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리셔스 공화국은 인도양 남서부에 위치한 섬나라로,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마다가스카르에서 약 900 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본섬인 모리셔스섬을 비롯하여 로드리게스섬, 아갈레가 제도, 카르가도스 카라호스 제도(세인트 브랜든) 등으로 구성된다. 수도는 포트루이스이며,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속한다. 다양한 민족 구성이 특징으로 인도계, 아프리카계 크리올, 중국계, 프랑스계 주민들이 공존하며, 힌두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다종교 사회이다. 공용어는 영어지만, 프랑스어와 모리스얀(모리셔스 크리올어)이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모리셔스는 10세기경 아랍 선원들에게 처음 알려졌고, 16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이 방문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식민 통치를 시작하며 '모리셔스'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시기 도도새가 멸종했다. 18세기에는 프랑스가 점령하여 '일 드 프랑스'로 명명하고 설탕 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1810년 영국령이 된 후, 노예제 폐지와 함께 인도인 계약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어 현재 인구 구성의 토대가 되었다.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영연방 왕국이 되었으며, 1992년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정치적으로 모리셔스는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경제는 과거 설탕 중심의 농업 경제에서 벗어나 관광업, 금융 서비스업,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등으로 다각화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 소득 수준이 높은 국가군에 속한다.
모리셔스는 독특한 생물 다양성을 지닌 곳으로 유명했으나, 인간의 정착 이후 많은 고유종이 멸종되거나 위협받고 있다. 정부는 환경 보전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 중이며, 특히 2020년 발생한 MV 와카시오호 기름 유출 사고는 큰 환경 문제로 대두되었다. 영국과의 차고스 제도 영유권 분쟁은 중요한 외교 현안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 의견 이후 최근 영국 정부가 주권 반환 협상에 나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모리셔스는 세가 음악과 춤, 다채로운 음식 문화 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국명
모리셔스라는 국가 이름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식 국명은 영어로 Republic of Mauritius리퍼블릭 오브 모리셔스영어, 프랑스어로는 République de Maurice레퓌블리크 드 모리스프랑스어, 모리셔스 크리올어로는 Repiblik Moris레피블리크 모리스mfe이다. 통칭으로는 영어로 Mauritius모리셔스영어, 프랑스어로는 Maurice모리스프랑스어, 모리셔스 크리올어로는 Moris모리스mfe로 불린다.
모리셔스섬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증거 중 하나는 1502년 포르투갈 지도 제작자 알베르투 칸티노가 만든 칸티노 세계지도에서 발견된다. 이 지도에서 모리셔스는 아랍어로 추정되는 Dina Arobi디나 아로비아랍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1507년 포르투갈 선원들이 이 섬을 방문했을 당시, 초기 포르투갈 지도에는 포르투갈 선박 '시스니'(Cisne시스느포르투갈어, '백조'라는 뜻)의 이름을 따서 Cirne시르느포르투갈어 또는 Do-Cerne두 세르느포르투갈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디오구 페르난데스 페레이라가 섬의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1598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함대가 비브란트 판 바르베이크 제독의 지휘 하에 현재의 그랑포르 지역에 상륙했다. 이들은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Stadtholder)이었던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네덜란드어: Maurits van Nassau마우리츠 판 나사우네덜란드어)의 이름을 따서 섬을 '프린스 마우리츠란트'(Prins Mauritslandt프린스 마우리츠란트네덜란드어) 또는 간단히 '마우리티위스'(Mauritius마우리티위스네덜란드어)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오늘날 영어식 국명 '모리셔스'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1715년 프랑스가 섬을 점령하면서 프랑스어로 '프랑스의 섬'이라는 뜻의 Isle de France일 드 프랑스프랑스어로 개칭했다. 1810년 영국이 이 섬을 점령한 후, 파리 조약 (1814년)에 따라 영국에 할양되면서 섬의 이름은 다시 '모리셔스'로 돌아왔다.
3. 역사
모리셔스의 역사는 아랍 선원들의 초기 발견 기록부터 시작하여 유럽 열강의 식민 통치, 설탕 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발전, 다양한 민족의 이주, 그리고 독립과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거쳐 현대 국가로 발전해 온 과정을 포함한다. 각 시대별 주요 사건과 사회 변화는 모리셔스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초기 역사

모리셔스섬은 유럽인들이 처음 도착하기 전까지 무인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세기 말경 아랍 선원들의 항해 기록에서 나타난다. 당시 아랍인들은 이 섬을 '디나 아로비'(Dina Arobi디나 아로비아랍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에는 인도계 및 인도네시아-말레이계 사람들이 섬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일본 측 자료에 있으나, 유럽인의 본격적인 정착 이전에는 지속적인 거주지는 형성되지 않았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이 지역은 포르투갈의 탐험 및 식민화 권역에 속하게 되었다. 1507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오구 페르난데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선단이 인도 항로를 탐사하던 중 우연히 이 섬을 발견하고 '백조의 섬'이라는 뜻의 Ilha do Cisne일랴 두 시스느포르투갈어라고 명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곳에 기항지를 건설했으나, 섬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아 장기간 머무르지는 않았다. 1512년에는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이었던 페드루 마스카레냐스가 이 지역 섬들을 방문했으며, 그의 이름을 따 모리셔스, 레위니옹, 로드리게스섬 등을 포함하는 군도를 마스카렌 제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1528년에는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로드리게스가 로드리게스섬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이 섬에 붙여졌다.
3.2. 네덜란드령 모리셔스 (1638년~1710년)

1598년, 네덜란드 제독 비브란트 판 바르베이크가 이끄는 함대가 그랑포르에 상륙하여,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령이었던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네덜란드어: Maurits van Nassau마우리츠 판 나사우네덜란드어)의 이름을 따서 섬을 '모리셔스'라고 명명했다. 네덜란드는 1638년부터 이 섬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주로 흑단나무 벌목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자바섬에서 들여온 사탕수수 묘목과 300명 이상의 마다가스카르 출신 노예들을 이용하여 설탕과 아락 생산을 시도했으며, 가축과 사슴도 들여왔다. 네덜란드 항해가 아벌 타스만이 미지의 남방 대륙(호주 대륙)을 찾아 나선 것도 이곳을 기지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태즈메이니아, 뉴질랜드, 뉴기니섬 일부를 탐험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최초의 네덜란드 정착촌은 약 20년간 지속되었다. 163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흑단나무 벌목과 새로 조성된 담배 및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으로 마다가스카르 출신 노예들을 데려왔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영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정착촌은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했고 결국 네덜란드는 1710년 모리셔스에서 철수했다. 1755년 영국의 '리즈 인텔리전서' 신문 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섬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섬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수많은 긴꼬리마카크 원숭이 때문이었으며, 당시 이 섬은 '원숭이 섬'으로도 알려졌다고 한다. 이 원숭이들은 네덜란드 통치 이전에 포르투갈 선원들이 동남아시아의 자생지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네덜란드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모리셔스 고유종이었던 날지 못하는 새, 도도의 멸종이다. 인간의 정착과 함께 도입된 외래종 동물들(개, 돼지, 원숭이, 쥐 등)에 의해 도도새의 알과 새끼가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무분별한 남획까지 겹쳐 17세기 말경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3.3. 프랑스령 프랑스섬 (1715년~1810년)

네덜란드가 철수한 후, 이미 인근의 부르봉섬(현 레위니옹)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1715년 모리셔스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섬'이라는 뜻의 Isle de France일 드 프랑스프랑스어로 개칭했다. 1723년에는 노예제를 규율하기 위해 Code Noir누아르 법령프랑스어(흑인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노예를 "재산"으로 규정하여 소유주가 "재산" 손실 시 보험금이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735년 프랑스 총독 베르트랑프랑수아 마에 드 라부르도네가 부임하면서 설탕 생산을 기반으로 한 경제 번영기가 시작되었다. 라부르도네 총독은 포트루이스를 해군 기지 및 조선 중심지로 건설했으며, 그의 통치 하에 수많은 건물이 세워졌는데, 그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정부 청사 일부, 몽플레지르 성, 현재 모리셔스 경찰 본부로 사용되는 라인 배럭스 등이 있다. 섬은 1767년까지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관할 하에 있었다.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모잠비크, 잔지바르 등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노예들이 유입되었다. 마다가스카르의 노예 상인들(사칼라바족 또는 아랍인)은 아랍의 스와힐리 해안이나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노예를 구입한 후, 세이셸에서 보급품을 받고 모리셔스, 레위니옹, 인도의 노예 시장으로 노예들을 운송했다. 1769년에서 1793년 사이에 레위니옹과 모리셔스로 수입된 8만 명의 노예 중 45%는 마다가스카르 북서부의 사칼라바족 노예 상인들이 공급했으며, 이들은 동아프리카와 코모로를 습격하여 노예를 확보했다. 나머지는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노예를 구입하여 마다가스카르를 거쳐 레위니옹으로 운송한 아랍 노예 상인들이 공급했다. 그 결과 섬의 인구는 30년 만에 15,000명에서 49,000명으로 급증했다. 18세기 후반에는 아프리카 노예가 섬 인구의 약 80%를 차지했으며, 19세기 초에는 섬에 60,000명의 노예가 있었다. 1729년 초에는 인도 폰디체리 출신의 인도인들이 '라 시렌'호를 타고 모리셔스에 도착했으며, 이들 기술자들은 1734년 자유를 얻으면서 노동 계약을 체결했다.
1767년부터 1810년까지,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주민들이 사실상 프랑스로부터 독립적인 정부를 세웠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섬은 프랑스 정부가 임명한 관리들의 통제를 받았다. 자크앙리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는 1768년부터 1771년까지 섬에 거주한 후 프랑스로 돌아가 《폴과 비르지니》를 집필했는데, 이 사랑 이야기는 프랑스어가 사용되는 모든 곳에서 '일 드 프랑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1796년 파리 정부가 노예제 폐지를 시도하자 정착민들은 프랑스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유명한 프랑스 총독으로는 포트루이스에 쇼세 거리를 건설하고 사반 지역에 농부들의 정착을 장려한 비콩트 드 수이야크와, 인도양 프랑스 식민지의 본부를 인도의 폰디체리가 아닌 모리셔스에 두도록 한 앙투안 브뤼니 당트르카스토가 있다. 샤를 마티외 이지도르 드캉은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성공적인 장군이었으며, 나폴레옹 1세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는 1803년부터 1810년까지 일 드 프랑스와 레위니옹의 총독으로 재임했다. 영국의 해군 지도 제작자이자 탐험가인 매슈 플린더스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고 드캉 장군에 의해 1803년부터 1810년까지 섬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모리셔스는 프랑스 사략선들이 영국 상선을 성공적으로 습격하는 기지가 되었다. 이러한 습격은 1810년 영국 해군 준장 조시아스 로울리가 이끄는 원정대가 섬을 점령하기 위해 파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랑포르 해전에서 영국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3개월 후 영국군이 캅말뢰뢰에 상륙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는 침공 5일째인 1810년 12월 3일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며, 항복 조건에 따라 정착민들은 토지와 재산을 유지하고 형사 및 민사 문제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통치 하에 섬의 이름은 다시 '모리셔스'로 돌아갔다.
3.4. 영국령 모리셔스 (1810년~1968년)


로버트 타운센드 파커 경을 초대 총독으로 시작된 영국의 통치는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라치타타니나 사건으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 왕 라다마의 조카였던 라치타타니나는 정치범으로 모리셔스에 끌려왔으나 탈옥하여 섬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려는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동료 라이자프의 배신으로 민병대에 체포되어 즉결 처형되었다.
1832년, 아드리앵 데피네는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모리셔스 최초의 신문 《르 세르네앙》(Le Cernéen르 세르네앙프랑스어)을 창간했다. 같은 해, 법무장관이 노예 소유주에 대한 보상 없이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는 불만을 야기했다. 정부는 만일의 반란에 대비해 모든 주민에게 무기를 반납하도록 명령하고, 포트루이스 중심부 언덕(현재 시타델 언덕)에 돌로 된 요새인 애들레이드 요새를 건설했다. 노예제는 1833년 이후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농장주들은 프랑스 점령기에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에서 수입했던 노예 손실에 대한 보상금으로 총 200.00 만 GBP을 받았다.
영국에서의 노예제 폐지는 모리셔스의 사회, 경제, 인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농장주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노동력으로 인도에서 대규모의 계약 노동자를 데려왔다. 1834년부터 1921년까지 약 50만 명의 계약 노동자가 섬에 거주하며 설탕 농장, 공장, 운송 및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또한 영국은 8,740명의 인도 군인들을 섬으로 데려왔다. 포트루이스 만에 위치한 아프라바시 가트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계약 노동자들의 주요 수용소 역할을 한 최초의 영국 식민지 시설이었다. 인도에서 온 노동자들은 항상 공정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으며, 독일계 프랑스인 아돌프 드 플레비츠는 이들 이민자들의 비공식적인 보호자를 자처했다. 1871년 그는 이들이 고든 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왔고, 이후 임명된 위원회는 향후 50년간 인도 노동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몇 가지 조치를 권고했다.


1885년에는 새로운 헌법이 도입되었다. '민주적 인구조사'(Cens Démocratique상스 데모크라티크프랑스어)라고 불린 이 헌법은 크리올 지도자 중 한 명인 오네시포 보가르가 주장한 원칙 일부를 포함하여 입법 평의회에 선출직을 만들었으나, 선거권은 주로 부동산을 소유한 프랑스계 백인과 피부색이 밝은 인도계 엘리트에게 제한되었다. 1886년, 존 포프 헤네시 총독은 설탕 과두 지배층이 경쟁자인 인도계 에밀 산다파를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나디카라옌 아를란다를 최초의 인도계 의원으로 지명했다. 아를란다는 1891년까지 재임했다. 1903년에는 모리셔스에 자동차가 도입되었고, 1910년에는 첫 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포트루이스의 전화는 1909년에 이루어졌으며, 같은 10년 동안 아모드 이브라힘 아치아 형제의 모리셔스 수력 전기 회사가 플랭윌렘 고지대 도시에 전력을 공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1910년대는 정치적 격동기였다. 의사, 변호사, 교사 등으로 구성된 신흥 중산층이 사탕수수 지주들의 정치권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포트루이스 시장이었던 외젠 로랑이 이 새로운 집단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정당인 '자유 행동당'(Action Libérale악시옹 리베랄프랑스어)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자유 행동당은 설탕 거물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앙리 르클레지오가 이끄는 '질서당'(Parti de l'Ordre파르티 드 로르드르프랑스어)과 대립했다. 1911년, 큐어파이프에서 과두 지배층이 로랑을 살해했다는 거짓 소문으로 인해 포트루이스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1911년 큐어파이프 폭동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의 상점과 사무실이 파손되고 한 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인 1911년, 큐어파이프에서 최초의 공공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같은 마을에 왕립 대학을 수용하기 위한 석조 건물이 세워졌다. 1912년에는 정부, 기업체 및 소수의 개인 가구가 사용하는 더 넓은 전화망이 서비스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8월에 발발했다. 많은 모리셔스인들이 유럽에서 독일군에 맞서,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터키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원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18세기 전쟁들보다 모리셔스에 훨씬 적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1914-1918년 전쟁은 설탕 가격 폭등으로 인해 큰 번영기였다. 1919년에는 모든 설탕 생산자의 70%를 포함하는 모리셔스 설탕 조합이 탄생했다. 1920년대에는 모리셔스를 프랑스에 반환하는 것을 선호하는 "반환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1921년 선거에서 모리셔스를 프랑스에 돌려주기를 원했던 후보들이 아무도 당선되지 못하면서 이 운동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전후 불황으로 설탕 가격이 급락하자 많은 설탕 농장이 문을 닫았고, 이는 경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 생활까지 통제했던 설탕 거물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891년 지명직 아를란다의 임기가 끝난 후 1926년까지 입법 평의회에는 인도계 의원이 없었다. 그러나 1926년 선거에서 던푸트 랄라와 라즈쿠마르 구자두르가 최초로 입법 평의회에 선출된 인도계 의원이 되었다. 그랑포르에서는 랄라가 경쟁자인 페르낭 루이 모렐과 가스통 게베르를 이겼고, 플라크에서는 구자두르가 피에르 몽토키오를 물리쳤다. 1936년에는 모리스 퀴레가 모리셔스 노동당을 창당했다. 에마뉘엘 앙크틸은 도시 노동자들을 규합했고, 판디트 사하데오는 농촌 노동계급에 집중했다. 1937년 우바 폭동은 현지 영국 정부의 개혁을 이끌어내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 금지를 해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절은 1938년에 처음으로 기념되었다. 3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하루 임금을 희생하고 섬 전역에서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참석했다.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노동조합 운동가 에마뉘엘 앙크틸은 로드리게스섬으로 추방되었고, 모리스 퀴레와 판디트 사하데오는 가택 연금되었으며, 수많은 파업 참가자들이 투옥되었다. 베드 클리포드 경 총독은 모리셔스 설탕 조합의 쥘 르클레지오를 도와 '블랙 레그'로 알려진 대체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파업의 효과를 상쇄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1939년에 발발하자 많은 모리셔스인들이 아프리카와 근동에서 영국 국기 아래 복무하며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원했다. 모리셔스는 실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었지만, 1943년 포트루이스 외곽에서 여러 척의 영국 선박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 제국군이 철수해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현지에서 모집된 군부대가 창설되었다. 1943년 3월 24일, 모리셔스 연대는 제국 부대로 창설되었고 동아프리카 사령부(EAC)의 새로운 예하 부대가 되었다. 1943년 말, 모리셔스 연대 제1대대(1MR)는 훈련을 위해 마다가스카르로 파견되었고, 그 자리에 왕립 아프리카 소총연대(KAR) 대대가 모리셔스에 주둔했다. 1MR 파견은 일부 군인들이 징집에 반발하고 해외 대대가 비백인 군인들로만 구성되어 국내 인종 갈등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1MR 군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차별, 불평등한 급여, 육체적으로 힘든 훈련에 더욱 불만을 품었고 일본군을 두려워했으며,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1MR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국내 상황은 어려웠다. 물가는 두 배로 뛰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10~20%밖에 오르지 않았다. 시민 불안이 있었고 식민 정부는 모든 노동조합 활동을 검열했다. 그러나 벨뷔아렐 설탕 농장의 노동자들은 1943년 9월 27일 파업에 돌입했다. 경찰관들이 결국 군중을 향해 직접 발포하여 4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이는 1943년 벨뷔아렐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운동가이자 잔 안돌란 운동의 지도자였던 바스데오 비순도얄은 사망한 네 명의 노동자 장례식을 주관했다. 3개월 후인 1943년 12월 12일, 비순도얄은 포트루이스의 "마리 렌 드 라 페"에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고, 섬 전역에서 온 노동자들의 상당한 군중은 잔 안돌란 운동의 인기를 확인시켜 주었다.
1947년 모리셔스 헌법 공포 이후, 1948년 8월 9일 총선이 실시되었고, 처음으로 식민 정부는 섬의 19개 언어 중 하나로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모든 성인에게 선거권을 확대하여 이전의 성별 및 재산 자격을 폐지했다. 기 로즈몽의 노동당이 힌두교도가 당선된 19석 중 11석을 차지하며 과반수 표를 얻었다. 그러나 도널드 매켄지케네디 총독은 1948년 8월 23일 프랑코-모리셔스 백인의 우위를 영속시키기 위해 12명의 보수당원을 입법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했다. 1948년 에밀리엔 로슈쿠스트가 입법 평의회에 선출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기 로즈몽의 정당은 1953년에 입지를 더욱 강화했고,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보통선거를 요구했다. 1955년과 1957년에 런던에서 헌법 회의가 열렸고, 장관 제도가 도입되었다. 1959년 3월 9일 처음으로 성인 보통선거에 기초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총선에서는 이번에는 시우사구르 람굴람 경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승리했다.
1961년 런던에서 헌법 검토 회의가 열렸고, 추가적인 헌법 발전 프로그램이 수립되었다. 1963년 선거는 노동당과 그 동맹 세력이 승리했다. 식민지 사무국은 모리셔스에서 공동체적 성격의 정치가 확산되고 있으며, 정당의 후보 선택과 유권자의 투표 행태가 민족 및 카스트적 고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무렵 저명한 영국 학자인 리처드 티트머스와 제임스 미드는 인구 과잉과 사탕수수 단일 경작으로 인한 섬의 사회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는 인구 폭발을 막기 위한 강력한 캠페인으로 이어졌고, 해당 10년 동안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감소했다.
1965년 초, 카트르본 시의 벨로즈 교외에서 정치적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노동당 운동가 람페르사드 수라트가 경쟁 정당인 모리셔스 사회민주당(PMSD)의 폭력배들에게 맞아 사망했다. 1965년 5월 10일, 수이약 인근 트루아부티크 마을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하여 역사적인 마을 마에부르까지 번졌다. 영국 식민지 전체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이 폭동은 크리올 갱단에 의해 차량에 타고 있던 비수 경찰관이 살해되면서 시작되었다. 뒤이어 트루아부티크에서 로베르 브루스라는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그 후 크리올 갱단은 해안가의 역사적인 마을 마에부르로 가서 시네마 오데옹에서 힌두스타니 영화를 보고 있던 인도-모리셔스 관객들을 폭행했다. 마에부르 경찰은 인도-모리셔스인에 대한 폭행 신고를 거의 100건 접수했다.
3.5. 독립과 영연방 왕국 (1968년~1992년)


1965년 랭커스터 회의에서 영국이 모리셔스 식민지를 포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59년 해럴드 맥밀런은 유명한 "변화의 바람 연설"에서 영국의 최선의 선택은 식민지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5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위한 길이 닦였다.
이후 1965년 랭커스터 회의 이후, 차고스 제도는 모리셔스 영토에서 분리되어 영국령 인도양 지역(BIOT)을 형성했다. 1967년 8월 7일 총선이 실시되었고, 독립당(노동당, 독립 전진 블록(IFB), 무슬림 행동위원회(CAM)의 연합)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1968년 1월, 독립 선언 6주 전에 1968년 모리셔스 폭동이 포트루이스에서 발생하여 25명이 사망했다.
모리셔스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68년 3월 12일 독립을 선포했다. 시우사구르 람굴람 경이 독립 모리셔스의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모리셔스 여왕으로서 국가원수 지위를 유지했다.
1969년에는 폴 베랑제가 이끄는 야당 모리셔스 투쟁운동(MMM)이 창당되었다. 이후 1971년, MMM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아 항구에서 일련의 파업을 일으켰고, 이는 국가 비상사태를 초래했다. 노동당과 모리셔스 사회민주당(PMSD)의 연립 정부는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1971년 폴 베랑제에 대한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지지자 파리드 무투르와 부두 노동자이자 운동가였던 아조르 아델라이드가 사망했다. 총선은 연기되었고 공개 집회는 금지되었다. 폴 베랑제를 포함한 MMM 당원들은 1971년 12월 23일 투옥되었고, 베랑제는 1년 후 석방되었다.
1973년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말라리아 진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1975년 5월, 모리셔스 대학교에서 시작된 학생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미래 고용 전망이 제한적인 교육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5월 20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랑리비에르노르웨스트 다리를 건너 포트루이스로 진입하려다 경찰과 충돌했다. 1975년 12월 16일, 18세 청년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의회법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젊은 세대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시도로 여겨졌다.
다음 총선은 1976년 12월 20일에 실시되었다. 노동당-CAM 연합은 62석 중 28석밖에 얻지 못했다. MMM은 의회에서 34석을 확보했지만, 퇴임하는 시우사구르 람굴람 총리는 가에탕 뒤발의 PMSD와 동맹을 맺어 2석 차이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82년 모리셔스 투쟁운동(MMM)-모리셔스 사회주의자당(PSM) 정부(총리 아너루드 주그노트, 부총리 하리시 부두, 재무장관 폴 베랑제)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MMM과 PSM 지도부 내에서 이념적, 개인적 차이가 드러났다. 베랑제와 주그노트 간의 권력 투쟁은 1983년 3월에 절정에 달했다. 주그노트가 제7차 비동맹 운동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델리로 떠났을 때, 귀국하자 베랑제는 총리의 권한을 박탈하는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주그노트의 요청에 따라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랄 도라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인도 해군과 인도 육군을 동원한 무력 개입을 계획하여 쿠데타를 막으려 했다.
MMM-PSM 정부는 1982년 6월 선거 후 9개월 만에 분열되었다. 정보부 관리에 따르면 이 9개월은 "사회주의 실험"이었다. 하리시 부두는 자신의 정당인 PSM을 해산하여 모든 PSM 의원들이 주그노트의 새 정당인 MSM에 합류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통해 MMM과 거리를 두면서 권력을 유지했다. MSM-노동당-PMSD 연립은 1983년 8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아너루드 주그노트가 총리, 가에탕 뒤발이 부총리가 되었다.
이 시기는 수출가공구(EPZ) 부문의 성장을 목격했다. 산업화는 마을로도 확산되기 시작했고, 모든 민족 공동체의 젊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설탕 산업은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대형 소매 체인들은 1985년에 매장을 열기 시작했고 저소득층에게 신용 편의를 제공하여 기본적인 가전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관광 산업도 호황을 누렸고 섬 전역에 새로운 호텔들이 생겨났다. 1989년에는 증권 거래소가 문을 열었고, 1992년에는 자유항이 운영을 시작했다. 1990년, 총리는 모리셔스를 베랑제가 대통령이 되는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헌법 개정안 투표에서 패배했다.
3.6. 공화국 (1992년 이후)

1992년 3월 12일, 모리셔스는 영연방 내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군주를 국가원수에서 폐지했다. 마지막 모리셔스 총독이었던 비라사미 링가두 경이 초대 모리셔스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과도기적 조치였으며, 그 해 말 카삼 우팀으로 교체되었다. 정치 권력은 총리에게 남아 있었다.
경제 개선에도 불구하고, 유가 하락과 유리한 달러 환율과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완전한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이미 1984년부터 불만이 있었다. 정부는 '신문 및 정기간행물 개정법'을 통해 모든 신문에 50만 루피의 은행 보증을 제공하도록 하려 했다. 43명의 언론인이 포트루이스 의회 앞에서 공개 시위에 참여하며 항의했다. 그들은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는 대중의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정책을 재검토해야 했다.
교육 부문에서도 불만이 있었다. 초등교육 수료증(CPE)을 통과한 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증가하는 수요에 부응할 양질의 중등 대학이 충분하지 않았다. 1991년 교육 마스터플랜은 국가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정부 몰락에 기여했다.
1995년 12월, 나빈 람굴람이 노동당-MMM 연립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1996년 10월, 포트루이스 고라이삭 거리에서 정치 운동가 3명이 살해된 사건으로 여러 명이 체포되고 장기간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9년은 2월과 5월에 시민 불안과 폭동으로 특징지어졌다. 1999년 카야 폭동 이후 카삼 우팀 대통령과 장 마르조 추기경이 전국을 순회했고, 4일간의 혼란 끝에 평온이 회복되었다. 사회적 혼란의 근본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결과 보고서는 빈곤의 원인을 깊이 파고들었고 많은 완고한 믿음을 인식으로 규정했다. 2000년 1월, 정치 운동가 라젠 사바파티가 라 바스티유 감옥에서 탈옥한 후 사살되었다.
MSM의 아너루드 주그노트 경은 MMM과의 동맹을 확보한 후 2000년 9월에 정권에 복귀했다. 2002년, 로드리게스섬은 공화국 내 자치체가 되어 자체 대표를 선출하여 섬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총리직은 MMM의 폴 베랑제에게 이양되었고, 아너루드 주그노트 경은 대통령이 되었다. 베랑제는 독립 이후 모리셔스 역사상 최초의 프랑코-모리셔스인 총리였다.
2005년 총선에서 나빈 람굴람은 노동당-PMXD-VF-MR-MMSM의 새로운 연립 하에서 총리가 되었다. 2010년 총선에서는 노동당-MSM-PMSD 연립이 집권했고 나빈 람굴람은 2014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
MSM-PMSD-ML 연립은 아너루드 주그노트의 지도 하에 2014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PMSD의 이탈로 이어진 집권 연립 내 불화에도 불구하고 MSM-ML은 5년 임기 동안 정권을 유지했다.
2017년 1월 21일, 아너루드 주그노트 경은 사임을 발표하고 그의 아들이자 재무장관인 프라빈드 주그노트가 총리직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양은 2017년 1월 23일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2018년, 아미나 구립파킴 모리셔스 대통령이 금융 스캔들로 사임했다. 현 대통령은 2019년 12월부터 재임 중인 프리트비라지싱 루푼이다.
2019년 11월 모리셔스 총선에서 집권 투사 사회주의 운동(MSM)이 의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현 프라빈드 주그노트 총리가 새로운 5년 임기를 확보했다.
2020년 7월 25일, 일본 소유의 벌크선 MV 와카시오호가 모리셔스 해안 산호초에 좌초하여 최대 1,000톤의 중유가 깨끗한 석호로 유출되었다. 보호받는 취약한 해양 생태계와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MV 와카시오호 기름 유출 사고는 서인도양을 강타한 최악의 환경 재앙 중 하나가 되었다.
2024년 11월 10일, 야당 연합인 변화 동맹이 모리셔스 총선에서 64석 중 60석을 차지했다. 지도자인 전 총리 나빈 람굴람이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4. 지리

모리셔스 공화국의 총면적은 2040 km2로, 세계에서 170번째로 큰 나라이다. 모리셔스 공화국은 모리셔스 본섬과 여러 외곽 섬들로 구성된다. 모리셔스섬, 로드리게스섬, 그리고 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레위니옹은 마스카렌 제도의 일부이다. 국가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은 인도양의 약 230.00 만 km2에 달하며, 이 중 약 40.00 만 km2는 세이셸과 공동으로 관리한다.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본섬 북서쪽에 위치한 포트루이스이다.
4.1. 모리셔스 본섬

모리셔스 본섬(Lil Moris릴 모리스mfe; Île Maurice일 모리스프랑스어)은 아프리카 남동해안에서 약 2000 km 떨어져 있으며, 남위 19°58.8' ~ 20°31.7', 동경 57°18.0' ~ 57°46.5' 사이에 위치한다. 길이는 약 65 km, 폭은 약 45 km이며, 면적은 1864.8 km2이다. 섬은 150 km가 넘는 백사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석호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산호초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모리셔스 해안 바로 앞에는 약 49개의 무인도와 암초가 있으며, 그중 몇몇은 멸종 위기종을 위한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모리셔스섬은 지질학적으로 비교적 젊은 섬으로, 약 8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성되었다. 세인트 브랜든, 레위니옹, 로드리게스섬과 함께 마스카렌 제도의 일부이다. 이 섬들은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로 이루어진 대륙 지괴에서 동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거대한 해저 화산 폭발의 결과로 생겨났다. 현재는 화산 활동이 없으며, 열점은 레위니옹섬 아래에 있다. 모리셔스섬은 해발 300 m에서 800 m 높이의 불연속적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해안 평야에서 중앙 고원으로 올라가며 해발 670 m에 이른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남서부의 피통드라프티트리비에르누아르산으로 해발 828 m이다. 용암류로 인해 생긴 균열을 따라 많은 하천과 강이 섬 곳곳에 흐르고 있다.
4.2. 로드리게스섬
자치섬인 로드리게스섬은 모리셔스 본섬에서 동쪽으로 약 560 km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108 km2이다. 로드리게스섬은 마스카렌 해저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솟아오른 화산섬이다. 섬은 구릉 지형이며 중앙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리몽산(Mont Limon몽 리몽프랑스어)으로 해발 398 m이다. 섬에는 산호초와 광범위한 석회암 퇴적층도 있다. 모리셔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7월 1일 기준 섬의 인구는 43,371명으로 추산되었다.
4.3. 아갈레가 제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갈레가 제도는 모리셔스 본섬에서 북쪽으로 약 1000 km 떨어져 있다. 북섬은 길이 12.5 km, 폭 1.5 km이며, 남섬은 길이 7 km, 폭 4.5 km이다. 두 섬의 총면적은 26 km2이다. 모리셔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7월 1일 기준 아갈레가 제도와 세인트 브랜든의 인구는 274명으로 추산되었다.
4.4. 세인트 브랜든 군도 (카르가도스 카라호스)
세인트 브랜든 군도(또한 카르가도스 카라호스 암초로도 알려짐)는 모리셔스 본섬에서 북동쪽으로 약 402 km 떨어져 있다. 세인트 브랜든은 잃어버린 미소대륙 모리티아의 잔해로 이루어진 군도이며, 계절풍, 사이클론 및 관련 모래 이동에 따라 총 28개에서 40개의 섬으로 구성된 5개의 섬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8년 영국 추밀원 판결(제71조)은 라파엘 어업 회사가 "1901년 증서(TB25 No 342호에 등재)에 언급된 13개 섬의 영구 허가 보유자임을 확인하며, 이는 해당 조건에 따름"을 명시했다. 2002년 세인트 브랜든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지로 전 세계 10위로 분류되어 당시 다른 모리셔스 후보지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2024년 5월 8일, 세인트 브랜든 보존 신탁이 텍사스 댈러스에서 열린 아프리카 기업 협의회에서 국제적으로 출범했다. 이 신탁의 임무는 세인트 브랜든을 보호, 복원 및 보존하는 것이다.
4.5. 차고스 제도
차고스 제도는 환초와 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리셔스 본섬에서 북동쪽으로 약 2200 km 떨어져 있다. 현재 영국령 인도양 지역(BIOT)의 일부로 영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 모리셔스는 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차고스 제도 영유권 분쟁 참조)
차고스 제도 북쪽에는 페로스 반호스, 솔로몬 제도 (차고스), 넬슨스섬이 있으며, 남서쪽에는 스리 브라더스, 이글 제도, 에그몬트 제도, 데인저섬이 있다. 디에고가르시아섬은 군도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2016년 기준 차고스인 인구는 모리셔스에 8,700명(원주민 483명 포함), 세이셸에 350명(원주민 75명 포함), 영국에 3,000명(원주민 127명 포함)으로 추산된다.
4.6. 트로멜랭섬
트로멜랭섬은 모리셔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430 km 떨어져 있다. 현재 프랑스가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의 일부), 모리셔스는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1715년 모리셔스를 점령하고 '일 드 프랑스'로 개칭했다. 1814년 5월 30일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모리셔스와 그 모든 부속 영토를 영국에 공식적으로 할양했으며, 레위니옹은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영국령 모리셔스 식민지는 모리셔스 본섬과 그 부속 영토인 로드리게스, 아갈레가, 세인트 브랜든, 트로멜랭(분쟁 중), 차고스 제도로 구성되었으며, 세이셸은 1906년 별도의 식민지가 되었다. 1814년 일 드 프랑스(프랑스 통치 하의 모리셔스 이전 명칭)와 그 부속 영토가 영국으로 이전될 때 트로멜랭섬이 포함되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파리 조약 제8조는 프랑스가 영국에 일 드 프랑스 "와 그 부속 영토, 즉 로드리게스와 세이셸"을 할양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트로멜랭섬의 주권이 영국에 이전된 적이 없다고 간주한다. 모리셔스의 주장은 1814년 일 드 프랑스와 그 부속 영토의 영국 이전이 일반적인 성격이었으며, 파리 조약에서 명시된 것 이상이었고, 일 드 프랑스의 모든 부속 영토가 조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모리셔스는 트로멜랭이 일 드 프랑스의 부속 영토였으므로 1814년에 사실상 영국에 이전되었다고 주장한다. 아갈레가, 세인트 브랜든, 차고스 제도 역시 파리 조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당시 일 드 프랑스의 부속 영토였기 때문에 영국령 모리셔스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모리셔스의 영국 당국은 수년에 걸쳐 트로멜랭에 대한 행정 조치를 취해왔다. 예를 들어, 영국 관리들은 1901년에서 1951년 사이에 트로멜랭섬에서 4건의 구아노 채굴권을 부여했다. 1959년 모리셔스의 영국 관리들은 세계기상기구에 트로멜랭을 자국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2010년 프랑스와 모리셔스 간에 공동 관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비준되지는 않았다.
5. 기후

모리셔스의 기후는 해안 지역에서는 전형적인 열대 기후이며, 산악 지역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계절적으로 발생하는 사이클론은 동식물에 파괴적이지만 빠르게 회복된다. 모리셔스는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대기 질 지수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9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Forest Landscape Integrity Index) 평균 점수는 5.46/10으로, 172개국 중 세계 100위를 기록했다.
남회귀선 근처에 위치한 모리셔스는 열대 기후를 나타낸다. 계절은 두 개로 나뉜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따뜻하고 습한 여름으로 평균 기온은 24.7 °C이며, 6월부터 9월까지는 비교적 시원하고 건조한 겨울로 평균 기온은 20.4 °C이다. 계절 간 기온 차이는 4.3 °C에 불과하다. 가장 더운 달은 1월과 2월로 낮 평균 최고 기온이 29.2 °C에 달하며, 가장 시원한 달은 7월과 8월로 밤 평균 최저 기온이 16.4 °C이다. 연간 강수량은 해안가의 900 mm에서 중앙 고원의 1500 mm까지 다양하다. 뚜렷한 우기는 없지만 대부분의 강수량은 여름철에 집중된다. 석호의 해수 온도는 22 °C에서 27 °C 사이이다. 중앙 고원은 주변 해안 지역보다 훨씬 시원하며 강수량도 두 배나 많을 수 있다. 우세한 무역풍으로 인해 섬의 동쪽이 더 시원하고 비가 더 많이 내린다. 간헐적인 열대성 저기압은 일반적으로 1월에서 3월 사이에 발생하며 약 3일 동안 날씨를 교란시키고 폭우를 동반하는 경향이 있다.
6. 환경
모리셔스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으나, 인간 활동과 외래종 도입으로 인해 많은 고유종이 위협받고 있다. 이에 따라 환경 보전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6.1. 생물 다양성


모리셔스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동식물 일부의 서식지이지만, 인간의 거주와 비자생종의 도입으로 인해 토착 동식물이 위협받고 있다. 화산 기원, 연대, 고립성,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모리셔스는 작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었다. 1507년 포르투갈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섬에 육상 포유류가 없었다. 이는 다수의 날지 못하는 새와 대형 파충류 종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 인간의 도래는 침입성 외래종의 도입, 서식지의 급격한 파괴, 그리고 많은 고유 동식물의 손실을 초래했다. 특히 모리셔스 고유종인 날지 못하는 새 도도의 멸종은 인간에 의한 멸종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도도는 모리셔스 국장의 (문장학적) 지지자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현재 토착림은 2% 미만만 남아 있으며, 남서부의 블랙리버 협곡 국립공원, 남동부의 밤부 산맥, 북서부의 모카-포트루이스 산맥에 집중되어 있다. 코르 드 가르드, 르모르느 브라반트와 같은 일부 고립된 산들과 여러 근해 섬들에는 해안 및 본토 다양성의 잔존물이 남아 있다. 100종 이상의 동식물이 멸종되었고 더 많은 종들이 위협받고 있다. 보존 활동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조류 및 식물 종의 번식 프로그램과 서식지 복원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다.
2011년 환경 및 지속 가능한 개발부는 "모리셔스 환경 전망 보고서"를 발표하여 세인트 브랜든을 해양 보호 구역으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2016년 3월 모리셔스 야생동물 재단(MWF)의 회장 보고서에서 세인트 브랜든은 환초 보존을 촉진하기 위한 공식 MWF 프로젝트로 선언되었다.
모리셔스날여우박쥐는 섬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유 포유류이며, 과일 농장에 위협이 된다는 믿음 때문에 2015년 11월에 도입된 정부 승인 도태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2015년 이전에는 심각한 사이클론이 없어 과일박쥐 개체수가 증가했으며, 당시 국제 자연 보전 연맹(IUCN)은 이 종의 상태를 멸종위기에서 취약으로 변경했다. 2018년 10월, 남아있는 약 65,000마리의 과일박쥐 중 20%에 해당하는 13,000마리의 도태가 승인되었지만, 이전 해의 도태로 인해 이미 상태가 멸종위기로 되돌아갔다.
6.2. 환경 문제와 보전
2020년 7월 25일 일본 소유의 벌크선 MV 와카시오호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자 프라빈드 주그노트 총리는 국가 환경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프랑스는 레위니옹에서 항공기와 전문가를 파견했고, 그린피스는 유출로 인해 수천 종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으며 "오염의 바다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이 사고는 보호받는 취약한 해양 생태계와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 가장자리에서 발생하여 서인도양에서 발생한 최악의 환경 재앙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기후 변화 또한 모리셔스 환경에 중요한 위협 요인이다. 해수면 상승, 해수 온도 증가, 극심한 기상 현상의 빈도 증가는 해안 침식, 산호 백화, 수자원 부족 등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모리셔스 정부는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 확대, 에너지 효율 개선, 지속 가능한 토지 관리, 해안 보호 강화 등 기후 변화 대응 및 적응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플라스틱 사용 규제, 폐기물 관리 개선, 환경 교육 강화 등을 통해 환경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7. 정치
모리셔스의 정치는 의원내각제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다. 모리셔스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모리셔스의 총리는 행정부 수반으로서 모리셔스 내각의 지원을 받는다. 모리셔스는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다. 행정권은 정부에 의해 행사된다. 입법권은 정부와 모리셔스 국회 모두에게 부여된다.
국회는 모리셔스의 단원제 입법부로, 1992년 공화국이 되기 전까지는 입법 의회라고 불렸다. 국회는 총 7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그중 62명은 다수의석 선거구에서 4년 임기로 선출되고, 나머지 8명은 "최량 패자(Best Loser)"로 알려진 추가 의원으로, 소수 민족 및 종교 집단이 공평하게 대표될 수 있도록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임명한다. 회원국의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CCPR)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유엔 인권위원회(UNHRC)는 현지 청년 및 노동조합 운동의 불만 제기 이후 모리셔스의 최량 패자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된다.
모리셔스섬은 각기 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20개의 선거구로 나뉜다. 로드리게스섬은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단일 선거구이다. 총선 후, 선거감독위원회는 의회 내 소수 민족 대표성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최대 8명의 추가 의원을 지명할 수 있다. 이러한 의원 지명 제도는 일반적으로 최량 패자 제도라고 불린다.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정부를 구성한다. 그 지도자가 총리가 되어 국회의원 중에서 내각을 구성하며, 단, 법무장관은 국회의원이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많은 대표를 가진 정당 또는 연합이 공식 야당을 구성하며, 그 지도자는 통상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야당 대표로 지명된다. 국회는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로 국회의장, 부의장, 위원회 부위원장을 선출한다.
모리셔스는 5년마다 정부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가장 최근의 국회 선거는 2024년 11월 10일에 본토 20개 선거구와 로드리게스섬 선거구에서 실시되었다. 선거는 전통적으로 두 개의 주요 정당 연합 간의 경쟁 양상을 띠어왔다.
2018년 이브라힘 아프리카 거버넌스 지수는 모리셔스를 거버넌스 부문 1위로 평가했다. 2023년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167개국의 민주주의 상태를 측정한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모리셔스는 전 세계 20위이며 아프리카 관련 국가 중 유일하게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었다. V-Dem 민주주의 보고서는 2024년 모리셔스를 아프리카에서 18번째로 선거 민주주의적인 국가이자 권위주의화 경향이 있는 국가로 기술했다.
직위 | 현직 | 임기 시작 |
---|---|---|
대통령 | 프리트비라지싱 루푼 | 2019년 12월 2일 |
총리 | 나빈 람굴람 | 2024년 11월 12일 |
부통령 | 에디 부아세종 | 2019년 12월 2일 |
부총리 | 폴 베랑제 | 2024년 11월 12일 |
대법원장 | 레하나 뭉글리굴불 | 2021년 11월 18일 |
국회의장 | 시린 아우메루디치프라 | 2024년 11월 29일 |
야당 대표 | 조 레종가르 | 2024년 11월 15일 |
7.1. 정부 구조
모리셔스의 행정부는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모리셔스의 총리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 형태를 따른다. 대통령은 주로 의례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실질적인 행정권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 있다. 총리는 국회 다수당의 지도자가 맡으며, 내각 구성원(장관)들은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내각은 국가 정책 수립 및 집행에 대한 책임을 국회에 진다.
7.2. 입법부 (국민의회)
모리셔스의 입법부는 단원제인 모리셔스 국회(National Assembly)이다. 1992년 공화국 선포 이전에는 입법의회(Legislative Assembly)로 불렸다. 국회는 총 7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이 중 62명은 4년 임기로 모리셔스 본섬의 20개 복수 의원 선거구(각 3명)와 로드리게스섬의 단일 선거구(2명)에서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나머지 8명의 의원은 '최량 패자 제도'(Best Loser System)에 따라 선거관리위원회가 임명한다. 이 제도는 선거 결과 소수 민족이나 특정 정당의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낙선자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자들을 추가로 임명하여 민족적·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독특한 제도이다. 하지만 유엔 인권위원회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회는 법률 제정, 예산 심의 및 승인, 정부 감독 등의 주요 기능을 수행한다. 국회의장은 의원들 중에서 선출되며, 국회 운영을 총괄한다. 국회는 다수당이 정부를 구성하고, 두 번째로 큰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공식 야당의 역할을 맡는다.
7.3. 주요 정당
모리셔스는 다당제 정치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몇몇 주요 정당들이 연립을 통해 정권을 구성해 왔다. 주요 정당들은 다음과 같다.
- 모리셔스 노동당 (Labour Party레이버 파티영어, PTr): 인도계 힌두교도를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지만, 크리올과 무슬림 일부에게도 지지를 받는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이다. 모리셔스 독립의 주역인 시우사구르 람굴람이 창당했으며, 오랜 기간 집권했다.
- 모리셔스 투쟁운동 (Mauritian Militant Movement모리셔스 밀리턴트 무브먼트영어, MMM): 크리올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좌파 성향의 정당이다. 폴 베랑제가 오랫동안 이끌었으며, 여러 차례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
- 투사 사회주의 운동 (Militant Socialist Movement밀리턴트 소셜리스트 무브먼트영어, MSM): 인도계 힌두교도를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이다. 아너루드 주그노트와 그의 아들 프라빈드 주그노트가 이끌며 여러 차례 집권했다.
- 모리셔스 사회민주당 (Mauritian Social Democrat Party모리셔스 소셜 데모크랫 파티영어, PMSD): 크리올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중도우파 성향의 정당이다. 주로 연립 파트너로 참여한다.
- 로드리게스 인민기구 (Rodrigues People's Organisation로드리게스 피플스 오거니제이션영어, OPR): 로드리게스섬의 지역 정당으로, 섬의 자치와 발전을 목표로 한다.
이들 정당 외에도 여러 소수 정당들이 활동하며, 선거 결과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연립 정부가 구성된다.
7.4. 사법 제도
모리셔스의 사법 제도는 영국 보통법과 프랑스 민법의 영향을 받은 혼합 법체계를 가지고 있다. 모리셔스 헌법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삼권분립을 명시하고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 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모리셔스는 단일 구조의 2심제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모리셔스 대법원(Supreme Court)과 하급 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마스터스 법원, 가사부, 상사부(파산), 형사부, 조정부, 민사 및 형사 소송 1심 법원, 항소 관할 법원(민사 항소 법원, 형사 항소 법원) 등 다양한 부서를 두고 있다. 하급 법원으로는 중급 법원, 산업 법원, 지방 법원, 보석 및 구금 법원, 로드리게스 법원이 있다.
최종 상소 법원은 영국의 추밀원 사법위원회이다. 1968년 모리셔스 독립 이후에도 추밀원을 최고 항소 법원으로 유지하고 있다. 항소 법원 또는 대법원의 결정에 대한 추밀원 사법위원회로의 상소는 헌법 제81조 및 법원법 제70A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당연 상소 또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추밀원 사법위원회는 헌법 제81조 5항에 따라 민사 또는 형사 문제에서 모든 법원의 결정에 대한 특별 상고 허가를 부여할 수 있다.
7.5. 행정 구역
모리셔스 공화국은 단일 1차 행정 구역인 모리셔스의 외곽 섬(프랑스어: Îles éparses de Maurice일 제파르스 드 모리스프랑스어)으로 구성되며, 이는 모리셔스 본섬과 여러 외곽 섬들을 포함한다. 섬 그룹은 다음과 같다:
- 모리셔스 본섬
- 로드리게스섬
- 세인트 브랜든 (카르가도스 카라호스)
- 아갈레가 제도
모리셔스 본섬은 9개의 현(district)으로 세분화되며, 이는 국가의 2차 행정 구역이다. 9개 현은 다음과 같다:
# 블랙리버현 (Black River)
# 플라크현 (Flacq)
# 그랑포르현 (Grand Port)
# 모카현 (Moka)
# 팜플레무스현 (Pamplemousses)
# 플랭윌렘현 (Plaines Wilhems)
# 포트루이스현 (Port Louis)
# 리비에르뒤랑파르현 (Rivière du Rempart)
# 사반현 (Savanne)
로드리게스섬은 자치권을 가진 외곽 섬으로, 자체적인 지방 의회와 행정 체계를 가지고 있다. 아갈레가 제도와 세인트 브랜든 군도는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있다.
7.6. 국방 및 치안
모리셔스는 정규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모든 군사, 경찰 및 보안 기능은 경찰청장 산하의 10,000여 명의 현역 인력이 수행한다. 8,000명 규모의 모리셔스 경찰 (National Police Force)이 국내 법 집행을 담당한다. 1,400명 규모의 특수기동대(Special Mobile Force, SMF)와 688명 규모의 국가해안경비대(National Coast Guard)는 모리셔스의 유일한 준군사 조직이다. 두 부대 모두 장기 순환 근무하는 경찰관으로 구성된다. 또한 모리셔스에는 테러 공격이나 고위험 작전에 개입하는 'GIPM'이라는 특수 작전 부대가 있다. 국방은 주로 해안 경비와 영해 순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변 국가 및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안보를 유지하고 있다.
8. 대외 관계
모리셔스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의 다양한 국가들과 강력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의 일부로 간주되는 모리셔스는 이 지역의 아프리카 국가들, 특히 가장 큰 대륙 교역 상대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모리셔스 투자자들은 점차 마다가스카르, 모잠비크, 짐바브웨 등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모리셔스의 정치적 유산과 서구 시장에 대한 의존성은 유럽 연합 및 그 회원국, 특히 프랑스와의 긴밀한 관계로 이어졌다. 인도와의 관계는 역사적, 상업적 이유로 매우 강력하다. 모리셔스는 1972년 4월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같은 해 소련과의 해군 계약과 함께 이 결정을 방어해야 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사관을 설치하여 중동 진출을 확대하고 있으며,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는 바레인 주재 대사도 겸임하고 있다.
모리셔스는 유엔, 세계무역기구, 아프리카 연합, 영연방, 프랑코포니,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 인도양 위원회, 동남아프리카 공동시장, 인도양 연안국 협력 연합의 회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71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에 각각 수교하였다.
8.1. 주요 관계국 및 국제기구 활동
모리셔스는 비동맹 중립 외교를 기본 정책 기조로 삼고 있으며, 주변 인도양 국가들과의 협력,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과의 연대, 그리고 전통적인 우방국인 인도, 프랑스, 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 인도: 역사적, 문화적 유대감이 깊으며, 경제 및 기술 협력, 안보 협력 등 다방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리셔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계 주민들은 양국 관계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인도는 모리셔스의 주요 개발 협력 파트너이기도 하다.
- 프랑스: 과거 식민 모국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영향력이 크며, 경제, 교육, 문화 교류가 활발하다. 프랑스어는 모리셔스에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이며, 프랑스는 주요 관광객 공급원이자 투자국이다. 인근의 프랑스 해외 영토인 레위니옹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 영국: 과거 식민 모국으로서 영연방 회원국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차고스 제도 문제로 인해 양국 간 외교적 긴장이 존재하지만, 경제 및 교육 분야에서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 아프리카 국가: 아프리카 연합(AU),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 동남아프리카 공동시장(COMESA) 등 역내 기구의 적극적인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아프리카 대륙의 평화, 안정,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한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과는 주요 교역 상대국이다.
- 국제기구: 유엔(UN) 및 그 산하 기구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소규모 도서 개발도상국(SIDS)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후 변화 대응, 해양 자원 보존 등 국제적 현안 해결에 참여하고 있다. 프랑코포니(OIF) 회원국으로서 프랑스어권 국가들과의 연대도 강화하고 있다.
8.2. 차고스 제도 영유권 분쟁

모리셔스는 북동쪽으로 약 1287 km 떨어진 차고스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차고스 제도는 18세기 프랑스가 처음 섬에 정착했을 때부터 행정적으로 모리셔스의 일부였다. 당시 모리셔스로 알려졌던 프랑스 식민 영토 '일 드 프랑스'를 구성하는 모든 섬들은 1810년 양국 간에 체결된 항복 협정에 따라 영국에 할양되었다.
1965년, 모리셔스 독립 3년 전, 영국은 차고스 제도를 모리셔스에서 분리하고, 세이셸에서 알다브라, 파커, 데로슈 섬들을 분리하여 영국령 인도양 지역(BIOT)을 형성했다. 이 섬들은 1965년 11월 8일 공식적으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지정되었다. 1975년 11월 인도양에 관한 영국-미국 간 논의에서 영국은 1976년 6월까지 평화로운 독립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알다브라, 파커, 데로슈 섬들을 세이셸에 반환할 의사를 밝혔다. 영국과 미국 모두 이 섬들이 인구가 거주하고 있어 차고스 제도에서처럼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국방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1976년 3월 18일 영국과 세이셸은 섬 이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고, 이 섬들은 1976년 6월 29일 세이셸 독립일에 공식적으로 세이셸에 반환되었다. BIOT는 현재 차고스 제도만으로 구성된다. 영국은 군도 내 주요 섬인 디에고가르시아섬을 미국에 50년간 임대하여 군사 기지를 건설하도록 했으며, 2016년 영국은 이 임대를 2036년까지 연장했다. 모리셔스는 이러한 영토 분리가 독립 전 식민 영토 분할을 금지하는 유엔 결의 위반이라고 거듭 주장하며, 차고스 제도(디에고가르시아 포함)가 모리셔스 법과 국제법 모두에 따라 모리셔스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1968년에서 1973년 사이 영국 관리들은 1,000명이 넘는 차고스인들을 모리셔스와 세이셸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이 과정에서 영국 관리들은 섬에 있던 1,000마리의 개들을 가스로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혐의도 받고 있다. 유엔과 영국 의회에 제출한 성명에서 영국은 차고스 제도에 "영구 거주민"이 없었으며, 이주된 주민들은 "계약 노동자"였다고 밝혔다. 1971년 이래로 디에고가르시아 환초만이 거주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약 3,000명의 영국 및 미국 군인과 민간 계약직원이 거주하고 있다. 차고스인들은 그 이후로 자신들의 강제 추방과 재산 박탈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군도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모리셔스는 차고스 제도와 트로멜랭섬의 영해를 자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의 일부로 간주한다.
2010년 12월 20일, 모리셔스는 영국이 2010년 4월 차고스 제도 주변에 선포한 차고스 해양보호구역(MPA)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유엔 해양법 협약(UNCLOS)에 따라 영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분쟁은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중재되었다. 재판소는 영국의 차고스 제도 반환 약속이 모리셔스에게 군도의 가능한 미래 사용에 관한 중요한 결정에 대한 이해관계를 부여한다고 결정했다.
2019년 2월 25일,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관들은 13대 1로 영국이 가능한 한 빨리 차고스 제도 관리를 종료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인 판사인 조앤 도너휴만이 영국을 지지했다. 재판소장 압둘카위 아흐메드 유수프는 1965년 모리셔스로부터 차고스 제도를 분리한 것은 "관련된 사람들의 자유롭고 진정한 의사 표현"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지속적인 관리는 위법 행위를 구성한다"며 "영국은 가능한 한 빨리 차고스 제도 관리를 종료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회원국은 모리셔스의 탈식민지화를 완료하기 위해 유엔과 협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9년 5월 22일, 유엔 총회는 50년 이상 영국이 점령해 온 차고스 제도가 "모리셔스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를 형성한다"고 확인하는 결의안을 토론하고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적 의견을 발효시키며, 영국에 "6개월 이내에 무조건적으로 식민 행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116개국이 결의안에 찬성했고, 55개국이 기권했으며, 호주, 헝가리, 이스라엘, 몰디브만이 영국과 미국을 지지했다. 토론 중 모리셔스 총리는 차고스인 추방을 "반인도적 범죄"라고 묘사했다. 이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유엔 최고 법원의 판결에서 비롯되었고 총회 투표가 세계 여론을 반영하기 때문에 상당한 정치적 무게를 지닌다. 또한 이 결의안은 즉각적인 실제적 결과를 가져온다. 유엔, 그 전문 기구 및 기타 모든 국제기구는 영국이 주권에 의심이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유엔법상 모리셔스의 탈식민지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
2024년 10월 3일, 영국과 모리셔스 정부의 공동 성명을 통해 군도의 주권이 모리셔스로 이전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군사 기지 캠프 저스티스가 있는 디에고가르시아섬은 이 새로운 조약의 유일한 예외로, 모리셔스 정부에 의해 최소 99년간 영국에 임대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협상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새로운 행정부의 검토를 위해 보류된 상태이다.
9. 경제
모리셔스는 종종 아프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로 묘사된다.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모리셔스는 저소득 농업 기반 경제에서 관광업, 섬유, 설탕, 금융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고소득 다각화 경제로 발전했다. 독립 이후 모리셔스의 경제사는 "모리셔스의 기적" 및 "아프리카의 성공"으로 불린다 (로머, 1992; 프랑켈, 2010; 스티글리츠, 2011).
최근 몇 년 동안 정보통신기술(ICT), 해산물, 호텔 및 부동산 개발, 의료, 재생 에너지, 교육 및 훈련이 중요한 부문으로 부상하여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상당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모리셔스에는 개발 가능한 화석 연료 매장량이 없어 대부분의 에너지 수요를 석유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현지 및 재생 가능 에너지원은 바이오매스, 수력, 태양광 및 풍력 에너지이다.
모리셔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배타적 경제 수역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으며, 2012년 정부는 해양 경제 개발 의사를 발표했다.
모리셔스는 경제 경쟁력, 우호적인 투자 환경, 양호한 거버넌스 및 자유 경제 측면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8년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GDP)은 291.87 억 USD로 추산되었으며, 1인당 GDP(PPP)는 2.29 만 USD를 넘어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모리셔스는 2019년 세계은행에 따르면 고소득 경제 국가이다. 세계은행의 2019년 기업환경평가 지수는 모리셔스를 190개 경제국 중 사업 용이성 측면에서 세계 13위로 평가했다. 모리셔스 외무부에 따르면, 국가의 과제는 소수 산업 부문에 대한 높은 의존도, 심각한 두뇌 유출, 숙련 노동력 부족, 인구 고령화, 비효율적인 공기업 및 준정부 기관 등이다.
모리셔스는 자유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2019년 경제자유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모리셔스는 세계에서 9번째로 자유로운 경제를 가진 국가로 평가되었다.
9.1. 경제 발전과 구조
모리셔스는 1968년 독립 당시 설탕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저소득 농업 국가였으나, 이후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통해 다각화된 고소득 경제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은 "모리셔스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초기 경제 발전은 설탕 산업의 현대화와 수출가공구(EPZ) 설립을 통한 제조업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1970년대부터 EPZ를 중심으로 섬유 및 의류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여 주요 수출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많은 고용을 창출했다. 동시에 정부는 관광 산업 육성에도 힘써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고급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금융 서비스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역외 금융 센터로서의 입지를 다지며 외국인 투자 유치에 성공했고, 이는 경제 다각화에 크게 기여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여 "아프리카의 사이버 섬"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관련 인프라 구축과 인력 양성에 투자하고 있다.
현재 모리셔스 경제는 관광업, 금융 서비스업, 제조업(주로 섬유 및 의류), 농업(설탕 중심), ICT 산업 등이 주요 축을 이루고 있다. 정부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외국인 직접 투자 유치, 인프라 개선, 인적 자원 개발 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해양 경제(Ocean Economy)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설정하고 관련 분야 투자와 개발을 추진 중이다.
9.2. 주요 산업
모리셔스 경제는 전통적인 농업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관광, 금융, 정보통신기술 등 다양한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균형을 이루는 다각화된 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각 주요 산업 분야는 국가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9.2.1. 관광업

모리셔스는 주요 관광 목적지이며, 관광 부문은 모리셔스 경제의 주요 기둥 중 하나이다. 이 섬나라는 맑고 따뜻한 바닷물, 해변, 열대 동식물을 갖춘 열대 기후를 즐기며, 다민족 및 문화 인구가 이를 보완한다. 2019년 관광객 도착 예상치는 1,450,000명으로, 2018년 1,399,408명보다 3.6% 증가한 수치이다.
모리셔스에는 현재 아프라바시 가트와 르모르느 브라반트 문화경관이라는 두 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또한, 블랙리버 협곡 국립공원은 현재 유네스코 잠정 목록에 올라 있다. 관광객들은 주로 유럽에서 오며,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관광객이 많다. 고급 리조트, 골프 코스, 스파 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다양한 해양 스포츠와 자연 탐방 활동을 즐길 수 있다.
9.2.2. 금융 서비스업

모리셔스 금융서비스위원회에 따르면, 2018년 금융 및 보험 활동은 국가 GDP의 11.1%에 기여했다. 수년에 걸쳐 모리셔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전략적 위치, 하이브리드 규제 프레임워크, 사업 용이성, 투자 보호 조약, 이중 과세 방지 조약, 고도로 숙련되고 다국어를 구사하는 인력, 정치적 안정, 낮은 범죄율과 현대적인 인프라 및 연결성을 결합하여 아프리카 투자 허브로 자리매김해 왔다. 모리셔스에는 다수의 국제 은행, 법률 회사, 기업 서비스, 투자 펀드 및 사모 펀드가 있다. 금융 상품 및 서비스에는 프라이빗 뱅킹, 글로벌 비즈니스, 보험 및 재보험, 유한 회사, 보호 셀 회사, 신탁 및 재단, 투자 은행, 글로벌 본사 관리 등이 포함된다.
법인세율은 15%에서 17% 사이이며, 개인 소득세율은 10%에서 25% 사이이다. 국가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정 부문에 세금 감면 및 면제와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하지만, 금융 부문에서 남용 행위에 관여하는 개인 및 기업으로 인해 언론에서 종종 조세 피난처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국가는 모범 사례를 활용하고 강력한 법률 및 규제 프레임워크를 채택하여 투명성 증대에 대한 국제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확고한 평판을 구축했다. 2015년 6월, 모리셔스는 조세 문제에 관한 상호 행정 지원에 관한 다자간 협약에 가입했으며, 127개 관할권과 정보 교환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 모리셔스는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 자금 세탁 방지 그룹의 창립 회원국이며 자금 세탁 및 기타 형태의 금융 범죄와의 전쟁에서 선두에 서 왔다. 국가는 공통보고기준(CRS) 및 해외계좌납세준수법(FATCA)에 따른 자동 정보 교환을 채택했다.
9.2.3. 제조업
1971년 수출가공구(EPZ) 창설 이후, 특히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한 섬유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1993년에는 섬유 산업만으로 GDP의 9.9%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같은 해 수출 총액에서 섬유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넘어 제당업을 능가하는 주요 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모리셔스는 섬유 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공업 분야 육성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섬유 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34.9%까지 낮아졌지만, 같은 해 기계류 수출이 13.5%에 달했다. 2009년 수출 총액에서 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64.2%였다. 현재 제조업 부문은 섬유 및 의류 외에도 시계, 보석, 광학 기기, 의료 기기 등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다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9.2.4. 농업 및 어업

모리셔스의 농업은 국내 농경지의 89.9%가 사탕수수 재배에 할애될 정도로 전통적으로 사탕수수 중심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에 의한 단일 경작이 기본이지만, 일부 자작농이나 소작농도 존재한다. 제당업은 1970년대까지 모리셔스의 거의 유일한 산업이었다. 그러나 다른 산업의 성장으로 설탕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감소하여 2014년에는 9.8%로 10% 아래로 떨어졌다. 현재는 설탕 외에도 차, 바닐라, 열대 과일, 채소 등도 재배되며, 농업 다각화를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 고원 지대에서는 차나무 플랜테이션도 존재한다. 반면 곡물은 거의 생산되지 않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모리셔스 주변 해역은 좋은 어장으로, 어업 또한 중요한 산업이다. 주로 다랑어와 가다랑어가 어획되며, 통조림 가공 등을 통해 수출된다. 2014년 가다랑어 및 다랑어 수출은 수출 총액의 약 10%를 차지했다. 정부는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양식업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9.2.5.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정보통신기술(ICT) 부문은 2016년 모리셔스 GDP의 5.7%에 기여했다. 정부는 ICT 산업을 주요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관련 인프라 투자, 인력 양성, 외국 기업 유치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에벤에 위치한 사이버시티는 ICT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 인터넷 레지스트리인 아프리카 네트워크 정보센터(AFRINIC) 본부가 에벤에 위치해 있다. 또한 모리셔스는 LION(Lower Indian Ocean Network) 케이블, 모리셔스-로드리게스 해저 케이블, SAFE(South Africa Far East) 케이블 등 다수의 광섬유 해저 케이블을 통해 국제 인터넷 인프라에 연결되어 있다. 주요 육성 분야는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BPO), 소프트웨어 개발, IT 컨설팅 등이다.
9.3. 교통

2005년부터 모리셔스의 공공 버스와 이후 열차는 학생, 장애인, 노인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모리셔스 메트로 익스프레스 철도는 현재 5개 주요 도시와 레뒤에 있는 모리셔스 대학교를 연결하며, 동쪽과 남쪽으로 확장될 계획이다. 과거 민간 소유의 산업 철도는 1960년대 이후 폐기되었다.
포트루이스 항구는 국제 무역과 크루즈 터미널을 담당한다. 인도양에서 가장 큰 공항인 시우사구르 람굴람 국제공항은 주요 국제공항이자 국영 항공사인 에어 모리셔스의 허브 공항이다. 로드리게스섬의 가에탕 뒤발 경 공항(플랭코랄 공항)은 모리셔스 본섬과의 항공 연결 및 레위니옹과의 국제선 항공편을 운영한다.
도로망은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으나, 차량 증가로 인해 주요 도시 지역에서는 교통 체증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10. 사회
모리셔스 사회는 다양한 민족, 문화,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특징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모리셔스 사회의 역동성과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10.1. 인구

2022년 인구 조사 최종 결과에 따르면 모리셔스의 인구는 1,235,260명(남성 608,090명, 여성 627,170명)이었다. 모리셔스섬의 인구는 1,191,280명(남성 586,590명, 여성 604,690명)이었고, 로드리게스섬의 인구는 43,650명(남성 21,330명, 여성 22,320명), 아갈레가 제도의 총인구는 330명(남성 170명, 여성 160명)이었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인구 밀도가 높다. 202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평균 연령은 38세였다. 202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5세 미만 아동의 비율은 2011년 20.7%에서 2022년 15.4%로 감소한 반면, 60세 이상 인구의 비율은 같은 기간 12.7%에서 18.7%로 증가했다.
순위 | 도시 | 현 | 인구 |
---|---|---|---|
1 | 포트루이스 | 포트루이스 | 155,226 |
2 | 바코아스피닉스 | 플랭윌렘 | 115,289 |
3 | 보바생로즈힐 | 플랭윌렘 | 111,355 |
4 | 큐어파이프 | 플랭윌렘 | 78,618 |
5 | 카트르본 | 플랭윌렘 | 77,308 |
6 | 트리올레 | 팜플레무스 | 23,269 |
7 | 굿랜즈 | 리비에르뒤랑파르 | 20,910 |
8 | 상트르드플라크 | 플라크 | 17,710 |
9 | 벨에르리비에르세슈 | 플라크 | 17,671 |
10 | 마에부르 | 그랑포르 | 17,042 |
10.2. 민족
모리셔스는 1982년 헌법 개정 이후 인구 조사에서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지 않고 종교적 소속에 대해서만 집계한다. 1972년 인구 조사가 민족성을 측정한 마지막 조사였다. 모리셔스는 인도, 아프리카, 중국, 유럽(주로 프랑스) 출신의 다민족 사회이다. 모리셔스 크리올은 반투족 하플로타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학은 동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노예 인구와의 상당한 조상 관계를 보여준다. 반면 인도계 모리셔스인은 자르칸드주 란치구의 초타나그푸르 고원과 관련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헌법에 따르면, 국회 의원 선출을 위해 섬에는 4개의 뚜렷한 공동체가 있다. 헌법 제1부속서 제3(4)항은 "모리셔스 인구는 힌두교 공동체, 이슬람 공동체, 중국계 모리셔스인 공동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생활 방식에서 이 세 공동체 중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은 일반 인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일반 인구 자체는 네 번째 공동체로 간주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모리셔스의 각 민족 집단은 힌두교도, 일반 인구, 무슬림, 중국계 모리셔스인으로 알려진 4대 공동체 중 하나에 속한다.
위의 헌법 조항에 따라, 1972년 민족 통계는 1950년대부터 모리셔스에서 전체 유권자에 걸쳐 민족 대표성을 전적으로 민족별로 조직하지 않고 보장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인 최량 패자 제도를 시행하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인도계(68%), 크리올(아프리카계와 유럽계 혼혈, 27%), 중국계(3%), 프랑스계(2%)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계 주민의 대다수는 19세기 영국 식민 통치 시절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크리올은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과 유럽 정착민의 혼혈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적인 크리올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10.3. 언어
모리셔스 헌법에는 공용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단지 국회의 공식 언어가 영어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며, 어떤 의원이든 의장에게 프랑스어로 연설할 수 있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정부 행정, 법원, 사업 분야의 언어로서 사실상의 국가 공용어이자 공통어로 간주된다. 모리셔스 헌법은 영어로 작성되었지만, 민법 및 형법과 같은 일부 법률은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모리셔스 통화에는 라틴 문자, 타밀 문자, 데바나가리 문자가 사용된다.
모리셔스 인구는 다중언어 사용자로, 대부분의 모리셔스인의 모어는 모리스얀어(모리셔스 크리올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하며 상황에 따라 언어를 바꿔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어와 영어는 교육 및 직업 환경에서 선호되며, 아시아계 언어는 주로 음악, 종교 및 문화 활동에 사용된다. 미디어와 문학은 주로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프랑스어에 기반을 두고 일부 추가적인 영향을 받은 모리셔스 크리올어는 대다수 인구가 모국어로 사용한다. 국가의 여러 섬에서 사용되는 크리올어는 다소 유사하다. 모리셔스 크리올어, 로드리게스 크리올어, 아갈레가 크리올어, 차고스 크리올어는 각각 모리셔스섬, 로드리게스섬, 아갈레가 제도, 차고스 제도 출신 사람들이 사용한다. 모리셔스에서 사용되는 다음과 같은 조상 언어들은 의회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보즈푸리어, 중국어, 힌디어, 마라티어, 산스크리트어, 타밀어, 텔루구어, 우르두어. 한때 모국어로 널리 사용되었던 보즈푸리어는 수년에 걸쳐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 202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보즈푸리어는 인구의 5.1%가 사용했으며, 이는 2000년의 12.1%에 비해 감소한 수치이다.
학생들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반드시 배워야 하며, 아시아계 언어나 모리셔스 크리올어를 선택 과목으로 배울 수도 있다. 수업 매체는 학교마다 다르지만 공립 및 정부 보조 사립학교는 보통 영어를, 유료 사립학교는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공립 및 정부 보조 사립학교의 O-Level 및 A-Level 시험은 케임브리지 국제 평가원이 모리셔스 시험 관리국과 협력하여 영어로 주관하며, 유료 사립학교는 대부분 프랑스 바칼로레아 모델을 따른다.
10.4. 종교

모리셔스 통계청이 실시한 202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모리셔스 인구의 47.87%가 힌두교를 믿으며,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32.29%, 이 중 가톨릭 24.94%), 이슬람교(18.24%) 순이다. 기타 종교(중국 민족 종교 포함)는 0.86%를 차지했다. 0.63%는 무종교라고 답했으며 0.11%는 답변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국가 중 힌두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헌법은 종교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종교를 실천하거나 개종하거나 어떤 종교도 갖지 않을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인도양 성공회, 모리셔스 장로교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힌두교 사원 협회 및 이슬람 모스크 조직은 세금 면제 혜택을 받으며 인구 비율에 따라 재정 지원을 받는다. 다른 종교 단체도 등록하여 세금 면제를 받을 수 있지만 재정 지원은 받지 못한다.
종교적 기원을 가진 공휴일로는 힌두교 축제인 마하 시바라트리, 오우가디, 타이푸삼 카바디, 가네샤 차투르티, 디왈리가 있으며, 기독교 축제로는 모든 성인 대축일과 크리스마스가 있고, 이슬람 축제로는 이드 알피트르가 있다. 국가는 마하 시바라트리를 위한 강가 탈라오 순례와 생트크루아에 있는 자크데지레 라발의 안식처로 향하는 연례 가톨릭 행렬 조직에 특별위원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1. 교육
모리셔스의 교육 제도는 유아 교육, 초등 교육, 중등 교육, 고등 교육 부문으로 구성된다. 교육 구조는 2~3년의 유아 교육, 초등학교 졸업 증명서로 이어지는 6년의 초등 교육, 학교 증명서로 이어지는 5년의 중등 교육,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로 끝나는 2년의 고등 중등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중등학교는 교명에 "칼리지(college)"라는 단어를 포함한다. 모리셔스 정부는 유아 교육부터 고등 교육까지 시민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2013년 정부의 교육 지출은 약 135.84 억 MUR로 추정되며, 이는 총 지출의 13%에 해당한다. 2017년 1월부터 정부는 초등교육 수료증(CPE)을 폐지하는 9년 연속 기초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교육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O-Level 및 A-Level 시험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케임브리지 국제 평가원이 모리셔스 시험 관리국(MES)과 협력하여 시행한다. 고등 교육 부문에는 모리셔스의 대학 및 기타 기술 기관이 포함된다. 주요 공립 대학교로는 모리셔스 대학교와 모리셔스 기술대학교가 있으며, 2012년에 설립된 마스카렌 대학교와 모리셔스 개방 대학교도 있다. 이 4개 공립 대학교와 여러 다른 기술 전문학교 및 고등 교육 기관은 2019년부터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면제하고 있다.
2022년 성인 문해율은 91.9%였으며, 전체 인구의 8.8%가 고등 교육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리셔스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55위(아프리카 1위)를 차지했다.
11.1. 교육 체계
모리셔스의 교육 체계는 단계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는 모든 시민에게 유아 교육부터 고등 교육까지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유아 교육 (Pre-primary): 2~3년 과정으로, 사립 기관과 정부 지원 기관에서 제공된다. 기본적인 사회성 및 학습 능력 발달에 중점을 둔다.
- 초등 교육 (Primary): 6년 과정으로, 모든 아동에게 의무 교육으로 제공된다. 2017년 이전에는 초등교육 수료증(Certificate of Primary Education, CPE) 시험을 통해 중등 교육 진학 여부가 결정되었으나, 현재는 '9년 연속 기초 교육(Nine-Year Continuous Basic Education)' 프로그램 도입으로 CPE 시험이 폐지되고 모든 학생이 중등 교육으로 진학한다.
- 중등 교육 (Secondary): 5년의 일반 중등 교육 과정과 2년의 고등 중등 교육 과정으로 나뉜다.
- 일반 중등 교육: 5년 후 '학교 증명서'(School Certificate, SC) 또는 영국식 'O-Level' 시험을 치른다.
- 고등 중등 교육: 2년 후 '고등학교 증명서'(Higher School Certificate, HSC) 또는 영국식 'A-Level' 시험을 치르며, 이 성적은 대학 진학에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된다.
- 고등 교육 (Tertiary): 대학교, 기술 전문학교, 직업 훈련 기관 등이 있다. 주요 공립 대학교로는 모리셔스 대학교, 모리셔스 기술대학교, 마스카렌 대학교, 모리셔스 개방 대학교가 있으며, 이들 국공립 고등 교육 기관은 2019년부터 자국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면제하고 있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제공한다.
교육 과정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주요 교육 언어로 사용되며, 학생들은 아시아계 언어나 모리스얀(크리올어)을 선택 과목으로 배울 수 있다. 국제 표준화된 시험인 O-Level과 A-Level은 케임브리지 국제 평가원이 주관한다.
11.2. 문해율 및 교육 수준
모리셔스는 교육에 대한 높은 투자와 접근성 확대로 인해 아프리카 국가 중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성인 문해율은 91.9%로 높은 편이며, 남성과 여성 간의 문해율 격차도 크지 않다.
전체 인구 중 고등 교육(대학교 이상) 자격을 보유한 비율은 2022년 기준 8.8%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정부는 무상 고등 교육 정책을 통해 더 많은 국민에게 고등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모리셔스는 교육 및 인적 자원 개발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인정받아, 2024년 세계 혁신 지수(Global Innovation Index)에서 전체 55위,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연구 개발 투자, 교육 시스템의 질, 기술 인력 양성 등 다양한 요소가 반영된 결과이다.
12. 문화

모리셔스의 문화는 인도, 아프리카, 프랑스, 중국 등 다양한 민족의 전통이 수세기에 걸쳐 융합되어 형성된 독특한 혼합적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다양성은 언어, 종교, 음식, 음악, 축제 등 삶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 있으며, 모리셔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12.1. 예술 및 건축
모리셔스의 시각 예술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다. 앙리 르 시다네, 맬컴 드 샤잘, 라우프 오데루트, 바코 바삭 등이 유명한 모리셔스 화가로 꼽히며, 가브리엘 비에는 저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전통 공예품으로는 바구니 세공, 목각품, 직물 등이 있으며, 이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해왔다.
모리셔스 건축은 식민지 시대의 교역 기지로서의 역사를 반영한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정착민들이 도입한 양식과 형태가 인도 및 동아프리카의 영향과 혼합되어 독특한 하이브리드 건축을 탄생시켰다. 이는 역사적, 사회적, 예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십 년간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모리셔스 건축 유산의 파괴를 초래했다. 1960년에서 1980년 사이, '캉파뉴(campagnes)'로 알려진 섬 고지대의 역사적인 주택들이 놀라운 속도로 사라졌다. 최근에는 확장되는 관광 산업을 위한 새로운 개발로 인해 농장, 주택, 공공건물들이 철거되거나 대대적으로 개조되었다. 수도 포트루이스는 199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변하지 않았으나, 현재는 건축 유산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토지 가치 상승은 모리셔스 역사적 구조물의 문화적 가치와 대립하며, 유지 보수 비용의 증가와 전통 건축 기술의 꾸준한 감소는 보존 투자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일반 대중은 역사적으로 크리올 주택이라고 불리는 곳에 거주했다.
1847년 영국 외 지역에서 최초로 발행된 모리셔스의 "우체국" 우표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우표 중 하나로, "모든 우표 수집의 가장 위대한 품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2.2. 문학
모리셔스 문학은 주로 프랑스어와 영어, 그리고 모리스얀(크리올어)으로 쓰이며, 다문화적 배경과 정체성, 식민주의의 유산, 사회 문제 등을 주제로 다룬다. 자크앙리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의 소설 《폴과 비르지니》는 모리셔스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도도새 역시 모리셔스와 문학적 연관성을 갖는다.
현대 모리셔스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모리셔스계 혈통을 지닌 이중 국적자 J. M. G. 르 클레지오, 아난다 데비, 나타샤 아파나, 맬컴 드 샤잘, 외제니 푸자드, 마리테레즈 욍베르, 셰나즈 파텔, 칼 토라불리, 아킬 고피 등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태생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린지 콜렌시고빈, 주로 모리스얀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데브 비라소미, 힌디어로 글을 쓰는 아비마뉴 우누트 등도 중요한 작가로 꼽힌다. 모리셔스는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작가들에게 번갈아 수여되는 '르 프랭스 모리스 상'을 개최하며 문학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2.3. 음악과 춤

모리셔스의 주요 음악 장르는 세가(Sega)와 그 퓨전 장르인 세게(Seggae), 보즈푸리어 민요, 필미로 대표되는 인도 영화 음악(특히 볼리우드), 그리고 서양 고전 음악과 인도 고전 음악 등이다.
이 중 세가는 모리셔스를 대표하는 전통 음악이자 춤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음악에서 유래된 세가는 주로 라반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북), 마라반 (나무 상자에 씨앗을 넣어 만든 악기), 트리앙글 (삼각형의 금속 타악기) 등의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된다. 리드미컬하고 경쾌한 장단에 맞춰 추는 세가 춤은 즉흥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남녀가 함께 어울려 즐기는 사교적인 춤이기도 하다. 세가는 모리셔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일상생활을 담아내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세게는 세가와 레게 음악이 결합된 장르로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다.
12.4. 요리

모리셔스 요리는 인도, 크리올, 프랑스, 중국 요리가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지니며, 섬 고유의 많은 요리가 있다. 현지화된 아시아 및 유럽 요리로는 채식 및 비채식 카레, 현지에서 '파라타'(farata파라타mfe)로 알려진 파라타, 감자가 풍부한 브리아니(biryani), 웍으로 조리한 민프리르(mines frires)와 디리프리르(diriz frires), '볼 랑베르세'(bol renversé볼 랑베르세프랑스어, 뒤집은 그릇)라는 찹수이 요리, 소시지와 토마토 기반의 '루가이'(rougaille루가이프랑스어), 그리고 무굴 요리에서 유래한 차가운 음료 '알루다'(alouda알루다mfe) 등이 있다. 현지에서 만든 프랑스식 페이스트리와 빵이 대부분 지역에서 판매되며, 분홍색 아이싱으로 덮인 사블레의 현지 버전인 "나폴리텐"(napolitaine나폴리텐프랑스어), 코코넛 기반의 '가토 코코'(gâteau coco가토 코코프랑스어)와 '마카차 코코'(macacha coco마카차 코코프랑스어), 아이스크림 쿨피와 같은 독특한 현지 디저트도 있다.
마살라 향신료, 달, 인도식 아차르에서 유래한 '자사르'(zassar자사르mfe), 그리고 브레드(brèdes)로 알려진 잎채소는 모든 가정에서 흔히 소비된다. 노점상들이 파는 길거리 음식으로는 인기 있는 랩인 '돌 푸리'(dholl puri돌 푸리mfe)와 로티, 현지식 인도 파코라인 '가토 피망'(gâteau piment가토 피망mfe), 차나 푸리(chana puris) 등이 있다.
12.5. 공휴일 및 축제
모리셔스의 공휴일은 모리셔스 역사의 여러 문화가 혼합된 것을 반영한다. 힌두교 축제, 기독교 축제, 중국 축제, 이슬람 축제가 있다. 모리셔스에는 연간 14개의 공휴일이 있으며, 새해는 주말에 해당하면 이틀에 걸쳐 기념한다. 크리스마스를 제외한 모든 종교 축제 관련 공휴일은 매년 날짜가 다르다. 홀리, 락샤 반단, 두르가 푸자, 마카르 산크란티, 페르 라발 순례와 같은 다른 축제들도 모리셔스의 문화 경관을 풍요롭게 한다.
다음은 2023년 기준 모리셔스의 주요 공휴일이다. (날짜는 매년 변경될 수 있음)
날짜 (2023년 기준) | 명칭 | 비고 |
---|---|---|
1월 1일 ~ 1월 2일 | 새해 | |
1월 22일 | 중국 설 (춘절) | |
2월 1일 | 노예제 폐지 기념일 | |
2월 4일 | 타이푸삼 카바디 | 힌두교 축제 |
2월 18일 | 마하 시바라트리 | 힌두교 축제 |
3월 12일 | 독립 및 공화국 기념일 | 국경일 |
3월 22일 | 우가디 | 힌두교 새해 |
4월 22일 | 이드 알피트르 | 이슬람교 축제 (달의 관측에 따라 변동) |
5월 1일 | 노동절 | |
9월 20일 | 가네샤 차투르티 | 힌두교 축제 |
11월 1일 | 모든 성인 대축일 | 기독교 축제 |
11월 2일 | 인도인 계약 노동자 도착 기념일 | |
11월 12일 | 디왈리 | 힌두교 빛의 축제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기독교 축제 |
12.6. 스포츠

모리셔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국가대표팀은 '도도새들(The Dodos)' 또는 '클럽 M(Club M)'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인기 스포츠로는 사이클링, 탁구, 경마, 배드민턴, 배구, 농구, 핸드볼, 권투, 유도, 가라테, 태권도, 역도, 보디빌딩, 육상 등이 있다. 수상 스포츠로는 수영, 요트, 스쿠버 다이빙, 윈드서핑, 카이트서핑 등이 있다.
1812년 샹드마르스 경마장이 개장하면서 시작된 서러브레드 경마는 여전히 인기가 높다. 모리셔스는 인도양 섬 게임을 제2회(1985년), 제5회(2003년), 제10회(2019년) 대회를 개최했다. 모리셔스는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서 권투 선수 브루노 줄리가 동메달을 획득하며 첫 올림픽 메달을 땄다.
골프에서는 과거 모리셔스 오픈과 현재의 아프라시아 은행 모리셔스 오픈이 유러피언 투어의 일부로 개최되었다.