.1. 나비파 결성과 활동


줄리안느 아카데미에서 모리스 드니는 폴 세뤼지에, 피에르 보나르 등 회화에 대한 공통된 생각을 가진 동료 학생들을 만났다. 보나르를 통해 그는 에두아르 뷔야르, 폴 랑송, 케르그자비에 루셀, 헤르만폴 등 다른 예술가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1890년, 이들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에서 이름을 따온 나비파 그룹을 결성했다. 그들의 철학은 실증주의와 오귀스트 콩트, 이폴리트 텐의 저술에 기반을 두었으며,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거부하고 보다 이상주의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드니는 1909년에 "예술은 더 이상 자연의 사진처럼 우리가 수집하는 시각적 감각이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창조한 것이며, 자연은 단지 그 계기일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드니는 처음에는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 양식에 끌렸으나, 너무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 가장자리에 있는 카페 볼포니에서 열린 고갱과 그의 친구들의 작품 전시에 매료되었다. 드니는 나중에 이를 회상하며 "얼마나 놀라웠고, 이어진 얼마나 큰 계시였던가! 인상주의자들처럼 자연을 향해 열린 창문이 아니라, 견고하게 장식적이고, 강력한 색채를 지녔으며, 거친 선으로 둘러싸여 분할된 표면들이었다"고 썼다. 고갱의 작품은 드니의 작업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889년에 처음 선보인 고갱의 골짜기 위의 암소의 밝은 색채 형태는 1890년 10월 드니의 테라스 위의 햇빛 얼룩에 나타났고, 이후 드니의 그리스도의 고독(1918)에도 반영되었다.
나비파는 1890년대 말까지 점차 해체되었지만, 그들의 사상은 보나르와 뷔야르뿐만 아니라 앙리 마티스와 같은 나비파 외부 화가들의 후기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모리스 드니는 이 그룹의 이론적 리더이자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3.2. 상징주의와 일본주의
18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드니는 이후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이끌게 될 예술 철학에 도달했는데, 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즉, 예술의 본질은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에게 이 둘은 유사한 것이었다. 그는 1895년 3월 24일 일기에 "예술은 확실한 피난처로 남아 있으며, 이제부터 우리 삶의 이유에 대한 희망이자, 우리 삶에 작은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우리가 창조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위로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꽃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빛, 나무의 비례와 파도의 형태, 얼굴의 완벽함에 새겨져 있다.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고통, 희망, 사유의 삶을 새겨 넣는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1890년대 초반은 예술계의 전환기였다. 1890년 빈센트 반 고흐와 1891년 조르주 쇠라의 죽음, 그리고 폴 고갱의 첫 타히티 출발이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주최하는 연례 살롱을 통한 예술 지배는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1884년 독립 살롱이 형성되었고, 1890년에는 공식 살롱이 국립미술협회(Société national des Beaux-Arts프랑스어)의 설립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자체 연례 전시회를 개최했다. 드니는 이 두 살롱과 함께 전위 예술을 위한 유럽의 주요 전시장인 브뤼셀의 라 리브르 에스테티크(La Libre Esthétique프랑스어) 살롱에도 작품을 선보였다.
장 모레아스가 1891년 르 피가로에 기사를 발표하며 상징주의 문학 운동이 시작되었다. 1891년 3월, 비평가 조르주 알베르 두레르(George-Albert Dourer프랑스어)는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de-France프랑스어)에 기고한 글에서 드니를 "회화의 상징주의"의 선두 주자로 칭했다. 드니의 작품은 비평가들과 중요한 후원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저명한 신문 라 데페슈 드 툴루즈(La Dépêche de Toulouse프랑스어)의 소유주인 아르튀르 위크(Arthur Huc프랑스어)는 자신의 미술 살롱을 조직하고 드니의 여러 작품을 구매했다.
드니는 다른 예술 형식과 장식 예술도 실험했다. 1889년부터 폴 베를렌의 시집 지혜(Sagesse프랑스어)의 삽화를 위해 일련의 매우 양식화된 7점의 목판화를 제작하여 자신의 작품 본질을 담아냈다. 그의 후원자 위크는 툴루즈 사무실을 위한 두 점의 대형 장식 패널을 태피스트리 형태로 의뢰했다. 드니는 이 시기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아르누보의 아라베스크 곡선이 특징인 다채로운 석판화 포스터도 디자인했다.
1891년 약혼 직후부터 드니는 마르트 뫼리에를 자신의 그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삼았다. 그녀는 정화되고 이상화된 형태로 가사 일을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그의 풍경화와 당시 가장 야심 찬 작품인 1893년에 시작하여 같은 해 독립 살롱에 전시한 뮤즈(The Muses프랑스어) 연작에도 등장했다. 그는 첫 그림을 친구 아르튀르 퐁텐(Arthur Fontaine프랑스어)에게 팔았고, 1899년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 중 하나를 구매하며 드니는 첫 공식 인정을 받았다.
드니의 아내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1890년대 내내 드니는 음악과 예술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는 1890년에 피아노를 치는 아내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클로드 드뷔시의 선택받은 아가씨(La Damoiselle élue프랑스어) 악보 표지를 위해 마르트를 특징으로 하는 유려한 석판화를 디자인했으며, 드뷔시가 오페라로 변형한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프랑스어)를 위한 또 다른 석판화도 제작했다. 1894년에는 상징주의의 가장 저명한 문학적 지지자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말레인 공주(Princesse Maleine프랑스어)를 바탕으로 작은 공기(La Petit Air프랑스어)를 그렸다. 1893년에는 작가 앙드레 지드와 협력하여 예술과 문학을 결합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지드의 긴 에세이 위리앙의 여행(Le Voyage d'Urien프랑스어)에 동반하는 30점의 석판화를 제공했는데, 이 석판화들은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예술가의 관점에서 동일한 주제에 접근했다.
이 시기에 드니가 다룬 또 다른 주제는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관계였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Le Concert Champêtre프랑스어)와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L'Amour Sacré et L'Amour Profane프랑스어), 그리고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Déjeuner sur l'herbe프랑스어)의 모델을 따라 두 명의 나체 여성과 한 명의 옷 입은 여성을 묘사했다. 배경은 생제르맹앙레의 고가교가 있는 드니 자신의 정원이다. 나체 인물들은 신성한 사랑을, 옷 입은 인물은 세속적인 사랑을 나타냈다. 그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는 정원에서 나체로 있는 마르트를 그렸으며, 한 인물 안에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을 모두 표현했다.
드니는 아내 마르트를 모델로 한 다양한 초상화와 누드화를 통해 그의 예술적 이상을 표현했다.
또 다른 영향은 당시 일본 미술이었다. 프랑스 예술가들의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은 1850년대에 시작되어 파리 만국 박람회 (1855년)의 전시를 통해 다시 활성화되었고, 1890년 에콜 데 보자르에서 열린 일본 판화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다시 부활했다. 1890년 이전에도 드니는 지크프리트 빙이 발행한 카탈로그 일본 예술(Japan Artistique프랑스어)의 삽화들을 오려내어 연구했다. 1888년 11월, 그는 친구 에밀 베르나르에게 "드 샤반처럼 색을 입히는 것에서 일본과 융합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선언했다. 일본 양식의 그의 그림들은 넓은 형식과 매우 양식화된 구성 및 장식을 특징으로 하며, 일본 병풍처럼 보인다.
3.3. 주요 미술 이론
1890년 8월, 드니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정리하여 비평지 아르 에 크리틱(Art et Critique프랑스어)에 발표된 유명한 에세이에서 제시했다. 이 에세이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시작한다. "기억하라, 그림은 전투마나 누드 여성 또는 어떤 종류의 일화가 되기 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로 배열된 색채로 덮인 평면이다." 이 아이디어는 드니에게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폴리트 텐은 그의 저서 예술 철학(The Philosophy of Art프랑스어)에서 이미 "그림은 색채가 있는 표면이며, 다양한 색조와 다양한 정도의 빛이 특정 선택에 따라 배치된다. 그것이 그림의 본질이다"라고 쓴 바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주목을 사로잡고 모더니즘의 기초가 된 것은 드니의 표현이었다. 드니는 화면의 평면성을 주장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모더니즘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드니는 그림의 형태가 주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 감정의 깊이는 이러한 선과 색채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충분함에서 온다... 모든 것은 작품의 아름다움 속에 담겨 있다"고 썼다. 그의 에세이에서 그는 이 새로운 운동을 쇠라가 이끄는 신인상주의의 "진보주의"에 반대하여 "신전통주의"라고 명명했다. 이 글의 발표로 드니는 나비파 철학의 가장 잘 알려진 대변인이 되었지만, 사실 그 그룹은 매우 다양했으며 예술에 대해 많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드니의 삶에서 다음 주요 사건은 1890년 10월 마르트 뫼리에와의 만남이었다. 1891년 6월부터 그들은 오랜 연애를 했으며, 이는 그의 일기에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1893년 6월 12일에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예술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많은 그림과 장식 작품, 예를 들어 채색된 부채에 등장했으며, 종종 순수함과 사랑을 상징하는 이상화된 인물로 표현되었다.
3.4. 신고전주의와 전통으로의 회귀

1898년 1월, 드니는 첫 로마 방문을 통해 바티칸에 있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긴 에세이 로마의 예술(Les Arts a Rome프랑스어)을 썼는데, 여기서 "고전적 미학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법과 존재하고자 하는 방법을 동시에 제공하며, 도덕이자 동시에 심리학이다... 전체로서의 고전적 전통은 노력의 논리와 결과의 위대함으로 인해 인류의 종교적 전통과 어떤 면에서 평행하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예술 상징주의의 두 거장인 귀스타브 모로와 피에르 퓌뷔 드 샤반이 사망했다. 파리로 돌아온 드니는 자신의 예술을 더 명확한 선과 형태로 신고전주의 방향으로 재편했다. 그는 1898년 3월 일기에 "그리스도가 중심 인물인 후기 그림들을 생각하라... 로마의 대형 모자이크를 기억하라. 대규모 장식 수단의 활용과 자연의 직접적인 감정을 조화시켜라"라고 기록했다.
드니는 폴 세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는 1896년 세잔의 집을 방문했고, 세잔의 "나는 인상주의를 박물관의 예술처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발언을 보도하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에서 드니는 세잔을 "인상주의의 푸생"이라고 칭하며 그를 현대 신고전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렀다. 이 시기 드니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는 친구 폴 세잔의 사망 후 그려진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1900)이다. 그림 전경에는 세잔의 친구들, 그중 몇몇은 전 나비파 멤버들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딜롱 르동, 에두아르 뷔야르, 비평가 앙드레 멜레리오, 앙브루아즈 볼라르, 드니 자신, 폴 세뤼지에, 폴 랑송, 케르그자비에 루셀,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드니의 아내 마르트가 보인다. 그림은 모두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어 매우 엄숙해 보이지만, 두 번째 메시지도 담고 있다. 인물들 뒤와 이젤에 전시된 그림들은 현대 미술의 전환을 나타내는데, 뒷벽의 고갱과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이젤 위의 세잔의 그림으로 이어지며, 이는 드니의 관점에서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에서 신고전주의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드니는 당시의 정치적 격변,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와 예술계를 양분했던 드레퓌스 사건(1894~1906)의 영향을 받았다. 에밀 졸라와 앙드레 지드는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편에 섰고, 오귀스트 로댕, 르누아르, 드니는 반대편에 섰다. 드니는 사건 대부분 기간 동안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지드와의 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프랑스 정부가 교회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움직임과 1905년 교회와 국가를 공식적으로 분리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었다. 드니는 1904년 민족주의적이고 친가톨릭 성향의 액션 프랑세즈에 가입했으며, 이 단체가 극우로 기울고 바티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비난받은 1927년까지 회원으로 남아 있었다.
약 1906년까지 드니는 파리 예술가들의 아방가르드로 여겨졌으나, 그 해 앙리 마티스가 야수파의 밝고 충돌하는 색채를 담은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프랑스어)을 선보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드니는 점점 더 신화와 그가 "기독교 인본주의"라고 부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1898년, 그는 브르타뉴의 해안 마을 페로스기레크에 작은 빌라를 구입했는데, 당시 그곳은 외딴 어촌 마을이었다. 1907년, 그는 그곳 해변을 신고전주의 작품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Bacchus and Ariadne프랑스어)의 배경으로 사용하며 색채를 밝게 하고 해변에서 발랄하게 노는 행복한 나체 가족을 묘사했다. 그는 이어서 신화적 주제를 바탕으로 해변이나 목가적인 환경에서 나체를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제작했다.
그는 신화적 주제를 바탕으로 해변이나 목가적인 환경에서 나체를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계속해서 제작했다.


3.5. 아르누보와 장식 미술

1890년대 중반, 브뤼셀과 파리에서 아르누보 양식이 등장하면서 드니는 장식 예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가족과 영성에 대한 그의 주제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 중 상당수는 미술상 사무엘 빙의 의뢰로 이루어졌는데, 그의 갤러리가 아르누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드니의 새로운 프로젝트에는 벽지,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램프 갓, 병풍, 부채 디자인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적 흐름과 아르누보의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그의 주제와 양식은 여전히 독자적인 특성을 유지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장식 작품은 1895년에서 1897년 사이에 그려진 바롱 코샹(Baron Cochin프랑스어)의 사무실을 위한 일련의 채색 패널로, 총칭하여 성 위베르의 전설(The Legend of St. Hubert프랑스어)이라 불린다. 이 작품은 피렌체의 메디치 예배당과 니콜라 푸생, 외젠 들라크루아, 피에르 퓌뷔 드 샤반의 작품에서 자유롭게 영감을 받았다. 코샹과 그의 가족은 한 패널에, 드니의 아내 안은 다른 패널에 등장한다. 이 패널들은 가족과 신앙을 찬양한다. 1907년 프랑스 정부가 코샹의 저택과 다른 교회 재산을 국유화했을 때, 파리 대주교는 그 사무실에서 미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드니는 소수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한 그림에 이본 르롤(Yvonne Lerolle프랑스어)을 세 가지 다른 포즈로 보여주는 특이한 초상화(1897)도 포함된다.
드니는 다양한 장식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선보였다.

3.6. 종교 미술과 성화 예술

드니는 삶의 마지막 시기에 점점 더 대규모 벽화와 종교 예술에 집중했다。1914년, 드니는 17세기에 루이 14세 시대에 건설된 생제르맹앙레의 옛 병원을 구입했다. 그는 이 건물을 "프리오리"(The Priory프랑스어)라고 이름 붙였고, 1915년부터 1928년까지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의 도움을 받아 건물을 장식했는데, 특히 미완성된 예배당을 자신의 디자인으로 제작한 프레스코,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상, 가구로 채웠다. 1916년 그는 "회화의 최고 목표는 대규모 장식 벽화"라고 선언했으며, 1916년부터 1943년 사망할 때까지 20점의 벽화를 완성했다.
프리오리 외에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파리 교외에 있는 혁신적인 철근 콘크리트 아르데코 양식 교회인 노트르담 뒤 랭시 교회의 장식이 있다. 오귀스트 페레가 설계한 이 교회는 1924년에 완공되었다. 이 교회는 스테인드글라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파리의 생트샤펠 정신으로 설계되었다.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 예술가 마르그리트 위레와 협력하여 제작되었다. 드니는 각 창문 중앙의 형상 예술을 디자인했고, 위레는 창문과 그 주변의 추상적인 유리 디자인을 만들었다. 다른 주요 종교 작품으로는 뱅센의 생루이 교회 예배당(1927), 페로스의 라 클라르테 예배당 창문(1931), 그리고 1943년 사망 전 마지막 프로젝트였던 토농의 교회가 있다.
1919년 2월 5일,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드니는 조르주 데발리에르와 함께 성화화단(Ateliers d'Art Sacré)을 설립했다. 이는 교회를 현대 문명과 화해시키려는 유럽 전반의 광범위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드니는 아카데미 예술이 관습과 기교에 감정을 희생시키기 때문에 반대했으며, 사실주의는 산문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신성의 속성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성화화단이 장식한 가장 중요한 교회는 1934년에 완성된 파리의 생테스프리 교회이다. 내부의 벽화와 프레스코는 조르주 데발리에르, 로베르 푸제옹, 니콜라 윈터스텔러, 엘리자베스 브랑리가 그렸다. 이 교회는 성화화단 회원들이 장식했으며, 2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 장식의 통일성을 위해 건축가는 묘사된 모든 인물의 표준 높이와 모든 배경의 색상을 빨간색으로 지정했다. 그림의 중심 주제는 "2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의 역사"이다. 드니는 제단화와 그 옆의 또 다른 대형 작품 두 점을 그렸다. 그가 그린 교회 벽화는 이탈리아 교회에서 본 르네상스 미술, 특히 조토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22년에 "숭고함이란 주제나 벽에 웅장하고 고귀하며 결코 사소하지 않은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3.7. 서적 디자인 및 삽화
1899년부터 1911년까지 드니는 그래픽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출판사 볼라르(Vollard프랑스어)를 위해 그는 사랑(Amour프랑스어)이라는 제목의 12점의 컬러 석판화 세트를 제작했는데, 이는 예술적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상업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이후 그는 목판화 제작으로 돌아와 조각가 토니 벨트랑(Tony Beltrand프랑스어)과 협력하여 1903년에 출판된 흑백 연작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L'Imitation de Jesus-Christ프랑스어)을 제작했다. 이어서 1911년에는 시인 폴 베를렌의 지혜(Sagesse프랑스어)를 위한 삽화를 그렸다.
1911년에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피오레티(Fiorette프랑스어) 삽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는 움브리아와 토스카나를 자전거로 혼자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1913년에 출판된 최종 작품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꽃 삽화로 가득했다. 또한 그는 단테의 새로운 삶(Vita Nova프랑스어, 1907)을 위한 매우 장식적인 서적 디자인과 삽화, 그리고 알프레드 드 비니의 엘로아(Eloa프랑스어, 1917)를 위한 24점의 삽화를 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제작된 마지막 작품은 이전 작품보다 더 엄숙했으며, 주로 옅은 파란색과 회색으로 채색되었다.


3.8. 건축 및 공공 장식

1908년, 드니는 러시아 미술 후원자 이반 모로조프를 위한 중요한 장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로조프는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주요 후원자였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를 소유하고 있었다. 드니는 모로조프의 모스크바 저택 음악실을 위해 대형 벽화 패널 프시케의 역사(The history of Psyche프랑스어)를 제작했으며, 나중에 디자인에 몇 개의 추가 패널을 더했다. 이 프로젝트로 받은 수수료 덕분에 그는 브르타뉴에 해변 집을 살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가 파리에 건설 중이던 새로운 극장, 샹젤리제 극장의 돔을 위한 더욱 야심 찬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 극장은 현대적이었다. 파리에서 철근 콘크리트로 건설된 첫 번째 주요 건물이었으며, 아르데코 양식의 첫 번째 건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드니의 작업은 순수하게 신고전주의적이었다. 주제는 음악의 역사였으며, 아폴론과 뮤즈의 형상들이 등장했다. 페레는 드니가 그렇게 큰 규모의 작품을 그릴 수 있도록 특별 스튜디오를 건설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그의 명성은 높아져 여러 중요한 공공건물 벽화 의뢰를 받았다. 여기에는 뤽상부르 궁전에 있는 프랑스 상원 계단 위의 천장화와 생테티엔 시립 호스피스를 위한 벽화가 포함되는데, 이 벽화에서 그는 자신의 해변 그림에서 보이던 다채롭고 신고전주의적인 주제로 돌아갔다. 그는 파리 국제 박람회 (1937년)를 위해 건설된 샤요 궁전의 두 벽화 패널을 제작하도록 의뢰받았다. 드니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초기 경력의 친구들인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케르그자비에 루셀을 초대했다. 두 패널은 성스러운 음악과 세속적인 음악을 다채로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찬양하며, 샹젤리제 극장 돔 장식을 연상시킨다. 고전적인 패널은 그가 최근 방문했던 로마의 보볼리 정원에서 고대 축제를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이후의 개조로 인해 다소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볼 수 있다.
말년에 그는 프랑스 밖에서도 두 가지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둘 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신앙과 인본주의 주제였다. 첫 번째는 1931년 제네바의 국제 기독교 노동자 협회가 제네바 국제 노동 기구 사무실을 위해 의뢰한 "노동자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라는 주제의 작품이었다. 두 번째는 1938년 국제 연맹의 새로운 본부를 위한 작품으로, 전쟁의 호랑이를 길들이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통해 평화를 위한 무장을 주제로 했다.
3.9. 교육 및 이론 저술
1909년부터 드니는 파리의 랑송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가르쳤으며, 그의 학생 중에는 타마라 드 렘피카도 있었다. 렘피카는 나중에 드니가 자신에게 회화의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고 인정했지만, 그녀의 아르데코 양식은 드니의 양식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는 또한 많은 시간을 이론서 저술에 할애했다. 1909년 그는 1890년 이후 자신이 쓴 예술에 관한 글들을 모아 이론(Théories프랑스어)을 출판했다. 이 책은 "상징주의와 고갱에서 새로운 고전적 질서로"라는 부제 아래 고갱부터 마티스(그는 마티스의 작품을 싫어했다)를 거쳐 세잔과 아리스티드 마욜에 이르는 예술의 흐름을 설명했다. 이 책은 널리 읽혔으며, 1920년 이전에 세 번 더 출판되었다.
이론에는 1906년 에세이 "태양"(The Sun프랑스어)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인상주의의 쇠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오류는 무엇보다 빛을 찾는 것이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는 것, 즉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 정신의 표현을 찾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며,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예술은 자연의 성화이며, 살아가기에 만족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자연의 성화이다"라는 그의 사상도 담겨 있다. 그리고 예술의 원천을 화가의 개성에서 찾는 그의 창작 이론을 설명하며,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의 힘이자 의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성숙기 작품의 주제는 풍경화와 인물 연구, 특히 어머니와 아이를 다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노동의 존엄성"과 같은 종교적 주제의 그림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 작품은 1931년 국제 기독교 노동조합 연맹의 의뢰로 윌리엄 라파르 센터의 주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4. 개인 생활
4.1. 가족 및 결혼

모리스 드니는 1893년 첫 번째 아내 마르트 뫼리에(Marthe Meurier프랑스어)와 결혼했다. 그들은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마르트는 드니의 수많은 작품에서 모델이 되었다. 1919년 마르트가 사망한 후, 드니는 그녀를 추모하는 예배당을 그렸다. 그는 1922년 2월 22일 엘리자베스 그라테롤(Elisabeth Graterolle프랑스어)과 재혼했는데, 그녀는 샹젤리제 극장 돔의 인물 중 한 명의 모델로 사용되었던 인물이다. 그들은 두 명의 자녀, 장바티스트(1923년생)와 폴린(1925년생)을 두었다. 엘리자베스 또한 드니의 여러 그림에 등장하며, 때로는 마르트와 함께 묘사되기도 했다.
4.2. 종교 및 사회 활동
드니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제3회 수도회의 회원으로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7년 그는 전통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액션 프랑세즈 운동에 가입했으나, 이 단체가 극우로 기울고 교황청으로부터 비난받은 1927년에 탈퇴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에도 영향을 받았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와 예술계를 양분했는데, 에밀 졸라와 앙드레 지드는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편에 섰고, 로댕, 르누아르, 드니는 반대편에 섰다. 드니는 사건 대부분 기간 동안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지드와의 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프랑스 정부가 교회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움직임과 1905년 정부가 교회와 국가를 공식적으로 분리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시 프랑스 정부를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
5. 평가와 유산
5.1.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
드니는 1890년 아르 에 크리틱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기억하라, 그림은 전투마나 누드 여성 또는 어떤 종류의 일화가 되기 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로 배열된 색채로 덮인 평면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이 아이디어는 드니에게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가들의 주목을 사로잡고 모더니즘의 기초가 되었다. 드니는 화면의 평면성을 주장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모더니즘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이론은 입체파, 야수파, 추상 미술과 같은 후대 미술 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5.2. 비평적 평가
약 1906년까지 드니는 파리 예술가들의 아방가르드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해 앙리 마티스가 야수파의 밝고 충돌하는 색채를 담은 삶의 기쁨을 선보이자, 드니는 점점 더 신화와 그가 "기독교 인본주의"라고 부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1907년 그는 신고전주의 작품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를 통해 색채를 밝게 하고 해변에서 발랄하게 노는 행복한 나체 가족을 묘사했다. 이어서 그는 신화적 주제를 바탕으로 해변이나 목가적인 환경에서 나체를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제작했는데, 이는 라파엘로의 목욕하는 사람들과 밀로의 비너스를 비롯한 그리스 조각의 고전적 나체에 대한 오마주였다.
1940년 1월, 70세가 되던 해 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성과를 요약했다. "나의 결혼: 들라크루아는 존경받고 이해받았다. 앵그르는 버려졌다. 극단주의자들과의 단절. 나는 공식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동시에 나의 비전과 사상을 표현하는 예술의 비밀스러운 불안감을 키웠고, 동시에 거장들의 가르침을 더 잘 깨닫도록 강요받았다."
드니는 1943년 11월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일은 2일, 3일, 또는 13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2023년에는 독일 유실 미술 재단 웹사이트에 등재되었던 드니의 나무 아래 서 있는 소년(Stehender Knabe unter einem Baum독일어)이 홀로코스트 희생자 마르셀 몽퇴(Marcel Monteux프랑스어)의 가족에게서 약탈당했던 것으로 밝혀져 반환되었다.
6. 전시
- 1963년 6월 28일부터 9월 29일까지 알비의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에서 회화, 수채화, 드로잉, 석판화 전시가 열렸다.
- 1980년 모리스 드니 미술관이 예술가의 생제르맹앙레 자택에 개관했다.
- 1995년 영국 리버풀의 워커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 2007년 몬트리올 미술관에서 유사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이는 북미에서 열린 첫 번째 주요 드니 전시회였다.
일본 국내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 어머니와 아이 (1895년, 우로코 미술관)
- 암탉과 소녀 (1890년, 국립서양미술관)
- 순결한 봄 (1899년, 미쓰비시 이치고칸 미술관 기탁)
- 성체 축일 행렬 (1904년, 유화, 캔버스, 149.9 cm x 201 cm, 이세 문화 재단)
- 춤추는 여인들 (1905년, 국립서양미술관)
- 파도 (1916년, 오하라 미술관)
7. 예술에 관한 명언
모리스 드니가 자신의 예술 철학, 창작 과정, 예술의 목적에 대해 남긴 중요한 발언들은 그의 출판된 글과 개인 일기에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 "기억하라, 그림은 전투마나 누드 여성 또는 어떤 종류의 일화가 되기 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로 배열된 색채로 덮인 평면이다." (아르 에 크리틱, 1890년 8월)
- "예술은 확실한 피난처로 남아 있으며, 이제부터 우리 삶의 이유에 대한 희망이자, 우리 삶에 작은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우리가 창조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위로의 생각이다... 예술의 노동은 가치가 있다. 꽃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빛, 나무의 비례와 파도의 형태, 그리고 얼굴의 완벽함에 새겨 넣는 것,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고통, 희망, 사유의 삶을 새겨 넣는 것이다." (일기, 1895년 3월 24일)
- "장식적이고 교훈적이다. 그것이 내가 무엇보다 예술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새로운 이론, 1922)
- "회화는 무엇보다 모방의 예술이며, 어떤 상상 속의 '순수함'의 하인이 아니다." (새로운 이론, 1922)
- "표현, 감정, 즐거움이라는 회화의 본질적인 목표를 잊지 마라. 수단을 이해하고, 장식적으로 그리고, 형태와 색채를 고양시켜라." (일기,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